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일곱 봉인(6,1-8,5)

윤 베드로 2016. 8. 30. 12:40

3. 일곱 봉인(6,1-8,5)

요한은 5장으로써 작품 전체를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환시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었기에, 더 풍부한 상징들을 통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환시를 조명하고 있다.

일곱 봉인의 이야기 중, 여섯 개의 봉인 이야기는 6장에 나오고, 일곱 번째 봉인은 8장 첫머리에 나온다. 일곱 봉인은 각각의 봉인이 떼어질 때마다 어떤 불길한 재앙을 몰고 올 조짐을 예감케 한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묵시 8장에 가서 ‘천상성전의 제단 불을 가득히 담은 일곱 금향로를 땅에 던졌을 때’ 그대로 실현되고 만다.

처음의 네 봉인이 떼어지면서 ‘네 명의 말 탄 기사’가 등장하는데, 첫째는 전쟁, 둘째는 폭력, 셋째는 기근, 넷째는 역병을 몰고 온다(6,1-8). 다섯째 봉인이 개봉되자 순교의 공포가 나타난다(6,9-11). 순교자들은 자기들을 박해한 자들에게 복수해달라고 부르짖는데, 잠시 기다리라는 말씀을 듣는다. 여섯째 봉인은 우주적 대이변을 초래하는데, 엄청난 지진이 일고,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6,12-14)

이러한 최후의 혼돈 속에서도 요한은 독자로 하여금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확고하게 지배하고 계심을 망각하지 않도록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심판하시고 당신의 성도들의 죽음을 복수하실 것이다. 어느 누구도 만물의 주님한테서 몸을 숨기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8,1-5)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전례가 기쁨에 찬 노래가 아닌 경외에 찬 침묵으로 표현된다.


  1) 처음 네 개의 봉인(6,1-8)


6장에 나오는 ‘네 개의 봉인’은 각 봉인마다 색깔이 서로 다른 말(馬)들(첫째 봉인 : 흰 말, 둘째 봉인 : 붉은 말, 셋째 봉인 : 검은 말, 넷째 봉인 : 푸르스름한 말)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이는 즈가리아 1장과 6장에 나오는 환시 내용이 어떤 연관을 짓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즈가리아1,7-17에서도 서로 다른 색깔의 말들(두필의 붉은 말, 잿빛 말, 흰 말)을 탄 네 명의 기사 이야기가 나오고, 이 기사들은 야훼께로부터 세상 형편을 살펴보라는 순찰 임무를 받고 파견된 자들로서 세상을 돌아보고 와서 야훼의 천사에게 결과 보고를 드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즈가리아6,1-8에도 각각 색깔이 다른 말들이 끄는 네 대의 병거가 나오는데,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으며, 즈가리아 1장에서처럼 각 병거의 말들이 온 세상을 순찰할 임무를 띠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묵시록이 구약의 즈가리아서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커다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의 즈가리아서에 나오는 말들은 단순히 세상을 순찰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데 반해서 묵시록에 나오는 말들(기사를 포함해서)은 세상에 곧 들이닥칠 재앙들의 종류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묵시 6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다른 두 개의 봉인들(다섯째와 여섯째 봉인)은 앞에 나온 네 개의 봉인에 등장하는 네 명의 기사들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

종합적으로, 묵시록 6장에 나오는 여섯 개의 봉인 이야기의 내용은 루가 21장9-12절과 25-26절(마르13,7-9.24-25; 마태24장)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공관복음의 소묵시록’이라 불리어지는 것으로서, 거기서 국제전쟁, 지진, 기근, 하늘의 불길한 징조들이 묵시록 6장과 더불어 ‘세말의 재앙 이야기들’을 묵시문학적 표현양식으로 전하고 있다.

루가 21장

묵시6장

1. 전쟁

1. 전쟁

2. 국제적 분규

2. 국제적 분규

3. 지진

3. 기근

4. 기근

4. 전염병(페스트)

5. 전염병

5. 박해

6. 박해

6. 지진과 우주적 징표들

7. 우주적 징표들

 

이렇게 루가21장과 묵시6장 사이에 연계되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

 


[1-2절] 첫 번째 봉인

이 대목은 즈가리아6,1-8의 환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에 맞게 고쳐썼다.

또다시 고개를 들고 보니,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병거 네 대가 나오는데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다. 내가 나와 말하던 그 천사에게 "나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 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붉은 말들은 동녘 땅으로, 검은 말들은 북녘 땅으로, 흰 말들은 서녘 땅으로, 점박이 말들은 남녘땅으로 나갈 말이다." 그 씩씩한 말들은 나가서 온 세상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천사가 나를 부르며 일러 주었다. "자, 보아라. 북녘 땅으로 나갈 말들이 주의 영을 모시고 북녘 땅으로 떠난다."

