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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5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3

윤 베드로 2016. 8. 28. 17:34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5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3

 

찬미 예수님! 잘지내셨습니까?

우리가 요즘 이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진 가을 분위기도 좀 나고요.

공부하기에 조금 좋아지는 계절로 들어오고 있는데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계속해서

일곱 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 대해서 봤습니다. 몇개의 교회를 봤지요? 일곱 개가

있는데 세 개를 봤습니다. 그죠? 다섯 개가 이제 남았습니다. 다섯 개의 교회가.

 

그런데 뭐 몇 개 봤으니까 이제 됐고 이제 나머지꺼 보면 이제 뭐 메세지를 알 수

있다라는 식의 아, 요거는 했으니까 다음 게 뭐 남았다. 이런 개념보다 앞의 두 개

봤는 건만 해도 우리가 모든 교회 늘 그렇지요. 서간문 제일 끝에 가면 늘 반복됐던

것이 "여러 교회에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라." 한 교회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 다시

말해서 모든 교회 일곱 교회, 모든 교회에 들려오는 메세지다.

 

두개 봤다고 해서 두 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든 교회의 이야기다. 그 모든

교회의 이야기를 또 오늘 페르가몬 교회로부터 해서 한번 계속해서 보도록 하겠습

니다. 오늘 페르가몬 교회에서는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메세지를 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가 또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마는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머리 속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 역시 지금 제가 강의하는 이 내용, 제가 지키고 제가 잘

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제 삶의 어떠한 목표, 지향점이기 때문에 말을

자꾸 해서 그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하는 거죠.

 

내 몸이 내 삶이 말씀과 하나가 되도록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야 된다는 것. 이거

안 되면 우리 지금 이 시간 다 헛수고 하는 거예요. 요한 묵시록 지식 아무리 머리

속에 집어 넣어봐야 "어우, 세상 끝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 이런 식의 이런

잘못된 해석을 가지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내는가? 오늘 페르가몬

교회를 보면은, 서간문에서 또 찾아보도록 합시다.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페르가몬: 일곱 개의 교회 중에 제일 북쪽에 위치하며 350미터의 급한 경사사

                 있는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일곱 개 교회 중에 이 교회 페르가몬을 딱 보다가 제가 오늘 이 방송부터 이제 보좌

신부가 아니고 이제 주임 신부로 주교님께서 발령을 내 주셨는데 제가 간 본당이

언덕 위에 있습니다. 예, 언덕 위에 하얀 집인데 하얀색인데 뭐 조금 정신병원^^*~~

자꾸 떠 올리시는데 언덕 위에 하얀집이라고 하니까 ^^*~~~

 

페르가몬 교회에서 아, 급한 경사가 있고 위쪽에 있는 그런 어떤 페르가몬 도시의

모습 이걸 떠 올리면서 아, 내가 지금 사목해야 할,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그 장소와 비슷한 거 같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살아라고 페르가몬에 보내는

메세지 대로 살아라는 또 하느님의 말씀인가? 계시인가?라는 그런 마음에 또

애착이 가면서 오늘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자, 이 급한 경사가 있는 곳에 불행히도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던 두 개의 교회와

비슷하게 여기도 신전이 있고 황제 숭배를 위한 그런 또 기도하는 장소가 있고

이걸 통틀어서 우상 숭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늘 어떤 교회는 보면, 문제는 일곱 개 교회는 보면서 늘 계속되는 문제는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을 파는 그것에 대해서 지금 경고를 하고 심판을

하고 회개하도록 하고 이 큰 어떤 축이 있다는 거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페르가몬은 특별히 그 에페소와 함께 번창한 도시로서 그 어떤 중요한 어떤

경제적, 정치적 중요한 자리였는데 특별히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많은 신들을

위한 다양한 신전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온천, 온천 그러면 물 따뜻한 물 그죠?

온천을 통한 병의 치유를 했던 그런 어떤 도시였습니다.

 

* 페르가몬: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많은 신들을 위한 제단이 발견되었고 제단

주위에는 물을 이요한 다양한 건축들, 예를 들어 온천이나 병을 낫게 하는 각종

시설들이 있었음

 

병의 치유가 뭐 온천으로 되는 것은 아니죠? 치유 받으려고 하면 우리도 뭐합니까?
뭐 부적 같다 붙이고 또 뭐합니까? 또 이렇게 뭔가 형상이 있고 거기에 빌어야 되고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고 뭐 이런 식의 조금 미신적인 행위들을 많이 했던 곳이

페르가몬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어떤 형상 같은 경우 뱀의 형상이 이렇게 많이 발견이 됐구요.

