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21강 여인과 용의 싸움(묵시록 12장)

윤 베드로 2016. 8. 28. 23:23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1강/ 여인과 용의 싸움(묵시록 12장)

 

+ 찬미 예수님.

예,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주에 우리가 7장을 봤었는데 구원 받는 이가 어떠한 사람들인가에 대한

모습을 우리가 봤습니다. 구원 받는 이는 어떤 사람이구요? 지난 시간 정리하는

의미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구원 받는 이가 어떤 사람? 인장 받은 사람.

그럼 인장 받은 이가 어떤 사람이라구요?

 

* 구원 받은 이(묵시록 7장): 인장 받은 사람, 세례 받은 사람

 

그리스도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진 사람.

이 사람은 삶의 어려움을 완전히 다 극복하고 뭔가 새로운 기쁨만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꿋꿋이 신앙으로 이겨내는 사람. 그렇다고

제가 저번 시간에 말씀을 안 드렸는데 살아가면서 닥치는 이 모든 어려움들,

자식 걱정, 돈 걱정, 명예, 권력 온갖 것 다 있죠?

 

그런 것 속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 이것들을 싹 다 가지고 와서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문제는 우리가 뭐에 대한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가? 신앙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기 위한 어려움. 그것을 우리가 꿋꿋이

이겨나갈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자칫 잘못하면 삶의 어떤 인간적인 문제 때문에 겪는 그 어려움도 다 내 십자가요.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이것을 참아 받으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꾸 수동적이 되요.

 

" 아우, 내가 좀 참지 뭐. 아우, 내가 조금 참으면, 희생하면 다 잘되겠지 뭐."

이런 식으로 살면 이게 뭐냐 하면, 나를 억압하고 오히려 나를 노예화 해버리고

나를 가둬 놓게 되는 거예요.

 

옆에서는 잘못된 게, 불의가 뭐 세상에서 이거는 정말 부조리한 것은 막 일어나고

있는데 "아우, 내가 참지 뭐. 내가 괜히 이야기 해가지고 또 뭐 얼굴 붉혀지고,

인간 관계 나빠지고 이러면 어떻게?" 아이고, 하느님! 이것도 내가 참습니다.

인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내 아닙니다. 이런 참는 거 아닙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극기를 통해서 내가 그것을 이겨 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승리자입니다.

 

예컨대 황제 숭배. "아이, 뭐 내가 조금 황제 숭배 하지 뭐. 속으로 그냥 하느님

믿는다고 하면 되지 뭐." 이런 식의 자세가 아니라, 강하게 예, 황제 숭배 하지

않으면 나는 불이익을 당해요.

 

우리 왜 일곱 개 서간 중에 어떤 노동 조합이 있다고 그랬죠?

같은 업종끼리 모여서 있는. 거기서 내가 미신적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내가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내 삶의 자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신앙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런 어떤 적극적인 그런 신앙의 실천.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을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승리하는 사람이고 7장에서 구원

받는 이 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해져 있는 사람이죠.

 

자, 오늘 우리가 봐야 될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서 조금 자리를 옮겨서 이러한

구원의 자리를 괴롭히는 존재. 요한 묵시록에서 용 그리고 두 짐승으로 이어지는데

오늘은 12장에 나타나는 여인과 용의 어떤 관계성. 용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우리 구원된 이들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와 떼어 놓고자 하는 이 존재는 도대체

어떤 세력인가?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용이. 그런 어떤 악의 세력의 근원이라고

할까요? 악함 자체는 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이 12장을 보면요. 좀 뜬금 없어요.

11장까지 일곱째 나팔이 완전히 다 불어집니다. 그리고 저 뒤에 가면요.

* 묵시 15,1: 나는 또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해서 마지막 일곱 재앙에 대해서 펼쳐

집니다. 자, 그래서 12장 용의 이야기부터 나타나서 13장에 두 짐승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으로 펼쳐지는 이 사이에서 뭔가 좀 다른 이야기

뭔가 좀 떨어져 있는 이야기, 연결이 그렇게 되지 않는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왜 이것을 넣었는가? 마지막 일곱 재앙부터 마지막 일곱 대접이죠? 거기서부터

펼쳐지는 것들이 뭐에 대한 내용이냐 하면, 악한 세력이 어떻게 망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묵시 15장-끝: 악한 세력이 어떻게 멸망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

 

악의 세력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가 15장부터 펼쳐지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7장

에서 봤다시피 구원 이야기지요? 일곱째 나팔에서도 보면, 11장에 보면,

* 묵시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다."

 

하늘에서 찬미가 막 울려요. 여기도 구원의 내용입니다. 구원의 내용이 됐는데

뜬금없이 15장부터 악은 망합니다라고 바로 말하면 조금 그러니까 악이 도대체

무엇인가? 뭐가 망하는 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악의 정체성이라고 해야 될까요?

