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24강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록 19장)

윤 베드로 2016. 8. 29. 11:14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4강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록 19장)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또 잘 보내셨습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봤죠? 지난 시간에 악의 근원인 바빌론의 멸망에 대해서

봤고 멸망이 무엇에 대한 멸망이었던가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다뤘습니다. 너무

급하게 다뤘는데 한 가지만 그냥 우리 머리 속에 기억합시다.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귀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정말로 우리 부의,

세상 살아가는 어떤 재화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바빌론의 어떤 패망의

문제였다. 그 접근이 관계의 단절, 다시 말해서 부의 편중 소위 있는 사람 자기의

탐욕, 자기만을 위해서 이 세상의 재화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요한 묵시록은

그것을 바빌론의 잘못, 패망의 원인으로 봤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런 쪽으로 가지 않고 하늘의 사람,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은

서로가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하다. 함께 나누고 철저하게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오늘 우리가 볼 혼인잔치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 혼인자치가 오늘 19장에 등장하는데요. 혼인잔치 다음에 뭐가 또 등장하느냐

하면 백마탄 기사가 그런 혼인잔치에 함께 가지 못하는 세상의 권력가들을 다

이렇게 쳐버리는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권력가들이 어떻게 했는지 우리 18장

에서 봤죠? 땅의 임금들 그리고 바빌론으로 표현된 로마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들의 재화, 자기들의 탐욕 그것을 위해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던 그런 어떤

권력의 힘, 로마의 특히 정치적, 군사적 힘이 13장에 바다에서 오라오는 짐승이죠.

그 정치, 군사적 힘을 등에 업고 경제적인 착취를 했는 그러한 권력을 우리가 백마

탄 기사가 오늘 볼 19장에서 없애 버립니다.

 

그거 없애면 어떻게 되요? 어떻게 됩니까? 함께 나누는 그런 마음만이 남아 있는.

그 남아 있는 마음의 가장 결정체가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볼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의 문제가 제일 중요해요. 요한 묵시록

전체를 바라보자면 결국에는 또 관계의 이야기입니다.

 

요한 묵시록 제일 마지막 장을 한번 다루겠습니다마는 관계가 잘 되는 것이 성경

전체의 메세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에덴 동산에 함께

있기를 원하셨거든요. 함께 있기를 원하셨는데 인간이 자기 원하는 것을 취득하기

위해서. 그게 원죄죠. 자기들만의 어떤 세상을 꿈꾸는 것.

 

그래서 이 관계가 단절이 됩니다. 내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의 것도 중요하다

는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요한 묵시록 강의가 이번

까지 합쳐서 세 개 남았습니다. 거의 끝나가는데 이제 좋은 이야기만 계속 됩니다.

 

오늘 혼인잔치, 백마탄 기사, 천상 예루살렘. 좋은 이야기만 펼쳐지니까 이제 마음

푹 놓고. 이제 그 징벌의 이야기, 재앙의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이거는 다 우리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들이고, 우리가 예언자들이고, 또 우리가 사도들

이고 이러면 그쪽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거예요.

 

18장에 바빌론 패망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하느님의 백성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거기서 나와라." 라고 그랬죠? 바빌론 거기서 나와라.

너희들은 부에 편중되는 것, 너희들만의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거기서

나오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왔어요. 나와서 오늘은 19장의 어린양의 혼인잔치

의 그 어떤 축하식 그런 내용으로 한번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19장을 볼 때 일단은 조금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가 조금 나눌 필요

있는데 일단은 19장 1절에서 10절까지. 요기서 이제 바빌론의 패망에 대한 어떤

찬미, 하늘에서의 찬미, 혼인잔치의 내용이 나오고.

 

* 묵시 19,1-10: 바빌론의 패망에 대한 하늘에서의 찬미와 어린양의 혼인잔치

 

그리고 두 번째 19장 11절부터 21에 나오는 게 백마탄 기사의 내용으로 크게

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묵시 19,11-21: 백마탄 기사

 

먼저 첫 번째 19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어떤 모습, 그 어떤 구조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19,1-2: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

 

자, 피를 되갚아 주셨습니다. 뭐 떠오르는 대목 없습니까?  6장에서 언제까지

우리 피의 복수를 미루시렵니까? 라고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이 외쳤습니다.

