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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5강 천상 예루살렘1

윤 베드로 2016. 8. 29. 11:15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5강 천상 예루살렘1

 

+찬미 예수님

예, 오늘부터 우리가 요한 묵시록 마지막 장면인 천상 예루살렘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 여기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끝날

때가 다 되었어요. 이제 오늘 이 시간 그리고 다음 주에 또 한시간 이렇게 두 시간 동안

천상 예루살렘에 대해서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과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자면 천상 예루살렘은 가능하지 않은,

있을 수 없는, 현실적으로, 인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는 우리가 흔히 종말, 휴거, 재림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조금 이렇게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미래에 곧 닥친다. 이런 식으로 겁을 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도시를 이해하시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 천상 예루살렘: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인 일치(친밀한 관계)를 다르게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

 

그래서 우리가 묵시문학 할 때 어떤 상징에 대한 개념들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예루살렘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빗대어서 말하는 하나의

상징이지 그 자체 그 도시가 생겨난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 속에 넣어

두시고 무슨 상징, 무엇을 빗대어서인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빗대어서.

 

그런데 사실 우리 지난 시간까지 악마의 어떤, 악의 무너짐, 파멸 이것을 봤습니다.

특별히 악마의 어떤 점? 뭐 악마 그러면 대바빌론, 거기에 로마를 지칭한다고 그랬

씁니다. 로마의 어떤 점을 우리가 이런 거는 안 좋은 모습이라고 요한 묵시록 저자가

바라봤습니까? 아, 로마는 이래서 안 된다는 어떤 점?

 

많은 물건들이 로마로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재화들이 로마의 귀족과 부자들의

소위 쉽게 얘기해서 배를 불리는데 사용됐는.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로마로 집중시키는. 그래서 제가 어떤 재화의 집중화, 편중,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악의 어떤 근원을 요한 묵시록 저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봤다라고

18장을 분석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돈이라는 것은 세상 살아가면서 이 재화라는 것은 그것이 우리

신자된 도리로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나누어서 공유하는 그런 개념

으로 우리가 조금 재화에 대해서 바라봐야 되겠다. "내가 내 돈 벌어서 내가 쓰는데

니가 왜?" 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보듯이 그것이 악적인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푼 벌면 세상 누군가는 한 푼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돈이라는 거는

그래서 우리가 공유개념으로 서로가 내가 버는만큼 누군가는 또 부족한 사람이 있다

라는 그런 생각을 해야 우리가 또 부족한데 관심을 기울일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

이 됩니다.

 

그래서 이 악마의 세력이 사실 파멸했다, 멸망했다, 멸망했다, 바빌론이 무너졌다라고

그렇게 외치지마는 사실 로마가 무너졌습니까? 아니거든요. 현실적으로.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이 왔습니까? 안 왔거든요. 현실적으로.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 관점이 정말로 아, 저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마음을 다시 다잡아서 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라며 내 마음이 바꾸면 똑같은

현실이라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다면 새롭게 보이는 거죠. 그 새롭게 보이는 것 

때문에 천상 예루살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요한 묵시록의 표현대로 할께요.  첫 번째 죽음이

끝나고 두 번째 죽음을 우리가 맞지 않고, 두 번째 죽음조차 죽어버리면 제가 뭐라고

그랬죠? 첫 번째 죽음을 육적인 죽음이고 두 번째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했죠?

두 번째 죽음은 우리가 맞지 않고, 부활을 체험하고 경험한다면 이 세상은 현실적

으로 똑같애도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갔을 때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새 세상이 된다

라는 것이죠. 그거는 조금 있다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현실을 나는 다른 현실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뭐 쉽게 이야기해

가지고 세례 전과 세례 후의 모습에서 세례 전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마는 세례 후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가자는 결심 안에서 이렇게 새 세상을 살아간다라고 표현

하는 것. 같은 어떤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 재미있는 게 얼마전에 제 동기 신부가 성당 빚을 갚는다고, 성당을

지어 가지고. 뭐 지은 것도 그렇게 멋있게 지은 게 아니라 돈이 없느니까 가건물이라고

그럽니가? 판넬로 이렇게 지었는데 그 돈 마련한다고 신자분들하고 바자회를 열었어요.

바자회를 열었는데 바자회를 가니까 강아지를 파는 거예요. ^^*~~~

 

엄마는 순종인데 그 적어 놓은 게 재미있습니다. 아빠는 누군지 모르겠어요라고 ^^*~

삽살개, 진도개, 또 뭐 한마리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일 가능성이 크다. 못 믿죠?

엄마가 잠시 어디 나갔는지 아빠가 들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강아지가

있길래 총회장님한테 "삽시다." 그랬어요. 3만원 밖에 안 하는 거예요. 생명을 돈으로

한다는 그 자체가 조금 그때 기분이 그랬습니다마는 샀어요.