 

 

우뢰와 같은 소리” : 이 현상은 첫 번째 봉인을 뗀 다음에야 나타난다. 이는 14,2와 19,6에서도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서는 기쁜 소식을 예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소리를 들었는데 마치 대단한 물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네 생물들이 번갈아 가며 역시 네 명의 기사들을 차례대로 호출해 낸다. 흰 말을 탄 첫 번째 기사가 등장한다. 흰 색은 묵시록에서 일반적으로 천상적 표징이다. 그 색은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흰 말을 탄다는 것은 묵시록에서 하느님께 가까운 존재들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흰 말을 탄 기사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또한 이 기사가 쓴 월계관은 일반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자들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지칭한다. 더 나아가 그 관은 기사가 쟁취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이 관은 모든 피조물보다 우월하다는 상징이다. 이 흰 말을 탄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그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기사는 을 지니고 있었다. 활이라는 것은 전투의 무기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흰색 말과 관을 쓴 승리자인 이 기사는, 멀리 있는 목표물을 관통시킬 수 있는, 즉 인간들에게 언약된 구원의 신비를 벗겨주는 활을 가졌다.


[3-4절] 두 번째 봉인

말의 붉은 색깔은 상징적이다. 붉은 말을 탄 두 번째 기사도 역시 전쟁을 상징하지만 붉은 색이 의미하는 ‘피 흘림’을 생각할 때 2절의 전쟁규모 보다 훨씬 더 크고 치열한 국제 전쟁을 나타낸다.

그리고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다는 점에서 두말할 여지없이 전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사의 표징은 “큰 칼”이다. 그것은 전쟁의 재앙이다. 요한 묵시자는 전쟁을 원죄의 결과 중에 첫 번째로 내세우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의 아벨 살해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5-6절] 세 번째 봉인

어린양이 세 번째 봉인을 떼자 세 번째 기사가 나타난다. 저울을 들고 검은 말을 탄 세 번째 기사는 기근을 나타낸다. 저울은 정확한 양을 재기 위해 물건을 팔거나 살 때 사용된다. 또한 물건을 팔 사람이나 채무자가 지불하는 돈을 다는데도 사용되었다. “문서를 만들어 봉한 다음 도장을 찍고 증인 앞에서 은을 저울에 달아 주었다.(예레32,10)”

그런데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기사가 손에 들고 있는 저울은 호세아12,8과 아모스8,5에서 경제 정의가 붕괴될 것이라고 이미 예고한 것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거짓 저울을 손에 들고 남을 속이기나 좋아하는 가나안놈 같은 것들...”(호세12,8)

“겨우 한다는 소리가 ‘곡식을 팔아야 하겠는데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지? 밀을 팔아야 하겠는데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아모스8,5)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 이 묘사는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게 될 것인지를 암시해 준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다. 그러므로 기사는 저울의 한쪽에 밀 한 되를, 다른 한 쪽에는 한 데나리온을 올려놓고 같은 값을 하는 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정상적인 경우라면 한 데나리온으로 밀 여섯 되를 살 수 있었다. 보리의 경우도 정상적인 경우라면 한 데나리온으로 열두 되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공정한 경제 정의와 지하 경제,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들, 이렇게 지금 기아의 고통이 밀어 닥치고 있음을 전해주는 것이다.

기아 곧 굶주림은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검은 말이 여기저기를 배회하면서 끊임없이 굶주림의 재앙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기름과 포도주에 제한이 가해지고 있다. 기름과 포도주는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기름은 고통을 가라앉혀주고 포도주는 소독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근으로 인하여 그것은 생각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7-8절] 네 번째 봉인

어린양이 네 번째 봉인을 떼자 푸르스름한 말을 탄 네 번째 기사가 나타난다. “푸르스름한 말을 탄 네 번째 기사”는 ‘죽음’ 과 ‘지옥’을 상징한다. 땅(인류)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운명을 당할 것이고, 죽음의 원인으로는 기근은 물론이고 페스트(흑사병)같은 나쁜 역병이나 사나운 짐승들에게 먹히는 경우 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표사는 에제키엘서가 묘사해 주는 내용과 유사하다.

