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18강 일곱째 봉인, 일곱째 나팔, 일곱 대접

윤 베드로 2016. 8. 28. 18:14

  



 

제 18강 일곱째 봉인, 일곱째 나팔, 일곱 대접

 

찬미 예수님! 예, 잘 지내셨습니까?

예, 우리가 지난 시간에 4장, 5장 그렇게 봤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6장, 7장 계속

나가야 되는데 이번 시간에는 6장부터 무엇이 펼쳐지는가? 6장부터 해서 15장,

16장까지 펼쳐지는 7의 시리즈, 일곱 개 봉인, 일곱 개 나팔, 일곱 개 대접.

이렇게 7이라는 어떠한 그런 어떤 상징적인 숫자와 더불어서 계속해서 장면이

펼쳐지는 시리즈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한번 살펴보고 6장부터 이렇게 구체적으로

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너무 바빴어요. 너무 바빠서 5장에 대한, 4장, 5장의 연결에

대해서 시간이 쫒기다보니 막 급하게 넘어간게 좀 있습니다. 그건 뭐 어쩔 수 없고

지나갔으니까. 그래도 4장, 5장의 전체적인 틀,구조, 메세지는 한번 가지고 있어야만

뒤에 6장부터 펼쳐질 내용들에 대해서 기본 출발점이 이렇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던 4장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4장에서 분명히 창조주 하느님을 봤습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그리고 5장에서 나타나는 중심 인물은 어린양. 어린양은 구세주로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자, 창조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은 하늘이었습니다. 그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어좌에. 하늘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일곱 눈, 일곱 뿔, 일곱 눈은 하느님의 영이시다. 그것이 어디로?
땅으로. 그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땅 쪽으로 이렇게 향하는 어떤.

땅에 있는 모든 민족들을 하늘로 다시 일치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그런 역활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으로?

당신의 피로써, 당신의 죽음으로써, 부활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일치 시키는.

 

사실 이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실 이 두 호칭은 어좌라는 곳에 예수님도 그리고 성부 하느님도

함께 그 자리에. 어린양의 위치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좌 한가운데에 계셨어요.

그러니까 한 분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 어린양의 위치: 어좌 한가운데

                         한 분 하느님이심을 강조

 

한 분 하느님이신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구세주로서의 하느님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4장, 5장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하느님이

한 분 하느님이시다. 이 한 분 하느님께 다른 세상 모든 사람들도 하나가 된다.

일치가 된다.

 

* 한 분 하느님께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도 하나(일치)가 됩니다.

 

누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예, 그렇게 우리가 4장, 5장을 봤습니다. 이 일치하는 모습, 하늘과 땅이 만나는

모습, 여기에 무엇을 드러내느냐? 5장 마지막에 모든 피조물들이 여기에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를 하고 이 영광과 찬미가 하느님과 땅을 일치된 모습에 온전히

울려 퍼집니다.

 

자, 5장까지 봤는데 이미 요한 묵시록 끝이 났어요. 이 뭔가 이 해피앤딩이예요.

그냥. 행복으로 다 끝났어요. 앞으로 6장부터 펼쳐질 내용은 그럼 뭔가?

이렇게 다 완전하잖아요? 하늘과 땅이 만나서 하느님과 일치 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 불림을 받았다. 이미 그것이 완성됐다. 그래서 찬미 찬송 드렸다.

 

이 끝난 이야기인데 6장부터 막 이상하고 무서운 이야기가 펼쳐져요. 이것이 뭔가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봐야 됩니다. 머리 속에 둘 것은, 요한 묵시록의 이야

기는 끝이 났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뭐냐? 일치고, 하느님과 일치고 그것은 기쁨이고

기쁨의 표현이 영광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끝이 났어요. 예수님의 부활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쁨

속에서 우리가 6장을 보기 시작해야 됩니다. 비록 6장부터 내용이 아주 무서운 장면이

펼쳐지겠지만 그러나 이 전체 출발점을 하느님과 일치된 기쁨이라는 것에서 출발하

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께서 주셨다. 자, 우리가 6장부터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일곱 개

봉인, 나팔, 대접 이렇게 순서로 펼쳐지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자, 천천히 한번

살펴보자면요.

 

자, 봉인을 유일하게 열어 젖힐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린양이시죠?

어린양만이 그분만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걸 찾아봐도 그분 외에는

봉인을 뗄 수 있는 분이 없다. 이 봉인을 뗀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느님,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어요.