 

사가지고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제관과 성당이 산 중턱에

있습니다. 마을에서 조금 올라가야 되는 거죠. 사실 올라갈 때마다 겁이 나요.

왜 그러냐 하면 사제관 창문 옆에 바로 무덤이 있거든요. 산이니까. 사제관이 이렇게

산쪽에 있으니까 비가 부술부술 어거나 안개가 쭈욱 끼는 날에는 올라가면, 수녀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저녁에 강의 마치고 가끔씩 들어갈 때 보면, 아, 섬짓할 때가

있습니다. 바람이 확 불고 이러면.^^*~~~

 

그런데 이제 강아지를 갖다 놓은 거예요. 며칠 전부터 강아지를 갖다 놓으니까 바로

옆에 무덤이 있는데도 차 세워 놓고 강아지하고 잔난친다고 제가. 하나의 생명이

있다라는 거 자체가 같은 건물이고 같은 장소인데 내가 다가서는 이 마음 자체가

이제 바뀐 거죠. 빨리 강아지 보고 싶다.

 

그리고 아침에 강아지가 좀 일찍 깨더라고요. 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그래서 조금 더

자고 싶은데도 밥 줘야 되잖아요. ^^*~~~ 밥을 줘야 되니까 일찍 일어나게 되고 밥을

주다 보니까 너무 반가워하니까 도 데리고 산책도 이렇게 하게 되고 생활이 바뀌는

거예요. 같은 어떤 집인데도.

 

이제는 집에 빨리 가고 싶어요. 지금도 집에 가고 싶어요. 저는 지금 이 방송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오는 강아지 밥은 어떻하나? ^^*~~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제 밥도 제가 이렇게 해 먹기 때문에 제 밥도 걱정이 되는데

강아지도 있으니까...

 

그래도 같이 뭔가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라는 것 자체가 아주 기쁘게 그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어떤 의미에서 하찮은 강아지의 어떤 모습에서도 우리

삶이 바뀔 수 있는데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선다면 이

세상 통째로 온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가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21,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자, 이 표현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세상이 지금 새하늘 새 땅이 왔어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태초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 때,

창세 1,1에 나타나는 것.

 

* 창세 1,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 하늘과 그 땅이 없어져버렸는가? 이 문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럽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거나 혹은 정말로 이 세상 끝날 때 보면 이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져

가지고 지금 세상 살아가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새로운 뭔가 와가지고 새 세상이

펼쳐져요. 이거는 유다이즘에서 메시아 사상도 아주 일맥 상통합니다.

완전히 이 세상의 이 세상 현실적인 거 이거 없어져야 되요. 메시아가 오면 싹 없어

지고 정말 정의와 평화가 정말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모든 것이 와야 되는 거예요.

 

이러한 유다이즘 안에서 메시아 사상이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것도 새 하늘 새 땅,

헌 하늘 헌 땅, 옛 하늘 옛 땅은 없어져야 된다고.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게

없어지면 이게 모순인 거죠.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고 지금 내 눈에 우리 현실적

감당이 안 된다고 이거 없어져야 된다고 바라는 것. 이거는 하느님의 어떤 섭리를

무시하고 없애는 것이겠죠. 

 

그래서 우리가 이 문장을 잘 이해하셔야 하는 게 저번에 제가  이 요한 묵시록 강의

중반에 제가 한번 설명해 드렸습니다. 설명해 드렸는데 여기서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요 문장에 사라진다라는 번역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고칠까 합니다.

 

이 '가다'라는 동사입니다. 어디 내가 가다. 어디어디 갑니다. 그러니까 이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리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내 눈 앞에서 어디 간거예요. 그러니까

있어요. 그러나 있다는 말이죠. 우리 22장에 보면 완전히 불의와 이런 역겨운 짓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천상 예루살렘 이 거룩한 도성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현실적인 어떤 요한 묵시록 저자가 바라봤을 때 안 좋은 것들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옛 하늘 옛 땅은 그대로 있어요. 다만 내가 보기에 "나는 또 새하늘 새땅을

보았습니다." 그러죠? 내가 보기에 새 하늘 새 땅인데 옛 하늘과 옛 땅은 내가

보기에는 없는 거예요. 없어진 게 아니라 내 눈 앞에서 없는 거예요.

 

자 관점의 변화입니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세상을. 지금 요한이 새 하늘

새 땅을 보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성도들과 한 무리를 이루고 또 파트모스 섬에 가서 유배를 당하면서 그 안에서

어떤 교회와 일치 안에서, 또 우리 수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온전힌 믿음으로  있기 때문에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현실을 이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겠다라를 그런 대목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에 뭔가 신천지가 펼쳐지는 그런 끝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도

이 자리에서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뭔가 새 것을 던져주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바라보는 거예요. 우리 방송하는 이 자리에서도 늘

우리가 앉아서 같이 있지마는 새로운 마음으로 본다면 모두 새롭게 보이는 거예요.