그런 뱀의 형상을 통틀어서 내가 치유를 받고자 하는 미신적 행위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페르가몬 그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사탄의 왕좌"라는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사탄의 왕좌.

 

우리가 전에 봤던 사탄의 무리라고 봤지요? 그건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고

여기 사탄의 왕좌는 아마도 황제 숭배를 했던 그런 신전을 가리켜서 사탄의 왕좌.

예수께서 하신 말씀보면 완전히 나를 따르지 않는 다른 것들은 가장 강하게 표현

하시죠. 그런 어떤 사탄의 왕좌, 사탄의 무리 뭐 어떻게 하겠다. 이런 거는 믿는

이들이 아닌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막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오면은 "어이구야, 난 어떻하나?" 그 겁먹은 사람들

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예요. 믿음이 있다면 겁먹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죠?

그래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믿음을 주십사 그런 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2,2: 페르가몬 천사에게 써 보내라.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이가 이렇게

                 말한다."

 

자, 앞에 시작하면서 우리는 교회의 편지, 서간을 시작하면서 이 타이틀, 이 호칭

이거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일곱 개의 교회가 시작 하기 전에

사람의 아들의 모습이 나왔었구요. 이 사람의 아들이 일곱 개 교회에 직접 말하는

편지를 써 보내라. 그 다음에 어떤이가 말한다. 다양한 호칭들이 나온다.

 

페르가몬 교회는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이가 말한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졌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까 경사진 급경사에 이르는 페르가몬. 뭔가 이렇게 조금 날카로운 어떤

느낌을 지형적으로 가질 수 있는. 거기에 어떤 맞추어서 이렇게 예수님의 호칭도

다양하게 표현해 내는 어떤 요한 묵시록 저자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쌍날칼? 이거 요한 묵시록 19장에 가면 백마탄 기사가 입에서 나오는

거예요. 말씀을 가리키는 거거든요. * 묵시 19,15: 그분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 칼로 민족들을 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 말씀이 어떻다고요? 말씀이 날카롭다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좋으셔요? 어떻게 좋으셔요?
그냥 마음이 편안해집니까? 저는 맨날 찔리는데 ^^*~~~ 예, 이걸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제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를 읽다가 보면 어우 강하게 찔릴 때가 많아요. 내가 못 살기 때문에, 내가

기쁨에, 사랑에 가득차서 내 삶이 어떤 예수께서 원하시는 어떤 삶을 살아간다고

느껴질 때 이렇게 복음서를 읽으면 사랑의 메세지로 들려요. 그런데 잠시 게으르고

막 이러다가 읽으면 막 이거는 완전히 협박 뭐 이런 느낌 정도까지 들 정도로

날카롭게 들려요.

 

지금 페르가몬 교회에 보내는 건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이가 말한다. 이건 뭔가

대단히 뭔가 잘못된 게 있다. 예수님이 화가 나셨다. 이제 꾸중 한번 쎄게 한번

해야되겠다라는 그런 식의 어떤 모습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 여기보면 * 묵시 2,13: 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안다.

늘 우리가 이 구조를 보셨죠? 일곱 개 구조? 편지, 서간의 구조는 늘 열결됩니다.

누가 말한다. 그리고 니가 어떻게 한지 한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뭐뭐 이거 때문에. 만약에 회개하면 이런 상이 주어질 것이다. 들어라.

뭐 이런 구조가 계속 연결 된다고 이렇게 봤습니다.

 

"나는 니가 어디에 사는지 안다." 어디에 삽니까?

제가 페르가몬 예, 조금 설명해드렸지요? 황제 신전이 있고 뭐 병의 치유한다고

물에 뭐 미신적인 행위를 한다. 이곳이 이제 우상 숭배 하는 곳. 우리 계속 반복

됩니다. 그죠? 예수님을 등지고 숭배하는 곳. 그런 장소에 사는 것을 안다.

 

* 묵시 2,13: 곧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라고 여기 바로 표현되지는 않습니까.

황제 숭배하는 곳에서 니가 어렵게 사는 것을 안다. * 묵시 2,13: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지키고 있다." 내 이름을 굳게 지키고 있다. 이름 석자 붙들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 그러면 제가 한번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름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고 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이 이름 예수님의 이름 그 이름이 뭡니까? 이름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꼭 붙들고 살아간다.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다.

예수님께 속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도 바오로도 그렇고

베드로도 그렇고 이름을 바꾸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그것은 뭐냐? 이제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라는 의미죠. 너의 존재가 바뀌었다라는

뜻입니다.

* 묵시 2,13: 나의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가 사탄이 사는 너의 고을에서 죽임을

                   당한 때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예, 그 꿋꿋한 예수님과의 일치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거는 칭찬이예요. 그죠?

