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묵시록2-3장)

윤 베드로 2016. 8. 30. 12:34

3.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묵시록2-3장)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흥미있는 연구과제이다.

이 일곱 편지들은 일정한 구조와 틀을 가지고 있다.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묵시1,12-16에서 묘사된 그리스도 환시체험 내용을 각각의 서두에 몇 가지씩 재 나열하고 있다.

2) 각 편지의 서두가 ‘나는 알고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즉 편지를 받아 볼 교회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으며

        적절한 평가를 내리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표현방식이다.

3) 각 편지마다 질책 또는 격려의 말씀이 들어 있다.

4)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항구하게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약속되어 있으며,

               승리자가 받을 보상이 명시되어 있다.

5)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이 말마디가

          앞의 세 편지들(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에서는 승리자가 받을 보상 문구 바로 직전에 있다.

    반면 뒤의 네 편지들(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에서는

           편지 맨 끝말로 기록되어 있다.

6) 각 편지들은 각 지방교회의 사정에 따라 적절한 지침으로서 제시되고 있음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2,1-7)

 

에페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수문장 구실을 하던 도시였다.

소아시아의 각 지역과 교역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에페소는 바울로 사도가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다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전교의 중심지였다(사도19장).

그곳의 ‘다이아니 성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에페소의 이 진기한 건축의 일부가 현재 런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6절] 네가지 항목에 걸쳐 에페소 교회를 칭찬하고 있다.

1) “에페소 교회가 한 일” : 이 말은 2절, 5절, 6절에서 연속적으로 3번 나온다.

      에페소 교회가 한 일이란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믿음이요,

                세상에서 예수에 대해서나 사탄에 대해서, 빛에 대해서나 어둠에 대해서 보여준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믿음의 행동을 말한다.

2) “수고” : 에페소 교회가 선교적 열성을 지닌 공동체였으며,

                   공동체의 사도적 수고와 선교활동에 무게를 실어주려는 의미를 지닌다.

3) “인내” : 인내라는 말이 묵시록 안에서 7번 나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덕목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태도인 것이다.

                 “여러분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르13,13)

4)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경계 : 사이비 사도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허위를 가려낸 일에 대해서(2절)

                                                         칭찬하고 있다.

5) 악한 자들에 대한 경계 : 니골라오파의 소행을 미워한 일에 대해서(6절) 칭찬해주고 있다.

6)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참아냈고 용기를 잃지 않음 :

                에페소 교회 안에서 보여진 6개의 소개의 소개된 내용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모든 교회들에 앞서 첫 번째 자리에 에페소 교회를 올려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에페소 교회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덕목들만큼이나 부족한 것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첫 번째 사랑을 저버렸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예레미아2,2를 연상케 한다.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똑히 일러 주어라. 나 야훼가 하는 말이다.

             씨 뿌리지 못하는 땅 사막에서 나를 따르던 시절, 젊은 날의 내 순정,

             약혼시절의 네 사랑을 잊을 수 없구나.”

     그런데 4절에서 이 순정을 저벼렸다고 책망한다.

 

[1절]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 여기서 천사는 필경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묵시록 1장에서 언급된 두가지 그리스도 환시 묘사를 재수록하고 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묵시1,16), “일곱 황금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분”(묵시1,12-13)

당시 정치적, 그리스도교적으로 중심지였던 에페소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당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신 분이고, 밤낮으로 당신의 오른손을 비추는

        첫 번째 촛대의 품위를 에페소 교회에 맡기시는 분이시다.(출애25,31-40; 레위24,1-3)

 

 

[2-3절]사도들” : 여기서는 ‘12제자들을 가리키는 사도들(Apostles)’이 아니고

                               단순히 ‘선교사들(missionaries)’을 가리킨다.

               여기에 나오는 ‘거짓 사도들’은 ‘거짓 선교사들’이란 뜻이며 6절의 ‘니골라오파’를 말한다.

 

 

[4절] 에페소 교회에 한 가지 사실을 꾸짖는다. 그것은 ‘처음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이 문구는 구약의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말씀과 유사하다.

