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17강 천상예배,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

윤 베드로 2016. 8. 28. 18:13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7강 천상예배,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

 

찬미예수님, 예, 반갑습니다.

아, 이제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서간 다 끝이 났고 오늘은 우리가 이제 4장, 5장

이제 요렇게 두 장에 걸쳐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 5장은 요한 묵시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 중요하냐? 어린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 29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어린양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 너무 지겹죠? ^^*~~~ 왜냐하면 요한 묵시록은 맨날 예수님,

맨날 예수님.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소도 누구요? 예수님. 누구요?
예수님. 그래서 이 요한 묵시록은 복음입니다. 복음.

 

요한 묵시록은 예수님에 대한 거예요. 미래에 뭐 펼쳐질 미래에 대한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어떤 그것을 다양한 기법으로,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저도 이젠 좀 ... 이제 예수님 그만 나왔으면 좋겠는데...

이 4장, 5장 또 예수님 나오는데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봤던 일곱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을 한번 종합하고 4장, 5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우리가 3개의 교회를 한꺼번에 본다고 되게 바빴어요. 되게 바빴는데

요번 시간 이제 일곱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 다 꼼꼼히 봤지마는 딱 잃어버리시고,

잃어버리셨죠? 벌써.^^*~~~ 예, 용량이 별로 안 되기 때문에 ^^*~~~ 오늘 종합

하는 요것만 좀 머리에 넣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뭐 집에서 쓰시거나 녹음하거나, 녹화하시거나 안 하셔도 되요. 그냥 머리 속에 담으

시면 되요. 예, 적어 놔 봐야 안 본다.^^*~~~ 적어 놔 봐야 절대 보지 않습니다. 제

경험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일곱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 첫 번째,

* 요한 묵시록의 일곱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은 요한 묵시록 전체를 대변한다.

왜 대변하는가? 우리가 봤다시피 여러가지 주제들이 다 요한 묵시록 4장부터 펼쳐

지는 이야기에 다 다시 나온다. 그 다시 나오는 모든 주제들이 일곱개 서간에 다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일곱개 서간을 보면 요한 묵시록 전체의 주제를 다 알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색깔과 관련된 거. 뭐죠? 흰옷. 흰옷을 한번 보겠습니다.

자, 처음에 흰옷이 없어요. 그런데 처음에 흰옷을 입고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긴 예복 같은 거를 입고 등장하시는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서간에 그래서 누구에게 흰옷을 주시고자 하고 흰옷을 입으라고,

옷 더럽히지 말고 흰색으로 좀 하라고 누구에게 하냐하면, 누구라고 할까요?

성도들이죠. 신자들이죠. 구체적으로 일곱개 교회의 어떤 신자들이죠.

 

우리가 신자라고 합시다. 지금 이게 흰옷을 가지고 한번 보거든요.

예수님이 오시고 신자들에게 흰옷을 입으라고 하시고 그 신자들이 흰옷을 입으면

나중에 천상 예루살렘에 가서, 21장, 22장에 보면,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어떤

자격 그것이 흰옷 입은 신자들이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겁니다.

 

자, 일관되게 흰옷이라는 주제, 우리 흰돌도 나오지 않습니까? 흰색이라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 신자들이 그것을 입었을 경우에 천상 예루살렘 여기는 뭐냐?

예수님+ 하느님+ 신자. 예수님과 하느님이 나눠져 있는 이원론적인 신 개념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시죠? 한 분 하느님이신데 어린양이신 예수님, 옥좌에 계신 하느님

그리고 신자가 일치되어 있는 천상 예루살렘. 그래서 우리가 대표적으로 그 교회의

어떤 모습,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서 너희들이 흰옷을 입고 승리해라. 승리해서 일치

해라라는 것이 흰옷이라는 그 하나의 표징을 가지고도 충분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이 입고 계시니까 우리 예수님 닮으라는 것이죠. 예수님과 하나

되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서간문에 흐르는 전체 주제고 결국엔 요한 묵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겠다.

 

예, 그 다음에 인제 나오는 것이 화관, 생명, 그 다음에 생명의 책도 나오고요.

뭐 이런 것들 다 천상 예루살렘에 관련된 것이죠. 이것(예수님+ 하느님+ 신자: 일치)이

곧 생명이고 일치가, 친교가 곧 생명이죠. 이 일치를 위해서 신자들이 흰옷을 입어야

되는데 흰옷을 입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신자들이 인내하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거 많이 봤죠? 사랑하고 봉사하고 이  전체를

계속해 나가는 그것이 곧 믿음이죠. 믿음은 그래서 곧 충실성이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신자가 충실히 살아갈 때 일치하고 여기서 생명을 얻어 내는 것.