예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안티파스가 누구냐? 안티파스. 전통적으로 보면

* 안티파스: 도미시안 황제 때에 페르가몬 교회의 주교로 전해집니다. 전통적으로.

5세기에 체사리아의 안드레아가 어떤 그런 간접적인 기록문을 남겼는데 페르가몬

교회의 주교였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주교님이 사탄이 사는 너희 고을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주교님이 죽임을

당했다. 순교하셨죠? 자, 우리 교회 각 교구 다 소속돼 계시는데 교구장님이 박해

있어 갖고 돌아가시면 얼마나 목자 잃은 슬픔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믿음을 지켰다. 페르가몬 교회의 어떤 믿음이 대단하죠?

 

대단하데 이 쌍날칼, 이 날카로운 칼이 도대체 어디를 지금 목표로 하고 있을까?

예수께서 어디를 지금 꾸중하실려고 그럴까? 칭찬하고 있는데 지금. 너희 믿음은

너 페르가몬 교회가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한번 계속해서 읽어보자면은

 

* 묵시 2,14: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이제 왔죠?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고 왔습니다. 무엇을 나무라는가?

* 묵시 2,14: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자, 요기 잘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이거 잘못했다. 너에게 몇 가지. 너는 누굽니까?

페르가몬 교회죠? 너는 이것을 잘못했다. 이것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무엇이?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너 전체, 페르가몬 전체가 아니라 너희들 중에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몇 명, 어느 한 부분. 이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자, 발라암이 그러면 누군가?

발라암은 구약 성경을 한번 봐야 됩니다. 발라암은 첫 번째,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묵상해볼 필요가 있어요. 발라암이 어땠길래,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어땠길래, 뭐가 문제길래? 구약 성경에 보면 민수기에 보면,

첫 번째가 발라암 잘했어요. 잘한 게 뭐가 잘했느냐?

 

이스라엘 축복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1. 이스라엘 축복

자, 자기 민족 축복하는데 뭐가 잘못됐어요?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해 주고 있는데.

 

두 번째가, 두 번째는 발라암은 민수 31,16에 보면 미디안 여자들을 선동해서 야훼

하느님을 배신하게 합니다. 야훼 하느님을 배신합니다.

 

* 민수 31,16: 너희가 여자들을 모두 살려 두다니! 프오르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발라암의 말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을 배신하게 하여, 주님의 공동체에게

재앙이 내리게 한 것이 바로 이 여자들이다.

 

2. 야훼에 대한 배신

자, 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 우리 백성, 우리 축복해 주는 것이 어떻게

야훼에 대한 배신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이게 조금 이렇게 상치되는, 반대되는

개념 같죠? 하느님 백성을 축복하는 것이 어떻게 야훼 하느님을 배신하는 거냐?

 

자, 여기서 보면 발라암의 큰 실수는 이스라엘 백성만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민족, 내 가정, 내 이웃,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관심 있어하는 그곳에만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면 되고 나머지 하느님의 뜻은 다른데 있으면 아, 그건 상관

없고 나의 어떤 영역 안에서만 축복을 달라. 그것이 어긋나면 내 뜻이 중요한 거죠.

 

자기 뜻, 그 뜻이 안 되면 야훼 하느님조차도 어떤 의미에서 관심이 없는 거예요.

1. 이스라엘만의 축복. 여기에만 너무 몰두한다면 야훼 하느님께 관심이 없는 거예요.

자, 우리 삶을 한번 이것을 가지고 한번 우리가 평가를 한번 해 봅시다.

이것이(이스라엘만의 축복) 어떻게 잘못하다보면 우리 성당, 우리 본당, 우리 교구.

우리 지역, 우리 동네, 이런 식의 어떤 집단주의가 돼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발라암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잘못은

어디서 출발하느냐? 선민의식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느님 백성으로 나는 뽑히움을

받았다. 우리 민족은. 완전히 우월 의식에 빠져가지고 아무리 하느님께서 다른 어떤

민족을 통해서 뭔가 깨달음을 주시려고 해도 내가 이미 거기에 빠져 있으면 내가 못

보는 거죠.

 

나의 눈에 들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만 바라보려고 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빠져버린다. 그래서 발라암 같은 경우, 자기 고집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우리 가톨릭이라는 말도 보편되다라는 뜻 아닙니까? 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의 모습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는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우리 구ㅜ언을 위해서, 세상 모든

구원을 위해서 예수께서 사셨던 그런 모습으로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체 교회에

대한 구원이고 그 구원을 통한 희망이지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만의

잔치, 우리만의 어떤 행사를 위해서 소위 서로가 안에서 소위 찌지고 볶고 하는

일들이 많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코 우리 발라암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 너희들에게 있다. 페르가몬 교회.