이것을 어린양이 받아서 어린양만이 열 수 있다. 이게 뭐냐?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뜻을 누구만이 드러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다: 하느님의 계획(섭리, 뜻)을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 세상에 드러내려고 오신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의 어떤 권능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 우리 복음으로 표현하자면

복음서의 표현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이 뭡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당신 외아들까지 주셔서 하시고자 했던 것은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어 고백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끔 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일치할 수 있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죠.

그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밖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 요한 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자, 그래서 일곱 개 봉인을 여는데 있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는 것.

첫 번째가 장소의 이동입니다. 일곱 개 봉인이 처음에 하나를 열기 시작하면서

6장부터 시작합니다. 열기 시작하면서 뭐가 되냐하면, "오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6장을 보다 깊게 전문적으로 분석할 때 다시 보겠습니다마는

 

"오너라" 지금 4장, 5장은 아까 하늘과 땅을 이야기 했죠? 그러나 그 어떤 중심이

되는 장소적 배경은 하늘, 천상이었어요. 4장에서 오너라 해서 가보니까 천상의

모습이, 그 천상 한가운데에, 어좌에 어린양까지 나타나있는 기본적으로 천상이

장소적 어떤 배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소 이동을 해서 어디로 갔냐하면, 이건 뭐 전쟁이다, 기근이다,

죽음이다. 그 안에서 막 신음하는 순교자의 모습도 나나나고 그래요. 이것이 뭐냐?

장소적으로, 상대적으로 약간 천상과 다른 지상의 모습으로 그 안에서 이 고통의

땅으로의 이동, 땅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슬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땅의 고통입니다. 땅의 고통 땅의 고통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일곱 개 봉인을 뜯기 시작하면서, 열기 시작하면서 일곱 개 나팔, 일곱 개의

대접까지 계속해서 하는 신학적인 고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들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이게 도대체 뭘까?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하죠?

 

예, 전혀 여기 고민이 없으신 거 같은데 ^^*~~ 고민이 없으십니까?

시청자분들 중에도 고민이 많으실 거 같은데 이것을 이 내 고민을, 이 어려움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이 봉인을 여신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 세상의 악적인 것, 세상의 어떤 고통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시고 계시는가의 문제. 이것이 바로 일곱 개 봉인을 뜯을

때, 뜯기 시작하면서 펼쳐지는 어떤 중심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번째로 봐야 되는 것은, 이 일곱 개 봉인, 일곱 개 나팔, 일곱 개

대접이 순차적으로 나오죠. 예컨대 일곱 개 봉인이 시작됐을 때 일곱 번째 봉인에서

첫 번째 나팔이 나옵니다. 일곱 개 봉인을 마지막에 뜯었을 때 이야기가 나오면서

첫 번째 나팔이 시작되요.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 일곱 개의 봉인이 마무리 되고 새로운 뭔가 다른 이야기가

나팔을 통해 펼쳐지고 또 이 나팔이 일곱 번째까지 가면, 그 다음에 첫 번째 대접

으로 연결됩니다. 이게 물고 물려서 가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인가? 왜 이렇게

요한 묵시록이 이렇게 구성을 하고 있는가? 

 

이게 뭐냐하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개 봉인을 뜯어주셨는 것 그것이

계속 당신의 뜻을,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계속 열어 보여 주신다는

것이지 한번 일곱 개의 봉인만 예수님께서 딱 드러내고 보여주시고 나머지 일곱

개 나팔과 일곱 개 어떤 대접은 다른 사람이, 다른 이가 어떻게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열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봉인과 나팔과 대접을 따로 이렇게 이야기 학 있는가? 요것은 이겁니다.

아까 제가 이 세상의 어려움이라고 그랬습니다. 그죠? 땅의 고통, 땅의 힘든 그

가운데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세 가지 관점으로 다르게 해석을 하는 거지요.

 

하나의 어려움을, 하나의 세상의 삶을 단순히 한쪽 관점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적어도 세 개의 관점으로 이렇게 한번 재해석, 신학적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어떤 특지이입니다.

 

그래서 봉인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나팔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대접에서는 어떤 신학적 메세지를 주고 있는가?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봐야 되는 것이지요.

 

또 그러나 출발점은 이것이 따로 떨어진 각각의 사건이 아니라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것을 물고 물려서 넘어가고 잇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다 열어 보여 주시는,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계시다. 요한 묵시록의 제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죠? 그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일곱 번째 재앙이 첫 번째 나팔이 되는 이런 식으로 연결하고

있다. 자, 연결해서 그러면 세 번째로 이렇게 연결해서 뜻이 뭐냐? 이 일곱, 7의

시지즈. 이 세 가지 이것의 마지막 결론은 뭐냐하면 승리입니다.

