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환시(5,1-14)

윤 베드로 2016. 8. 30. 12:38

2.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환시(5,1-14)


묵시록 4장에서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 강조되었다.

이제 5장에서는 ‘인류 구속’이라는 주제가 다루어진다.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신 표를 지닌 채 하늘의 옥좌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어린양이 희생으로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승리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5장에서 다루어지는 ‘어린양의 환시’는 6장 이하에서 전개될 내용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5장의 내용은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들고 계신 두루마리(봉인된 책)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기록된 비밀문서이다.

그 두루마리는 봉인되어 있는 만큼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를 모른다.

역사의 목적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비밀이다.

그런데 결국 봉인을 어린양이 개봉함으로써 그 내용들이 공개된다.

 

 

[1절] “안팎에 글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 :

묵시록이 씌여진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제본된 책이 없었고,

             대부분 낱장마다 글자를 써서 한 장씩 모으거나,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것에 써서 그 길이대로 둘둘 말아두었다.

이 경우에 흔히 글씨는 자연적으로 한 쪽면에만 썼고,

               다 쓴 다음에는 그 ‘파피루스’를 감으면 안쪽에 씌어진 내용을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양쪽면에 쓴 경우도 있었는데

          에제키에리 예언자 소명을 받는 대목에서 앞 뒤 양면에 글씨가 적혀 잇는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이 소개된다.(에제2,9-10)

실제로 당시 고문서나 계약서 또는 유언장에서는 흔히 안팎으로 쓰던 관습이 있었다.

 

이사야29,11 : 이렇듯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은 밀봉된 책에 씌여진 말씀과 같다.

         글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책이 밀봉되었는데

         어떻게 읽겠느냐?”고 할 것이다.

다니12,4 : 너 다니엘아, 이 말씀을 비밀에 붙여 마지막 그 때가 오기까지

               이 책을 봉해 두어라.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쳐 잘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일곱 봉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 : 다음 장에서 봉인된 밀서가 개봉되는데

         봉인을 뗄 때마다 점점 더 심해가는 파멸의 운명을 읽게 된다.

         구약성서에는 이처럼 봉인된 책에 대한 이미지들이 많이 있다.

 

봉인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지켜져야만 할 비밀과 보증에 관한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그 책은 옥좌에 앉은 분(하느님)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다.

이 말은 그 책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 책은 봉인되어 있다.


[2-4절] 이제 관심의 초점은 누가 봉인을 뗄 수 있는지에 모아져 있다.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이 관심의 초점이다.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볼 자격이 있는 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다.(4절)”

요한의 비통한 슬픔은 현 시점에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받는 박해로 인하여

          그 자신과 온 교회가 겪는 크나큰 고통에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두루마리의 비밀 속에는 바로 그 고통의 신비,

          즉 모든 시대 사람들이 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고통의 신비가 들어 있다.

예언자들과 지혜서 저자들, 이사야, 예레미아, 제2이사야서의 저자, 욥기와 전도서의 저자들은

                 모두 이 고통의 문제, 특히 선하고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라는 문제와 씨름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명확한 해답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실 분 메시아가 어떻게든 그 진리를 알려 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했다.

그럼 과연 봉인된 두루마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3세기이 히뽈리또, 오리게네스 교부들은 봉인된 책을 구약성서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설명은 프랑스 공동번역 속에도 나타난다.

봉인된 책을 구약성서와 동일시 하는 것은 스물 네 명의 원로들 중 하나가 요한을 위로하고 있는

           5절과 부합될 수 있을 것이다.


[5절] 원로들중 하나가 그 “일곱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실 분”은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라고 요한을 위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서의 열쇠, 즉 구약성서의 열쇠,

    다시 말해서 하느님 계획과 우리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열쇠를 받은 분이다.

그분에 의해서 구약성서가 완성되고 구약성서의 모든 계시와 가르침이 성취된다.

 

이사야11.1 : 이새의 구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여기에서 “다윗의 뿌리” 라는 표현은 이새의 구루터기에 대한 유명한 예언을 연상케한다.

 

다윗의 지파에서 새 사자가 일어나서 악을 쳐부수고 자기 백성에게 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울지 말라는 위로를 듣는다.