한 사람, 한 무리만의, 한 부분만의 그것을 강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우리 본당에서 살아가시다보면 그런 것들이 있을꺼예요.

 

예를들어, 어느 단체가 잘 된다. 예컨대 뭐 ME나 뭐 그런 프로그램이 많죠?

또 뭐가 있습니까? 꾸르실료 교육, 뭐 성령 쇄신회라고 그럽니까? 그런 것도 많고

또 다른 신심활동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우리만 따로 뭉쳐서 우리 뜻이

관철 안 되면 조금 기분 나빠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간다면,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를 우리가 쌍날칼, 날카로운 쌍날칼로 예수께서 꾸중하신

일이다라고 우리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발라암의 가르침, 그리고 이 발라암과 같이 연결해서 우리가 그 불륜이라는

단어를 여기서 또 사용하고 있습니다.

 

* 묵시 2,14: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발라암은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다.

 

이 뭐 성적인 어떤 단어라기 보다는 '포로네오'라느 이 단어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나만의 뜻,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뜻은 상관 없고 나만의 뜻으로 그것을 내 뜻대로

걸어간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죠. 하느님 아닌 것, 예수님 아닌 것은

우상 숭배예요.

 

따로 뭐 상(像) 하나 갖다 놓고 빌고 그 앞에서 정화수 떠 놓고 뭐 아침 저녁으로

빈다고 해서 그것만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가르침을 어기고 내 뜻을

어기고 내 뜻을 따라가는 그 내 뜻이 곧 우상이 되는 거죠. 그러한 것에 대해서

불륜이라는 단어 포로네오를 씁니다.

 

* 포르네우오(porneu):  불륜, 구약에서 하느님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동사.

 

우리 포로노 영화 뭐 야동 이런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고 뭐 간음하지 마라

십계명에 나옵니다. 굳이 요즘 뭐 대구 시내에도 주위에 모텔에 뭐 낮에 빈자리가

없다는데 그런 식으로 우리가 그런 성적인 것만 생각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개념은 하느님 등진 것도 이게 불륜이라는

거죠.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 같이 이렇게 살아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기는 것 자체가 불륜이다라는 겁니다. 그게 간음이죠. 그래서

되게 힘들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제가 간음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간혹 이런 게 있어요. 야, 이거 나 하고 싶은데... 그런데 배우고 익히고 묵상하고

기도한 것은 그러면 안 되는데... 맨날 나 혼자 싸우다가 나 혼자 지치고 맨날 그

저녁에 성무일도 끝기도 할 때는 "아유, 인간아~ 왜 사나...! ^^*~~~ 이렇게 돼

가는데.

 

예전에 신학생 때 윤리신학 할 때 뭐 세심증도 이것도 죄라고 배웠었는데 너무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는 것도 죄지마는 우리가 어떠한 내 삶을 한번 되돌아 보면서

내 뜻을 못 꺽었을 경우는 어떤 때가 있는가? 분명히 으리 속에는 이것  알아요.

무엇이 맞다라는 거. 왜? 교회 전통상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그랬거든요.

 

하느님의 목소리가 나한테 울려 나오고 있어요. 왜? 내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작품이 저고 우리들인데요.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못하는 그런 모습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 묵시 2,15: 너에게는 또한 니콜라오스파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도 있다.

 

자, 발라암 이야기 했고, 니콜라오스가 나오는데 니콜라오스는 우리가 에페소

교회에서 봤습니다. 니칼라온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죠? 니콜라오스는 초대

교회 부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이상한 이단으로 빠졌다.

니칼라운 말 자체가 백성을 괴롭히고 멸망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 니칼라운: 백성을 괴롭히고 멸망하게 하다.

 

내가 아무리 신부고, 내가 아무리 주교고, 내가 아무리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한 순간에 내 뜻만 고집하면 그거는 곧 백성을 무너뜨려 버리는 그런 어떤 모습을

가져옵니다. 우리 신자분들도 내 한 순간의 판단이 잘못되면, 어떤 좋지 못한

행동으로 신자분들 냉담시킬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야 되고 그리스도의 표징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까 고해 성사도 보고 하루하루 반성할 수 있는 이런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 묵시 2,16: 그러므로 회개하여라.