“너희 가운데 삼분의 일은 성 안에서 염병으로 죽든지 굶어 죽을 것이요 삼분의 일은 성 밖에서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으로 흩어버리고 칼을 빼들고 뒤쫓으리라.”(에제키엘5,12)

죽음이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운명에 속한 것이다. 나아가 죽음은 인간 역사를 구성하는 신비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전쟁과 기근과 죽음조차도 흰 말을 타고 순회하는 승리자이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에 의해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2) 다섯째 봉인(6,9-11)


다섯 번째 봉인이 떼어지면서 계속되는 환시는 하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다섯째 봉인이 개봉되자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흘린 피의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시편에도 나온다. “당신 종들이 흘린 그 피의 복수를 우리 보는 앞에서 이방인에게 보여주소서.”(시편78,10)

그러나 이런 내용은 그리스도교 기도 정신과 크게 어긋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크게 반대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

또 묵시록의 이 대목은 ‘산상설교’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최고 가르침과 크게 상치된다. 또한 최초의 그리스도인 순교자인 스테파노 역시 순교하면서 박해자들을 위해 예수님과 비슷한 기도를 남겼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사도7,60)

그런데 묵시록의 이 대목에서는 그러한 주제보다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 수가 다 찰 때까지”(11절) : 유다 묵시문학에서는 일정한 수의 영혼들이나 뽑힌 이들의 수가 다 채워지면 세상의 종말이 된다고 가르쳐왔다. 따라서 묵시록의 이 구절들은 유다의 ‘라삐’사상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들이 흰 두루마기를 받고 휴식을 한다는 표현은 순교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휴식은 세상의 고통에서의 해방을 말하며, 흰 옷은 첫 번째 기사가 탄 흰 말과 같이 새로운 상태의 삶을 암시해 준다. 인자가 타고 오는 구름도 흰색이며(14,14) 그분이 탄 말도 흰색이다(19,11). 더 나아가 심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앉으시는 옥좌 역시 흰색이다(20,11). 그러므로 순교자들에게 허락된 흰 예복은 그들의 성성(聖性)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구원을 의미하며, 악으로부터의 해방과 신적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 안에서도 새 영세자들이 흰 옷을 입었던 것이나, 오늘날 세례식 때에 흰 수건을 머리에 얹는 것도 이와 연관된 것이다.


  3) 여섯째 봉인(6,12-7,17)


여섯 번째 봉인에 관한 내용은 매우 풍부하게 전개된다. 여기서 요한은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의 총체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요한은 중추적인 두 번의 개입을 부각시킨다.

첫 번째는, 히브리 민족에 관계되었던 개입으로써 이집트로부터의 해방과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 그리고 율법의 선물과 메시아의 언약이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개입으로써 죄와 사탄의 권세 하에 놓여 있던 모든 인간들의 구원과 새로운 계약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류역사에 두 번에 걸쳐서 결정적으로 개입을 하셨는데, 그 두 번의 개입은 지속성을 지닌 것이다. 첫 번째 개입은 두 번째 개입의 예고나 준비 또는 표상으로써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봉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옛 구원 경륜(이마에 인장이 찍힌 자들로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 출신들인 144,000명)이 표상하고 있는 바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은 하느님의 두 번째 개입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표징”인 “대지진”과 우주적 혼란(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12-14절] 여섯째 봉인이 개봉되자 천체의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다. 즉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휘말리며 산이 뒤흔들렸다. 이사야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전한다. “산들은 모두 피로 물들고 언덕들은 썩어 문드러진다. 하늘이 두루마리인 양 말리고 포도 잎새가 말라 떨어지듯, 무화과나무의 낙엽이 지듯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이사34,4)


[15-17절] 이 대목은 루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 때 사람들은 산을 보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할 것이며 언덕을 보고 ‘우리를 가리워달라’ 할 것이다.”(루가23,30)

근본적으로 묵시록의 이 대목은 호세아10,8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죄악인 ‘베다웬’ 산당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을 덮으리라.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더러 묻어 달라’, ‘언덕더러 무너져 덮어 달라’고 애원하리라”는 내용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이 부분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응징적인 모습을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들을 빌어 전해주는 묘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종들임을 표시하는 인호[7,1-8]


선택받은 하느님의 백성은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더불어 절멸당할 것인가? 요한은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들은 틀림없이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되리라고 그들에게 다짐하고 있다. 마지막 날들에 벌어지는 그 끔찍한 사건들의 와중에서 이제 극적인 쉼의 순간이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도장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바로 하늘나라 궁전에서 한 자리를 얻게 되리라는 표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원로들 및 상징적인 네 생물들과 함께 어린 양과 옥좌에 계시는 분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

7장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7장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을 전하는 두 개의 장면이 서로 겹쳐지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고 상치되면서 내용 묘사를 해 나간다. 144,000명의 “하느님의 종들”은 이마에 인장이 찍혀 있으며(1-8절), 무수한 무리가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난다(9-17절).