          “젊은 날의 네 순정, 약혼시절의 네 사랑”(예레2,2; 호세2,14-16).

           교회의 정통성은 바로 사랑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5절] 질책에 이어 다그치듯 엄한 위협이 뒤따른다.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에페소 교회는 과거의 뛰어났던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의식하고,

                     옛날의 모범적인 생활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등경을 치워버리겠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 말은 에페소 교회가 아시아에서 얻고 있는 그 으뜸되는 지위를 잃든가,

                     소멸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에페소에서 한 번 피었던 그리스도인의 증거의 불꽃은 지금 사실상 꺼진 셈이다.

          에페소 교회는 현재 소멸되었다.

 

[6절]니골라오파’ : 성 이레네오 교부의 ‘반이단론’이라는 책에 이들에 대한 비평의 글이 씌여 있다 :

         “니골라오파는 제멋대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한 교부 히뽈리뚜스의 ‘이단론’에도 “니골라오파는 바른 교리를 외면하고

                사람들에게 아무 음식이나 먹고 어떤 난잡한 생활을 해도 관계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이 니골라오파를 묵시록 2,14-15에 나오는

           ‘발람을 추종하던 무리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소상히 밝히지 않고 있는 니골라오파의 소행은 묵시2,14-15에 나오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짓을 하게 한 짓’이라고 본다.

 

[7절]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마르4,9)라는 주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이 책에 있는 권고와 타이름에 대해 주위를 돌리게 하려는 말이다.

  “승리하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 :

                  구약의 창세3,24의 내용에 바탕을 둔 말이다.

    인간의 불순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의 동산에서 쫒겨나고

              하느님의 동산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로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낙원을 되찾게 되었으며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묵시22,14).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2,8-11)

 

스미르나 역시 에페소처럼 대상업도시로서 각 지방으로 무역이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항구를 갖고 있었다.

스미르나는 “아시아의 장식”이라 불릴 정도로, 에페소, 베르가모와 나란히

                  아시아 제일의 도시라는 칭호를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이 도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스미르나는 로마제국에 대한 전통적이고 특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여신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고, 로마 황제를 위해 신전을 세운 아시아 유일의 도시였다.

그러면서도 스미르나의 신앙인들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잘 지켜낸 것이다.

요한 묵시자는 이 편지에서 스미르나를 칭찬하고 있다

[8절]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 서두에도 묵시록 1장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환시 묘사가 재수록되고 있다. “처음과 마지막이고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 분”(묵시1,18)

[9절] 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부요하다

즉 스미르나 교회는 외적으로는 환난과 궁핍을 겪었지만 모든 박해를 잘 이겨냈기 때문에

                 내적으로는 부요하다. 이렇게 라오디게이아 교회와는 달리 스미르나 교회에 대해서는

                 비난의 그림자도 없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스미르나 교회는 라오디게이아 교회와는 반대 상황이다.

물질적인 부유함은 영적 빈곤에 떨어질 수 있고, 그 반대로 물질적 궁핍이 영적 부유함을 가져올 수 있다.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자들’ :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 교회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갈라6,16)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유다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한 셈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사탄의 무리’에 불과하다.

요한 묵시자가 유다인들에게 갖는 이런 적대감정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유다인들이 외교인들 못지 않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예컨대 ‘데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은 바울로 사도가 제1차 전도여행때

          ‘마케도니아’를 거쳐 ‘베레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까지 굳이 쫒아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란을 피우며 박해한 일이 있었다(사도17,13).

 

 

[10절]열흘 동안’ : ‘10’이란 숫자는 ‘꼭 채워짐’을 뜻한다.

그러나 ‘꼭 채워짐’을 뜻하는 숫자로 가장 널리 쓰이는 숫자는 ‘1,000’을 꼽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말하는 ‘열흘’이란 숫자는 “꼭 채워짐”을 뜻하는 동시에

           시간적으로는 ‘아주 짧은 기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해로 인한 환난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아주 혹심하리라’는 뜻을 암시해준다.