이제 회개로 넘어갑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가? 자, 여기서는 교회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에 잘못 빠지고 있는, 잘못 이렇게 자기

뜻대로만 움직이는 발라암과 같은, 니콜라오스와 같은 그런 무리들에 대해서

한번 회개해야 됩니다.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페르가몬 교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너희들 중에

그 몇몇 잘못하는 그 사람드을 회개하도록 이끌어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개념입니다. 사회적으로 더 넓게 봐서는 사회의 잘못된 부분, 옳지 못한 부분,

정의롭지 못한 부분 교회가 입 꾹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에게 분명히 질책 하십니다.

 

왜? 예수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으니까요. 가톨릭 신자만 구원하러 오신

거 아니니까요. 개신교 신자만 구원하러 오신 것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구원하러

오셨고 모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벽을 쌓는 그런 것을

없애고 우리 안에서 잘못되는 신자들만 보지 마시고 우리 동네에서 잘못되는 그런

것에도 우리가 이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으로 한번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묵시 2,16: 그러지 않으면(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곧 너에게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

 

자,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가 말했는데 칼로 싸웁니다. 누구와 싸웁니까?

그들과 싸웁니다. 그들은 누구냐? 발라암, 니콜라오스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너희들이 하지 않으면, 너 페르가몬 교회 너희들이 그들을 다시금 회개 시키고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가서 직접 싸우겠다. 그전에 빨리빨리 좀 이렇게 해

봐야 되겠지요? 예수님이 직접 나서시기 전에.

 

우리가 선교라는 개념 안에서도 그 어떤 갈라진 혹은 잃어버린 그런 형제 자매들을

불러들이는 그것도 분명히 필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 묵시 2,17: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계속 반복되는 그 여러 교회들, 일곱 개 교회를 가리키지마는 7이라는 숫자가 보편

적이고 모든 교회다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모든 교회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는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지켜나간다면 그 사람은 승리하는 사람

 

예, 승리하는 사람은 우리 알죠? 요한 묵시록의 승리는 어떤 개념? 이 승리한다는 게

요한 묵시록에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 승리한다는 것은 내가 게임해서, 싸워서

이긴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 승리하는 사람은?

 

* 승리하는 사람(묵시 2,17) : 지금 어려운 것(힘든 것) 안에서 부대끼면서 인내하며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현재형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역사적 배경에서 자주 말씀드렸는데 지금 견디고

꿋꿋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뭐 게임하고 스포츠 경기를 해서 이겼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재 여러분들 또 아파하고 예수님 가르침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라고 고민

하시는 분들 그분은 이미 승리하셨고 그분들 이미 화관을 받으셨고, 생명의 책에

이름 올리셨고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가시면 되겠습니다.

 

* 묵시 2,17: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고 흰돌도 주겠다. 그 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준다? 숨겨진 만나. 만나라는 형상 우리 잘 압니다.

만나. 만나는 딱 떠오르는 사건? 탈출기 안에 광야 생활 할 때 하늘에서 주신 양식.

그런데 '숨겨진 만나'예요. 이거 두 가지로 해석하겠습니다.

 

첫 번째, 유다 전통상 이 만나라는 게 아주 역사 안에서 뭔가 각인 된 게 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양식이기 때문에 유다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냐하면,

 

* 숨겨진 만나(유다 전통):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하늘에서 주시는 은총(선물)을

                                     숨겨진 만나로 이해하고 있고

* 숨겨진 만나(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성찬례

 

그리스도교 안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는 숨겨진 만나가?  먹는다.

잔치, 성찬례. 어찌 되었던 메시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님. 그분을 함께. 곧 일치죠? 친교죠? 그러니까 승리하고 꿋꿋하게 견디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다른 상이 있는 게 아니예요. 괜히 딴 거 기대하지

마세요. 뭐 신앙 생활 열심히 살아냈다 해가지고 딴 게 뭐 와가지고, 금붙이라도

뭐 주시는, 그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죠?

 

기도 열심히 하면 뭐가 뚝 떨어지고. 모 선전 광고에 보니까 뭐 대출한 돈이 툭

떨어지는 뭐 ^^*~~~ 바로 그런 광고도 있던데 우리 신앙적으로 그러면 얼마나

좋겟습니까? 주신이 떨어지는데 조금 막 빌면서 오르게 해 달라.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지마는 예수께서 주시는 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시시 않겠느냐?

 

두드려라. 구하라. 다 아시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신다. 뭐?

성령을 주신다. 성령 주신다는 게 뭐 불이 내려와서 주시는 게 아나라

* 성령은 위로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일관되게 가르쳐

깨우치게 하시고 예수님과 일치시키시는 분(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분)

하느님과 일치, 친교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시죠? 그건 뭐냐? 선물을 주시는

거는 하느님과 일치라는 거죠.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숨겨진 만나를 주고 또 하나를 더 줍니다. 뭘 주느냐? 돌을 줍니다. 흰돌을 줍니다.