새 하늘 새 땅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제 제발 이 현실을 하느님

뜻 안에서 바라보도록 하자라는 초대의 말과 같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습니다. 옛날에 바라보던

구태의연하고 현실에 이렇게 굴복했고, 그 안에서 이렇게 현실의 어떤 권력,

특별히 로마의 힘, 정치, 경제, 뭐 군사적인 힘에 억눌려 있었던 것에서 자유롭게

좀 이런 세상의 억압 속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새롭게 바라보자.

그래서 새 하늘 새 땅이 왔다.

 

우리 12장부터 시작된 것이 해답이, 결론이 이제 여기 있습니다.

12장에 뭐가 나왔습니까? 12장에 용이 나왔어요. 용. 그 미카엘 천사와 싸웠습니다.

자, 이 구조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 묵시록 12장까지 요약: 어린양이 봉인을 뜯고 그의 백성들은 현실 안에서 참고

   견디면 구원을 얻는다.

 

12장까지 그 앞의 이야기는 어린양이 봉인을 뜯어서 현신을 이렇다라고 보여 주시고

이러한 현실 안에서 너희들이 참고 견디면 7장에서 빨마 가지를 흔들면서 구원을 외칠

수 있다. 이 안에서 정말 그 구원이라는 것은 현실을 떠나서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힘들더라도 굳건히 인내하고 믿음을 가지면 그것이 구원의 자리다라고 설명을 해오

면서. 자, 너희들도 이제 구원의 자리 이제 알았지라고 12장부터는 이제 보여주시는

거예요. 구원의 자리를 너희들 알았으니까 이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 묵시록 12장 ㅡ 18장: 구원을 지키가 위해서 맞서야 되는 악의 세력을 보여준다.

 

내가 직접 그 구원의 어디에 맞서 싸워 지켜야 되는지 한번 그 대상, 맞서야 되는 세력,

악의 세력을 12장부터 보여주겠다 해서 18장까지 쭉 나오는 게 바빌론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간단하게 한번 보자면, 12장 용은 악의 근원이겠죠? 뭔지 모르

겠어요. 정말 악의 근원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게 뭔지 모르니까 요한 묵시록이 구체적

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용이 바다의 모래에 떨여져서 떨어진 것이 바다에서 올라

오는 짐승, 땅에서 올라오는 짐스응로 고대로 용의 어떤 권한을 받습니다. 요 두 가지

를 뭐라고 그랬습니까?

 

*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정치, 군사적인 로마의 힘

* 두 번째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종교적인 로마의 힘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용의 권한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요 두 짐승이 가보니까 결국에는 뭐냐? 대바빌론, 로마를 지칭하는 어떤

상징이었다. 지난 시간에 봤듯이 로마의 어떤 종교적인 악습들 그런 것들이 바로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악의 어떤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요게 무너졌다.

 

그럼 너희들 이제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의 문제를 우리

에게 이제 천상 예루살렘 안에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악의 패배를 결국에는 구원

된 자로서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악을 충분히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 묵시록은 절대 뭐 우리 19장에 백마탄 기사가 나타나서 하셨지마는

절대로 우리 대신 우리의 관점을 멋대로 당신이 바꿔 가지고 "이제 앞으로 너희들

이렇게 봐!" 라고 한 게 없고, 악의 근원을 이길 수 있는 그 어떤 자세는 우리에게 있

다는 것입니다.

 

그 모델을 백마탄 기사,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어떤 행위가 곧 우리에게 당신이 멋대로 하기 위한 하나의 힘이, 권력이

아니었다는 거죠.  우리 역시 그분의 삶 안에 동참을 할 때 우리가 악의 근원을 바라

보면서 우리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가만히 있고 당신이 다 알아서

하세요.

 

우리 고해성사 보통 어르신들 하시면 "사는 게 죄입니다. 두루두루 사해 주이소."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당신 다 알아서 해 주세요." 이런 자세가 아니라

우리가 어린양의 피 안에서 겉옷을 빨아야 되요. 빨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 시작에서

새 하늘 새 땅이라는 것은 나의 능동적인 참여가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된다.

 

* 새 하늘과 새 땅(묵시록 21장)에는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거기 참여하지 못하면 천상 예루살렘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라는 나의 어떤

자세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예, 그래서 이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이 새롭다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우리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되겠

습니다. 숩게 이야기해서 새롭다는 것은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적 해석의 대상

으로 내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새롭다(묵시록 21장)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적 해석의 세상으로 들어 가는 것

 

신앙적으로 내가 받아들일 때 이거 제가 몇번 강조했던 것입니다. 같은 사건 현상을

보더라도 신앙적으로 내가 해석을 하느냐? 아니면 사회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해석

을 하느냐에 따라서 분명히 많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새롭다는 단어를 제가 그리스 말을 가르쳐 드렸었어요. 그전에. 여기 지금 새 하늘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뭐 거룩한 도성에서 새롭다라는 이 형용사가 많이 사용

됩니다. 이 단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제가 설명해 드렸습니다.