 

생명수는 뭐 우리가 뭐 이렇게 해서 내가 천 년 만 년 건강하게 사는 그 생명이 아니라 

일치입니다. 일치의 개념이 곧 생명이라고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요런 주제들이

서간문에 딱 있다. 뭐 여렵게 생각하실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우리가 봐야될 것이 이러한 일치 흰옷의 요 구조 있죠? 여기에

반대되는 구조가 뭘까? 반대되는 구조가. 이렇게 충실하지 않고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고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그런 개념에 연결되지 않는 반대는 뭡니까?

 

흰옷을 더럽힌다. 그것이 뭐였죠? 이제벨과 같은, 발람과 같은 우상숭배. 그러니까

예수님과 친교를 이룬다는 건 생명으로 간다고 그랬죠? 우상숭배를 하면 죽음이고

이제 예수님이 강한 심판을 합니다. 특별히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 )

라는 강한 표현을 우리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서 봤습니다.

 

이거는 단절이죠. 친교가 아니라 죽음은 곧 단절을 의미합니다. 요 주제 그러니까

친교, 일치를 이루는 주제가 있고, 반대의 주제도 이 단절, 예수님과의 갈라짐 이런

주제 이 갈라지면 뭐가 됩니까? 우리 그 이제벨 이야기 나왔을 때 "병상에 던진다."

"침대에 던져 버린다." 환난이 오고. 완전히 그런 어던 죽음이 오고 그런 쪽으로

우리가 간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분명히 심판 이런 것도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자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에게 뭔가 구원을 주십니다. 여기에 너무 이렇게 해서 모든 게 사랑이고,

예수님만 떠올리면 무조건 너그러이 용서해야 되고. 물론 하느님께서는 대자대비

하신 분이고, 사랑 자체이시고 그런 분이시죠. 그런 신적인 어떤 부분을 갖고

계시죠.

 

그러나 이것이 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심판, 정의의 개념이 사라진 사랑 개념은

예수님의 모습이, 하느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의 위에 놓여진

것이지 정의든, 불의든. 우리 표현이 있죠? 너희들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다. 미지근하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사랑이어야만 하는 거예요. 내한테 못된 소리하면 하고 심판하시면 절대 안 되요.

하느님은.

 

요즘들어 우리 모든 사조가 그런 식으로 많이 쉽게 흐릅니다. 쉽게 생각 할려고 하고

편안하게 생각할려고 하고 조금 아프고 힘든 것은 거부하는 것이 우리 요즘 어떤

신학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에서도 예전엔 정의의 하느님, 정의로움을

강조했다면 지금은 사랑, 이런 구원쪽을 강조하는 경향들이 너무 강해요.

 

그렇게 강하다보니까 정의, 심판 개념이 아주 사라졌어요. 중세 때는 완전히 심판

개념만 막, 그래서 협박하는 어떤 수준까지 갔습니다. 그쪽으로만 너무 가도 문제가

되지마는 사랑쪽으로만 가도 그거는 큰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의 어떤 대립되는

구조를 늘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 친교, 이 생명을 위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것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깨어 있다."라는

것으로 제가 한번 설명을 할까 합니다. 깨어 있어야 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한번 친교를 이뤘다고 해서,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얻어 누렸다고 해서,

지금 느낀다고 해서 그것은 그 순간일 뿐이죠.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제가 중간에 한번 그런 말씀 드렸죠? 지키고, 돌아보고, 또 가르침을 한번 생각해

보고 지속되는 동사라고 그랬습니다.

 

그 지속되는 거를 계속해 나가면서,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해야 되는 게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회개하라, 이례적인 사건, 유일한 사건 그것이 지속되는 것

안에서 계속해 나가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봤을 때 우리는 이 친교와 생명을 나

누기 위한 신앙을 계속해서 우리는 만들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새 이름, 새 예루살렘, 선물로 주어지는 새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새롭게

여길 수 있도록 내가 계속 쇄신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새 이름, 새 예루살렘 이

거 맨날 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계속 하느님을 새롭게 만날 것인가? 어제 하느님 다르고 오늘 하느님

다르고 그 하느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거를 한번 고민해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어떠한 그 신심 활동이라든지 여러 가지 기도라든지 뭐 피정이라든지

그런 곳에 가서 좋은 신부님, 좋은 영성가 뭐 좋은 수녀님, 이런 강의 등을 그곳에서

듣고 그럴 때는 너무 감동 받고 그래요. 그런데 집에 왔을 때는 허전함이 가득해요.