 

 

이 승리는 누가 주시느냐? 그리스도께서 주셨다. 우리가 방금 아까전에 4장, 5장을

봤습니다. 하늘과 땅을 일치시키고 하느님께 우리 모든 세상 사람을 구원해서 데리고

가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예, 삶의 어려움, 이 세상의 어려움, 세상의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는 이가 승리하는 자라고 몇번을 강조했습니다. 그죠?

 

*지금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적인 가치를 꿋꿋이

 지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요한 묵시록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일곱 개의 어떤 7의 시리즈가 끝나는 그 순간마다 등장하는 것이 승리의

노래, 승리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으로 너희 삶의 어려움이 있지

마는 봉인을 뜯을 때마다, 나팔을 불 때마다, 대접을 쏟을 때마다 세상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 어려움 속에서 꿋꿋하게 이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죠.

 

꿋꿋하게 이기지 못하고 지면, 그 모습은 세상과 타협하고 뭐 그리스도교의 가치관,

"아이고, 뭐 살다보면 그게 되나, 쉽게 되나?" 그러면서 안 따르고 그냥 성당 밖에만

나가면 세상하고 대충 이래 살다가 일주일에 한번씩 성당에 와서 또 그래  잘못하는

줄 알면서 또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반복되는 모습은 신앙적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라 타협하는 모습이죠.

 

고 타협하는 모습은 15장 이후에 대접이 다 끝난 이후에 나타납니다. 멸망으로 나타

납니다. 명망이예요. 요 두 축이 그러니까 이 일곱 개의 봉인, 나팔, 대접 요기까지는

무시무시한 장면이지마는 결국에 말하고자 하는 거는 승리다.

 

그런데 승리 이후에 15장, 16장 뒤로 가서부터는 승리하지 못하는 이들이 나타는데

멸망이다. 바빌론이, 대탕녀 바빌론이 무너졌다. 이 멸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승리하는 사람이 다 멸망시켜나 놓으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게 21장, 22장에 뭡니까?
천상 예루살렘이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요한 묵시록은 아주 긍정적인 책입니다.

아주 적극적인 우리에게 기쁨을, 승리를 주고자하는 책이죠. 이 흐름을 보십시오.

 

 

 

 

 

땅으로 인해 땅이 고통이지마는 이 고통스러운 것을 승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해석을 했고, 승리 안 하고 옆에 곁가지 붙었는 것은, 승리하지 않는 것은 "너 없어져"

이제 없어졌고, 이들은 뭐 관심 없구요. 얘들은 어디 가버렸구요. 어디 갔는지 모르

겠고. 요한 묵시록이 이렇게 자세히 구성하는 게 마지막에 천상 예루살렘, 이 승리의

어떤 기쁨입니다.

 

4장, 5장에 기쁨을 노래한다고 그랬죠? 머리 속에 두시라고 그랬습니다. 그죠?
요한 묵시록의 어떤 처음이자 끝이라고 했습니다. 이 끝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이야기 해 주는 것이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봉인부터 시작해서 천상 예루

살렘까지다. 요런 전체적은 구조. 이제 한번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우리가 어떤 이 땅의 고통이라는 거, 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한계성, 이것을

우리가 먼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묵시록 우리가 처음에 시작할 때,

그 당시 요한 묵시록을 읽었던 사람들의 시대적 상황이 어땠다라는 것을 다섯

가지의 시대적 배경, 구체적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몇번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뭐 한참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머리 속에 남아 있다는 건 기적적인

이야기이고 ^^*~~~ 기적에 가까운 거고 절대로 머리 속에 안 남아 있죠?

그죠?^^*~~~ 예, 그러니까 그 시대 상황을 보십시오. 이 독자들이 겪고

있는 시대 상황, 그 어려움 그것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요한 묵시록이.

 

인간의 운명, 물론 승리, 기쁨으로 이야기하며 위로와 격겨를 주기 위해서 요한

묵시록이 쓰여졌다고는 하지마는 문제는 그 고통 앞에서, 힘듬 앞에서 버티고

있다는 거 이거 대한히 어려운 것이겠죠? 그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의 어려움이

뭐였습니까?

 

첫 번째가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어려움: 1. 예수님의 죽음

 

내가 믿고 있던 이분이 물론 부활하셔서 하느님 곁으로 승천하셨다고 이러지마는

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빨리 오시라 이거죠. 당신 죽음 이후에, 부활

하신 이후에 당신이 직접 보이지 않으니까 너무 힘든거예요. 내가 믿고 바라는

주님이 안 계시니까.