그리스도는 역사 속의 온갖 고통이 갖는 의미를 드러내 보여 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6절] 어린양  

그리스도께서는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에” 살육당한 것 같은 분으로 모습을 드러내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옥좌 한 가운데, 곧 하느님의 영역에, 하느님 곁에, 그리고 네 생물들,

       곧 세상 한 가운데에, 그리고 장로들 곧 구원 역사의 한 가운데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단숨에 하느님의 영광 속에 그리고 세상 한 가운데

               그리고 역사의 심장부에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다고 소개하는 것은 승리와 부활에 연계되어 있다.

 

어린 양’ : 이 용어는 가장 빈번하게 그리스도께 붙여드리는 칭호 중의 하나로

                 묵시록에서만도 30여번이나 나오는 말이다.

묵시록에서 ‘어린양’의 상대자로 등장하는 ‘짐승’ 은 11장까지는 한 번도 나오지 않다가

                  묵시록 후반부인 12장 이후에 나타나서 ‘어린양’의 적수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분’ : ‘어린양’이 얼마나 강한 분(일곱 뿔)이며

                또 얼마나 진지한 분(일곱 눈)인가를 암시해준다.

구약성서에서 뿔은 전통적으로 권세의 상징이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권위나 왕적 존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린양의 일곱 눈은 일곱 영을 대표한다. 어린양은 그 일곱 눈을 통해 모든 민족들을 비추게 될 것이다.

즈가리아는 “일곱 등잔은 천하를 살피시는 야훼의 눈”(즈가4,10) 이라고 하였다.

즈가리아서에서 말하는 눈은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통해 역사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눈은 세상을 비추는 주님의 보편적 활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메시아는 하느님의 영을 충만하게 소유하게 될 것임의 뜻한다.


[7-8절] 성도들의 기도

모든 전례는 어린양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두루마리를 받기에 합당하고,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양을 찬미 찬양하기 위해

                모든 전례가 거행되고 있다.

어린양이 이처럼 영과의 찬미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살육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께서 건네주시는 책의 봉인을 뗄 수 있는 이유이다.


[9-10절] 찬미의 노래

두루마리의 비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제 이 책의 메시지를 이야기 한 셈이다.

예수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죽음을 맞으셨다면

              그것은 우리를 다시 하느님과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교회들이 현재 사악한 로마 제국의 손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황제숭배를 강요당함으로 인하여 순교(죽음)와 배교 사이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들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분의 승리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땅 위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10절)”


[11-14절] 네 생물과 원로들 및 천사들과 창조계 안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찬미와 예배를 드리며

                  옥좌에 앉아 계시는 분에게, 그리고 어린 양에게 영광을 드린다.

                   이처럼 경배의 강도가 점점 높아 가는 가운데 이 장은 적절한 끝맺음에 이르게 된다.

 

 

[결론]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분은 악을 정벌하시고 항구한 평화를 실현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이들이 기대하던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로마제국에 맞서줄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더 이상 전쟁도 없고

          옛날 다윗왕 처럼 유대민족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줄 현세적인 메시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처럼 막강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분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18,36) 라고 하셨고,

            혁명운동에도 군사조직에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계셨다.

그리고 그분은 비참하고도 연약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완벽하고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분은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겪으셨기에 진정한 승리자가 되셨다.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찬양하면서, 초

              대교회 신자들이 당면한 고민에 해답을 주고 있으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신자들도 스승 예수처럼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로마 황제의 권세와 칼 앞에서 갈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묵시록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장엄하게 그리면서,

          세속 황제의 권세나 칼이 승리자이신 어린양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세상이 주는 고통과 실패, 질병과 환난속에서 신음하면서,

          세상이 주는 물질과 안락함의 유혹에 굴복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박해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로마황제의 권세이다.

황제의 칼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순교의 길을 택할 것인가?

그러나 현재의 우리에게도 묵시록은 말한다.

물질과 재물의 영광은 어린양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세상이 주는 순간의 행복은 영원한 행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일곱 봉인을 여실” 자격이 있으며,

       그분은 높은 곳에서 24 원로네 생물의 찬미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유혹을 극복하고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는 자는 “땅 위에서 왕노릇 할 것(10절)”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