 

거기서는 뭔가 정말 기쁨 충만 뭐 이런 상태였는데 돌아와서 자기 꼬라지 보니까

영~ 이 시원치 않거든요. ^^*~~~ 그래 다시 그곳으로 갑니다. 자꾸 찾아가요.

그러다보면 이거는 예수님과 친교, 일치, 생명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죠. 이것도

하나의 우상숭배가 되죠.

 

* 매 순간 내가 되돌아 보면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그 순간 순간이 새 예루살렘,

새 이름을 얻어 누릴 수 있는 그 자리임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게 어렵죠.

그래서 믿음은 늘 인내와 함께 요한 묵시록이 표현하고 있다. 그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일곱개의 교회에 보내는 그 서간의 어떤 종합 어떤 요 개념을 머리 속에 넣고

요것만 딱 넣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4장부터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을 보면요. 이 4장, 5장이 같이 봐야 되는가?  4장에는 보면, 옥좌에,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보이기 전에 어떻게 뭐가 시작되냐 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 이리 오너라. 올라 오너라. 그럽니다.

자, 지상과 하늘, 묵시 문학의 어떤 장소적 구조 자체가 하늘은 쉽게 말해서 좋은 것.

지상은 나쁜 것. 그런데 요한 묵시록에서 이 지상에 있는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건 뭡니까? 하늘과 땅이 우예 된다고요?


 

예, 우리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뭐가 내려오죠? 그죠?

예,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다. 하늘의 문이 열린린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다 묵시 문학을 보면요. 하늘에서 뭐가 싸~악 내려와 가지고

* 다니 7,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되게 이렇게 권위적이죠. 이렇게 뭔가 내려오는.

 

그런데 "야야, 올라온나!" 되게 포근한 느낌이 있죠? 운동이 이제 거꾸로 되죠?
위에서 뭔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불림을 받아서 가는.

예, 하느님을 만납니다. 가서 보면 모를 보러 가느냐? 이 어좌를 봐요. 어좌를.

요게 4장입니다.

 

어좌에 누가 앉아 계십니까? 하느님. 옥황상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어좌를 4장에서 보여 줍니다. 어좌에서 어떻게 되어 있느냐? 어좌에 대한 소위

누가 주변에 뭐 있고, 이래 나타나있고요. 5장에는 뭐가 있냐하면, 어린양이 등장

합니다.

 

자, 구조가 이렇다는 거죠. 땅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의 문이 열렸고, 하느님을

보고, 그 다음에 그 하느님 자리에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이 전체적인 흐름이 그

하느님 자리에 어린양이 등장힙니다.

 

이 전체적은 흐름이 땅에서부터 와서 어린양인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는 4장,

5장의 구조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가장 그리스도론의

대표적인 장을 뽑으라고 그러면은 4장, 5자입니다.

 

예, 그래서 왜 이렇게 구조를, 구성을 이렇게 해 놨는가? 왜 하느님을 통해서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을 설명하고 어린양으로 갔는가? 어린양부터 제일

중요하면 어린양부터 바로 하늘로 올라가보니 어린양이 있더라, 예수님이 있더라

그러면 되는데 왜 이래 놨는가? 요한 묵시록의 고민이죠. 이것이. 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유다인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죠.

 

*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유다 전통을 완전히 섭렵한 요한계 학파라고 추정된다.

 

그 유다 전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 전통에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결국에는 하느님이죠. 유다교, 유다이즘에 제일 중요한 게 한분 하느님이 제일

중요하죠. 그런데 이 유다 전통을 가진 이 요한 묵시록의 저자들이 어떻게

어린양을, 예수 그리스도를 한분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게 숙제인 거예요.

 

한 분,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활동 하시고 우리와 함께 사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이분이 어떻게 한 분 하느님과 같은 분인가? 이게 진짜

숙제인 거죠. 그래서 그것을 이렇게 강조하기 위해서 이분은 진정 하느님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

 

요 어죄 4장에 나타난 것은 구약의 하느님의 모습을 다 담고 있습니다. 조금 있다

볼 껀데 다 담고 있는 이 하느님이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한번 4장, 5장의 이런 연결성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4장, 5장을 왜 같이 봐야 되는지를 한번 보시면,

* 묵시 4,1: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무슨 목소리예요?

예,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는 예수님의 목소리죠.

*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예수님)의 목소리

 

이 예수님의 목소리가 일곱개 교회에 뭐 써보내라라면서 뭐뭐뭐 하는 이가 말한다

라고 했을 때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입니다. 계속 예수님이 주는 같은 목소리죠.