 

그리고 두 번째, 주님을 따른다는 수석 사제라는 정말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하는 바오로와 베드로가 순교해 버리는 거예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어려움: 2. 바오로와 베드로의 순교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이 두 기둥이 사라진거예요.  이것도 큰 슬픔이죠.

그러다가 또 뭡니까? 또 유다 민족 폭삭 망하는 유다 항쟁. 70년 경에.

*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어려움: 3. 유다민족의 멸망을 초래하는 유다 항쟁

 

그 다음에 또 유다인들이 또 그리스도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아요.

*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어려움: 4. 유다인들의 박해

 

얌니아 종교회의 우리가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이단시 취급해서 박해를 합니다.

거기다가 로마 식민지 상황이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 숭배, 로마의 어떤 군사적,

정치적 탄압.

*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어려움: 5. 로마의 군사적, 정치적 탄압

 

이런 것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요한 묵시록을 읽는

독자들이 실제 느꼈던 어떤 위협, 삶의 어려움이겠지요. 그 속에서 신앙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어려움이 어떻게 다가오냐면, 너무 어려운거예요.

 

그래서 7이라는 숫자로, 일곱 개 봉인, 일곱 개 나팔, 일곱 개 대접이라는.

7이 무슨 의미였습니까? 완전수. 그죠? 충만한 거. 그만큼 어렵다는 거예요.

* 7은 완전 수. 충만한 것을 상징한다.

 

너무 힘들다는 거죠. 그러나 끝에 가서 승리를 이야기한다고 그랬죠? 일곱 번째.

7의 일곱 번째 순간에 승리를 해요. 그 승리는 완전하다는 거죠. 그런데 일곱 개

봉인, 나팔, 대접을 이야기할 때, 땅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숫자가 뭐냐하면,

4라를 숫자가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예컨대 네 생물과 네 기사, 네 마리 말, 네 천사,

땅의 네 모퉁이.

 

* 땅을 지칭하는 4라는 숫자: 네 생물, 네 기사, 네 천사, 네 모퉁이

 

땅을 지칭히는 이 4라는 숫자가 땅의 모든 것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이 인간의

운명, 이 한계성은 모두 세상 곳곳에 이렇게 펼쳐져 있는 것이죠. 단순히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부류의 사람 이런 개념이 아니라 이 힘든 어떤 시대적 상황은 모든

이에게 펼쳐진다.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을, 누가 그 고통을 본격적으로 당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겁니다. 우리가 여름에 홍수도

많이 나고 그랬지요? 뭐 자연 재해입니다마는, 그것이 어떤 인재일 수도 있고

이러한 어떤 삶의 어려움이 살다가 보면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나 그것을 그 어려움을 어떻게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이것을

쉽게 또 다른 어떤 삶의 희망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좌절 그 자체가

돼 버리는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자, 우리가 16장 이렇게 쭉 보면서 16장을 보면, 삶의 고통은 아까 7, 그죠?

4, 땅. 삶의 모든 곳 그렇게 나오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이는 신자들이고 신자들은

무엇을 하느냐? 회개를 합니다. 회개가 뭐냐? 뭐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한 거를 내가

반성하고 이런 차원으로 머무르지 마시고 돌아서는 거죠. 하느님과 일치하는 거죠.

 

 

4장, 장에서 말했던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그죠? 일치하는 관계의 회복을 하는

것은 삶의 어려움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도 내가 하느님을 믿고 이것을 좀 기회로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어떤 모습으로 변화를 줄 수

있지마는

 

"아이구, 어려워라. 아이구, 어려워라. 이거 어떻게 감당하냐?

아아구 뭐 회개구 뭐 관계 단절 뭐고, 아이구, 그냥 일단은 힘 있는 사람한테 좀

이렇게 엎드려서 이것만은 조금 어떻게 비켜가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해 보자."

요것이 6장에 나타나는 막 산이며 바위가 나를 숨겨다오하며 피하는 어떤 모습.

 

그리고 13장에 나타나는 그 어떤 짐승,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경배하는 모습,

세상과 타협한다는 거죠. 하느님을 떠나서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 굴복해버리고

신앙을 버린 사람에게 일곱개 7의 시리즈의 어떤 고통, 하느님의 징벌(심판)이

본격적으로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봤을 때 요한 묵시록의 불행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에 대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말씀드렸던 게 이 불행은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믿고 그분과 일치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그분을 거부하고 세상 것에 타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징벌, 심판이 바로 7의 시리즈의 그 어느 고통이 그 사람을

향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뭐 땅의 3분의 1이 뭐 이렇게 해를 입고 뭐 이런 거.