 

요런 악이 15장부터 망한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12장에 용, 13장에 두 짐승 요것을

이기는 게 14장에 어린양, 시온산의 어린양 그러므로 15장부터는 악이 망해갈

것이다라는 내용이 대바빌론까지 쭉 연결하면서 조금 있다가 우리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는 또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요한 묵시록 구성;

   12장: 용, 13장: 두 짐승, 14장: 어린양, 15장 이하 : 악의 멸망 설명

 

자, 11장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봐야될 12장은 그 구원에 맞서는 악한 세력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용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자, 장소는 어디? 하늘입니다. 11장과 계속 연결됩니다.

11장의 하늘은 구원을 노래하는 장소였습니다. 11장과 연결되는 12장의 하늘입니다.

자, 그 들어가기 전에 질문 하나 먼저 던지구요.  악함에 대해서 본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하늘이예요.

 

자, 묵시문학에서 하늘은 땅과 상대적으로 어떤 곳이죠? 찬미가가 울려 퍼지는

하늘은 좋은 곳, 영광스러운 곳, 하느님의 자리, 하느님의 거처이기 때문에 기쁨이

있는 곳, 구원이 있는 곳 이런 개념이예요. 왜 이 자리에서 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까요? 이거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왜 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가?

 

악은 지상에서 오히려 이야기 해야 되겠죠? 물론 13장의 두 짐승에 가면, 땅, 바다

에서 이야기가 됩니다. 장소적 공간이. 그러나 여기는 하늘에서 지금 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용은 원래 하늘에 있어요. 지금. 왜 하늘에서 용을 시작 할까요?

 

이것도 요한 묵시록 저자의 의도일 수 있는데 제가 예전에 창세기 이야기를 했습니

마는 창조 이야기에서 어떤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하느님께서 빛만을 좋아하시는

게 아닙니다. 빛이 어둠과의 조화 안에서 하느님이 그것을 보시니 좋은 거예요.

 

모든 피조물이 구별되고, 너와 내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질서죠. 어둠이라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빛의 조화 안에서 하느님이 함께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조금 더 넓게 봐서 선함 그 자체가 하느님께

중요하죠. 하느님은 선함 그 자체시니까 선함 자체가 중요하지마는 이 선함이

악함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마는 선함이 선함일 수 있는 것은 악함과 더불어

있다는 거죠. 악의 근원 역시 하느님의 영역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은 아,

더러운 것, 나쁜 거니까 이거는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 하느님은 좋은 것, 선한 것,

확실한 것, 정의로운 것만 하느님의 것. 그런 식으로 우리 인간적인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죠. 우리 나약함까지, 우리의 악함까지, 세상의 모자람

까지. 장난 말로 '타락한 천사' 있죠? 교회 전통이 있습니다마는 타락한 천사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거죠.

 

나쁜 것이라고 자꾸 몰아낼려고 하고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과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그것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우리가 진정 선하신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꾸 선하고 좋은 것만 추구하다보면 내 약함을, 부족함을, 나쁜 점을 잘 보기가

힘들어요. 그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봐야죠.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늘에서 용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좋은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쁜 것도 지금 이야기 할려고 하는 것이거든요. 좋은 것만 자꾸 추구하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어떤 자세는 어떤 자세냐 하면,

우리가 요즘 많이 자기를 개발할려고 해서 좋은 것으로 자기를 만들어 가는데 너무

혈안이 돼 있는 거 같아요.

 

* 그러나 우리 신앙은 기본적으로 나의 부족함, 나의 한계성 이것에 대한 인정과

온전히 받아들임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 안에 놓는 거예요.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나의 아픔을, 나의 부족함을 계속 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가 버리면 실제 나는 무엇 때문에 아픈가? 무엇이 나의 부족함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살아갑니다.

 

그 아픔과 부족함과 한계를 건드려버리면 화가 파~악 나거나, 분노가 일어나거나,

그 아픔에 대해서 들켰다고 해서 내가 되게 부끄러워지는 그런 체험을 하죠.

그것을 직시하셔야 됩니다. 자, 오늘 하늘에서 용을 보는 것. 정말 우리의 나약함도

하느님 안에서는 또 어떤 모습인가? 신앙적으로 묵상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자, 여기 하늘에서 용이 나타나기 전에 인제 우리가 봐야될 것이 여인이 나타납니다.

용과 대립하고 있는 여인이 나타나거든요. 물론 용은 미카엘 천사하고 싸웁니다.