교회는 심한 박해에 직면하여 옥에 갇히고 시련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 시련은 단 열흘간 뿐이다. 즉 짧은 기간일 뿐이다.

 

생명의 월계관’ : 끝까지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한 이들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진다.

이 용어는 묵시3,11에서도 나온다.

‘스미르나’는 운동경기로 널리 알려진 도시였다.

아마도 요한 묵시자는 ‘스미르나’에서 자주 벌어진 운동 경기를 상상하며

           승리자에게 화관을 씌워주던 풍습을 이 대목에 끌어들였으리라고 본다.


[11절] 두 번째 죽음 : 묵시21,8에 설명이 나온다.

‘첫번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누구든지 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두번째 죽음’은 일단 첫 번째 죽음 후 심판과 천벌을 받게 될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또한 두 번째 죽음은 ‘그리스도와 영원한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관찰될 수 있다.

요한 묵시자가 ‘승리하는 자는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은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즉 바울로는 “죽음도 생명도....그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라고 하였다.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말씀(2,12-17)

스미르나 북쪽에 있는 베르가모는 앞의 에페소나 스미르나 같은 상업도시가 아니고 문화의 중심도시였다.

이 도시에 있는 도서관에 20만권 이상의 양피 두루마리가 소장되어 있었다니 알 만하다.

지중해로부터 약 15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로서 소아시아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피지’(parchment)라는 낱말은 바로 이 도시 이름(Pergamum)에서 유래한다.

또한 300미터의 고지에 있는 베르가모는, 훌륭한 신전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정상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로마 여신의 신전을 세우게 하여,

              소아시아 지방 가운데 최초의 황제숭배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13절에서 베르가모를 가리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까지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2절]쌍날칼’ :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말씀 서두에도 역시 묵시1장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환시 묘사가 재수록 된다.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고 얼굴은 대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묵시1,16)

로마 제국에 속하는 식민지에는 로마인 총독들이 파견되어 통치했는데

        이들은 황제로부터 식민지 원주민들의 생사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유스 글라디이(Jus Gladii)’라는 검(劍)을 갖고 있었다.

총독들은 식민지 그리스도인들의 생사 여부를 이 검으로 판가름하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전인류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사 여부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쌍날칼’(그리스도의 말씀의 관통력)에 달려 있음을

           요한 묵시자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3절] 이 절에서는 베르가모를 칭찬한다.

안디바스’(Antipas) :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알 길 없고,

               다만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인이며 순교자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증인’ : 희랍어에서는 ‘증인, 증거’에 해당하는 낱말이 ‘마르띠스(martys)’이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신앙을 지켜 증거하는 사람(martys)이라면

                        거의 전부가 순교를 겸해야 했기 때문에

                        이 희랍어가 순교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즉 원래는 신약성서에서 이 말이 ‘증인, 증거, 증언’이라는 말로 사용된 것인데,

                           2세기 중엽부터 ‘증거’와 ‘순교’ 두가지 의미로 혼용되게 되었다.

사탄의 왕좌’ : 교회의 상태가 어려웠던 것은 사탄이 베르가모에 있는

                                   왕좌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4-15절] 베르가모 교회는 앞에서 칭찬을 들었지만 여기서는 질책을 받게 된다.

                  그것은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용납하고,

                  ‘니골라오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6절 해설 참조.


[16절]뉘우쳐라.....입에서 나오는 칼을... : 만일 뉘우치지 않으면 ‘쌍날칼’과 같은

                                  하느님 말씀의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영원한 벌을 내릴 것이다.

[17절]흰 돌’ : 고대 유다 관습에는 축제에 앞서 그 축제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입장권 구실을 하는 하얀 조약돌을 나누어주곤 했다.

            그래서 이 ‘흰돌’은 현세의 축제뿐만이 아니라 천상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 흰 돌 위에 기쁨의 날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새로운 이름’ : 흰 돌 위에 적혀 있는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19,13),

                        혹은 구원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본성(이사야62,2; 65,15)을 가리키며,

                        그 탁월성은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평가할 수 없다.