그 3분의 1이라는 표현은 한계적인 부분, 어떤 한 부분. 이 부분은 뭐냐?

하느님께 신앙을 두지 않는 이들. 여기서 그래서 또 중요한 거는 우리가 요렇게

같이 있는데 믿는다 해서 우리는 편안하게 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렵게 살고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생각을 하지 마시고 어떤 세상의 모든 어려움은 모두가

같이 겪는거예요.

 

그 어려움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우리 신앙인이냐, 비신앙인이냐의

갈림길에 있다라는 것이죠. 이것을 신앙적으로 잘 해석해 나갈 때, 잘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수께서 예컨대 십자가상 당신께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아, 못하겠습니다. 이제 나 이 잔

마시겠습니다."라고 했더라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건 없었겠죠. 

철저하게 그 모든 삶의 인간적인 어떤 어려움을 다 받아들인 것 가운데 승리하셨

습니다.

 

요한 묵시록 5장에 나타난 어린양, 살해되었으나 서 있다라는 것.

살해되었기 때문에 서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교 신비는

어떤 신앙의 진리는 여기 있습니다.

 

* 묵시 5,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편한 것, 마음의 평화 우리가 많이 찾죠? 성당에 오늘 저도 예비자 교리 해

보면 성당 와서 마음 편해질려고 오는, 세상사 다 잊고.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셔요.

그럼 제가 농담으로 그러죠. 그럴려면 산에 가서 굿을 하시던지, 무당 찾아가라고.

아예 푸닥거리 한번 해야 마음 편안해진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더 편하지.

그리스도교 들어오면 마음이 더 힘들어집니다라고 말씀드린적이 있는데.

 

왜? 왜? 더 힘들어집니까? 모든 걸 이래 세상 살이를 바라보자니 다 이거 뭐냐?

그리스도교적 가치로 이렇게 뭘 해보려고 하면 속에 천불이 나거든요.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모든 것이 예, 더 힘들어질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힘든 것은 정의를 위한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거는 승리의 설레임을 가지고 우리가 부딪쳐야 되는데

구체적으로 여러분의 가치관이 있고 여러분들의 어떤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가치관, 정말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도 우리가 그럼 무엇이

진정한 우리의 가치관인가? 라는 것을 조금 한번 생각해 보면서도 그렇게 한번

요한 묵시록을 읽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의미에서 세상살이, 이 삶의 어떤 어려움, 그것에 대한

어떤 이 표현들이 6장부터 펼쳐지는데 이미 종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우리가 봐야 되겠습니다. 왜 무슨 의미에서 종말이 왜 시작되는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눈을 반짝 뜨시고 저를 쳐다보세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에 내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돼 있고

그분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면 그 어떤 상황이 변하고 바뀌어진다고 하더라도

4장, 5장에 끝났다고 했어요. 누가 와 갖고 뭔 짓을 하더라도 나는 꿋꿋하게

그렇게 산다. 예, 그렇다면 그것이 이미 종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면

7장 15절에서 17절까지 한번 보겠습니다.

 

* 묵시 7,15-17: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거 누구에게 얘기 하냐면요? 일곱개 봉인 그 어떤 바로 직전에 구원받는 이에

대한 그 사람. 구원 받는 이가 이디 있냐하면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빤 사람.

이게 구원에 대한 표현인데 그만큼 자기가 어려움에 꿋꿋이 버티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에게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구원을 약속하시는 것이죠.

 

그러면 이 사람이 이미 구원을 받았지 않습니까? 이 표현대로 하면. 여기에 보면.

그들에게 어떠한 열기나 목마름, 굶주림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구원 받은

상태입니다. 이게 구원이예요. 이게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뭔가 편안한 상태, 정말 소위 게임 끝났어. 정말 영원한 생명을 얻으면서 하느님과

그냥 기쁨만이 가득한 그 상태가 구원의 상태가 아니라, 아까 승리의 개념,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하느님의 약속인 굶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

도 않고, 어떠한 열기도 너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 자체가 구원인 것이죠.

 

그러니까 되게 실망스럽죠? 뭔가 편안한 게 와야 되는데, 상이 주어져야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꿋꿋이 계속 견뎌. 열심히 해봐. 야, 너 이제 구원 줬다.