4장을 시작하는데 어좌에 계신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누가

말하고 있어요? 목소리.

 

* 묵시 4,1: 곧 나팔 소리 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 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요기를 딱 보시면, * 묵시 4,1: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 자, 어좌가 나왔어요. 그죠?

하늘의 처음 목소리가, 예수님이 인도해서 올라가니까 처음 본 것이 어좌죠.

 

자, 5장을 한번 볼께요. 5장을. 5장 1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 묵시 5,1: 그리고 나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 손에...

 

4장도 어좌로 시작하고 5장도 어좌로 시작합니다. 어린양 예수님도 하느님이고,

어좌에 계신 분도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자, 이 둘을 누가 엮어주나? 아까 목소리

라고 했습니다. 예, 같이 같은 구조를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5장 7절을 보면요.

* 묵시 5,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자, 어좌에 앉아 계신 분에게서. 자, 이 구절과 똑같죠? 어좌에서 어린양으로. 뭐를?

두루마리입니다. 두루마리는 조금 있다가 설명하기로 하고 어쨌든 이것을 어좌에서

부터 어린양이 넘겨 받습니다. 그전에 어린양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어좌 한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두 부분은 살펴볼테니까 구체적으로 머리속에 지금 두어야될 것은,

아, 어좌하고 지금 자꾸 관계를 짓고자 하는구나.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구나.

그 정도만 머리속에 넣으시면 되겠습니다. 두루마리와 연결되어 있구요.

그 다음에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가 중요합니다.

 

4장에 보면요. 어좌가 있구요. 4장 4절부터 보겠습니다.

* 묵시 4,4: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다."라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뒤에 나오는 것이 6절 후반부에  * 묵시 4,6: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자,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어좌에 싸고 있습니다. 요 존재가 고대로 어디로 가느냐

하면, 5장 8절에 보면, * 묵시 5,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어좌에 앉으신 분 주위에서 그렇게 있었던 존재가 어린양이 활동하는데도

똑같이 같이 있습니다. 그죠? 이렇게 똑같은 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일이 찬미하고 노래 부릅니다.

 

4장부터 보겠습니다. 4장 8절 후반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묵시 4,8: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이라고 외칩니다.

 

자, 5장 13절을 보면요.

* 묵시 5,13: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자, 같이 노래를 요렇게 했지요? 4장에서 요것이 또 똑같이 등장을 합니다.

4장 11절에,

 

* 묵시 4,11: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 이것을 드릴 수 있는 거는 구약 전통에서 오직 유일하신

하느님에게 보냈던 건데 5장에 보면 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에게 동시에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했던 것 그게 뭐냐? 어린양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어린양

이고... 그러니까 4장을 왜 요거를 표현했는가?

 

요한 묵시록을 쓰신, 만드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부터, 전통에서 계속

계시되어 왔던 진짜 하느님임을 하기 위해서 구약 전통을 싹 다 가지고 예수님께

적용시켜야 되겠지요? 자, 그래서 우리가 4장에 나타나는 하느님이 구약 전통 어떤

전통을 4장에 담아 놓고 있는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전통이 예수님께

어떻게 향하고 있는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4장부터 한번 보면요. 4장은 쉽게 이야기 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여러분들 직접 보셨습니까? ^^*~~

적어도 여기 한 30년, 40년 신자 생활 하신 분 계시죠? 예, 아직도 못 보고 신앙생활

했겠네요. 그러면 ^^*~~~ 예, 하느님을 보고 싶다. 정말 뵙고 싶다라는 강한 어떤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예요.

 

가끔씩 그래요. 아, 답답할 때는 기도 중에 뭔가 하나 탁 나타나셨으면 믿어버릴 건데

안 나타나니까 있는가 없는가? 할 때도 있고. 이거 신부지만 솔직한 고백입니다.

신학교 갈 때 고등학교 3학년 때 "아, 이 결혼도 못하고 들어 갔다가 하느님 없으면

참 답답할 노릇일꺼거든요. ^^*~~ 그래서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느님이 계시나

안 계시나 이런 질문까지 가게 되더라구요.  내가 신학교 들어가야 되느냐?

 

이런 고민할 때 하느님 존재의 문제까지 제가 고민을 하게 되는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해서. 인간으로서의 제 자신을 바라밨을 때에

매일 미사를 봉헌 하지마는 그 미사 때 빵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진짜 하느님일까?

이런 의심 솔직하게 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 부족하고.