흰색? 우리가 묵시 문학에서 색깔 이야기 하면서 흰색은 어떤 의미? 구원, 승리,

영광, 기쁨, 뭐 이런 의미들이 쭉 있습니다.

 

* 흰색(요한 묵시록): 구원, 승리, 영광, 기쁨을 상징

 

흰옷을 입고, 다 구원 받은 이들의 어떤 모습을 보는데 당시 상황에서  흰돌이라는

해석을 한번 해보자면 아주 다양합니다. 어떤 죄인이 있을 때 이 죄인을 석방시킬까,

말까? 이렇게 했을 때 투표할 때 흰돌이 나오면 석방시켜 주자라는 페르가몬의 어떤

그런 분위기였고, 공식 축제에 초대하기 위한, 돌을 가져가면 오라는 거예요. 흰돌을

주면. 그런 게 있고 또 우리 그리스 올림픽 이런 거 떠올리지 않습니까? 경기?

 

이런 경기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진 돌. 그래서 주석 학자들이 아마 요기에서

힌트를 좀 얻은 거 같애요. 어디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 우리는 분명 승리하는 게

경기와는 다른 어떤 개념이지마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대로 세상

꿋꿋이 경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흰돌을 스포츠 경기 할 때마다 이렇게 주니까

사회에서. 그 흰돌의 개념을 요한 묵시록 저자자 아마 그렇게 가지고 우리 신앙의

승리는 이야기 해 온 표현이 거기서 조금 더 해석이 맞는 거 같구요.

 

만나와 더불어 하늘에 속해진 보석이라는.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 온 보석 개념으로

또 해석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뭐 이 중에 어떤 거를 선택하든 여러분 자유입니다.

어떤 학자도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못을 딱 못하였으니까. 다만 흰색

이라는 것. 돌은 단단함. 구원 받은 이의 견고함. 이런 것을 선물로 주어진다라고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 흰돌(묵시 2,17): 신앙의 단단함, 구원 받은 이의 견고함

 

자, 그런 다음에 또 있어요. 이거 완전히 보너스가 많은데

* 묵시 2,17: 그 돌에는그것을 받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이름?)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새로움, 새롭다. 요한 묵시록의 특징이죠?

저 뒤에 천상 예루살렘 갔을 때 새로움은? 새 하늘 새 땅 뭐 이런 거.

 

새롭다라는 거 제가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물건이 새 것이 와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신앙적으로, 영성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것.

아무리 낡은 물건이라도 지금 봤을 때 새롭게 보이면 새로운 거예요. 그리스 말에

정말 객관적으로 옛날 것, 지금 새것 이렇게 하는 게 신상? 뭐 지난 상품 이월전

이런 거 있죠? 그런 개념으로 쓰이는 새 것이 있고 헌것이지마는 내가 내 관점에

따라서 새 것으로 보이는 그런 개념이 구별해서 사용한다.

 

여기서는 새 이름이라는 것은 너는 이미 나의 백성이고 그렇지마는 늘 새롭게,

갈라진 형제들 개신교에 가면 새롭게 하소서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늘 새롭게

하소서. 그러니까 그런 새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것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자에게.

 

승리하는 자는 고정된 하느님 그리고 고정된 어떤 신앙의 감동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매일 매일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는 새롭게 만나야 힘이

있지요? 그래서 페르가몬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그 말씀에 제일 중요한 것은

첫 번재로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신앙을 위해서 북돋아 가면서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자.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제가 주임 신부로써 ^^*~~~ 예, 보좌 딱지를 떼고 ^^*~~~

이래 가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세지가 혼자 발라암과 같이 자기 뜻대로 가는

그런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라 잘못된 거 부축여주고 같이 등 뚜드려 주면서 함께

이렇게 하느님 뜻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안 되겠는가? 그런

어떤 메세지를 제가 묵상을 많이 했습니다.

 

티아티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자, 그 다음에 한번 볼까요? 티아티라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티아티라 교회. 여기서 먼저 그러면 우리가 티아티라 교회에 대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텍스트를 읽고 있으니까 티아티라 교회는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묵시 2,18: 티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자, 요기까지만 읽어 보겠습니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이것도 강렬합니다. 눈에 불꽃과 놋쇠 같은 발. 놋쇠가 아주 당시에는 비싼

그런 어떤 재료지요. 놋쇠는 굳건함, 아주 강인함 그런 예수님의 또 다른

호칭이 나옵니다. 사람의 아들의 형상 1장에 나왔을 때와 비슷하죠?