 

여기서 쓰인 새롭다라는 것은 첫 번째 우리가 흔히들 아는 새로움, 새 물건, 저번에

신상이라고 했는데 신상품, 백화점에 신상 이런 개념의 새롭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석의 새로움입니다. '네오스'라는 용어의 영어의 '뉴' 뭐 차가 새로 나와도

뉴 뭐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뉴의 개념의 '네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카이노스'라는 신앙적 해석적 어떠한 대상에 대한 그것을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 가치 부여를 했을 때 새로운 것입니다.

 

되게 헌 건데, 성경을 두고 헌거라고 해서 그렇습니다만 새롭게 산 성경이 아닌데,

날마다 아침에 펴서 읽어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면 이게 새로운 거예요. 새것이예요.

그래서 이러한 성경이라고 했을 때 "뭐야, 다 낡았고 줄도 막 그어져 있고 그런데 이게

무슨 새로운 성경이냐?"라고 말씀을 하시겠지마는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죠.

여기 새 하늘 새 땅도 고런 단어가 사용됐다라는 것. 우리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자,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상 예루살렘 한번 나왔으니까

한번 묘사가 됐다고 생각하지 쉽지마는 천상 예루살렘에서 두 부분으로 묘사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아마도 첫 번째 그 어떤 천상 예루살렘이 더 보충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넣었을 것이다라고, 후대에 편집 되었을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뭐 편집 과정까지 다 공부하기는 그러니까 한번 두 가지로 어떻게 관점이

차이가 있는지 한 가지 천상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가 21장 1절에서 8절까지 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21장 9절에서 27절

까지의 구 가지 구분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두 가지 구조가

똑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형식이냐 보시면, 처음에 천상의 묘사를

합니다. 이 천상이 어떤 건가? 한번 내용을 볼까요? 

 

천상 예루살렘 21장 1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뭐냐하면, 아, 새로운 하늘이 이제 펼쳐지고 새로운 땅인 신천지가 펼쳐

지면서 거기에 옛 것은 없다라고 이렇게 방금 제가 설명 드렸던 부분이죠?

 

바다가 없다라는 거는 뭡니까? 바다는 전통적으로 유다이즘 안에서 하느님이 없는

무질서한 죄악의 근원 이런 의미가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다라는 천상 예루살렘 장면 묘사가 있구요.

 

두 번째가 뭐냐하면 거룩한 도시에 대한 묘사입니다. 거룩한 도시는 천상 예루살렘

이죠? 거룩한 도시가 있는데 첫 번째 21장 1절에서 8절까지의 거룩한 도시의 모습을

보면요. 어좌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21장 3절을 보면요.

 

*  묵시 21,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느님의 어좌, 성부 하느님이 앉아 계신 어좌에서

직접적인 목소리가 들려요. 이전까지의 어떤 목소리들을 한번 보십시오. 큰 천사가

나타나서 뭔가 대리로 하는 목소리들이었다면 지금은 바로 어좌에서 직접적으로.

 

 

그러니까 이 거룩한 도시는 이제 아까 제가 처음 시작하면서 뭐라고 했냐하면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직접 일치의 어떤 모습을 전해준다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이제 어좌에서 직접 내려오는 거예요. 직접 내려오는데

 

* 묵시 21,3: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거쳐" 요 단어 아주 중요합니다. 요한계 문헌에서 아주 중요

합니다. 자, 이거 요한 복음으로 한번 가 볼까요? 요한 복음으로 한번 가보면,

자, 요한 복음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 뭐겠습니까? 우리 요한 복음 시작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예, 이 말씀은 하느님이셨고 하느님은 태초에 계셨고. 이게 요한 복음 1장의 하나의

시인데, 시로 표현된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 고 문장과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임마누엘이예요. 임마누엘.

 

그러니까 지금 천상 예루살렘의 거룩한 도시에 대한 묘사를 하는데 그 정체성이

뭐냐? 하느님의 거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너무 명확한 답이 여기 나오는 거예요.

 

지금 예컨대 여러분들이 자꾸 제가 강조하는 건 관점의 변화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느님하고 같이 함께 계십니까? 하느님과 계시죠? 함께. 종교가 자꾸 세뇌를

시키면 안 되는데 ^^*~~~ 마음으로 우러나와야 되는데 그죠?

 

저는 솔직하게 하느님이 계시는 거 같기도 하다가 안 계시는 거 같기도 하다가 뭐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바뀌었다가 ^^*~~~ 그렇습니다. 안 되니까 맨날 성체

조배하고 앉아 있어야 되는데. 세뇌 당하지 마시고 마음이 동화되셔야 되요.