미카엘 천사하고 싸우는데 그런데 이 용이 뭐할라고 덤벼들기 때문에 미카엘 천사가

딱 나나타 싸우느냐? 여인과의 대립 관계입니다. 여인이 누군가?

 

자, 12장에 나타난 여인이 누구일 것 같애요? 성모님이라고 우리가 이해를 많이

하죠? 그죠? 그래서 성모 신심이 아주 강하신 분들 여기서 성모님을 많이 찾는데

그런데 고것을 약간 좀 다른 관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성모님이라고 바라보면 우리가 너무 편협하게 해석해 버립니다.

성모님하고 연결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성모님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인이. 용과의 대립 안에서 왜 그런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여인은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있습니다. 태양과 달.

하느님의 피조물과 함께 있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우주론적인, 우주 전체의

어떤 그런 거죠. 거기다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쓰고 있습니다.

 

자, 12라는 숫자는 계속 반복이 됩니다. 그죠? 12가 뭐 어떤 겁니까?

12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

* 열둘(묵시 12,1): 온 세상의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

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 별이 뭐였습니까?

* 별(묵시 12,1): 일곱 교회를 지칭

 

별은 우리가 일곱 교회를 지칭할 때 또 나왔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지금 이

우주론적이면서 동시에 그 열둘이라 하는 하느님 백성을 지칭하면서 이것을 다

이렇게 여인의 형상이랑 같이 있다는 것. 이것은 단순히 한 인간, 하나의 어떤

존재를 지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든 보편적인 하느님 백성 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이것을 한번 봐야 되겠습니다.

 

* 여인(묵시 12,1): 보편적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아우르는 모습

 

그런데 이 여인이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26,17-18을 보면요.

 

* 이사 26,17-18: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하느님, 저희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임신한 여인의 해산할 때의 고통. 저는 어떤 고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 어떻게 고통이 심하세요? 죽을 거 같애요?

살아계시잖아요. ^^*~ 해산의 고통은 생명을 출산하기 위한 고통이지 죽을라는

고통이 아니죠? 그래서 여성분들은 느낌이 탁 오겠지만, 물론 아가씨들은 제외하고

그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느낌이 탁 올 것 같은데.

 

우리 남자 신자분들은 뭐 아, 많이 힘든 고통. 뭐 이 정도 생각 하시는데 뭐 체험이

확 안 되는 거 같애요. 느낌이 확 안 오는 거 같애요. 군대 생활을 우리가 또 많이들

이야기 합니다마는 여자의 임신과 해산 그건 전혀 다른 어려움이니까.

 

예, 어쨌든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 그 고통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주님의 어떠한

버림, 내침을 당한 어떤 그러한 어떤 모습. 거기에 대한 두려움, 아픔, 시대적인 아픔

그런 것들이 여기 다 담겨져 있는. 그거를 지금 이사야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어떤 고통이냐 하면, 이 고통이 딱 지나고 나면 애를 낳을 거 아니예요.

해산을 딱 할 거 아니예요. 그거는 비유적으로 메시아가 와서 지금 우리의 이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놓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고 전 단계, 고 고통을 임신한 여인의

해산의 고통으로 고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묵시 12,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어려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해산의 고통(묵시 12,2):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전(前) 단계의 고통

 

그래서 여기 여인이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다는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하느님 백성의 지금 현재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죠.

단순히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는 그런 표현이 아니라 우리 하느님 백성 전체,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간절함, 그 심정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표징이 바로

해산의 진통입니다.

 

예, 요한 복음 16장 22절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요한 16,22: 해산할 때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을 한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기쁨으로 고통을 잊어버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면 그 고통은 기쁨으로 변한다는 것이죠.

 

자, 그런데 이 여인도 광야로 달아납니다. 뭐 때문에? 용 때문이죠.

광야로 달아나는데 그 광야에서 1260일 동안.

* 1260일: 1년과 2년과 반년, 즉 3년 반(42달)

 

요거는 뭐냐하면, 자, 용이 해산하는 여인을 왜 공격을 합니까? 뭐 할라고?

아이를 잡아 먹을라고. 아이의 생명을 해칠려고 덥벼듭니다. 그러니까 광야로

가죠. 광야라는 개념이 여기서는 어떻게 이해하냐 하면, 어려움, 고통, 극기,

이것이 아니라.

 

* 광야: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서 거기에서 참된 보살핌을 받는 곳

 

여기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거든요. 여기 광야에 가서 보면,

하느님의 보살핌의 장소예요.

*  묵시 12,6: 여인이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여인이 천이백육십 일 동안

    보살핌을 받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하나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되는 악한 것의 어떤 특징,

첫 번째가 뭐냐 하면,

* 악함(용)의 특징: 생명에 대한 위협

 

용이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위협입니다. 용이 왜 여인에게.