 

* 묵시 6,10: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순교자들의 어떤 형상이겠죠? 자, 이것의 완성이 여기서 됐습니다. 그죠?

피의 복수는 뭐냐? 내가 억울하게 당했으니까 나를 좀 어떻게 좀 보상해 달라는

나의 차원이 아니라. 자, 대탕녀가 무너졌어요. 경제적 부의 편중, 자기 만을 위한

탐욕이 무너졌어요.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어요.

 

* 순교자들이 원했던 피의 복수: 하느님의 분배 정의의 실현

 

피의 복수는 하느님의 정의에 그것도 지난 시간 막바지에 말씀 드렸는데 하느님의

분배 정의의 그것의 실현이 바로 순교자들이 원했던 그들의 피의 복수였던 거죠.

"쟤가 나 한대 때렸어요. 대산 한 대 때려 주세요." 이런 좀 유치한 차원의 어떤

복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의 실현 그것이 바로 여기 19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징벌이, 이 피의 복수의 실현이 어떻게 되느냐?

 

* 묵시 19,3: 그들이 또 말하였다. "할렐루야!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영원무토록. 자, 시간의 문제에 한번 집중해 보십시오. 이제는 대탕녀 바빌론의

멸망,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의 멸망은 영원무궁합니다. 영원무궁히 그렇게

연기가 타오른다. 그러나 이 영원성은 또 어디에 등장하냐 하면, 이 바빌론의 패망의

영원성은 천상 예루살렘이 나타나서 천상 예루살렘이 영원히 그 안의 모든 민족들이

거닐 것이다. 구원의 영원성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의 영원성입니다.

 

* 바빌론의 패망: 구원의 영원성을 상징

 

같은 건데 바빌론의 패망인데 이것은 동시에 구원의 영원성이 된다는 것이죠.

자, 우리 구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원 받으시고 싶죠?

이 구원이라는 단어는 자칫 잘못하면 나중에 심적으로 이해를 해버리면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편해지고 내가 하느님한테 복 받는 것. 내가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도 제가 보기에 18장의

대탕녀 바빌론의 모습과 별반 차이 없습니다.

 

나 자신의 감정 상태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금

구원은 어좌에 계신 분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라고 7장에 수많은 무리, 군중들이

이야기하거든요. 구원은 내 것이 아니예요.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이예요.

그분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탕녀 바빌론이 멸망하니까 영원무궁토록 그 여자를 불태웠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죠. 그것이 나와는, 내가 보기에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지마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됐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자꾸 나 중심적으로 우리가 자꾸 종교, 구원 어떤 신앙적인 측면으로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거는 점집 가는 거나 별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머리 속에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구원 개념도 관계예요.

 

쉽게 얘기해서 이겁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친구가 정말 잘 됐어요. 정말로

훌륭하게 멋지게 됐어요. 축하해 주고 내가 내 기쁘면 되겠죠? 진정 내 친구니까.

그런데 옆의 친구 잘 되면 배 아프잖아요. ^^*~~~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나도 그렇게 됐으면,

저게 나한테 왔어야 되는데... 이런 식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이것도 관계의 문제거든요.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이루어

졌으면 그게 나한테 구원인 거예요.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 묵시 19,4: 그러자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자,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릴께요.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처음 등장한 곳은?

아, 갑자가 침묵이? 조용해졌는데... 제가 침묵 그러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게

뭡니까? 일곱 개 봉인 일곱 번째 뜯기 전, 나팔 일곱 번째 전, 일곱 번째 대접

전에 침묵이 흘렀다. 뭐 때문에? 이것도 또 다른 퀴즈가 돼 버리네요.

회개하라고. 하느님 뜻에 돌아서라고 침묵기가 있다고 그랬죠?

제가 퀴즈 내면 침묵하시면 안 되요. ^^*~~~ 여러분은 홰개하셨기 때문에 ^^*~~

 

자,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은 묵록 4장에 나타나죠? 4장에는 어떤 모습이 있는데?

하느님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묘사하는 것. 어좌에 계시고 그다음에 그 주위에

스물네 원로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하느님을 경배합니까?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5장에서 어린양이 나타나죠?

 

지금 가면 갈수록 자꾸 이제 요한 묵시록 전체를 정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장, 20장, 21장, 22장 계속 가면서 앞에 나온 개념들을 다 끌고 가는 거예요.