종교, 뭐 제도 종교에서 혹은 우리 염경기도 하면서 계속 나의 머리 속에 주입을

할려고 하는 그런 신앙은 하느님께서는 원치 않습니다.

 

맨날 주님, 주님, 주님 외쳐봐야 "난 니 누군지 모른다." 하실꺼예요. 아마 그러면.

그래서 내가 마음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하느님의 거처에 함께 있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렇게 되면 천상 예루살렘 자체도 하느님과의 긴밀한 일치

속에서 살아간다면 지금 여러분은 천상 예루살렘 안에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뭐가 와가지고 자꾸 뭐 하느님이 뭔가 해 주시를 바라면서, 해 줘야 내가 뭐

구원 받은지 아닌지 알지라는 그런 개념으로 요한 묵시록은 적은 게 아니라는 것이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내가 지금 그렇게 느낀다면 천상 예루살렘의 일원으로

내가 거기 들어가 있는 것이죠.

 

* 묵시 21,3-4: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우리 동사의 시제를 잠시만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있다'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현재죠?

그런데 뒤에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미래죠?

 

자, 여기서 이제 동사 시제에 대해서 한번 간단하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지금 하느님과 함께 있어요. 아까 분명 계신다고 했어요. 하느님과 일치하고 계신다고

그러셨어요. 거짓말 아니지죠? **^~~ 그런데 우리 눈에 슬픔이 없고, 괴로움이 없고

세상 사는 뭐 힘든 거 없습니까? 있죠?

 

예,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떨쳐 버리자는 거죠.

하느님의 구원은, 하느님의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인간적인 모든 괴로움과

이런 현실적인 게 다 없어진 정말로 인간적으로 편하고, 좋고, 행복하고, 사랑 그

자체고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어진 인간 삶

전체가 하느님의 나라에 다 있는 요소들이라는 거죠.

 

이 눈물이 없어지고 울부짖음도 없고 이거는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세상 정말로

종말 때, 그때가 되면 하느님과 정말 영원히 일치되어 있을지. 그 때가 언제인지 그

시간은 우리가 모릅니다. 그죠? 모르지만 그 때가 되면 그런 세상이 오겠지요.

 

*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구원과 일치를 느끼는 이 순간이 정말 하느님

의 사랑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이 자체가 '천상 예루살렘'이고 거기에 느끼는 슬픔과

눈물이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그것이 하느님과 일치 자체가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만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가끔씩 주일 미사 할 때마다 신자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늘 합니다.

일주일 동안 있었던 괴로움과 슬픔, 어떤 어려움들 예수님께 다 얘기하고 속으로

정말 욕을 하던지,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소통이고 일치거든요.

예수님 앞에서 거룩하게 난 깨끗한 척 내가 예수님 앞에 욕 한마디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 가식적으로 그렇게 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성당에서는 거룩한 척 하지만 밖에 나가 운전대만 잡으면 십원짜리가 입에서 튀어

나올 수 있는 게 우리인데 그런 현실을 왜 예수님 앞에, 하느님 앞에 왜 있는 그대로

말 못합니까? 기도한다고 해서 좋은 말만 머리 속에 되뇌이는 것. 이것도 보면 제가

보기에 이거를 광신입니다.

 

나의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괜히 아, 성당에서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이것도 별로 신앙에 유익한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여기보면 동사의 시제가 이미 시작되었어요. 시작되었지마는 그 완성에 대해

서는 우리를 냅두세요. 그건 하느님께서 주실꺼예요. 언제 하느님께서 꼭 이루어 주실

꺼예요.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인데, 우리 삶의 어떤 것은 제껴

놓고 어떤 것만 하느님께 이렇게 한다는 거. 이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죠?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의 안에 들어와 있고, 모든 것을 다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

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거처. 있는 그대로 다 봉헌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기서 이제 해야 되는 것이 뭐냐하면 에제키엘서를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가 어디 있는가?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성전. 어제키엘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바빌론 유배를 가서 그 어떤 예언을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거든요.

 

*  이 하느님의 거처는 어디 있느냐? 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굳이 예루살렘의 성전의

    번듯한 건물 앞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거처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정말 내 마음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그런 삶의 자세에 있는 그 사람 자체

    가 성전(하느님의 거처)입니다.

 

사로 바오로 식으로 표현하면, 내 안이 성령의 궁전인 거예요. 나는 거룩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누구든 봐도 사람들 내가 밉다고 해가지고 막 이렇게 좀 해꼬지 하고 싶고, 저

사람  없어졌으면 좋겠고 이러한. 그러면 그게 신성모독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도 그러지마는요. ^^*~~ 바로 앞에서 좀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아유, 왜 저러나?"