이제." 이런 상태니까 종말의 시작이 바로 여기부터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 완성은 아직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재림

하시지 않으셨고, 그 완성은 언제일지 우리는 모릅니다. 도둑처럼 오겠지요.

그러니까 깨어 있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종말이다. 이 종말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종말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승리하는 사람, 인내하고 신앙의 가치를

지키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종말을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꿋꿋하게 살아간다면, 신앙적 가치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미 내가 구원 받은 그런 모습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 종말의

때는 어떠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 삶을 찾아보면 되겠지요? 종말의 때는

어떠한 신앙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면서 그 어려움 그것을 세 가지 관점

으로 일곱 개의 봉인, 일곱 개의 나팔, 일곱 개의 대접을 세 가지 관점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를 각 다른 관점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죠.

 

일곱 개 봉인에서는 그러면 종말을 어떠한 모습으로 보는가? 이것은 우리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일곱 개 봉인. 종말의 모습입니다. 일곱 개 봉인에서 볼 수 있는

종말의 모습은 순교자 개념입니다.

 

6장에 보면요 봉인 다섯 개째 뜯으면 뭐가 나타나냐 하면, 제단 아래서 울부짖는

영혼들. 언제까지 저의 피의 복수를 미루시렵니까? 주님. 이런 외침이 나타납니다.

종말의 때는 순교자의 개념입니다. 세상의 고통, 세상의 어려움을 부딪치면서, 이겨

내면서 목숨까지 바치고자 하는 그러한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종말의 때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신학적 가치를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내가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결단을 가지고 세상 일에

부딪쳐 본적이 있으신가?

 

일곱 개 봉인이 말하는 것은, 일곱 개 봉인을 뜯기 시작하면서 죽음과 기근과 전쟁과

이런 세상적ㅇㄴ 어려움을 표현하면서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내가 정말 목숨 걸고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겠다라고 하는 것이 일곱 개 봉인에서 말하는 종말의 때에

드러나는데 이래야, 저래야 되어야 아까 약속했는 거 있지요? 7장에서.

 

굶주림도 없고, 열기도 해치지 못하고, 목마르지도 않고 이것이 주어질 것인데 내가

신앙적으로 정말 간절하게 목숨 내놓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번 있었는가? 우리 신앙이 그만큼 중대한가? 아니면 그냥 취미생활

하듯이 동오회 모임 가듯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사실 입바른 소리 할려면 많이 떨리고 무서워요. 그죠? 신앙적인 가치를 우리 이웃

안에서, 우리 세상 안에서 외치려고 하면 소위 한국은 요즘 막 이념적인 어떤 대립

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한마디 잘못하면 확 바로 그냥 세상에서 많이 욕을 얻어먹는

그런 어떤 날카로운 우리 모습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어떤 의미에서는 더 목숨 내나놓고 내 가치를 지키려는 뚝심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이리저리 휩쓸려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사는 것이 아니라라는 것이죠. "언제까지 우리의 피의 복수를 미루시렵니까?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꿋꿋하게 이렇게 참아야 됩니까? 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순교자에 있습니다.

 

이 순교자가 무엇을 지향하는가? "아이구, 내 못 살겠다!" 그것이 아니라 순교자가

지향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뭘 지향하느냐 하면, "아우, 내 편안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복수라는 개념 우리가 다음 시간에 볼 건데 하느님의 복수라는 개념은

단순히 내가 필요한 것을 이렇게 보상해 주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 하느님의 복수라는 구약의 예언서의

전통에 많이 나타납니다.

 

*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복수': 하느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

 

그러니까 순교자가 내가 무엇을 위해서 목숨 걸고 하는가? 하느님의 정의가 이

세상에 오롯이 펼쳐지는 그런 어떤 모습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종말의 때에

드러나는 것이다. 일곱 개의 봉인에서 볼 수 있구요.

 

두 번째 종말의 때는 어떻해야 되는가? 일곱 개의 나팔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일곱 개의 나팔에서 보면 11장 18절을 한번 읽어보면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묵시 11,18: 모든 민족들이 분개하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진노가 닥쳤습니다.

   이제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에,

   그리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에게 

   상을 주시고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시키실 때가 왔습니다.