자, 여인은 뭐라고 했죠? 하느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온 백성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어요. 메시아는 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해요. 여기서.

 

아이의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 아이 메시아를 낳아요. 낳게 되는데 이것을

위협해요. 첫 번째 생명에 대한 위협이예요. 자, 생명, 이 생명에 대한 위협인데

요것이 어떤 반생명적인 차원에서 용이 활동을 하죠. 그런데 이 생명은 어디로

가냐하면, 여인이 아이를 낳지 않습니까? 아이는 낳는데 아 아이가 뭐를 하냐

하면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 묵시 12,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다스림이죠. 메시아의 다스림.

자, 우리는 이 메시아의 다스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신 것. 그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과 반하는

장면에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반생명적인 거죠.

 

나중에 이것이 어디로 흐르느냐 하면요. 18장에 보면 대탕녀 바빌론으로 갑니다.

자, 생명을 낳은 사람은 여인이죠? 그런데 이 반생명적인 차원의 용이 지금 잡아

먹으려고 하죠? 요 모습은 어디로 가냐하면, 18장의 대탕녀로 갑니다.

이거는 창녀라고 하죠? 창녀는 생명을 낳는 존재가 아니죠? 인간의 욕정을

채우려고 하는 어떤 그런 것.

 

몰론 요즘 시대 우리가 이 창녀에 대한 표현이 나왔을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창녀를 비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아픔으로 정말 어쩔 수 없이 창녀의

어떤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우리가 감싸 안아야지. 아, 이 사람은 참 나쁜

사람이라며 내치는 거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요즘 식으로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창녀는 이 생명의 여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생명을 낳았어요. 여인은. 그러나 이 창녀는 생명을 낳기 위한 그런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배불리는.

 

그래서 대탕녀 바빌론이 주로 로마를 말하는데 18장에 가서 망할 때 경제적인

측면을 많이 다룹니다. 자기 배불리고, 자기가 돈을 벌고, 자기가 부유해지고

그런 로마의 어떤 경제상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요것을 우리가 나중에 살펴 보겠는데 지금 볼 것은 생명이냐, 반생명이냐의

차원에서 생명은 메사이 해갔고 온 백성을 다스리는 쪽으로 나오고 이 다스림은

나중에 생명의 물을 이렇게 천상 예루살렘에서 받아 먹는, 계속 생명을 지향하게

되는 그런 흐름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 반생명적인 용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18장에 가 가지고 자기 욕정만

채우는 대탕녀, 대창녀 바빌론의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이 바빌론은 결국에는

경제적인 어떤 측면에서 많이 다루는데 여기서 멸망을 하게 됩니다.

여인과 메시아는 생명으로 계속 이어져 나가고 용, 대탕녀는 망하게 되는 구조로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자, 이 여인이 이러한 망함을, 멸망의 길을 떠나서 메시아의 다스림을 위해서

광야로 갑니다. 광야의 장소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생명의 자리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이 바빌론에서 경제적인

차원에서 우리 나라가 지금 자본주의의 어떤 사상을 가지고 그렇게 젖어들고

살아가는 자리임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도.

 

돈이면 최고다라고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끔 하는 그런 분위기가 우리에게 만연했고

그래서 돈 때문에 생명을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그런 게 우리에게는 분명히 있습니다.

많은 우리 사회의 이슈가 있는 것도 여러분 다 잘 알고 계시고, 그것이 돈이 목적인가

정말 생명이 목적인가? 우리는 다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 판단을 가지고 지금 요한 묵시록의 구조는 이 반생명적인 것.

정말 돈을 지향하고 있는 그런 쪽으로는 망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고,

생명을 중히 여기고, 생명을 정말로 간직하고, 생명에로 나아가는 길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하느님과 일치의 자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이런 자리가 광야의 자리에로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것.

이것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시를 떠나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지마는 그곳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된다라는 것. 이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 여인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요.

열두 개의 별, 해산의 진통, 그리고 광야로 달아나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생명에 대해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나아간다는 것. 이 전체를 통틀어서

봤을 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여기에 나타나는 여인은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문화를 지켜내는,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그러한 모습을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라는 것이죠.

 

* 여인의 모습(묵시록 12장):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문화)을 지켜내고자

   하는 모습

 

임신, 해산,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의 하느님 백성, 생명을 지향하는 그런 하느님 백성

이것을 반하는 존재가 용이다. 생명을 무참히 없앨려고 하는 것. 요한 묵시록의 저자

가 이 악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이 12장의 어떤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 두 축 생명과

반생명 이 두 구조를 뒀다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어려움의 박해 시절에 어떤 강요를 받는, 로마로부터 황제 숭배뿐

만 아니라 다양한 어떤 문화적 강요 그리고 유다이즘 안에서 유다인들로부터의

어떤 배척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에서 이 요한 묵시록 저자

가 지향하고 차고 나갈려고 했던 것이 하느님 안에서의 생명을 이렇게 지향한다는 것

 

그 관점에서 다른 것을 봤을 때 당시의 세상이 생명을 지향하지 않는 반생명적인

문화가 당연히 있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가? 이런 것을 여인의 모습에서 볼

수 있겠구요.