이런 속으로 생각도 해 보고, 정말 나의 정체성으로 저 사람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뭐 이런 게 저도 많이 이야기 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을 바라볼 때 마음 속에 가져야 될 것은 그 사람 역시 하느님의

거쳐가 될 수 있다는 것. 제가 요것 살짝 비교를 해 볼께요. 이사야서를 보면요.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미사 시간에도 하는 게 있어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세 번 거룩하시다 나오는 게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어떤 현존 모습입니다. 너무 거룩해요.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 함부로

할 수도 없어요.

 

자, 에제키엘서 하느님은 내 안에 있다. 나의 삶 그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약간

구별이 되죠? 예언서도 그래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도 다양한 측면에서 강조점이 다르

니까 우리 그 관점에 따라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거는 여기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이 하느님의 거처는 내가 슬프거나

내가 힘들거나 어쨌든 간에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온전히 일치 시키는 그런 모습

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너무 거룩하게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마시고

내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껴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요렇게 살아갈 때, 살아간다면 마지막으로 여기서 또 말하는 것이 악에 대한 경고

입니다. 자, 아까 새 하늘 새 땅이 왔다고 해서 옛 하늘과 옛 땅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천상 예루살렘이

원하는데 하느님의 거처 안에서.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악은 도대체 뭔가?

거기에 대한 경고가 있는 것인데 악에 대한 경고는 21장 8절에 있습니다.

 

* 묵시 21,8(악에 대한 경고):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

   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두 번째 죽음은 영성적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영성 곧 신앙마저 다 죽어버리는.

그것은 어떤 일 때문에 죽는가? 여기 나옵니다.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이 바로

역겹고 자신을 더럽히고, 살인자고, 불륜이고, 마술쟁이고, 우상숭배자거든요.

 

자, 그래서 이 큰 제목이 이러한 악이라고 생각하는 천상 예루살렘 지금 묘사에서

악이라고 생각하는 그 큰 제목이 뭐냐하면 제목이 비겁하고 불충한 자들입니다.

이 비겁하다니까 감이 팍 안 오는데 겁나서 막 이렇게 피하고 있는 상태 같은데

요 비겁하다는 단어가 어디에 또 사용되느냐 하면,

 

마태오 복음을 딱 보면요. 이 장면 아실 꺼예요. 제자들이 배 속에서 무서워서 떨고

있어요. 왜? 무엇 때문에? 풍랑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뭐하고 계세요? 주무시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막 깨우잖아요. 난리 났다고. 지금 이 판에 당신께서 주무시고

계시면 되냐고 막 흔들어 깨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바람을 꾸짖으시죠?

 

왜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왜 무서워 떨고 있느냐?" 겁나는 거예요.

겁나는 거. 이 비겁하다는 것은 고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비겁

하다는 것은

 

* 비겁하다(묵시 21,8): 예수님을 옆에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겁을

   내는 것

 

굳이 겁이 안 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보다 세상적인 것이 더 예수님의 가치보다,

"아, 뭐 이래 살지 뭐." 하고 넘어가는 것. 이게 비겁한 겁니다. 그런데 불충한 것은

똑같죠. 예수님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충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깊은

신뢰가 없기 때문에 이쪽에 신뢰가 더 끌리는 거예요. 세상적인 것에.

 

그런 것들이 뭐냐하면 뒷부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입니다. 역겨운 것, 자신을 더럽

히고, 살인, 불륜, 마술쟁이, 우상숭배. 이러한 것들이 악의 근원입니다. 쉽게 표현해

가지고 한 마디로 예수님께 믿음을 두느냐? 두지 않는 것들. 나아가서 우상숭배까지

나아가는 이런 것들이 바로 천상 예루살렘에서 말하는 악에 대한 경고.

 

하느님의 거처와 연결해서 바라보자면, 거처에서는 하느님과 일치라고 그랬습니다.

그분과 어찌 되었든 내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함께 생각하는. 악에 대한 경고는 그분

께 있지 않는 것. 불신이죠.

 

예, 첫 번째 천상 예루살렘의 구조  천상의 장면이 묘사되었고요. 새 하늘 새 땅이

등장했고, 거룩한 도시에 대한 묘사, 그 다음에 악에 대한 경고. 이 세 단계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가 반복됩니다. 두 번째를 한번 살펴 보자면,

천상의 묘사가 21,9-10에 나타납니다.

 

* 묵시 21,9: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자, 첫 번째 천상 장면 묘사에서 여기 중요한 단어가 어린양의 신부입니다.

자, 신부가 어디서 내려오는지 보십시오.

 

* 묵시 21,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였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자, 이것(어린양)이 하느님

으로부터 내려옵니다. 아까 산 위에서 그 거룩한 도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이럴 때

누가 이것을 묘사했습니까?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그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지금 이 두 번째 것도 천상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어린양이 신부를 소개

하는데 어디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우리 신부라는 개념은 너무 전통적으로 너무 잘 압니다. 그죠?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약 유다이즘 전통이 하느님 백성을 지칭히는 신부. 하느님 신랑, 신부로. 우리 신약

안에서는 신랑은 누구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제 어린양의 신부,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천상 장면이 묘사 됐고요.