자, 5장에서는 구세주로서의 하느님. 당신 피로써 세상 모든 민족을 속량하셔서

하느님께 이끌고 간다. 5장에서 구세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에 5장에 나타난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하느님을 우리가 함께 봤었습니다.

4장에 나타나는 하느님 어좌 주위에 있었던 창조주 하느님을 경배했던 그 인물이

지금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의 등장입니다.

 

* 묵시 4,10: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흔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분의 앞에 있었던 분들이 나타나서 아멘. 할렐루야를 합니다.

무엇? 대탕녀 바빌론이 패망하고 영원무궁토록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

무궁토록 올라가리라.

 

* 묵시 19,3: 그들이 또 말하였다. "할렐루야!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여기에 이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경배했던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어떤 것이다. 얘들은 이제 끝났으니까 얘들은 이제

바빌론은 없어졌으니까, 타고 있으니까 이제는 하느님의 영역 안에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5절부터 보면,

 

* 묵시 19,5: 그때에 어좌에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종들아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자, 당연한 결과죠. 이제 소위 나쁜 것은 없어지고 하느님의 어떤 영역, 창조주

하느님으로서의 영역에 있으니까 오로지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13장에

로마의 정치, 군사적 거기에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이제 경배할 곳은

하느님 한분 밖에 없다라는 것이죠.

 

* 묵시 19,6: 나는 또 많은 무리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큰 물 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자, 여기 중요한 포인트. 자, 지금 무리의 목소리 또 많은 무리의 목소리 같기도 한

많은 무리의 목소리입니다. 이것이 말하는데 하느님의 다스림의 시작을 이야기

하고 또 뭘 이야기합니까?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 묵시 1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어린양이 누구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과 연결하고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봐야 되겠습니다. 자, 이 문제를 보기 전에

우리가 전체적인 지금 19장의 처음 부분은 그냥 대략적으로 대충 봤는데

이 마지막 목소리. 방금 했던 또 많은 무리의 목소리가 하느님의 다스림과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엮어 놓는 이 목소리.

 

그리고 첫 번째 목소리와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소리.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와 지금 여기 5절, 6절에 시작하는

많은 무리의 목소리. 이 두 목소리가 있지요? 하나는 하늘에서 하는 목소리죠.

이 마지막에 6절에 있는 목소리는 땅에서 하는 말이고.

 

자, 우리가 요것을 두 개를 같이 놓고 지금 19절이 말하고 있거든요.

하늘과 땅의 수많은 군중. 요거 우리가 어디서 본적이 있습니다.

7장에서 봤습니다.

 

* 묵시 7,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군중들. 이 군중들이 어떤 군중들입니까? 분명히 하늘에서

어좌 앞에서 찬미를 드렸거든요. 그런데 이들이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서 왔냐?

라고 말해 보라고 요한에게 말하니까 원로,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원로가 설명해 줍니다. 이들은 많은 고난을 지금 겪고 있는.

 

제가 그때 번역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겪은 사람들이 아니라 현재 분사인

겪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건너오고 있는, 고난에서. 땅의 고난 속에서 함께 하는

군중들. 하늘과 땅이 지금 만나는 7장에서 봤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늘에서 내는

수많은 무리의 어떤 목소리. 대바비론이 망했다. 하느님께 경배해야 된다.

 

그리고 여기는 하느님께 경배하는 것이 하느님의 다스림 때문이다. 그 다스림은

어린양의 혼인잔치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지금 어우러져 하늘과 땅이

같이 연결되는 어떤 차원에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머리 속에

각인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사실 아까 4장, 5장도 이야기했고요. 요한 묵시록이 전반적으로 쭉 걸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유다 묵시문학 작품들은 천상과 지상을 나누었어요. 천상은 좋은 곳이고

지상은 나쁜 곳이고 이것이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금 조심을 주저했습니다.