 

 

 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말씀(2,18-29)


티아디라 교회는 베르가모의 남동쪽 약 6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리디아의 도시였는데,

             일곱 도시 가운데 가장 중요성이 적은 도시이다.

본래는 군대의 주둔지로서 기원전 190년 로마에게 점령당하였다.

이곳에는 직물 염직(사도16,14)과 옷감과 주물에 대한 강력한 조합이 있었다.

20절은 이 동업자의 연회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 연회는 반드시 보호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들이 있었고 이 대목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상인이나 서민들의 생활은 기성종교와 깊은 토속종교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오늘날 어떤 사업이나 중대한 일을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는 것과 비슷하다.

티아디라에 있는 상인 조합에서 이교도의 축제의식과 음행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문제가 야기되었을 것이다.


[18절] 말씀 서두에서 역시 묵시1장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환시 묘사가 재수록 되어 있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같은 발을 가지신 분”(묵시1,14-15) : 모든 것을 다 아시고(불꽃 같은 눈)

                  변함이 없으신(놋쇠같은 발) 분이라는 뜻이다.


[19-21절] 다른 편지와 마찬가지로 우선 칭찬하는 말로 시작하고 그리고는 꾸지람으로 바뀐다.

티아디라 교회는 우선 그 도덕적, 종교적 본연의 자세에 대하여 매우 칭찬을 받는다.

칭찬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그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박해 속의 끈기있는 인내이다.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 그러한 행위가 최근에 한층 진보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2-23절]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칭 예언자인 이세벨과 그 여자의 자녀들(추종자들)을

                   벌하실 것이다.  “고통의 침상”은 무거운 벌의 상징일 뿐 아니라, 오래 앓는 긴 병을 가리킨다.


[24-25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단에 저항했던 다른 신자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에게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의무는

    거짓 예언자로 말미암아 음행에 유혹되지 않는 것과 우상숭배의 연회를 피하는 것이다(사도15,28-29).

사탄의 비밀” : 영지주의자들인 거짓교사들은 ‘비밀지식’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들은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이원론을 펼쳤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만이 신성한 것이고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따라서 육체로 저질러지는 어떠한 행위도-간음을 포함하여-영혼에는 아무런 손상도 끼칠 수 없다는

          궤변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한술 더 떠서 영적 존재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윤리법에도

          구속받지 않게 되었다고 허황된 주장을 펼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요한 묵시자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런 가르침을 하느님의 것이 아닌

                     ‘사탄의 비빌’이라고 혹평하고 있는 것이다.

[26-28절] 시편2,8-9의 말씀을 인용하여, “승리하는 자”에게는 뉘우치려 하지 않는

                   하느님의 적에 대한 승리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은 하늘의 지배에 참여하는 것을

                                 약속해 주셨다.

쇠지팡이로 질그릇을 부수어...” : 적을 전멸시키고 승리한다.

                                                     곧 적을 영원한 멸망으로 몰아낸다는 뜻이다.

승리하는 자에게는 “샛별”이 약속된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샛별이 ‘여명을 알리는 사자(使者)’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22,16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빛나는 샛별”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계신다.

2베드로1,19에서도 그리스도를 “샛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승리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

           혹은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29절]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야 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광된 승리의 삶을 이룬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말씀(3,1-6)

사르디스는 티아디라에서 약 30마일 가량 떨어진 도시이다.

고도 450미터의 3면이 각아지른 듯한 절벽과 벼랑으로 천연 요새를 이룬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만 해도 이 도시는 전성기를 누렸고,

          강력한 지배자인 ‘크로에수스(Croesus) 왕’이 다스리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로 일컬어졌던 이 도시가 경계를 게을리한 나머지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 왕’에게,

           또 희랍 제국의 ‘안티오쿠스’에게 두차례나 점령당했던 쓰라린 역사를 지닌 곳이다.

그것도 정면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소수 특수부대가 절벽을 기어올라 보초병 하나 세우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있는 도성을 삽시간에 함몰시켰던 것이다.