 

그러나 이 성사라는 것, 하느님의 어떤 이 오심을 인간적으로 내가 있다, 없다라고

결정할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컨대 태평양에 섬이 있습니다. 내가 있다, 없다

모르는 건데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건 마치 하느님이 인간보다 워낙 뛰어나시니

내가 있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조금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행동

이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뵙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굳이 봐야만 믿겠다라는 것이 조금. 그렇게 또 반성하며

또 넘어가고. 이 체험, 우리가 서간문에서 봤던 사랑의 체험, 사랑하는 모습 안에서

하느님도 나타나시고 하느님의 뜻이 실천 되는 것. 그래서 내 할일이나 제대로 하자.

늘 결론이 그렇게 나갑니다.

 

남이야 우째던 간에 하느님께서 내가 한 행실대로 갚아 주신다면, 내 행실이 곧

하느님과 나를 엮어 놓는 어떤 끈끈한 끈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을 보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집착을 합니다.

구약을 보면 하느님을 보고싶어 난리인데 그런데 "하느님을 보면 죽는다." 하고

너무 거룩하신 분이니까. 이 약간 모순적이지요?  보고 싶은데 보면 죽는다고

율법으로 딱 이렇게 해 놓고.

 

그런데 이것은 두 전통이 있는 거 같애요. 하느님을 뵙는데 있어서.

예컨대 하느님을 보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요? 구약은 우리가 너무 잘 알죠? 그죠?

예, 탈출기 33장 20절에 보면,

 

* 탈출 33,20: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왜?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요런 전통이 있는데

모세는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했다. 뭐처럼? 친구처럼.

 

자, 왜 이런 극단적인 다른 게 있을까?  예컨대 야곱을 한번 보십시오. 밤새 뭐 합니까?

하느님과 맞대면 하고 이스라엘이라고 이름도 바뀌고. 그죠?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도

판관 13,22에 보면,

 

* 판관 13,22: 그래서 마노아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뵈었으니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

 

아, 큰일났다. 나 하느님 봤다. 죽을 거 같은 거예요.

봤어요. 진짜. 그런데 보면 안 된다. 죽을 것이다.

안 죽었어요. 야곱, 모세,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안 죽습니다.

왜? 두 개의 전통이니까.

 

그래서 구약을 읽을 때 보면 여러가지 전통이 뒤섞여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하나의 관점으로, 하나의 논리도 적혀진 책이 절대 아닙니다. 그죠?

이스라엘 안에서도 부딪친 거예요. 하느님을 친구처럼, 아니다 하느님은 너무

거룩하다.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이사야 예언서에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세번 하지요? 세번 하면 무조건 거룩한 거예요. 나와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 식의 전통이 있는 반면에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하는 전통도 있었다.

예수님은 어떤 전통을 취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

 

율법에도 두 축이 있습니다. 두 흐름이 있습니다. 샴마이와 힐렐이라는 두 어떤

축이 있습니다. 이 축은 하나는 보수적이고 하나는 되게 개혁적이고 개방적입니다.

 

* 구약 율법의 두 축

   샴마이: 보수적   힐렐: 개방적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보면요 개방적인 힐렐의 가르침을 많이 따릅니다.

힐렐의 가르침이 뭔가? 모든 것이, 그 율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도 가서 실제로 네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라."라는

것이 율법의 모든 종합이라고 힐렐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르는 대로 너도 남에게 해 주어라."

바로 그건 것이지요. 예,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구약의

전통, 그러나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거룩하게 만드는 것. 이거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일반 서민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너희들 믿는 이들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너희들 뭐해요? 속죄를 해야 한다. 속죄는 누구를

통해서? 사제를 통해서. 사제는 그래서 대단하다. 특별히 사제는 일년에 딱 한번

성전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현존을 만날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마라. 특히 여자들, 들어오지마! 여자들은 사람이

아니죠. 여인의 뜰 해 놓고 이스라엘의 뜰 해 놓고. 이스라엘의 뜰에는 남자가

들어가요. 고로 여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

 

예, 성전의 구조가 사회의 어떤 구조를 나타내는데 그 얼마나 차별적 요소가

강합니까?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고 하느님을 아무도 함부로 못 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직접 보여주는 모습. 이 하느님의 가시적인 모습.

여기에 대해서 제가 조금 길게 이야기를 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하나의

문이 열려서 인간 요한이 올라가서 어좌를 보고 하느님을 직접 대면합니다.

 

이것은 사제를 통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중간적인 어떤 특정 계층을 통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파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대사제와 사제들이.

우리가 사제가 있고 평신도가 있고 수도자가 있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고유한

역활을 분담하는 것이지 그것이 계급이 절대로 아닌 것이죠.