 

* 유다 묵시문학: 천상(좋은 것)과 지상(나쁜 것)으로 구분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늘 반복되는 것이 천상, 지상을 늘 나누면서 이야기하지마는

동시에 이것을 자꾸 엮어줘요. 엮어 주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 구절을

요한 묵시록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 천상과 지상을 엮어 주는 것이 구원이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 그래서 이러한 천상과 지상의 온전한 일치 그것이 우리가 19장 1절 후반부부터

우리가 구체적으로 보자면,

 

* 묵시 9,1: 그 뒤에 나는 하늘에 있는 많은 무리가 내는 큰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했죠? 요거 우리 7장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했더, 셀 수 없는 군중이 했던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죠? 구원과 영광이

우리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하느님의 이 군중 그리고 아까 6절에 또 많은 무리의 군중의 그 목소리는 같은

거라고 했습니다. 같이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원이

우리 하느님의 것이라고 낼 수 있는 군중은 누군가? 누굴까요? 그것은 요한 묵시록

전반에 걸쳐서 두 가지 차원에서 우리가 그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다.

 

* 구원과 권능의 선포: 1) 고난을 겪고 있으며 인내로이 신앙을 지키는 자(묵시 7장)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을 것이고, 끌려갈 사람은 끌려갈 것이고 그러나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까닭입니다라고 13장 중반부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지금 구원과 권능을 외치고 하느님의 영광을 외치는 것은

아까 하느님의 정의의 실현 때문이라고 했죠? 정의의 실현이 악의 요소의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내 삶이 지금 어렵지마는 아, 하느님의 뜻이 조금씩 이루어져 가는

구나. 그래서 내가 희망을 느끼는구나. 나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내로이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습. 내 뜻의 실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그것이

내 삶의 힘겨움일지라도. 그래서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원을 외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큰 환난에서 걸어오고 있는 이들, 건너오고 있는 이들. 그런 군중의

모습을 여기서 봤고.

 

* 구원과 권능의 선포: 2)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

   (묵시 14장)

 

자, 수많은 군중들 다음에 이야기가 나타나는 14장에 보면 시온 산에 어린양이

있고, 십사만사천 명이 어린양을 늘 그분이 어디를 가나 따라 간다고 했습니다.

 

* 묵시 14,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거예요. 요한계 문헌의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함께 거처한다는 것. 함께 있다.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간다. 요한복음 처음 제자들 부를 때 제자들이 가서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요. 예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와서 보시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가서 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그 다음에 돌아와서 머문 사람은 안드레아인데 자기 형 시몬에게 뭐라고 합니까?

"내가 메시아를 만났소." 예수님께서 있는 그 장소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예수님을 체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로서의 체험을 얻고 내가 증언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제자 부르심이죠.

 

여기도 마찬가지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자.

이 사람들이 구원을 외칠 수 있다는 거죠. 아까 말한 구원의 개념과 같은 겁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편해지고, 내가 행복해지고 그런 것이 구원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분의 뜻이 이러우지니까 내가 어디로 와야 되요?

그분의 자리에 가야 되겠죠. 거기 가야 내가 행복한 거지.

 

"내 뜻이 아니야 너. 너는 내 뜻과 달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내 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 두 가지 차원, 인내로 신앙을 지켜 가는 것. 동시에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이 두 가지가 바로 구원과 권능을 외칠 수 있는 수많은

무리들의 목소리다.

 

자,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한번 보면요. 이 두 가지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의 개념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아까 제가 6절에 나타나는 그런 수많은 무리의 어떤

이 찬미가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어린양의 혼인날이 왔다.

하느님의 다스림과 어린양의 혼인잔치 이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 라고 말씀드렸죠?

 

자, 거기에 대한 해답이 예수님의 삶 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르코 복음 1장

14절에서 15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 마르 1,14-15: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 때가 차서 뭐가 왔다고요? 하느님 나라입니까?

하늘 나라입니까? 뭐가 맞을까요? ^^*~~ 예, 마태오 복음은 하늘 나라.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 나라. 왜? 미태오 복음은 유다이즘이 아주 충실하였기에 유다이즘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하늘 나라라고 되어 있고,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에게 쓰여지니까 이방인

에게 뭐 하늘, 하느님 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유다인들보다는. 그러니까 하느님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씁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

 

하느님의 나라가 어디 땅덩어리가 새로운 땅덩어리가 땅덩어리가 왔다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그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

되었다. 그래서 회개하고 거기에 복음을 믿어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의 말씀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 말씀, 예수님의 행적이

하느님의 다스림의 표징이었어요. 요한 복음은 그것을 표징으로 계속해서

묘사를 하고 있지요. 그럼 하느님의 다스림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가 구체적으로 역사의 예수, 예수께서 살아가신 모습 안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그것이 하느님의 표징이라면 예수께서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분의 삶의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갈릴래아, 나자렛, 호수 주변, 광야, 특별히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 받았던 사람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죄인을 만는 거였죠? 제일 화가 나는 게

그거예요. 목동들이 최하증민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목동들이. 이 목동들이

왜 최하층민들었나? 마을 안에 살지 못했으니까요. 양을 칠려고 광야에 살았으니까요.