 

두 번째로 용에 더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이 반생명을 지향하는, 생명을 짓밟고자

하는 용의 모습을 한전 보도록 하겠습니다.

 

* 붉은 용: 불과 같은 용으로 묘사

이 불과 같은 용은 어떤 용이냐 하면, 우리가 6장에서  봉인을 뜯을 때 붉은 말과

그 기사가 나오죠? 붉은 색이 어떤 내용이었어요? 불처럼 활활 타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거 어떤 의미였습니까?

 

* 묵시 6,4: 그러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

   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나면 불에 타고 막 그러죠? 예, 전쟁의 어떤 그런 것들, 살육의 현장, 살해

하고 칼을 들고 막 그러는 것. 용은 지금 또 불과 같은 용이라고 표현을 사용하는

것. 그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아까 반생명이라고 했죠?

 

* 붉은 용: 생명에 반하고 죽이는, 전쟁하고 살육하는 용으로 묘사

 

 

그런데 이 용이 일곱 개의 머리가 있습니다.

* 묵시 12,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일곱 개나 되요. 일곱 개나 되는데 자, 일곱이라는 숫자는 어떤 숫자?

완전수. 머리가 일곱 개 있으면 얼마나 똑똑하겠어요? 힘, 권능 이거는 뿔

이런 거구요. 눈은 지혜 뭐 이런 상징이구요.  어쨌든 머리가 일곱 개 있으면 되게

똑똑할 거 같애요. 똑똑함이 완전히 차고 넘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자, 어린양 한번 보겠습니다. 어린양 흉내내는 거예요.

지금 용이. 어린양을 보면, 뿔이 몇 개? 눈이 몇 개? 일곱 개, 일곱 개입니다.

자, 그러나 머리는 하나입니다. 하나. 그게 뭐냐?

 

하나, 일치된 일곱 개 뿔이 하나로 집약되고 일치된 거죠. 그런데 지금 용은 일곱 개

머리가 있어요. 다 머리가 지 각기 따로 노는 것이죠?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이것이

꽉 찬 지혜이지마는 동시에 분열된 모습을 우리가 여기서 봐야 됩니다.

 

묵시 5,6                                                      묵시 12,3

어린양(일치된 모습)                                     용(분열된 모습)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 머리는 하나            머리가 일곱, 뿔이 열

 

다 똑똑하지마는 일치를 이루느냐? 아니면 똑똑하지만 서로 지 잘난 맛에 분열을

이루느냐? 요것도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형상의 모습에서

어린양과 비슷하게 나가나 뭔가 차별화 시키는 고런 모습을 용에서 보겠습니다.

 

* 살육: 반생명적인 것, 분열

 

* 묵시 12,3: 일곱 머리에는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자, 로마 황제를 의미하겠죠? 로마 황제의 모습을 일곱 각각의 머리마다.

다 로마 황제들이 보면 다 자기가 잘난 그 어떤 자기 정책이 있고 그런데

이것이 일치된 어떤 게 아니라 분열의 모습으로 요한 묵시록 저자는 표현

하고 있다라는 것이죠.

 

자, 그 다음에 인제 전체적으로 한번 봤을 때 왜 하필이면 용인가?

이 용이 살육이고, 반생명이고 그래서 분열되고 이러한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왜 하필 용인가? 용의 형상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한번 보면,

 

이사야서 27장 1절에 보면 이 용은 파라오를 의미하고 파라오는 이집트 왕이죠?  

그 다음에 예레미아서에 또 보면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 왕이죠?

이집트와 바빌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입니다.

여기서 이것을 용으로 표현합니다. 구약의 전승은.

 

* 용(이사야서): 이집트와 바빌론의 왕(이스라엘의 원수)을 상징

 

우리는 용은 뭡니까? 아주 신성한 뭐 그죠? 용꿈 꿨다. 그러면 좋은 꿈이죠?

개천에서 용나고 그죠?

 

아무튼 이 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집트의 그 어떤 파라오, 바빌론의 왕,

이스라엘에게 원수가 되는 이것을 용으로 놓으면서 이 용의 악마적인, 악적인 것을

단순히 아까 죽음, 반생명적인 것, 분열 이것에서 더해서 이 현실에 자기가 체험한

것 안에서 악적인 요소를 발견해 내고자 했던 그런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이집트, 바빌론 이러한 어떤

역사적 체험이 자신에게는 악적인 요소로 드러났다는 거죠. 그래서 용이라는

표징을 사용했죠. 공중에 붕 떴는 그냥 악함 자체, 악마, 영적인 거 이런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삶 안에서 체험한 것.