[1-3절]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말씀 서두에도 역시 묵시1장의 그리스도 환시 묘사가 재인용된다.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

이 도시는 모직물과 염색과 황제숭배의 신전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묵시자는 사르디스 교회에 어떤 특정한 죄목을 들어 말하지 않고,

              이 교회가 활기를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한시바삐 신앙의 잠든 상태에서 깨어나 사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하라고 촉구한다.

그 주민들은 방종한 생활로 평판이 나 있었다.

이 땅의 교회도 매우 쇠잔되어 있었기 때문에 묵시자에 의해 준엄한 질책을 받는다.

걷보기에는 모범적이고 번창하는 교회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속속들이 꿰뚤어 보시는 눈으로 보면

                 교회 성원의 거의가 영적으로 죽어 있든지 혹은 잠들어 있다.

두 차례나 적에게 점령 당했듯이 신앙에 있어서도 나태해지면

               그리스도께서 도둑처럼(성을 함락시킨 특수부대 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나타날 것이다.(마태24,43-44)

[4절]옷을 더럽힌다’ : ‘악에 물든다’라는 말의 비유적 표현이다.

신자 대부분이 옷을 더럽히고 있다. 즉 악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아직 악에 물들지 않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하얀 옷(승리, 순수성)을 입게 될 것이다.

[5-6절] 승리하는 자에게는 세가지 약속을 하신다.

1) 흰 옷을 입게 된다. 흰 옷은 하느님(1,12-16), 천사들(15,6), 뽑힌 사람들(19,14)의 옷을 의미한다.

                직물로 유명한 사르디스에게 옷에 대한 비유는 참으로 적절한 것이다.

2) 그 이름이 ‘생명의 책’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생명의 책에 기록됨과 삭제 사이에는 현저한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름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3) 심판때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안다고(착한 제자로 인정) 증언하실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3,7-13)

 

필라델피아(Philadelphia)라는 말은 “형제애”라는 의미의 희랍어이다.

원래 이 지명은 ‘아탈로스 필라델포스 2세’가 이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도시는 묵시록의 일곱 도시 중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로서 사르디스 남동쪽 28마일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평원인 까닭에 항상 지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곳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곳에 유다인의 강력한 이민 집단이 있었다.


[7절]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 이런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끌어낸 표현이다.

“내가 또한 다윗의 집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이사야22,22)”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열쇠의 권위를 가지시고,

           메시아의 나라에 누구를 들여보내고 제외하느냐의 결정권을 가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8절]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이 교회에 대해서는 일체 나무라지 않고 크게 칭찬만 하신다.

네 힘이 비록 미약하지만...” 이 교회는 작고, 성원들도 노예나 소상인과 같은 계급 출신들이기 때문에

             경제력도 없었다. 그래도 “내 말을 잘 지켰으며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 없다.”

즉 이 교회는 쓰라린 시련이 있었으나 용감히 극복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

이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너를 위해서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하신다.


[9절] 필라델피아 신자들은 유다인들의 적대행위 때문에 매우 시달림을 받았다.

         “사탄의 무리에 속하는 자들”은 “자칭 유다인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참된 새 유다 백성이다.(2,9)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다인의 학대를 보셨다.

          언젠가는 유다인들도 회개하여(엎드려)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0-11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에 중요한 또 하나의 약속을 하신다.

       그들의 끈기와 충실성의 보상으로서 “온 세계에 환난이 닥쳐 올 때 나는 너를 보호해 주겠다.”

       묵시록에서 “온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거의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8장, 9장, 16장에 기록된 환란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13,5-10에 나오는 ‘반(反)그리스도’의 득세 기간인 3년 반(42달)과 일치한다.

       그러나 뽑힌 사람들은 그것을 모면하게 된다. 곧 오실 그리스도께 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이 교회가 충실성과 인내심을 단단히 유지해야 하며,

                 아무에게나 “월계관”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이 월계관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2,10).

[12-13절] 승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기둥”으로 삼는다.