 

거기 나오는 건데 지금 티아티라 교회에 대해서 한번 보자면 여기서 중요한

거는 계속 반복이 되지마는 황제 신전이 있었고, 뭐 어떻고 또 우상 숭배를

했고 이런 게 반복되지는데 여기서 특별한 점은

 

* 타아티라: 산업화된 도시로 동업 조합이 존재했고 제빵, 염색, 옹기, 가죽,

                  청동 등의 산업이 성행.

 

25절 26절에 가면 옹기 그릇 바수듯이 그는 쇠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라는 옹기가 나옵니다. 옹기 그런 산업도 발달했고 가죽, 청동 제품을 다루니까

놋쇠 같은 이런 쪽으로. 보세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호칭이 그 지역에

있는 어떤 요런 호칭을 요렇게 해 놨습니다.

 

여기보면 이러한 산업들이 다양하게 발전한 도시이기 때문에 뭐가 있냐?

요즘 식으로 하면 노조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동업하는 사람들끼리

일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서 조합을 만드는 거예요. 이 조합을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조합에 안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왕따?^^*~~~ 왕따가 되지요?

 

조합에 들어가면 예컨대 우리 시장에 가보면 어떤 집 문 열었다. 조합비 내고 점포

하나 열었습니다. 자, 무슨 머리가 앞에 먼저 나옵니까? 돼지 머리 앞에 ^^*~~~

사다 놓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들이 그 앞에서 절하고 돈 꼿고. 물론 이거는 문화적

인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정말 돼지한테 빌기 위해서 갖다

놓는 거는 없겠지요?

 

그러나 당시의 어떤 미신적인 어떤 그런 행위들이 이렇게 펼쳐져 있는 그 도시라면

그것을 강요했을 때 그리스도교 신자가 혹은 유다 공동체의 유다인들이 그것을

용인을 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티아티라 교회가 위치한 이 티아티라 여기서는 동업 조합, 그러니까 각

산업의 동종 업종들이 모여 있는 거기에 대해서 들어야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거 아주 경제적이고 실재적인 삶의 어떤 그 모습이거든요.

 

우리가 회사 생활 하시는 분이 많을 건대 이 회사에서, 살면서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은 이렇고, 정의는 이런데  이것이 교회 안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 안의 단체지마는 이것이 무조건 하느님의 뜻에 100퍼센트 그렇게

맞는 단체는 이 세상에 없겠죠?

 

그런 어떤 갈등이 오고 맞느냐, 맞지 않느냐? 했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우리 티아티라 교회를 보면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티아티라 교회는 이상하게 황제 신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뭐가 발견되었냐하면 무녀. 무녀는 뭐냐? 무당 정도로 그러한 무당이 있으면

미신이 있겠죠? 왜 무당이 발달했겠습니까?

 

조합이 있으니까 각 산업마다 모시는 신이 있겠죠? 푸닥꺼리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것을 위해서 이 무녀들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 티아티라" 동업조합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우상숭배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티아티라 교회에서 이제벨이 나옵니다. 이제벨이 무당 같은 역활을 했었거

든요. 구약 성경에서 조금 있다가 한번 보겟구요. 자 한번 보겠습니다.

 

* 묵시 2,8: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 자, 이 표현이 지금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그럽니다. 성부 하느님이 계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 아들 개념을. 왜?

 

신의 아들. 요거 당시 고대 근동에 보면 이건 신이예요. 하느님이예요. 표현상.

어떤 신의 신보다 못한 어떤 아들 개념이 아니라 다 신의 세계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 관계, 아버지보다 좀 못한 이런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지금까지는 다른 표현으로 호칭을 했지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느님이 말한다라고

렇게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 묵시 2,19: 나는 네가 한 일을, 너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안다.

 

나는 네가 한 일, 네가 한 일은 곧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 두 가지. 사랑이 먼저 나옵니다. 니가 한 일 중에 최고로

치는 것은  사랑이다. 요거 요한계 문헌의 특징입니다. 요한계 문헌의 사랑. 사랑이

최고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는데 또 뭐 있겠습니까?

믿음 소망 뭐 있죠? 예, 그래요. 모든 것은 사랑보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요 문장을 보고 너의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오는 거 보면서 좀 반성

되는 게 있는데, 제가 상당히 부정적이예요. 제가. 정말로. 보는 것도 그렇고 이 맨날

맞는 소리하면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자꾸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제 안에 언저부터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살면 살수록 얼마 안 살았습니다마는 살면

살수록 제일 그런 게 비판과 어떠한 이런 잘못된 거 꼬집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거는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 그것이더군요.