 

자, 여기 보면, 지금 상과 파멸이라는 두 주제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종말의 때는 이 상은 누가 받습니까? 승리하는 자가 받죠? 승리하는 자가 받는데

여기 보시면 승리하는 자가 누구냐?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낮은 사람, 높은 사람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 승리하는 자(상을 받을 자) :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죠?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성도들은

겉옷을 입고 흰옷을 입고 그죠? 꿋꿋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가르침, 그분의

가르침대로 꿋꿋하게 따라가는 사람. 그런 성도들 그리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

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

 

경외한다는 것은 어떠한 존재 앞에 나를 온전히 낮추는 것입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인다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이 주어지고

땅을 파괴한 자들은 파멸. 땅을 파괴한다는 것.  하느님께서 창조 해주신 이 세상

만물을 파괴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그분의 섭리를 거역한다는 것이죠?

 

* 파멸을 당하는 자: 땅을 파괴하는 자들(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이 세상 만물을

   파괴하는 자, 그분의 섭리를 거역하는 자)

 

그런 사람들에게 파멸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 상주고 파멸 준다.

구약의 어떤 예언서의 완전한 전통입니다. 상선벌악. 너희들 하느님 가르침을,

하느님 말씀따라 회개하고 돌아오면 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징벌을

받을 것이다.

 

종말의 때에 대한 묘사, 이것이 일곱 개 나팔에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팔이

불 때 파멸과 상을 받는 게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일곱 개 대접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일곱 개 대접에서

바라보는 종말의 때는 어떤 것인가? 15장 2절에서 4절까지를 보면요.

 

* 묵시 15,2: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

   짐승과 그 상과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뜯고,

 

바다 위의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 이게 뭐냐 하면,

짐승은 요한 묵시록의 짐승은 13장에서 보게 될 껀데요. 거기에는 로마에 대한

황제 숭배, 군사적인 어떤 그런 억압. 이런 것들이 다 통칭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 짐승: 로마에 대한 황제 숭배, 군사적인 억압을 통칭함

 

그러한 억압 속에서도 그러한 어떤 로마의 통치, 로마의 억압 그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는 승리하는 자들이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 그들은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노래가 나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을 크고도 놀랍습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거 어떤 노래와? 레지오 하십니까?  마니피캇에 보면

하느님의 뜻이 펼쳐질 것에 대한 그러한 기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보십시오. 아까 제가 이 순교자가 하느님의 정의, 의롭고 참된 것을 드러내는

거기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어요. 그것이 큰 일을 하셨다는 것이죠.

 

* 묵시 15.4: 주님, 주님을 경외하지 않을 자 누구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입니까? 정녕 주님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자, 다른 거는 필요 없습니다. 다른 세상 어떤 것은 억압, 나를 짓누르는 것 다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님 그분 홀로 거룩하시고 그분 이름 찬양하고 찬양하지

않을 자, 경외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와서"

자, 보십시오. 모든 민족들이 와서입니다. 믿는 이들만이 아닌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처사, 주님의 정의가 대접, 여기에 드러났습니다. 온전히 다 드러났습니다.

모든 민족, 보편적 구원인데 구원에 대한 찬미를 하고 있습니다.

 

자, 일곱 개 대접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종말의 때의 특징은 찬미입니다.

찬미. 뭐에 대한? 구원에 대한 찬미. 그것도 믿는 이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구원에

대한 찬미를 일곱 개 대접에서 하고 있습니다. 자, 요 순서대로 한번 보시면

 

 

어려워요. 사실 어렵습니다. 그죠? 그런데 좀 참아라. 상 주실꺼다. 안 그러면 너 벌

받는다. 열심히 살면 구원 받을 것이고 기쁨에 겨워 노래할 것이다. 그렇게 조금만

참아라. 자꾸 참아라 하니까 종교가 이게 어떤 사람이 그랬죠? 종교는 아편이라고.

 

그러니까 아픈데 괜찮다. 괜찮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순교, 이건 아주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적극적인 것. 내가 정말로 꿋꿋하게 버텨서 견디어 내는 것. 아파요.

아프지마는 내 신앙의 가치를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면

상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구원을 받고 보편적인 구원 속에서 내가 기쁨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요렇게 돼 있습니다.

 

요게 구약의 예언서의 전통을 말하자면 야훼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입니다.