[1절] “네 바람” : 네 바람은 여기에서 악마적 세력을 의미한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과 바다를 두려워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묵시록에서도 반영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들의 개념으로 “네 바람”에게는 땅과 바다를 해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권한 행사가 천사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르4,35-41을 보면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동시에 제어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센 풍랑이 일었는데 바다를 향해 예수님이 호령하시자 바다와 바람은 고요해진다. 그러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하며 수군거렸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이 전승에서 발췌된 자료들이 묵시록의 이 자리에 삽입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하여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했다는 말은, 악마적 세력들이 아무런 재앙도 끼치지 못하도록 제압하는 것을 의미한다.


[2-4절] 이 대목은 에제키엘서와 관계가 있다. 하느님이 예루살렘의 죄를 징벌하시기 전에 먼저 필묵통을 허리에 찬 천사를 파견하시면서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며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印)를 해 주어라”(에제키엘9,4)라고 분부하시는 대목이 나온다.

묵시록의 이 대목에서도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의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각 지파마다 12,000명씩 뽑혀 도합 144,000명이 이마에 도장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들은 곧 닥칠 징벌에서 면제된 사람들이다.

 

 

[5-8절] 12지파의 144,000명 : 이 숫자는 묵시14,1에 한 번 나올 뿐 더 이상 묵시록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숫자는 묵시자 요한이 전수받은 유다 전승의 한 조각일 가능성이 짙다. 이 숫자는 물론 상징적인 숫자이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의 무한한 수와 궁극적인 완성을 말해준다. 요한에게 있어서 144,000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지만, 그보다 오히려 질서와 완성을 말해 주는 숫자이다. 그는 완성의 표시인 12를 취하여 그것을 제곱하고 다시 완전한 무한의 상징인 1,000(10X10X10)을 곱한다.

요한은 이 거룩한 암호를 통해 박해당하고 경멸당하고 쫒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소중한 백성이요 새 이스라엘의 지파들로서 현재의 시련을 격고 나면 영원불변의 완성된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또한 요한은 자기가 말하는 숫자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제 구원받는 사람이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많다고 말한다(7,9).

이 144,000명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인장”으로 찍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악마적 세력들(네 바람)을 붙잡아 두는 자들은 바로 천사들이다. 그렇다면 이마에 새겨진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신적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천사가 이마에 인장을 찍은 사람들은 다섯 번째 봉인에 나오는 순교자들처럼 구원된 자들이다. 즉 순교자들과 동일한 존재들이다.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있고 그와 함께 144,0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14,1) 모습을 요한은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순교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들로 한정되어 있다. 즉 구원된 자들의 숫자가 히브리 백성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온 군중[9-17절]

앞의 1-8절에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묵시록 저자는 세상 종말에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우선적으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나서(묵시7,1-8) 그 다음에 이방계 그리스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묵시7,9-17)

묵시록 저자는 6장에서 봉인이 개봉되기 시작하면서 가중된 일련의 공포감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서 일종의 강장제 구실을 할 수 있는 내용(구원받을 사람들의 이야기)을 묵시록 7장에 삽입함으로써 묵시록 8장 이후에 다시 계속되는 무서운 사건들을 다소나마 안정된 상태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하늘나라의 묘사를 묵시록 7장에 소개하는 또 다른 목적은 박해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갖게 해주려는 데에 있다.


[9-13절] 요한 묵시자는 하늘나라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이 영광중에 싸여 기쁨의 극치를 이루고 있음을 환시 중에 체험한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들을 들고 있었다는 것은,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하고(종려나무 가지) 신적인 생명에로(흰 예복) 나아갈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천사들과 대천사들도 모르는 존엄성을 부여받는다.


[14절]큰 환난” : 여기서 나오는 환난은 그 기간이 장기적인 것이 아닌 환난으로서 묵시록3,10에 나오는 환난과 같은 성격이다.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든” : 이 대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붉은 피로 두루마기를 하얗게 빨 수 있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어린양의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더렵혀진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용서를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어린양이 겪은 고통과 시련의 결과로서 의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흰 예복을 입은 군중은 “큰 환난”(박해)로 인해 겪어야 했던 그리스도의 죽음의 놀라운 결과인 것이다.


[15절] 여기에 또다시 천상 성전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황제숭배를 하는 신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신전에서의 황제숭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은 천상 성전에서 사제 공동체를 이루어 주님을 섬기고 있다.


