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하늘의 환시(4,1-11)

윤 베드로 2016. 8. 30. 12:37

제3부 봉인된 밀서의 개봉(4,1-8,5)


묵시록 4장에서부터 고유한 의미에서의 묵시적이고 예언적인 부분이 시작된다.

이 4장에서부터 어조 자체가 바뀌고 있다.

하늘이 열리고 환시가 시작되면서, 그것은 20장까지 지속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수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진 구절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표면적이고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묵시록의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지배받고 있던

              막강한 로마황제의 세력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그 전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재정적 힘과 해군, 육군을 장악한 단 한 사람의 통치 하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카이사르였다.

그보다 작은 군주들은 모두가 그의 허가에 의해서만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임명한 총독들은 관할 지역 내에서 생사결정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황제 자신은 이제까지 세상을 통치해 온 도시들 중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의 심장부에서 견줄 자 없이 위풍당당하게 살았다.

그의 힘과 위엄에 있어서 그와 겨룰 자가 없다는 점에서,

               그가 신으로 숭배 받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막강한 권세와 당당한 위풍 앞에서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는가?

신으로 숭배를 강요하는 카이사르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사멸할 존재, 비참한 한 인간임을 아는 것이다.

그들의 하느님은 카이사르까지도 지배하시는 분이셨던 것이다.

 

 

1. 하늘의 환시(4,1-11)


묵시록 나머지 부분(4-22장)은 장차 다가올 일에 관한 계시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묵시록 4장에서 ‘하느님의 환시’와 5장에서 ‘어린양의 환시’를 보여줌으로써

                  장차 닥칠 일을 더욱 실감나게 해준다.

묵시록 4장과 5장은 하나의 거대한 장면을 두 각도에서 따로따로 비춰본 것이라 하겠다.

즉 묵시 4장에서는 ‘창조주’라는 각도에서, 5장에서는 ‘구세주(어린양)’라는 각도에서

                           똑같은 하느님을 조명하고 있다.

묵시록 4장의 절정은 11절(“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하느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리실 만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주님의 뜻에 의해 생겨났고 또 존재합니다.”)이고,

5장의 절정은 12절(“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이다.

요한 묵시자는 이제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늘나라 궁전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준다.

그의 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최상권과 모든 충실한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참되고 지속적인 영광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1절]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요한은 계시를 받게 된다. “계시(revelatio(라), revelation(영))” 라는 말의 의미가,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다”, “베일을 벗기다”라는 의미임을 생각할 때

            하늘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1,10해설 참조)” : 요한 묵시록을 읽을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점은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문자 그대로 나팔소리가 귀에 들렸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유다인 전승속에서 볼 때, 나팔은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출애19,16이나 히브12,19을 보면 주님의 현현이 나타날 때 나팔소리가 울린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나팔은 그리스도의 귀환(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기 위해

              선택된 도구라 할 수 있다.(마태24,31; 1고린15,52; 1데살4,16) 12절 이하에서 보겠지만

              나팔소리는 바로 인자의 소리인 것이다.

이리 올라오너라” :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하늘로 들어올리시어 신비들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것은 요한에게 베풀어진 은총이었다. 요한은 환시를 보여달라고 청하거나 떼를 쓴 적이 없다.

그는 급작스럽게 하늘로부터 문이 열려졌을 뿐이고,

       요한은 거기로부터 ‘올라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이와 유사한 모습은 출애굽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애24,1 :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 올라 와 멀찍이 엎드려 있어라.

출애24,9 :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데리고 올라 갔다.

출애24,12 : “내가 있는 이 산으로 올라 와 머물러 있어라.”...

출애24,15 : 모세가 산으로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신명10,1-3 : ...돌판 두 개를 다듬어 가지고 산으로 올라 나에게 오너라....

하느님은 요한에게 ‘올라 오라’고 명령하신 다음,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2-3절] 요한은 이제 ‘영에 사로잡혀’ 환시를 체험하게 된다.

                        요한은 온전하게 의식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졌다.

우선 요한은 ‘옥좌’를 본다. 옥좌는 하늘 나라의 최고 주권자를 상징하는 말이다.

저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옥좌가 있다.

이 대목은 예레미아서에서 유래 했다고 본다. “한 처음에 높이 자리잡으신 빛나는 옥좌 있는 곳,

              그곳이 우리의 성소입니다.”(예레17,12)

‘옥좌’는 묵시록에서 거의 매 장마다 나올 정도로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약 40번 등장)

우리는 여기에서 ‘옥좌에 앉아 계신 분’에 관한 장엄한 묘사에 유의해야 한다.

우선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는 관습이 있는데, 그것이 여기서 그대로 나타난다.

4,2은 오직 한 분만이 옥좌에 앉을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래서 ‘어떤 분’ 이라고만 말한다.

이는 하느님을 한 인격적 존재로만 소개하는 것이며, 단순히 ‘어떤 분’이라고만 묘사한다.

옥좌와 그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은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환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옥좌 둘레에 있는 존재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에제1,26.28에서도 높이 옥좌 같은 것 위에는 사람 모습을 한 이가 앉아 있다고 되어 있다.

독자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즉시 느끼게 된다.

그분의 지엄한 옥좌는 엄위와 권세, 그리고 그분이 주님이시고 심판관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습을 ‘그 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라고

           간접적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벽옥은 푸른 색을 띄고 있고, 홍옥은 붉은 색을 띄고 있다.

이 말은 독특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시사한다.

요한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하늘나라 궁전을 기묘하고 찬란한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만물이 그분의 위엄에 대한 경외감을 우리에게 불러 일으킨다.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개는 후광을 의미한다.

즉 거룩한 사람이나 사물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빛의 모습을 의미한다.