이날 상 혹은 심판 이 두 개념이 동시에 주어지죠. 야훼의 날은 6장에서 나옵니다만

하느님 분노의 날, 진노의 날 뭐 이렇게 표현됩니다마는 그 진노는 어떤 이에게는

상이 되는 거고, 정말 어떤 이에게는 그 자체가 벌이 되고 심판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상 받아야 되죠? 기쁘게 노래해야 되죠? 그것을 일곱 개의 이 7의 시리즈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보편적 구원적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죠? 그것을 위해서 이 상을 받기 위해서 요한 묵시록이

아주 재미있는 특징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자, 일단 구조를 한번 볼께요. 지금 우리가 이 7의 시리즈의 중심 주제 그것에 대해서

계속 보고 있습니다. 보편적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이가 어떻게든 돌아오기 위해서

자, 표를 한번 보시면,

 

 

 

7개의 봉인이 있구요. 4장과 5장으로 시작되서 이제 6장부터 이렇게 봉인이 딱

뜯겨집니다. 그런데 출발점을 보면요. 구조를 통해서 우리가 한번 봅니다.

이 출발점을 보면 일곱 개의 봉인을 뜯을 때 어린양이 어디 있어요?
어좌, 천상에 있어요.

 

7개의 나팔을 불 때 어디 있냐 하면, 천상입니다. 8장 2절에서 5절을 한번 보셔요.

천상입니다. 자, 일곱 개 대접을 시작할 때도 천상입니다. 자, 우리가 출발점이 계속

천상, 천상, 천상, 하늘입니다. 하늘. 하늘에서 재겠다.

 

아까 4장, 5장에서 하늘이 어떤 하늘이라고 그랬어요? 하느님과 모든 인간들이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하늘이라고 그랬지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지금 아까

어려움이라고 그랬지마는 순교자. 아까 우리가 봤습니다마는 시작은 지금 그 하늘과

땅이 일치했다라는, 하느님과 일치했다라는 그 천상의 세계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 그 다음에 이제 문제는 심판의 모습이 여기 나타나는데 징벌, 심판의 모습이

등장을 합니다. 심판의 모습이 등장을 하는데 요것이 보면 6장과 8장 사이에서 9장,

그리고 16장에서 나타납니다. 요 심판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가며

분석할 건데 요 심판의 내용이 천상 다음에 나타납니다. 무서운 장면들이. 그런데

요기서 이제 중요한 것, 신기한 것.

 

세 번째 여기 보면, 뭐가 있냐 하면, 침묵기가 있습니다. 뭐의 침묵기?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 일곱 번째 나팔, 일곱 대접 전에 침묵기가. 약간의 갑자기

조용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두가 조용해진다. 이 침묵기를 요한 묵시록은

각 시리즈마다 이렇게 각각 놓고 있습니다. 왜 놓고 있는가?

 

많은 이견들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아까 제가 시작하며 보편적 구원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대해 찬미 노래하고 기쁨을 노래한다고 그랬죠. 요한 묵시록은 지금 출발점

이 하늘과 일치 차원입니다. 하늘에서 기쁨을 노래하고 영광을 노래해야할 장소에서

출발을 하고 있어요. 긍정적 출발이죠.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이 징벌은, 심판은 누구에게? 이런 기쁨을 받아

들이지 않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이들조차도 침묵기를 거치면서 시간을 주는

거예요. 이런 징벌 너희들, 천상에 이런 기쁨이 있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에게는 심판이 주어지는데 그렇지만 심판이 끝이 아니다. 돌아봐라. 이렇게 안

될려면 너희들 한번 생각해 봐라. 침묵을 주는 거예요. 

 

마지막에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구원 노래했던 거 있지요? 목마르지 않고 , 어떠한

열기도 해치지 않을 것이고 굶주리지도 않고 그런 하느님의 약속, 구원의 약속이

마지막에 노래가 됩니다. 여기서 일곱 번째 전에 침묵기가 있다는 것. 이것이 일곱 

개 봉인, 일곱 개 나팔, 일곱 개 대접의 구조 안에서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그렇게 구원으로 왔을 때 우리가 최종적으로 모든 민족이 거니는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 그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이러한 징벌의 마지막 결론의 어떤

모습입니다. 

 

자, 우리가 종합해서 이번 시간에 봤던 것은, 6장부터 펼쳐질 이러한 7의 시리즈의

전체적인 흐름, 전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짚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 6장부터 일어

나갑니다. 이 전체적인 흐름에서 머리 속에 둬야 될 것은 긍정적이고 아주 희망적

인 메세지다. 

 

비록 무서운 장면들이 나타날 것이지마는 그 무서운 장면들은 결국 회개에로 

부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회개로 돌아오면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더라도 꿋꿋이 살아가는 희망,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는 마음으로 또 한 주간을 보내면서 다음 시간을

또 기다려 주시면은 고맙겠습니다. 

 

다음시간 예고: 처음 여섯 봉인(요한 묵시록 6장)

수고하셨습니다.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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