 

계급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만약에 군림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계층이

그것은 제가 단언하건대 사이비입니다. 그거는 그리스도교가 아니죠.

아무리 신부든, 주교든 아무리 교황님이든.

 

예, 교황님 중에 한분이 나는 종들의 종이라고 그랬죠? 교황님이 그러셨는데...

그 표현이 뭐냐? 우리는 다 형제 자매의 개념이죠. 하느님 백성은 평등한데

고유한 역활이 뭔가?

 

요한이 직접 어좌의 하느님을 봅니다. 자, 이 가시적인 하느님의 모습.

이것은 4장에 나타나는 것은 구약의 4가지의 신적 현현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다 담아냅니다. 자, 구체적으로 한번 보자면,

 

4장을 우리가 쭉 보면요. 올라와라 해서 성령에 사로 잡혀서 보게 되는데 거기에

보면, * 묵시 4,1: "이리 올라오너라." 라는 표현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첫 번째, 탈출기 3장 구약의 신적 현현의 모습은, 3장에 무슨 내용이 있길래?

여기는 뭐겠습니까?

 

* 탈출 3,5: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예, 뭐가 불타고 있고...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신을 벗으라고 하죠? 거룩한 곳이니.

"이리 와라."라는 그 어떤 이리 오너라. 이쪽으로 와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

예, 이거 신을 벗는다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제가 처음에 유학 갔을 때, 한국엔 신을 벗고 들어갑니까? 신고 들어갑니까?

집에. 벗고 들어가죠. 그런데 거기는 신고 들어간단 말이죠. 아, 싫더라구요.

프랑스는 개똥이 많아요. 이렇게 길거리에 ^^*~~~ 개똥 밟으면 발 막 이래

비비고 해가지고 방에 들어오거든요. 어우, 너무 싫잖아요.

 

그래서 제가 신발 벗으라 소리 하기에는 좀 너무 까칠한 거 같고, 좀 문화에도

적응도 못하는 거 같기도 해서 제 방문에 뭐라고 적어 놨느냐 하면, 이 탈출기

3장의 이야기를 적었어요.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시오." ^^*~~~

그래서 같이 사는 신부님들이 웃으면서 신발 벗고 들어오던데...

예, 제 방은 신발 벗고 들어 왔어요. 거룩하다고 ^^*~~~

 

그런데 이 탈출기 3장에 어떠한 불타는 떨기의 어떤 모습, 그 앞에 하느님께서

이제 처음으로 드러내시는 거죠. 야훼 하느님이. 거기에서 신발을 벗어라. 그리고

이쪽으로 와라. 초대하는 것. 그 모습이 4장 1절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리 올라오너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불타는 떨기에서도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앞으로 뭐뭐 이렇게 해라라는 계시가 시작하는 것이죠.

자, 그 다음에 보면, 4장 5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 묵시 4,5: 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을 탈출기 19장에 보면요. 이게 뭐죠? 시나이 산에 모세가 이제 올라가고

왔다 갔다하고 이런 시나이 산에 하느님께서 등장하실 때 보면 뭐가 나타난다고요?

예,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라는 이 표현, 이것이 탈출기 19장 16-19절까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나이 산이죠.

 

* 탈출 19,16-19: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나타나시다.

 

그 다음에 4장 5절에 일곱 횃불, 그거는 시나이 산이 어떤 벌겋게 불나는 것처럼.

아마도 이 자연 현상이, 석양이 지고 이렇게. 시나이 산 성지 순례 가보면, 빨갛게

이렇게 된다고. 저는 안 가봤습니다마는. 그런 어떤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 등장

하셨다. 과거 그 어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봤을 때 하느님의 어떤 그런

모습과 같다라고 생각을 했을꺼예요. 불이 확 났다기보다는. 하여튼 그러한 표현들,

그러한 것들이 하느님께서 등장하는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4장 8절에 보면, * 묵시 4,8: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요렇게 돼 있습니다.

 

자, 요기에 보면, 4장 8절에.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이분은 누구신가?

이분은 야훼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야훼'라는 표현.

예, 요 구절을 탈출기 3장 14절에 보면, 야훼라는 뜻을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야훼라는 뜻이 뭡니까?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첫 번째, 시간적으로 해석이 됩니다.

야훼는 '이다'입니다. 야훼는 이다인데 현재형입니다. 현재형이다.

나는 이것이예요. 나는 무엇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무엇이다라고 했을 때

무엇에 묶여 버리면 안 되죠. '나는 있는 자 그로다.' 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데 그냥 '나는 이다'예요. 영어의 be 동사예요. 그럼 현재형이예요.