후광을 무지개로 볼 경우, 창세기9,8-17을 연상하게 된다.

무지개는 홍수 이후에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결정적으로 맺으신 계약의 표징으로 묘사된다.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무지개는 화해와 자비의 표지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계시되고 있는 ‘어떤 분’은 은총의 하느님,

              다시 말해서 자비의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이시다.

비취옥은 푸른색의 돌이다. 요한은 푸른 색이 지배하고 있는 찬란한 빛의 신비를

              지금 환시를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푸른 색이 주종을 이루고 있을까? 푸른 색은 청초한 하느님의 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모든 생명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계절적으로 봄의 모습을 지니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발하시는 초자연적인 광채를 표명해 낼 수 있을 만큼의

           언어 표현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런 형태의 묘사를 통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4절] 요한은 하느님 주위에 흰옷을 입고 있는 24 원로를 보고 있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스물 네 개의 옥좌에 앉아 있는 이들인데,

          구원의 상징인 흰 옷을 입고 있으며(묵시3,4) 금관을 쓰고 있는데(묵시2,10)

           그런 모습을 한 이들이 천사들이라고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원로(장로)들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이는 원로(장로)라는 명칭이 유다이즘과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지니고 있는

       전문적인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그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영광을 받은 인간들, 하느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옥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신 왕으로서의 특성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흰 옷은 구원의 상징으로서 하느님 세계를 특징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전례에 있어서 흰 옷이 늘상 사용되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왕과 사제들이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흰 색이 승리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스물 네 명의 장로들은 분명 승리자들이다.

또 그들은 금관(월계관)을 쓰고 있었는데, 이점에서 스물 네 명의 원로들은

               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흰 옷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적이며 사제적이다.

 

24라는 숫자는 12 + 12이다.

묵시21,13-14에서 24원로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줄 실마리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즉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에서 12라는 숫자가 각각 다른 두가지 큰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열 두 대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를, ‘열 두 주춧돌’에서는 ‘어린양의 열 두 사도’를 뜻한다.

이렇게 볼 때 마치 ‘구약과 신약의 합일’을 이루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그리스도 이전(구약)의 하느님 백성(이스라엘 열두 지파)’과

       ‘그리스도 이후(신약)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어린양의 열 두 사도)’이 ‘새 예루살렘’의 창립 멤버이다. 

  여기에서 24라는 숫자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5절] 번개와 천둥은 구약성서에서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현현에 관계된다.

          번개와 천둥은 특별히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출애19,16 : 셋째 날 아침, 천둥 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시나이산 위에

      짙은 구름이 덮이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펴지자 진지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이 절에 나오는 일곱 개의 횃불은 1-2장에 나오는 일곱 등경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희랍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일곱 영들인 일곱 개의 횃불이 천사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틴 교부들은 옥좌 앞에 자리하고 계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현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6a절]옥좌 앞은 유리바다 같았고 수정처럼 맑았다’ :

수정같은 유리바다는 하느님께서 창공을 만드시는 모습을 연상케 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우주 위에 좌정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요한은 눈부신 옥좌를 보고 있으며, 그 옥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유리바다가 옥좌와 신적인 인물의 모습을 투영시켜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하늘의 문 앞에 서 있는 요한과

          하느님의 옥좌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암시해 준다.


[6b-7절] 이 부분은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네 생물들에 관한 환시(에제1,1이하)와

                              이사야의 환시(이사6,1이하)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에제키엘의 내용과 이사야의 내용이 겹쳐서 나타난다.

요한이 자기가 본 환시를 구약성서에서 가져 온 표현들을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요한은 자신이 본 환시를, 자신이 쓸 수 있는 언어 표현의 도움을 받아(이사야,에제키엘의 표현들)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과 그의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요소들을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약에서 빌어 온 네 생물들에게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에제키엘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생물들은 각각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황소의 얼굴,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모두 하고 있지만,

                       묵시록에서는 각 생물이 그 네가지 특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씩만을 취하고 있다.

눈이 가득 박힌 생물 네 마리” 눈이 많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하느님의 영의 현존을 나타낸다. 에제10,12에서 끌어온 표현이다.

성 이레네오 교부는 네 생물들이 네 복음서 저자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은 마태오, 사자는 마르코, 황소는 루가, 독수리는 요한)

그러나 이것은 묵시록이 의미하는 네 생물의 원래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근거가 희박한 해석이다.

묵시록 본문이 이레네오가 생각하듯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면 묵시록에서 이 네 생물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4’ 라는 숫자는 우주의 근원적인 네 방향과 관계가 있다.

네 생물들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Cosmos(우주, 세상)이다.

 “천사 넷이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었다(7,1)”.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의 옥좌를 받치고 있는 네 생물은 창조된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요한은 계약을 상징하는 무지개에 둘러 쌓여

          하느님의 옥좌 둘레에서 구원의 역사를 대표하는 자들을 묵상하고 있다.

즉 요한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보고, 뒤이어 네 생물로 묘사된 창조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8절] 6절의 묘사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사야6,3에서 따온 내용이 재현된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거룩하시다.”

스랍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천신 가운데 하나로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자’ 라는 뜻이다.

미사때 성찬의 전례중에 이 찬미가가 삽입되어 있다.


[9-11절] 천상의 전례

이제 요한은 천상의 전례에 참여하고 있다.

네 생물들이 8절의 내용으로 선창을 하자, 24원로들이 11절의 내용으로 화답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한다.

장엄한 전례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역사와 세상이 함께 하고 있다.

이 천상 전례의 내용은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라본 세상 역사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다.

이 찬미가는 창조주 하느님과 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묘사해 준다.

하느님은 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