 

이 이집트의 파라오와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 이것은 어디로 또 연결되냐 하면,

로마와 연결되죠. 용은 우리가 다음 시간에 볼 때 두 짐승으로 가는데 용이 두 짐승

으로 연결이 됩니다.

 

* 묵시 12장의 용(이집트, 바빌론)에서 13장의 두 짐승(로마)으로 악의 세력이

   연결이 되고 있다.

 

이 로마의 표징이 등장하거든요. 과거의 어떤 역사적인 체험, 어려움의 체험이

로마 지금의 로마의 어떤 고통, 로마가 억압하는 그쪽으로 연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이죠.

악마의 세력 자체가.

 

그래서 이 용의 모습 안에서 우리는 이제 바라봐야 되는 것이 반생명, 분열 그것은

곧 우리 일상의 체험 안에서도 분명히 목격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 남자 아이입니다.

남자 아이는 생명을 상징하죠? 메시아의 도래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갑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우리 식으로

얘기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하느님 백성은 뭡니까? 그리스도 공동체

교회를 의미하겠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공동체가 바로 어디에

있는냐? 광야에 가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 척박한 장소 광야는 하느님의 보살핌인 장소인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인 반생명과

분열을 겪고 살아가는 곳. 그러나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다.

 

이 교회의 지금,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이 현실을 그대로 여인과 남자 아이와 용의

그 어떤 관계에서 잘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되게 멋진 비유예요. 광야(어려움)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고 거기는 또 악마의 어떤 공격이 있고, 이러한

삼중 그러한 구조가 그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자, 이 여인, 용, 남자 아이에 대해서 봤는데 자, 그러면 전투한다는 것, 싸운다는 것,

전쟁을 한다는 것 이 측면에 대해서도 용의 모습을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싸우는 전쟁, 전투 이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도 25번 이상이 되는데 요한 묵시록에서

15번 사용됩니다.

 

* 전쟁(전투): 신약성경 25회, 요한 묵시록 15회 나옴

 

그러니까 요한 묵시록이 무시무시한 어떤 전투,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게 그런

이유이기도 하는데 자, 아까 우리가 12장을 시작하면서 공간적으로 어디부터 출발

했어요? 하늘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늘에서 뭔가? 용과 미카엘 천사가 싸웁니다.

 

* 묵시 12,7: 그때에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운 것입니다.

 

미카엘 천사는 구약 전통상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전투자의 어떤 모습

으로 나타나거든요. 그 미카엘 천사가 용과 싸웁니다. 하늘에서 싸웁니다. 전투는

하늘에서 벌어집니다. 요말을 약간 바꾸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영광, 하느님의 기쁨

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 안에서 어려움이 발생하고 어떤 의미에서 살육, 살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전쟁

이라는 개념이 우리 머리 속에서 떠오르면 그래서 이게 뭐냐? 유다 묵시문학 안에

서는 하늘과 땅은 온전히 분리되어 있었어요. 땅은 나쁜 곳이고 하늘은 좋은 곳이고.

하늘에서 나쁜 것이 나오면은 안 되요. 

 

그런데 요한 묵시록은 이거를 연결해 버렸어요. 특별히 4장에서부터 "이리 오너라."

해가지고 하늘과 땅을 온전히 같이 놓는 거죠. 7장에서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구원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천상에서 경배를 하죠. 계속 섞어요. 하늘과

땅이 달리 따로 구분이 안 되어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하늘과 땅을 늘 구분하는듯 하지마는 실제 그 내용은 같이 갑니다.

좋은 것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 안에서 나쁜 것과 어떻게 나쁜 것을

극복하고 이겨내고 같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좋은 것을 지향해야 될 것인지 이 

문제에 요한 묵시록은 계속해서 관심을 두고 있다.

 

큰 환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승리자의 모습이 될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

어려운 것, 나쁜 것 내쳐버리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요한 묵시록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전투가 하늘에서 벌어진다는 것. 그거에 대해서 우리가 

머리에 늘 두시기 바랍니다.