       필라델피아는 지진이 자주 일어났고, 그 때마다 주민들은 자기 집을 뛰쳐나와

                           도시 밖 안전지대로 피신해야 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어떤 큰 지진에도 끄떡이지 않는 튼튼한 기둥과 허물어지지 않는 건물을 가져,

                  피신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헬레니즘 문화에서는 사람을 곧잘 기둥으로 비유하였고, 유다교에서도 그러했다.

      성 바울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교회의 기둥”(갈라디아2,9)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대목의 비유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승리자 위에 표시하게 될 세 개의 이름” : (1)하느님의 이름, (2)하느님 도성의 이름,

             (3)하늘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묵시록21장)의 이름을 새기겠다.

             이는 그가 하느님의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 또한 하늘나라 도시의 시민임을 표시한다.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3,14-22)

 

‘라오디게이아’라는 도시는 필라델피아와 같이 프리기아 국경에 있으며,

          기원전 3세기에 안티오고스 2세로 말미암아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은행업이 발달하였는데 그 당시 동서양과의 교통요지로 많은 상거래가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수표와 같은 신용장 제도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다.

또한 의류제조업이 번창했으며 특히 양털로 짠 검보라색 모직류가 유명했다.

그리고 ‘멘(Men)’이라는 신전에 아주 유명한 의학파가 있었으며,

           고대 의학 특히 안약, 고약 등이 유명했다.

묵시록은 라오디게이아가 이런 물질적 풍족함에 안주하려함을 크게 질책하고 있다.

또한 라오디게이아 신자들의 미적지근한 신앙을 지적하는 내용이 이 대목에 기록되어 있다.


[14절] 그리스도께서는 “아멘이시며”라고 자칭하신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아멘”은 이 경우 “확실히 그렇다”라는 뜻이다.

이는 미지근하고 현실타협적인 이 도시를 향해 말하기 전에

       진리이신 그리스도(“진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며...”)를 말해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시작”이신 이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요한1,3; 1고린8,6; 골로1,16).

[15-16절]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성 바울로가 에페소에서 전도할 때

       골로사이인의 에바프라가 창립한 교회로(골로1,7; 4,12-13),

       골로사이 교회와는 이웃사촌 격이었다(골로2,1; 4,16).

그러나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자기들의 평범한 생활에 젖어 만족하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나 칭찬받기 어려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 교회는 한 마디 칭찬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준엄한 질책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즉 냉담하고 뜨뜨미지근 하며 세속에 정신을 팔고 있다고 하신다.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큰 죄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차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따뜻함의 근원이며

                     또 그 결과이기도 한 기쁨의 봉헌과 분발하는 성실성이 모자란다.

그런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역겨움을 느끼시고 차라리 버리시겠다는 경고이다.


[17-18절] 이 교회의 상태가 매우 위험한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 빈곤을 의식하지 못하고

                      물질적 풍요와 자기만족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었다”는 표현은 무역, 은행, 안약(의료기술), 모직물로 번창하고 있는

               이 도시 사람들에게 적절한 표현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경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도시가 빠져 있는 신앙적 쇠잔이라는 비극적인 상태는 두 가지 사정에 달려 있다.

하나는, 신앙인들을 믿음으로 향하게 할 박해와 시련이 없었다는 점.

또 하나는, 두드러진 경제의 부유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비참하고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계신다.

이 교회는 자기들의 경제적인 안정과 편안함에 도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영적인 풍요함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1고린4,7-10).

그러면 그들에게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신다.

치료의 수단은 “나에게서...사서”, 즉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사야 할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단련된 금, 흰 옷, 안약”이다.

이 말씀은 두 말할 것 없이 라오디게이아의 경제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경제적 안정아 아니라, 단련된 금(1베드1,7), 즉 순수한 믿음이 중요하다. 

또한 그들이 생산하는 검보라빛 모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흰 옷(새로운 인간을 입어라),

        즉 덕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들이 의술로 만들어 내는 안약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현명함과

           영적 혜안이 필요하다.


[19절] 이 말씀은 참으로 신약시대에 존재하는 고통의 이유를 말해 주시는 계시이다.

