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제1부 머리말(1,1-3)

윤 베드로 2016. 8. 30. 12:31

제1부  머리말(1,1-3)  

 

머리말에서 요한은, 하느님이 장차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이 계시를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그리스도는 천사를 당신 종 요한에게 보내시어

         이것을 알려주셨다고 말한다.

 

이 환시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로 시작된다.

그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의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 교회들이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이들에게 약속된 보상은 묵시록 끝부분에 가서 다시 이야기 된다.

 

우리는 이 편지들 안에서 낯익은 주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하더라도 놀라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

어떤 교회들은 번영을 누리면서 자만자족하고 있고,

       어떤 교회들은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분열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편지들은 일곱 교회에 쓴 것이긴 하지만,

          시대를 넘어 모든 교회들에게 보편적인 훈계를 주고 있는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절] 계시의 원천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신비가 밝혀질 수 있고

         어둠이 빛이 될 수 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요한5,3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들은 내 나름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 안에 머물러 계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요한14,10)

 

요한은 계시를 기록하면서 일부러 기호와 상징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당시 독자들은 자기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박해를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상징들의 의미를 굳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신(하느님)의 종들” : 이 말은 “노예”(servants)를 의미한다.

         묵시록 전체를 통해서 이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교 예언자들을 가리킨다.(묵시10,7)

         둘째, 순교자들을 가리킨다(묵시19,2).

         셋째, 그리스도인들을 총칭한다(묵시22,3).

이 대목에서는 첫 번째 의미인 “그리스도교 예언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당신의 종 에언자들에게 속을 털어놓지 않으시고는 주 야훼,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아모3,7).

계시의 수신자들은 하느님의 종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지, 관중이나 말 잘하는 연설가들이 아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불리기도 하고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서에서도 ‘종’이라는 말은 특별히 예언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이사42,1에서 유래하는 메시아적 호칭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묵시록에서 이 호칭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갈망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로 한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묵시록에서 14번이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지칭하고 있다.

 

곧 일어날 일들” : 요한은 자기가 예언한 모든 일들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3절에서도 “그 일들이 성취될 시각이 가까웠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천사” : ‘천사’라는 용어는 구약성서 초기작품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좀 더 후대의 작품, 특히 바빌론 유배(BC.586-538) 이후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용어는 바빌론과 페르시아 사상에서 유래했으며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기간을 통하여 자기들 종교에 접목시켜 발전시켰을 것으로 본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 편에서 볼 때 너무나 위대하시고

        인간의 사유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는 어떤 다리 역할을 해 줄만한 중개자가 필요하다.

성서에서 천사의 위치가 확고부동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특히 묵시문학서들(에제키엘, 즈가리아, 요엘, 다니엘) 안에 이 천사개념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천사를 통해서 전달된다.

그래서 구약성서 초기 작품들에서는 하느님이 인간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나다가

           이런 현상은 차츰 줄어들었고, 구약 후기작품이라 할 수 있는 즈가리야 예언서 등에 와서는

           거의가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연결이 이루어진다(즈가1,19).

 

천사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자 전령이며

       하느님이 인간보다 더 높게 창조하신 육체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영적 존재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눈에 보이고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을

         창조하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늘나라에 하느님과 함께 계신 무수한 영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의 확신이다.

그런데 천사는 하늘나라에 천사라는 본성을 가진 특별한 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천사라는 명칭은 본성을 뜻하는 명칭이 아니라 직무를 뜻하는 명칭이다.

하늘나라의 거룩한 영들이 하느님의 심부름으로 특별한 사명과 직무를 받고 파견될 때에만

           천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중에서 덜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을 천사라 부르고,

         보다 중대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을 대천사라 불렀다.

따라서 동정 마리아께는 아무 천사나 파견되지 않고 대천사 가브리엘이 파견된다.

이와 같이 중대한 일에는 그 역할에 맞는 높은 등급의 천사가 파견되는 것이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강론중에서)

 

미카엘 :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천사 이름.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

          즉 하느님 보다 위대하신 분은 없다는 뜻으로서, 천상 군대의 총지휘관으로 묘사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수호천사로 등장하고<다니엘서;10:13, 21, 12:1>,

신약성서에서는 사탄과의 싸움을 지휘한다<요한묵시록;12:7>.

서양미술에서는 가브리엘과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천사이나,

        계시의 천사 가브리엘과 달리 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라파엘 : 구약성서 토비트서에 등장하는 천사로서 “하느님게서 베푸시는 치유”라는 뜻이다.

의인 토비트의 아들 토비아에게 나타나 눈을 뜨게 해주었던 라파엘 대천사는

     모든 여행자들의 보호자, 치유하는 천사로 존경을 받고 있다.