 

신앙적으로 "아이구, 내 인제 이만하면 됐다. 편안 것 같다. 신앙적으로 이렇게 살면

되는 갑다." 이거 아닙니다. 어려움, 고통, 투쟁이 없으면, 내 안에서 내적인 어떤 신

앙적인 것을 지키기 위한 그러한 나름의 십자가가 없으면 그 편함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우리가 하늘을 산다면 그 하늘 안에서도 늘 전투하면서

살아야 되요. 깨어 있으라는 거죠. 긴장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 하늘에서 이 전투의 결과는 장소적으로 변합니다. 내가 하느님과 같이 있으면

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에서 전투가 일어나서 거기서 내가 승리를 하고

이겨내면 악적인 요소는 떨어집니다. 하늘에서. 내가 지쳐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이 악적인 요소가 떨어집니다. 어디로 떨어지냐?  바다의 모래로 용이 떨어집니다. 

 

* 묵시 12,9: 그리하여 큰 용,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계를 속이던 그자가 떨어졌습니다. 그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떨어졌습니다.

 

악적인 것이 땅으로 떨어진다. 악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쪽으로 장소가

바뀝니다. 자, 장소가 바뀌니까 이제 땅은 악한 게 내려왔어요. 땅이 인제 불행한

거죠. "불행하다. 불행하다." 땅이 이제 불행해요. 이 불행의 두 표징이 다음 시간에

볼 두 짐승으로부터 등장합니다.

 

요기서부터는 구체적으로 완전 역사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지금은 이제 우리의

어떤 신앙적인 어떤 투쟁, 영적인 투쟁 정도로 우리가 이해하시면 되겠구요.

악마적 그 자체, 갇혀 있는 것이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는데 이 떨어지면

이것이 "아이구, 이제 자, 땅이 절단났구나. 큰 일 났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게 아니라 요 구조를 한번 잘 보면요. 재미있는 게 발견되는 게

 

자, 용이 등장을 했었습니다. 용이. 자, 땅으로 떨어지니까 제가 13장에서부터

나오는 게 두 짐승이 나온다고 그랬죠? 이 두 짐승을 어디에 비유하냐 하면,

두 짐승은 바빌론이다라는 그 표현이 18장부터 나타납니다.

 

그 짐승의 하나가 일곱 개 머리를, 일곱 개 동산 뭐 이렇게 나타나는데 로마를

의미합니다. 머리는 황제를 의미하고. 이 두 짐승은 곧 로마, 바빌론으로 가는데

이 멸망을 해나가면서 두 짐승 이야기가 또 나와요. 두 짐승이 파멸하는 것.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용의 파멸이 나타납니다. 요게 지금 12장부터 쭉 연결이

됩니다.

 

 

 

용이 하늘에서 싸워가지고 땅으로 떨어지면서부터 펼쳐지는 흐름이예요.

이 바빌론을 기점으로 해서 이쪽으로는 악마가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망해

갖고 여기서부터는 파멸을 그려나갑니다. 바빌론을 기점으로.

 

자, 악마 그 자체에서 두 짐승은 약간 현실적인 로마의 그 상징성을 쓰면서

구체적으로 로마의 이야기를 하면서 구체적인 현실의 이야기에서 살짝 이

현실의 악적인 요소를 극복해내고 망하면 두 짐승은 약간 좀 상징적인 차원

으로 가면서 용, 악마 그 자체로 가는 거예요.

 

비현실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내려왔다가 현실적인 것에서 그 악마 그 자체

이게 무슨 소리냐? 말은 어려운 거 같은데 쉽게 표현해 가지고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그냥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뭐가 있는 것처럼 자유, 평등 이런 개념처럼 악마를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죠.

 

그게 악적인 요소가 아니라 우리 생활 구체적인 것 안에서 요한 묵시록이 비유적

으로 이런 다른 표징을 쓰지마는 결국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 지금 안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일 안에서 우리의 행동 안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그 체험

안에서 악마적인 요소는 분명히 악적인 것이 있다.

 

* 지금 현실 안에서 살아가며 구체적인 일이나 행동 안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체험 안에서 악마적인 요소(반생명적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따 말했던 반생명적이고 분열을 조장하고 이런 것들이 분명히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로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기에 그 길을 방해하는 것들은

붕 떴는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역사 안에서, 우리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의 체험 안에서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간혹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보면 너무 영성을 추구하면서 너무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우리 사랑합시다.

우리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서로 평화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이거 어떻게?
뭘 하면서? 그런 구체적인 현실이 제외된 이러한 말들은 야고보서의 논조로 이야기

하자면, 실천 없는 우리 믿음의 어떤 모든 이야기는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 그래서 요한 묵시록 나중에 가면 이러한 그

어떤 악마의 자리 다 물리치고 성도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이들에게 보상을 주는

것은 보상은 또 다른 문제가 되요.  "너희들의 행실에 따라서."