 

 

 

두 번째 보면 이제 거룩한 도시에 대한 묘사가 21장 12절 그리고 14절

요렇게만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21,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

   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 묵시 21,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보면, 열두 개의 문에 대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12라는 숫자가

딱 등장을 하면 예,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것이 12는 어떤 뜻이예요? 예, 열두 지파.

열두 지파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으로 바껴 나가죠. 서서히.

 

하느님 백성이라는 게 이스라엘 사람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12라는

숫자는 보편적인 하느님 백성. 이 세상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숫자가 12.

열두 개의 문이 동서남북으로 다 펼쳐져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모든 하느님의

백성으로 동서남북 세상으로 모든 사람을 모여오겠다.

 

 

 

뒷부분에 가면 천상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하거든요. 이게 보편적 구원을 지칭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열두 문에 어떻게 돼 있냐하면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자손들이죠? 그런데 이것만 있다면 저 요한 묵시록 공부 안

했을 거예요. 화가 나가지고. 이스라엘 사람 자기들끼리만 뭐 좋은데 갑니까?

그래서 열두 지파만 있었다면 안 했을텐데 그런데 뒷부분에 보면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 묵시 21,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거룩한 도시 묘사가 보십시오.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가 같이 문과 열결되어 있습니다.

보편적 구원이라는 12문이 열려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인 그리

스도인을 대표하는 열두 사도 이름이 다 거기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문의 초석이 뒷부분 가면 나타나겠습니다만 초석이 어디서 보이냐 하면,

어린양입니다. 초석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때 제가 잠시 말씀을 드렸죠? 화운데이션

이라고. 그죠? 그 단어 자체가 화운데이션이라는 겁니다. 기초 화장 맞죠?

 

저도 이 방송한다고 오늘 이 뭐 바릅니까? 물어보면 화운데이션이라고 그런데 이

무슨 성분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얼굴에 뭐 바르는 거 있지요? 우리 자매님들.

그 단어가 그대로 어린양의 그 문에 화운데이션인 거예요.

 

그 위에 열두 사도. 열두지파 이렇게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이제 어린양 때문에 이분으로 인하여 보편적인 하느님의 거처로 들어올 수 있다라를

것이죠. 그래서 이 두 번째 묘사에서는 강조점이 어린양이 출발점이 되고 기초가 됩니다.

 

자, 첫 번째에서는 뭡니까? 하느님 그죠? 하느님의 어떤 중심이 되는.

그리고 두 번째는 어린양이 중심이 되는. 자, 하나의 천상 예루살렘을 보고 성부

하느님의 입장에서, 두 번째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하는 거죠.

 

요 구조를 우리가 똑같은 구조를 한번 봤습니다. 어디서 봤냐하면 4장, 5장에서

우리가 봤었어요. 4장은 하늘이 이제 처음 열려가지고 요한이 하늘을 보는 거지요.

보게 되는데 그때 이제 어좌가 있고 그 옆에 네 생물이 있고 스물네 원로가 있고.

 

* 묵시 4,4: 그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 묵시 4,6: 또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에제키엘서의 하느님의 현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신비적인 동물

이예요. 이것은 구체적인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느님의 현존을

꾸미기 위한 도구고.

 

* 네 생물(묵시 4,6): 하느님의 현존을 꾸미기 위한 도구

   (사자, 황소, 사람같은 얼굴, 독수리)

 

스물네 원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했습니다.

* 원로 스물네 명(묵시 4,4): 1) 다윗 시대의 성전 성가대  2) 열두 지파 + 열두 사도

 

첫 번째는 다윗 시절에 성전에서 소위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성가대예요.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에서 노래 불러주고 이러는 성가대.

 

두 번째 관점은 열두 지파 + 열두 사도. 그래서 24다. 뭐 이런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성부 하느님의 현존을 막 노래하는 그런 게 있었고 5장에 어린양이, 5장 6절

에 살해 되었으나 서 있다라고 해 가지고 등장하는그 인물.

 

* 묵시 5,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 중심으로 이분이 당신 피로 세상 모든 사람을, 모든

언어와 백성과 민족과 나라로부터 사람을 구해서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그런.

성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5장이 쓰여졌다. 같은 논리죠. 같은 천상

예루살렘인데 하느님의 거쳐, 어린양 중심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자, 마지막에 이거 두 번째 부분에서도 악에 대한 경고가 제일 뒤에 가면 또 나타납

니다. 22장 15절로 가겠는데요. 두 번째가 27절까지 있지마는 악에 대한 경고 이거는

저 뒷편에 나타나는데 22장 15절에 보면 어떻게 돼 있습니까? 