지금 이다.

 

두 번째, 이거는 또 미래형으로 번역이 됩니다. 야훼라는 말은 미래다.

지금 내가 무엇인 동시에 앞으로도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도 무엇이었고

지금도 무엇이고, 앞으로도 무엇이다. 그러니까 그 어느 순간에도 규정할 수 없는

규정될 수 없는 분이 야훼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늘 현재하는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그 언제에서도 그 어떤

때에서도 현재 하느님이시다. 미래형은 그런 하느님을 속박하고 규정하고 개념화

시키는 것을 하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이 탈출기의 어떤 하느님의 등장하실 때

모습 그것을 드러내고 있구요. 다음에 4장 8절 아까 읽었던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요거? 뭡니까? 이것을 보면요.

이사야서 6장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을 되게 거룩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 이렇게 만드는. 미사 안에도 들어와

있죠. 그죠? 예, 그러한 어떤 모습을 우리가 참고해서 볼 수 있겠구요.

 

4장 6절에서 8절을 보면, 네 생물이 나오죠? 네 생물은 에제키엘서 1장에 보면,

유배 시기에 크바르 강가에서 어떤 환시를 보는데 그때 네 생물이 어좌를 받치고

이런 어떤 모습이 나옵니다.

 

* 에제 1장: 제삼십년 넷째 달 초닷샛날이었다. 나는 유배자들과 함께 크바르 강

   가에 있었다.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보았다.

   ...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이건 뭐 실존하는 그런 거 보다는 신화와 같은,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우리 뭐

쉽게 이해합시다. 절에 가면 사천왕 있지요? 왜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막아서는 어떤 그런 존재들 아닙니까? 그런 어떤 것처럼 네 생물

역시 어떤 신화적 존재로서 그런 어떤 하느님의 영역, 그 하느님의 환시를 보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영역을 가리키는 어떤 그런 경게로서의 어떤 존재. 그런 어떤

존재가 에제키엘 1장에서 유배 시기에 크바르 강 가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요 네 가지가 구약에서 하느님이 등장하는 어떠한 모습이죠. 요거를 고대로

묵시록 4장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하느님. 이렇게 구약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냐? 4장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 세상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 묵시 4,11: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

나고 창조되었습니다.

 

자, 만물을 만들었어요. 5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창조주 하느님을 이렇게 해나

놓고 이 만물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답부터 들어갈께요. 바로 어떻게 되느냐하면,

5장 2절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 묵시 5,2-3: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 문제가, 새로운 문제가 생겨냐죠? 만물을 다 만들어 나 놓고,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 그런데 그부분에 문제는 뭐냐? 어좌에 앉으신 이분, 창조주 하느님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계시는데, 오른손에 가지고 계시는데 누구 열 사람이 없는거예요.

지금. 만물은 우리에게 다 펼쳐져 있어요. 그런데 이것에 대한 이해를 하고 깨닫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알려줄 것인가? 하느님과 인간에게 어떤 거리감이 있는 것이죠.

만들어 주신 세상 이것을 알 수 있는 것.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요한이 어떻하냐?

울어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요한이 슬피 웁니다.

 

* 묵시 5,4: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슬피 운다는 것은 인간적 한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어디에 없다?

* 묵시 5,3: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 묵시 5,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자, 여기 보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요 표현은 구약에서의 표현이죠?

유다 지파, 다윗 가문, 메시아 이거 다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사자, 곧 다윗의 뿌리는,

* 구약에 나오는 개념: 유다 지파, 다윗의 가문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뭐 어떻게 나온다. 그 메시아의 가문, 전통적으로 얘기하는.

거기서 나온 사람이 누군가? 구약의 전통을 지금 자꾸 가지고 오죠. 가지고 와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

 

* 묵시 5,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자, 우리가 다시 한번 보자면, 창조주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을 구약 전통을 가지고 와서 다 설명해 놓고 다 드러냈는데 숨겨진 무엇이

있습니다. 무루마리가 있습니다. 장소적으로 한번 볼께요.

 

자, 여기 어좌입니다. 어좌라고 했을 때 여기 하느님 계시죠. 여기.

그런데 두루마리가 있어요. 이 두루마리는 딱 봉인되어 있어요. 열 수 없어요.

그런데 열 수 있는 사람이 등장을 했어요. 누구? 메시아.

구약에서부터 메시아라고 이렇게 가르쳐 준 유다지파, 다윗의 뿌리.

예수님이예요. 예수님이 요 안에서 같이 있어요. 어린양.