 

가브리엘 :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오는 대천사의 이름.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권세”이란 뜻이다.   《구약성서》에서는 다니엘의 이상을 풀기 위하여(다니엘 8:16, 9:21),

《신약성서》에서는 제사장 스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기 위하여(누가복음 1:11)

            또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고하기 위하여 (누가복음 1:26∼36) 보내심을 받았다.

 

 

이렇게 천사는 하늘에서 하느님을 모시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주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다,

그런데 성서에는 '사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사탄'은 '반대자' 혹은 '악마', '대적자', '원수'라는 뜻이다.

사탄에 대한 개념이 구약성서에 등장한 것도 천사의 개념이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520년경에 욥기(1-2장)와 즈가리아서(3장)을 통해 처음 나타나기 시작되었다.

사탄에 대한 개념이 하나의 인격체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국운이 쇠퇴하여 가던 그리스-로마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연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이 겪는 재난이 하느님을 저버린데 대한 징벌이라는 전통적인 이론은,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자기반성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재난이나 하느님의 공의를 사람들에게 설득시키기 어렵다.

유대교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원론에 의존했는데,

         이 이원론이란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죄와 이스라엘의 억압하는 자들의 횡포의 책임이

         사탄에게 있으며 세상은 이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원리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 대적하는 초자연적인 악마의 개념이 없다.

반면 신약성서에서 보여주는 초자연적인 악마로서의 사탄이라는 개념은

    ‘선악의 이원론’의 입장에 서 있는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사탄은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나타나고(마태4,1이하),

하느님 나라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자(마르4,15), 허위(사도5,3; 묵시12,50)로 나타난다.

 

성서에서 사탄은 악한 영의 왕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원수이다.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수단과 방법은 세 가지인데,

       첫째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유혹이고,

       둘째로 사람들이 용기를 잃도록 만드는 것이며,

       셋째로 마귀 들림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구마(exorcism)의 대상이 된다.

                                   (한국가톨릭 대사전 6권)

이렇게 인격적인 악마의 개념은,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개념에

       악과 죄와 불행과 고통의 근원을 투영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현대인들도 밀튼의 ‘실락원’과 같은 문학작품이나,

       샤마니즘적 요소들이 가미된 인격적 악마의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안 된다고 말렸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이렇게 천사와 사탄의 차이점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느냐,

       걸림돌이 되느냐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 우리는 천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하느님의 뜻에 대적한다면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사탄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잘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천사들이 되도록 하자.


 

[2절]증언” : 요한의 증언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계시 내용과,

                         자신이 묵시 중에 본 내용에 관한 것이다.


 

[3절] “행복(복되다)” : 이 용어는 마태5,1-12의 ‘참된 행복’에서 잘 드러난다.

            묵시록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축복문이 일곱 번이나 언급된다.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일들이 성취될 시각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묵시1,3)

2) 나는 또 "'이제부터는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묵시14,13)

3) 그 때에 "잘 들어라. 내가 도둑같이 오겠다. 벌거벗고 다니는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묵시16,15)

4) 또 그 천사는 나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하고 말했습니다.(묵시19,9)

5)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묵시20,6)

6) 그러자 주님께서 "자, 내가 곧 가겠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묵시22,7)

7)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 가려고

         자기 두루마리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묵시22,14)


묵시록에서 7이란 숫자가 지니는 중대성을 감안할 때 묵시록에 나오는 위의 일곱 개의 축복문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라 할 수 없으며 묵시자 요한이 의식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는 행복의 완전성이 초점이 되고 있다.

즉 요한 묵시록은 완전한 행복의 길을 제시해 주는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          하느님

                     |

 

                예수 그리스도

                     |

 

 중재자들    표징들

                     |

 

                신앙의 천사

                     |

 

                   요한

                     |

종들인
신앙인들   읽는 사람

                     |

 

                 듣는 사람

 

복되어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

     이 말씀에서는 “실천하는 사람들”에 액센트가 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호기심에서 읽는다는 말이 아니고 메시지로서 이 묵시록이 전해질 일곱 교회에서

        큰 소리로 읽혀지고 실천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묵시록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묵시록 속에서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신비로운 예고의 내용을

              찾아내려는 호기심 어린 태도를 버려야 한다.

묵시록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실천하는 것이 완전한 행복의 길이다.

요한이 일곱 교회를 대상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사실은 전체 교회그 그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묵시록 1,1-3까지의 분석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왼편의 도표와 같다.

하느님의 말씀은 왼편의 도표와 같은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청중들인 신앙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아멘’(22,20)으로 응답함으로써

         그 말씀을 수용한다.

전례란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원탁이 아니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