 

* 묵시 22,15: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

   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

 

아까 앞의 경고와 같죠? 그런데 여기 개가 등장합니다. 개가. 방송 시작 하면서

강아지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제 강아지는 예뻐 죽겠어요. ^^*~~ 예뻐 죽겠는데

여기에 나오는 개들은 우리 왜 사도 바오로가 "저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럽니다.

제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을 저는 진짜 일상 용어로 한번 번역해

보고 싶어요. 정말 그 그리스 말의 느끼는 뉘앙스 그대로.

 

예, 그 개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개~~ 삐삐 하는 욕있지요?^^*~~~

그거와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개들을 조심하십시오."라고 이렇게 해

놓으니까 뭔가 이렇게 비판만 하는 느낌이지만 그건 욕이었어요.

 

예컨대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더러 "사탄아, 물러가라."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욕

입니다. 그냥 "사탄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완전히 실행활에서 팍팍

감정이 오는 그런 욕을 했는데 이 개라는 것도 뭐냐?

 

결국에는 사도 바오로의 관점에서는 문자에 얽매여서 진짜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 문자에 있는 것도 비록 율법을 뭐 지킨다고 하지만 율법

자체가 우상이 돼 버리는 그런거죠. 하느님과의 관계는 잊어버고. 그럼 개죠.

 

여기도 개들과 이렇게 개들과 마술쟁이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뭐냐? 하느님과 일치

하는, 만나는 것을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막 이렇게 살아가는. 그것을 이제 개들이라

고 합니다. 이 악에 대한 경고는 여기 불신과 같은 거죠. 관계의 단절이죠.

 

 

그래서 이 세 가지 관점, 관계 단절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악에 대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체적인 구조만을 이렇게 보고 이야기 됐는데 뭐 쉽습니다.

천상 예루살렘 뒤에 세부적으로 뭔가 이야기가 쭉 됩니다. 뭐가 어떤 이것은 왜

이렇게 했고, 왜 이런 보석들이 왜 이렇게 치장됐고. 그거는 우리가 다음 시간에

한번 살펴 보겠고요.

 

그런데 이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될 것은 예수님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인 우리, 또 그리스도인 이 모두가 어떤 관계 안에서 일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천상 예루살렘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그런 내용이다. 이 정도로

우리가 좀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창기에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이 천상 예루살렘의 두 가지 관점을

한 가지로 표현하자면요. 프랑스에서 공부했으니까 불어로. 이거는 우리 성당의

할머니들도 다 아세요. 이제. 국문 안 깨친 할머니들도 다 아세요. '앙상블' 이예요.

'앙상블', '닮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거처는 그 안에서 내가 너와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 왜 연주회 가면 앙상블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 앙상블(Ensemble)이란 그 안에서 내가 정말 긴밀한 일치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 이것이 천상 예루살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미래에 펼쳐질 어떤

   사건이 와서 새로운 신천지가 펼쳐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발 그래서 외부에 뭔가 이런 어떤 휴거설이나 이런 것들. 뭐 종말이 오면 이렇게

뭐가 온다라는. 온다고 했던 것들 대부분 보면 되게 인간적인 어떤 관점에서 묘사가

되고 있어요. 구름을 타고 뭐가 와가지고 뭐 한다는데 그거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고요.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땅 위에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간다면

우리는 분명히 천상 예루살렘에 앙상블, 곧 하느님과 앙상블이라고, 음악회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관점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게 천상 예루살렘의 구조를

본 어떤 답이겠고요. 이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은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쭈욱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마는 지금 마지막 정리하면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대바빌론과 아주 도 구조적인 측면에서 아주 긴밀하게 서로 비교하면서 얘는 이런데

얘는 이렇다라는. 말마디가 아주 대비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18장과 21장, 22장에

걸쳐지는 이 천상 예루살렘의 묘사가 같은 논조로, 같은 말마디로 해서 비교가 됩니다.

 

이것이 뭐냐?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마는 바빌론이라는 것은,

자, 대바빌론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대탕녀. 아까 두 번째의 천상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어린양의 신부라고 그랬습니다. 그죠?

 

자, 대탕녀는 로마의 재화가 어떻게 누구한테로? 자기한테로. 여기는 홀로, 혼자라고

합시다. 어린양의 신부는 신부 혼자 결혼합니까? 신랑하고 있어야 되죠. 그러니까

함께. 혼자서 살아가고, 함께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저 혼자만 배부르냐, 아니면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느냐?

 

이 두 구절을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한번 짚어 보면서 이러한 큰 틀 안에서 어떤

모습이 우리가 천상 예루살렘을 지향해야 할 바인가? 아까 그래서 앙상블이라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함께'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주간 또 살아가시면서, 요번 강의 듣고 살아가시면서 이웃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천상 예루살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자, 잘 더불어서 살아가시고 다음 시간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다음시간 예고: 마지막회 천상 예루살렘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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