 

 

 

 

장소적으로 같이 되어 있어요. 이게 어좌인데 여기에 하느님 계시고, 두루마리도

있고, 어린양도 여기에 함께 있습니다. 자, 장소적으로 이렇게 배치되어 있는 거는

뭐냐? 하느님이 곧 어린양이고, 어린양이 하느님이시다. 이 어떤 관계.

 

그런데 문제는 두루마리입니다. 아직 신비스럽게 닫혀진 것이 있다.

이 두루마리가 뭘까? 이제 한번 보겠습니다. 요러한 같은 하느님으로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시는가 보면요.

 

* 묵시 5,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여기에 보면 어린양이 뭐 어떻게 있어요? 살해되었으나 어떻게 돼 있다구요?
살해되었으나 서 있습니다. 자, 어린양이 어좌에 계신데, 어좌에 있다는 것은

이 장소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뜻이죠? 하느님인데 어린양이 어떻게

있냐하면, 살해되었으나 서 있다.

 

자, 살해는 죽음이죠? 예수님께서 죽음은 무슨 죽음이요? 십자가죠.

서 있다는, 예, 부활이라는 동사, 부활하셨다라는 동사는 '일어나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서 있다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을 어린양의 모습에 서 있다.

살해되었으나 서 있다. 살해와 서 있다가 동시에. 그 모습 죽음과 부활은

하나다. 하나의 사건이다라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십가자 상이 곧 영광의 때이고, 들어 높여진,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할 때, 죽음이 곧 죽음이 아니고 영광이 되고 부활의 때라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함께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은 이분이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인데 그 일곱 눈을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자, 여기에

어린양이, 그림을 잘 못그리고 여기에 뿔이 있다고 생각해요. 뿔이 일곱 개 인데

이게 어디로? 어좌가 이제 하늘에 있지요? 이게 하늘인데 요게 땅으로 가요. 뭐가?

뿔이 땅으로 갑니다.

 

땅은 지상이죠?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모든 그거죠. 모든 피조물드이죠.

이 피조물들에게로 갑니다. 뭐가? 일곱 뿔이. 가면 하느님의 영이 간다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늘에 계시고 동시에 땅에 연결되어 있는 땅으로 파견

됩니다라는 표현이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누구에 의해서. 어린양에 의해서 파견되요.

왜 파견이 되요?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모든 민족들을 사서, 뒷부분에 나옵니다.

사서 어떻게 한다구요? 사서 어좌에 계신분께 이끌고 갑니다. 구원이라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땅에 있는 모를 산다?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서, 구원해서 하느님께로 간다.

무엇으로? 당신의 피로써. 피가 뭡니까? 십자가상 죽음으로. 십자가상 죽음이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자리로 우리를 모두 이끌어 주신다. 이끌어 주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5장 마지막에 가서 뭐라고 외치냐?

 

* 묵시 5,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찬미 찬송을 합니다. 모든 땅의 모든 것이 일치를 하게 되고

친교를 이루기 때문에. 자, 이 친교에 있어서 이제 중요한 거는 친교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의 유일한 역활,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는 거죠. 유일한 역활.

 

땅, 하늘, 땅 아래 그 어디에서도 봉인을 열 수 없었다고 그랬지요?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예수님만 이 일을 할 수 있다.

예수님만 믿어야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 예수님만을 통해서 우리가

일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죠.

 

그럼 두루마리는 뭡니까? 두루마리는?

자꾸 제가 일치, 일치 했죠? 친교, 친교... 예수님만을 통해서.

두루마리는 뭐냐하면, 어떻게 일치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겠지요.

많은 주석 학자들이 두루마리를 겉으로 보이는 거는 말아 놨으니까 겉은 보일

거 아닙니까.  앞 뒤로 써 있으니까. 그 두루마리를 구약과 신약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내용이 어찌 되었든 우리는 내용을 앞으로 볼 것이고 두루마리가 지향하는

어떤 표징적 의미는 이러한 연다, 열어서 일치를 시켜 주시는 분은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두루마리는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보고다.

표징이죠. 두루마리를 열면 앞으로 펼쳐질 장면을 6장부터 펼쳐지겠죠?

 

그러한 내용을 다 알고 난 후에 아, 두루마리가 이런 의미구나. 단순히 구약

성경이다. 신약 성경이다. 이런 식의 어떠한 논리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장면들을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 펼쳐질 장면이 뭐냐? 결국은 친교에 대한

내용. 천상 예루살렘까지 나아갈 겁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 모든 내용이 친교에 가는 길에 어떻게 갈 것인가의 과정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자,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6장부터 한번

6장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일곱째 봉인, 일곱째 나팔, 일곱 대접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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