 

'에르곤'이라는 그리스 말로 너희들의 행실이 어떠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의 그

보상, 선물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 묵시록이 악의 근원을 12장에서 지금

악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그 특징을 로마의 경제적인 아까 경제라고 얘기 했는데

바빌론, 이 로마의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재 조명했고

 

여기서 이 로마의 구체적인 현실을 극복해야 결국에는 용의 추상적인 어떤 악마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자본에, 돈에, 정말 건강도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으니 건강에만 그렇게만 몰두해 있으면서 그것을 내가 쫓아가면

결국에 그거는 악적인 거 쫓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돈만이 아니고 진정 좋은

가치가 있다.

 

진정 우리가 살아갈 때 그 참다운 행복 그런 가치가 있다라고 늘 깨어서 기도하고

깨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눈이 있다면 우린 그것이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고

곧 인류를 하나되게 하는 어떤 모습이다라고 우리가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다 참아내고, 이러한 어던 사탄의 악마의 어떤 요소를

극복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냐? 그 어떤 찬미하는 노래가 12장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한번 볼 수 있습니다.

 

* 묵시 12,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세가 있죠? ‘엑수시아’(ἐξουσία)라는 그리스 말인데 요한 묵시록에서

7번 나타납니다. 이게 뭐냐?

* '그리스도의 권세'란 용어: 묵시록에 7번(완전을 뜻함) 사용됨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권능이 7번 사용되었다는 의미는 완전하다, 완벽하다,

그것만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죠. 

 

* 묵시 12,10: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

   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이게 누구냐? 용이죠. 악마 그 자체죠. 아까 분열이라고 했습니다. 그죠?

용이 한 일이 분열, 고발, 이간질이죠. 자꾸 그렇게 하면서 서로를 찢어 놓으려고

그러는. 그것이 바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는 그자가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 묵시 12,11: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를

   이겨 냈다.

 

이거 어떻게 이겨냈다구요? 어린양의 피. 그리스도의 희생과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

이 증언은 뭡니까? 내 생활의 구체적인 내 삶 안에 안에서 나의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냥 정말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런 거 외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그들의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증언이 바로 악마를 이겨낸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이, 바빌론이라고 표상되는 이러한 어떤 현실. 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증언의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악 자체인 용이 멸망으로

간다는 것이지요. 내가 여기서 흔들려 꺽어져 버리면 악은 뭐 더 나타나는 것이죠.

 

* 묵시 12,11: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시간에 봤던 순교, 승리자입니다. 정말로 내 목숨, 내 인생 전체를 걸고 그렇게

투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묵시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안에 사는 이들아, 즐거워하여라.

   그러나 너희 땅과 바다는 불행하다.

거기에 바로 용이, 악마 자체가 내려 갔기 때문에.

 

* 묵시 12,12: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달은 악마가 큰 분노를 품고서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내려가서 어떻게 하냐 하면요? 17절에 보면,

* 묵시 12,17-18: 그러자 용은 여인 때문에 분개하여,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용은 바닷가 모래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 누구? 여인의 후손입니다. 여인은 하느님 백성을 의미한다고 그랬죠?

교회를 의미한다고 그랬습니다.

* 여인(묵시록 12장): 하느님의 백성(교회)를 의미

 

교회의 후손들이 계속된다는 거죠. 우리 교회가 지금 우리만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후손들, 앞으로 우리 한국에 살아갈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후손들이 있습니다.

계속 악은 싸울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악적인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마는, 악 자체가 우리에게 해꼬지를 하거나

불편함을 주거나 뭐 한다는 거는 뭐 전설의 고향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악함 자체는 내가 할 수도 있고, 우리가 할 수도 있고, 우리 안의 나약함이 악마를

다 드러냅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봐야될 13장의 두 짐승의 모습 안에서도 악을 이 세상에 드러

내는 거는 우리 자체입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치를,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는가?

이 문제가 바로 악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악마를 피하고 하느님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 전에 내가 내 안에서

살아가면서 "아, 이건 아니다." 싶은 것 하나하나 이렇게 조금 치우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용을 무찌를 수 있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내가 오늘 여인이 돼 보십시오. 내가 생명을 낳는.

거짓말 혹은 남에게 주는 상처를 내는 그런 말들, 혹은 내 행동이 남에게 불편을

주는 것. 이런 것 다 어떤 의미에서 남을 죽이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지향하고, 남을 살리고, 남을 더 이렇게 칭찬해 주고,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 생명을 지향하는 그 모습이 바로 여인의 모습이고, 나는 해산의

고통이 좀 아플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내가 뭔가를 도 다른 생명을 만들어 내는

창조 사업의 또 다른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다면 분명 여인으로서 광야의

하느님의 보살핌 많이 받고 그렇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또 한 주간 살아가면서 악마적인 것을 용감히 맞서는 그런 우리 신자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시간 예고: 두 짐승(묵시록 13장)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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