광야에 사니까 율법을 지킬 수 있어요? 없어요? 밤새 일을 해야 되는데, 양을 지켜야

되는데 율법을  못 지키죠.

 

그 양들의 주인은 누군데요? 율법을 지킨다고 노력하는 유다인들, 좀 율법을 지켰

다고 죄인 아니고 자기들의 재산인 양을 봐 주고 있는 사람들을 율법 한 지킨다고

죄인 취급하고. 이게 되게 화가나는 구조적인 문제죠. 사회 구조적인 문제.

이러한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제일 먼저 목동들에게 드러났어요. 그죠?

 

그러한 사회적 억압과 소외 계층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머무셨던 당신의 삶의 자리가 사회적 소외 계층이 머물렀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다스림의 어떤 자리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그 자리에 있어야죠.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하셨다면, 그 자리에 가야죠. 

 

예수 추종해야 된다면서요. 예수님을 만나야 되죠. 예수님의 삶의 어떤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의 시작이었죠. 그렇다면 예수님과 일치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게 하느님의 다스림이죠.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 하느님의 뜻 안에 살아

가는 것.  

 

* 하느님의 뜻(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것: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것

 

어려울 것 하나도 없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삽시다라고 말하면 잡히는 게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인간의 뜻은 조금 포기하고, 세속적인 가치는 조금 내려 놓고,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 갑시다. 그럼 하느님의 뜻은 뭐요? 라고

말하면 뭡니까? 구체적인 모습은? 그럼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보면 되요.

어디서 활동하셨는가?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이 역사의 예수님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 지금 살아

가는 사회 안에서 소외받고 힘들어하고 목소리 아무리 내질러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그런 계층에서 사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18장 대탕녀 바빌론과 비교해서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부를 사용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부를 뺏겨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소외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 묵시 1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예수님과 일치가 되었다.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

이라는 것이 6절에 우리가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어떻게 되느냐?

요한 복음 마지막의 글귀를 가지고 한번 결론을 내자면,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어 고백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뭐라고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생명은 저 혼자만의 건강 이런 자기 혼자만의 영원무궁한 삶 이것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에서 배우겠습니다마는 하느님의 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

입니다. 이게 뭐냐? 생명의 공유입니다.

 

* 생명수: 생명의 공유를 의미함

 

영원한 생명은 "아이구야, 내 죽은 후에 아이고, 나는 이제 영원히 사는구나!"

이런 나 중심적으로 또 생각을 하거든요. 그게 아니예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 영원한 생명: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내가 살아가면서 나 혼자만의 삶이 아, 죽음 이후에 영원히 펼쳐지겠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음 이후에 하느님을 만나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구나

라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얻어 누리게 된다.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된다라는 것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 어린양의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다스림이죠. 이렇게 계속 연결해서 고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자, 두 번재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날이 왔을 때, 두 번째 나오는 것이 그분의 신부

입니다.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죠? 살아야 되는데 '몸단장을  끝냈다.' 요거를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무엇 하는 것이 몸단장을 끝냈다는 것일까? 어떤 것이?

* 묵시 19,8: 그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

   고운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자,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입는다는 것이죠. 의로운 행위가 뭐겠습니까?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한번 정리해 보자면, 19장 1절부터 쭉 나오는 것을 한번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구원에 대한 선포입니다.

 

* 의로운 행위(묵시 19,8): 구원에 대한 선포

 

구원에 대한 선포입니다. 의로운 행위. 지금 의롭다는 것의 정의를 내리는 거예요.

구원에 대한 선포. 아까 구원은 내가 얻어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의 실현

이라고 했습니다.

 

1) 그것을 외치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것.

2) 대탕녀 바빌론의 패망을 이야기합니다.

 

* 의로운 행위(묵시 19,3) : 대탕녀 바빌론의 패망

 

하느님의 뜻 아닌 것의 멸망, 저것이 불의다, 저것이 잘못됐다, 저것은 사라져야 한다

라는 정의의 목소리. 그것에 대한 선포. 뭐 쉽게 이야기해서 이겁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아니예요. 지금.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우리 본당 안에서든,

세상 안에서든  저것은 아닌데 침묵하고 있거나 눈감고 있거나 외면하는 것.