시련도 고통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표이다. 책망이 아무리 가혹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권고하신다.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20절] 냉담한 생활을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되돌아오는 사람은

            사랑에 넘치는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며 기쁨에 넘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성원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문 앞에서

                        겸손하게 문을 두드려 청하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취하신다.

[21-22절]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은 앞의 편지와 같이 종말론적이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구조는 거의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를 도포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

내용 

에페소

2,1-7

스미르나

2,8-11

베르가모

2,12-17

티아디라

2,18-29

사르디스

3,1-6

필리델

피아

3,7-13

라오디

게이아

3,14-22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어라.

1a

8a

12a

18a

1a

7a

14a

말씀하신다.

1b

8b

12b

18b

1b

7b

14b

알고 있다.

2

9

13a

19

1c

8a

15a

귀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라.

7a

11a

17a

29

6

13

22

승리자에게(언약)

7b

11b

17b

26. 28a

5

12

21

 

 

이 편지들에는 내용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우선 이 여러 교회의 종교적, 도덕적 상태를 짐작케 한다.

1)그 가운데 다섯 곳, 즉 에페소,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열성이 식고 있다.

- 첫 번째로 언급된 에페소 교회는 책망받는 교회들 속에 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8가지나 되는 칭찬을 받고 있다 : 소행과 수고와 인내(2,2),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하느니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 사도임을 밝혀낸 일(2,2,)

       인내심을 갖고 있는 모습(2,3), 내 이름 때문에 고통을 당한 모습(2,3), 용기를 잃지 않은 모습(2,3).

- 베르가모 교회는 “내 이름을 굳게 지켜 왔고 내게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2,3)라는 말을 듣는다.

- 사르디스 교회는 칭찬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몇이 있다(3,4)라는 말을 듣는다.

- 라오디게이아 교회는 가장 준엄한 질책의 편지를 받은 교회이다.

             “너는 차지도 덥지도 않다.....그러므로 너는 열성을 다해 회개하여라.”(3,15-19)

이와 같이 책망받는 교회들에 관한 내용들을 비교해 보면, 에페소-베르가모-사르디스

              -라오디게이아 순으로 칭찬이 줄고 있다.


2) 무죄하다고 여겨지면서 칭찬을 받고 있는 교회들은 스미르나-티아디라-필라델피아 교회의 순으로

                     충실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스미르나와 필라델피아 교회는 이 당시 박해를 받고 있었다.

- 스미르나 교회는 그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2,9).

- 티아디라 교회는 4개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2,19).

- 필라델피아 교회는 이미 월계관을 받은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3,11).

이것이야 말로 최대의 칭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과적으로 불충실성의 증대 순서는 준엄한 질책의 증대 순서에 상응하고,

                충실성의 증대 순서는 칭찬의 증대 순서에 상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개로의 부르심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은 에페소 교회, 베르가모 교회, 사르디스 교회, 라오디게이아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묵시록 전체의 내용을 통해 신앙인들은 끊기 있게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초대받고 있으며

           회개하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가차 없는 질책이 가해지고 있다(9,20-21; 16,9-11)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

이렇게 자신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지적받으면서 아울러 경고와 약속을 받고 있는

          묵시록의 일곱 교회는 바로 우리 자신의 공동체를 대표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일곱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스미르나 공동체나 필라델피아 공동체처럼

                  가난하고 시련과 박해에 맞서 투쟁해야 하면서도 믿음과 사랑은 강한 교회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라오디게이아 공동체 처럼 부유하고 득의만만하지만

          신앙을 완전히 상실한 현실적인 위험에 놓인 교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나머지 교회들처럼 선과 악이 섞여 있으면서

           끊임없이 회개와 정화를 필요로 하는 교회일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우리 공동체에는 어떤 내용의 글을 써보내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실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잘잘못에 대한 공덕과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갖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과 덕행이 없이 공동체가 거룩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나 자신의 모습은 이 일곱 교회중에서 어느 교회의 모습에 근접할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에 대한 지적은 아니다.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믿음과 인내, 충성과 회개 등

       우리기 이미 가르침받은 내용들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몰라서라기보다 노력의 부족 때문이다.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르리고 있다...”(묵시19B-21)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