[16-17절] 이 대목은 묵시록 저자가 이사야서에서 적합한 대목들을 기술적으로 발췌하여 자신의 의도에 맞게 한데 묶은 것이다. 즉, 16절의 내용은 이사야49,10에서 끌어온 것이다. 또한 17절의 내용은 거의 이사야25,8의 내용과 일치한다.


  4) 일곱 번째 봉인(8,1-5)


일곱 개의 봉인 중에서 가장 간단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일곱 번째 봉인이다. 일곱째 봉인의 개봉은, 이제 단죄의 단계가 끝났고 지금부터는 징벌 단계로 돌입하였음을 시사한다. 그 징벌의 개시는 일곱 나팔을 부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묵시8,6이하)


[1절] 일곱 번째 봉인이 떼어졌을 때 야기된 것은 하늘에서 “반시간 가량의 침묵”이 흘렀다는 점이다. “침묵”은 마치 폭풍 전야의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고요함에 비길 수 있다. 이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라는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침묵이 흐르고 있는 곳은 하늘에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늘에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의 노래를 중단 없이 부르며 전례를 거행하는 천사들의 음성이 나타났다. 그리고 천사들의 중재를 통해서 하느님께 올라가는 “거룩한 자들, 즉 성도들의 기도”가 합쳐지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죽음의 복수를 해달라는 순교자들의 외침이 첨가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곱 번째 봉인의 “침묵”은 그와 같이 다양하게 울려 퍼지던 소리를 끝맺게 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순교자들의 외침이 멈춘다고 하는 것(침묵)은 그들이 요구하던 목적이 성취되었거나 성취 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요구하던 것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

천상 전례의 중단은 십자가 사건과 일치한다. 공관복음서들은 상징을 통해서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유다인 의식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자 갑자가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달래로 찢어지고 땅이 뒤흔들이며 바위들이 갈라졌다.”(마태27,51) 묵시자 요한은 여섯 번째 봉인에서 이미 그 점에 대해 암시해 주었다.(지진, 우주적 혼란, 피신)

그와 동일한 의미를 표명하기 위해 묵시록에서는 천사적 전례의 중단(침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침묵이 흐른 시간은 약 30분이었다. 물론 이 시간은 양적으로 계산된 시간이 아니라 영적인 시간이다. 침묵이 흘렀던 반시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 간격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 시간적 간격 동안에 하늘에 침묵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이 거행한 옛 전례가 멈추고, 새로운 과월절인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의식을 기다리는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2절]일곱 천사들” : 아마도 일곱 대천사를 지칭하는 것 같다. 즉 가브리엘(루가1,19), 미카엘(묵시12,7), 라파엘, 우리엘, 라구엘, 사라키엘, 예레미엘(4에스드라4,35-36)등 일곱 대천사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외경인 1에녹20장에 열거되어 있다.


[3-5절] 금향로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는 묵시5,8을 참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금향로와 황금제단의 모형은 지상 예루살렘 성전의 도구들에서 착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 중앙에 있는 지성소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제들이 분향예절을 했다. 사제들은 성전 밖에 설치된 번제물 태우는 제단으로부터 숯불을 가득히 담은 화로를 성전 안으로 운반해서 황금제단 위에 그 숯불을 수북하게 쌓아 올린 다음 향으로 그 숯불 위에 끼얹어 향기로운 연기를 피웠다. 세례자 요한의 부친인 즈가리아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분향예절을 드리려고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난다.(루가1,9)

유다인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상의 성전에 대응하는 똑같은 성전이 천상에도 있다고 믿어왔다. 이런 사고방식이 묵시록 전편에 흐르고 있다. 묵시록에 의하면 황금 제단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놓여있다.


[결론]


이 일곱 봉인에 대한 이야기들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날 재앙을 묘사해주는 것이 아니다. 요한 묵시자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죽음, 예수의 파견과 십자가상의 죽음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늘 제기되는 세 가지의 전통적인 의문점을 갖고 있다 : 전쟁은 왜? 기근과 경제적 불평등은 왜? 죽음은 왜?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며 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투성이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생명력조차 잃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죄악을 송두리째 뽑아서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죄악과 성스러움이 한계선상에 함께 자리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죄악을 저지른 자에게는 불행이 닥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산들보고 무너져 달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와 흡사한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 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 고 대답하였다.”(마태13,24-30)


그러나 전쟁과 기아와 죽음을 가져오는 기사들이 인간의 전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분명하게 표명되어 있다. 전쟁과 기근과 죽음조차도 흰 말을 타고 순회하는 승리자이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에 의해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전 역사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최종 목적지를 향해 역사의 흐름을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