 

실컷 구원에 대한 선포 해 놓고 구원은 하느님의 것이고 구원은 하느님의 것이고

그 영광 찬미 다 드려 놓고 성당 안에서만 박수치고, 노래 부르고 찬미 찬송하고,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저게 하느님의 뜻이 아닌데 거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 눈 감고 있는 것. 이거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의로운 행위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한는데 첫 번째 구원에 대한 선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실현에 대한 선포. 두 번째 악한 것에 대한 단호한 우리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그리고 세 번째 하느님의 다스림 앞에 내가 온전히 순명하고 겸손되이

그 다스림 안에 들어가겠다라는 것. 아까 예수님 추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다라는 것이죠. 요것만 갖추면 의로운 행위예요.

 

* 의로운 행위: 예수님의 삶을 살아 감

 

쉽죠? 뭐 의로운 행위가 구체적으로 딱딱 잡혔습니까? 예, 요게 성도들입니다.

요게 어린양의 피 속에 자기 겉옷을 빠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가 갈망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의 모습에 우리가 분노할 줄 알고,

예, 얼마전에 프랑스에 [분노하라]라는 책이 나왔는데, 요즘 젊은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적은 책이든데 분노할 줄 모르는 젊은 이들이 좀 안타깝다는 내용입니다.  

 

왜 분노를 해야 되는가? 세상 불의에 입을 닫고 자기만을 살펴보는 이런 세대,

개인주의적이고 나아가 이기주의적인 어떤 세상을 비판하는 책이었습니다.

우리가 맞지 않는 것에 분노할 줄 알고, 나아가서 내가 막 잘려서 그것이 아니라

분노는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나의 겸손의 또 다른 표현이 되는 것.

의로운 행위를 우리가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렇게 예수님과 일치해서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이제

뒤에 백마탄 기사로 등장을 하십니다. 이제 19장 후반부 11절부터 한번 우리가

보겠는데요.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이런 신부의 어떤 '몸단장 하는 신부'의

어떤 모습의 의로운 행위로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분께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일까를 한번 보겠습니다.

 

* 묵시 19,11-16: 백마탄 기사(메시아를 상징)의 개입

 

백마탄 기사는 구약 전통에 보면 메시아의 형상입니다.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자,

우리를 구원해 주실 자,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 주실 자, 하느님의 뜻의

실현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 분, 그분의 어떤 개입의 모습이고.

 

* 묵시 19,17-21: 종말적인 전쟁

 

종말론에서 등장하는, 묵시문학에서 등장하는 마지막 때의 어떤 전쟁. 그런데 이

전쟁의 목표는 백마탄 기사가 전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아까 제가

강의 초반부에 말씀드렸던  세상의 권력가들입니다.

 

자기만의 힘을, 자기만의 사치를, 자기만의 탐욕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전쟁의 대상

이지 아까 의로운 행위, 성도들, 하느님 앞에 겸손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 성도들은 여기 이 전쟁의 모습과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복음서에도 그때 왜 마지막 때에 대한 것을 우리가 이 강의 요한 묵시록 강의

초반부에 말씀드렸습니다. 그죠? 막 전쟁이 일어나고, 가족이 가족을 거슬러 일어나고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뭐 이런데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 그날이 바로

어떤 구원의 때이기 때문에. 그거하고 같은 맥락입니다.

 

이 종말론적 전쟁이 지금 17절부터 등장하지마는 이 전쟁은 여러분들께서 성도들

이라면 이 전쟁은 오히려 기뻐해야 될 표징이 된다는 거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

가는 그런 어떤 이기적인 세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관계를 지향한다면,

관계를 지향하는 우리 성도들이라면.

 

자,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말씀, 이게 중요한데. 백마탄 기사 이름이 하느님의 말씀

이라고 합니다.

 

* 묵시 19,13: 그분께서는 또 피에 젓은 옷을 입고 계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러면 떠오르는 대목, 모슨 복음서입니까? 요한 복음서.

*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이 말씀이 로고스입니다. 로고스가 뭐 그리스 말의 인격적이고 뭐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지금 하는 이 말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렇게 표현

합니다마는 어쨌든 말씀이 인격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니까. 이 말씀을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 말씀(로고스): 성실, 참됨, 정의

 

그 말을 타신 분의 이름이 백마탄 기사가 하느님의 말씀인데 그 말을 타신 분은.

* 묵시 19,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흰말이 있었는데,

   그 말을 타신 분은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분을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실과 참됨과 정의. 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자, 요것이 이제 백마탄 기사의

정체성의 문제니까 요것만 머리 속에 딱 넣으시면 됩니다.

 

자, 성실, 참됨, 정의 이 세 가지인데 성실이라는 단어가 어떤 느낌이 듭니까?

꾸준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요것도 약간 그러니까 다른 방면으로 우리가 설명이

돼 버리는데 "열심히 일했구나, 놀지 않고 일했구나." 이렇게 우리 이야기 하는데

이 성실은 믿음의 문제와 연결이 됩니다.

 

그리스 말을 보면 이게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을만 하다는 신뢰의 문제입니다.

성실한 사람 보면 신뢰가 가죠? 성실이라고 번역 했는 것에 대해 좀 그런데

여기에 신뢰의 의마가 들어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백마탄 기사의 청체성의 세 가지 관점이거든요.

 

첫 번째가 성실하다라는 것은 이 백마탄 기사를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백마탄

기사가 참으로 신뢰하고 참으로 내가 의탁할 수 있는 분이라는 거죠. 참으로

그분이 믿을만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라는 분이 이 성실과, 참됨과 정의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는데,

이 성실한 것이 왜 이 백마탄 기사가 성실하고  믿을만한가? 왜 신뢰할만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고

그 뜻만을 위해서 마지막에 십자가상 죽음까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일관되고 성실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을만한 분이죠. 그래서 오리게네스가

이 성실의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설명을 해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믿을만하다.

왜? 그분이 보여주신 삶의 자세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두 번째 참됨. 참되다 그러면 뭡니까? 거짓이 없다. 진실하다. 뭐 이런 의미도

나올 수 있겠죠?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어떤 측면에서 봤나하면 육화의 차원에서

봅니다. 거짓이 없다. 틀림없이 이거다. 틀림없이 이거다라고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이 세상에 육화를 하셨다.

 

예수님의 삶의 어떤 구체적인 모습 자체가 거짓이 없는 거예요. 왜? 역사 안에서

직접 살아가셨기 때문에. 그죠? 그래서 육화의 사건은 예수님이 진짜 있는 그대로,

정말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셨다. 이 이상 우리가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가 참되다.  아까 육화에서 어디서 사셨다고요?

소외받고 힘들어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계층 속에 살아가셨다.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다라는 것이죠.

 

정의는 뭐냐? 아까 불의, 정의, 구원 이야기하면서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뜻으로

봅니다. 그래서 요 세 가지 관점이 백마탄 기사입니다. 요것에 어긋나는 것, 요거와

같지 않는 게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세상 권력입니다. 세상의 권력에는 신뢰가, 믿

음이 안 되요. 자기 것만 원하기 때문에.

 

아니 이건 세상 권력이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치적인

권력도 필요하고 정치적인 힘도 다 필요해요. 그러나 그 군사적인 힘이든, 정치적

인 힘이든 무엇을 지향해야 되는가? 관계를 지향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계속

관계라는 단어를 모리 속에 두십시오. 요한 묵시록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지향하지 않고 자기 것만 챙기게 되고, 자기 이권만을 챙기기

위해서 정치든, 군사든 그 힘을 이용한다면. 우리도 정치인들 보면 자기 배만

불리는 사람보면 우리가 싫어하잖아요. 그래 놓고 투표는 잘 안해 주고. 투표를

잘 해야 되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할려면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되잖아요.

우리도 있다. 우리도 우리 목소리도 있다라는 게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투표

아닙니까? 자기 배만 불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 이건 믿음이 안 갑니다.

신뢰가 안 갑니다. 그죠?

 

그 다음에 참되다. 육화다라는 것은 구체적인 증거, 진실된 삶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권력이 아까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대탕녀 바빌론의 모습에서 봤을

때 그 마지막의 물건 중에 자가가 물건 사듯이 샀는 게 뭡니까? 사람이예요. 사람.

사람을 부리면서 자기는 소위 손가락 까딱 안 하고.

 

복음서에서 바리사이들 욕할 때 "자기는 손가락 까딱하지 않으면서 사람들한테

짐을 다 지워버린다."고 하죠? 그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하지 삶을 부풀리고, 화려

하게 꾸며가는 사람. 세상 권력 그런 규정에 의한 세상 권력을 말합니다. 그거 안

된다는 거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의 뜻, 자기 욕망, 자기 탐욕을

추구하는 세상 권력은 안 된다.

 

요거를 이제 없애는 게 누가 하느냐? 이분이 바로 백마탄 기사고, 이분의 이름이

하느님의 말씀이죠. 하느님의 말씀은 성실, 참됨, 정의. 요 세 가지 차원에서

이렇게 이루어져 간다. 그래서 요 반대되는 개념 요것이 세상 권력을 없애는 모습

으로 등장을 한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력과 마주쳐서 싸우는데 어떻게 됩니까? 어린양이 승리를 해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어린양은 당연히 승리하죠. 왜냐? 임금들의

임금이고, 주님 중의 주님이죠.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으니까. 그거는 우리가

어떨 때 신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문제는 어린양을 추종하는 사람들, 그 성도들도 그 전쟁에 이긴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길까요? 어떻게 이겨야 되겠어요? 전쟁에 이길려면? 어린양처럼 살아야

되죠? 또 이 문제를 언급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양처럼 살아야 되요. 성실하게

살고, 정말로 신뢰를 줄 만큼 그렇게 살고 예수님께서 사셨듯이 삶의 증거를 해야

되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서 늘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이러한 예수님을 추종하는, 어린양을 추종하는 사람도 이런 세상의 어떤 그런 잘못

된 논리 앞에서 살아갈 때 전쟁, 승리하는 것이지요. 이 전쟁은 쉬운 전쟁이 아닙니다.

13장에 나타나느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앞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경배하는데 나는

거기에 붙어서 싸워야 되는데, 전쟁해야 되는데. 그래서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려야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죠?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를 받으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흰말을 탄 백마탄 기사는

옷을 뭐 입고 있습니까?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박해를 받으니까.

 

* 묵시 19,13: 그분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칼로 민족들을 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격렬한

진노의 포도주를 짜는 확을 친히 밟으실 것입니다.

 

우리도 피에 젖은 옷을 입을 수 밖에 없어요. 증거하려고 그러면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행복하십시오.

괜히 세상 권력에 붙어서 길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 뭐 요즘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70년생 이상은 100세까지 산다던데.

 

뭐 성경도 바꿔야 되겠습니다. ^*~~~ 길어야 100년, 근력이 좋아야 120년.^^*~~

여기(세상 권력)에 붙어서 사시지 마시고. 여기(성실, 참됨, 정의)에 살려면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 성도들이 인내와 신앙이 필요하죠. 요한 묵시록은 맞서서 싸울 승리자

를 원하는 것이지 세상과 타협해 가지고 그렇게 막 세상 논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렬를 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 어렵고

힘든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이제 이제 나타나는 피에 젖은 옷. 저렇게 부딪쳐서 전쟁하시는 분,

백마탄 기사 되게 약간 폭력적이다. 무섭다라고 그러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

어떻게 등장하십니까? 자비하시고 오는 어린이들 다 맞아 주시고,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셔서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시려고 그러고. 그런 예수님 만나다가 이거 백마탄

기사 여기는 입에서 칼 같은 말씀 나오고 다 없앨라고 그러고.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오게 왜 군사적이고 어떤 폭력적인 모습이 왜 등장할까? 결론과 같은데요.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지마는 누구에게는 슬픔이 되고 불행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거죠. 내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고, 어렵지만 꿋꿋이 살아갈 때는 예수님은 나에게 자비 그 자체,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폭력적이고 되게

무서운 심판관의 모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논리가 어디에 등장하냐

하면, 마태오 복음 11장 20절에서 24절에 등장합니다.

 

* 마태 11,20-24: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

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다

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무서운 말씀을 복음서에서도 하십니다. 왜? 회개하지 않으니까.

* 회개해야 하느님이 자비롭고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이 정말 우리의 친근한

벗이 되는 것이지 그분의 뜻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이시고

평화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호도하고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실, 참됨, 정의 이 안에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 자체이시다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예고: 제 25강 천상 예루살렘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