 

비판을 하더라도 사랑하지 못할 바에는 비판 안 하는 게 낫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지 내가 비판을 해 가지고 상대방을

바꿀려고 우리에게 삶의 목표가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서로가 비판하는 것은 사랑으로 일치하기 위한 겁니다.

내가 싫어서 나쁜 소리 하는 거는 자기 뜻을 관철시키고 자기 뜻을 설득 시키기 위한

어떤 그런 이것도 우상 숭배일 수 있겠죠. 사랑하지 않을 바에야 입을 다물어라라는

어떤 생각들을 좀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사랑 다음에 믿음과 봉사가 있는데 봉사라는 단어는 여기

한번 쓰입니다. 봉사는 하느님께 대한 어떤 봉헌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되겠구요.

믿음과 인내가 문제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단어는 명사로도 쓰이고 형용사로도

쓰이는데 요한 묵시록에 대부분 만나는 단어가 인내와 만납니다. 믿음은 늘 인내

라는 단어와 함께 요한 묵시록에 사용됩니다.

 

믿음은 내가 편안하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성당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인내해야 할 일이 있어야 됩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것은 내가

참고 견뎌 내야 되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분들 설문조사하면 대부분 성당 왜 다닙니까? 그러면 마음의 평화

이러는데 마음의 평화를 가질려고 성당 오는 것보다 자꾸 말씀드리지마는 산에 가서

이렇게 굿을 하시거나 아니면 뭐 이런 아까 말한 푸닥꺼리를 하시거나 그게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더 오겠지요? 눈에 보이는 것.

 

성당에 와서는 어떤 의미에서 고통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이

그러시는데. 그러니까 믿음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삶의 굴곡을 믿음의

가치로 조금씩 깨닫고 겪으면서 이렇게 넘어 갈 것은 넘어가고 되게 힘들꺼예요.

그러면 힘들 때 마음의 상처를 받고 힘드니까 좌절하고 쓰러지죠. 그래 부딪끼고

다시 일어나고, 일어나고 이것이 승리하는 자, 바로 믿는 자입니다.

 

왜 요한 묵시록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인내라는 단어와 늘 같이 사용하는가?

이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묵시 2,19: 또 요즘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도 안다.

 

티아티라 교회에 예수님이 처음보다 더 많은 사랑, 처음 사랑, 처음 일, 첫 마음.

이것들이 에페소 교회에서 봤죠? 첫 마음이 뭐냐? 예수님과 일치하고 만나는 마음.

"그런데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도 안다." 더 많은 일이라고 우리 성경은 번역해

놨는데 더 많은 일은 처음과 대비되는 너의 마지막 일을 안다. 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마지막 일을 안다. 처음 이 예수님과 일치, 예수님과 만남, 예수님께 오롯한 어떤

신앙. 이러면 마지막 반대되는 것은 뭐가 있겠어요? 그 반대가 되겠지요? 반대.

예수님을 떠나고 등지고 그러는 것.

 

자, 요거 마지막 일을 뭐와 연결하면? 티아티라 교회의 상황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아까 무슨 조합이? 각 이렇게 직업마다 조합이 있다고 그랬지요? 그 미신적 행위가

있다고 그랬지요? 그러면 처음에 예수님께 이렇게 만나고 일치하는 게 아닌 그쪽

조합의 미신적인 행위에 대한 일.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하는 교회이지마는

그러나 그 교회가 마지막 일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떠나는 일이죠. 그 일을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 묵시 2,20: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 불륜을

         저지르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다.

 

자, 이제벨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제벨은 구약 성경에 아합 왕의 아내로 나옵니다.

아합 왕의 아내로 1열왕에 나오는데 이 여자가 시돈인들의 엣바알의 딸입니다.

 

* 1열왕16,31: 아합은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죄를 따라 걷는 것만으로는 모자랐

던지, 시돈인들의 임금 엣바알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에게 가서 그것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

 

* 이제벨: 유다 임금 아합의 아내이며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음행과 마술을 일삼는

               여자로 묘사됨 (2열왕 9,22)

 

* 2열왕 9,22: "예수 장군, 평안하오?" 하고 묻자 예후가 대답하였다.

    "당신의 어머니 이제벨이 온갖 음행과 마술을 일삼고 있는데 평안이 다 뭐요?"

 

이제벨, 외국 여자죠? 예,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아버립니다. 이것도 좀 유다 민족이

받아들이기 힘든데 바알 신에게 막 가서 기도합니다. 거기서 예배하고 그리고 음행과

마술을 일삼는 여자로 이제벨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2열왕 9,22에 보면 음행, 마술을

일삼는 여자로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잘못이 초대 교회에서는 이제벨이라는 형상이 곧 우상 숭배, 하느님 등지는

어떤 무녀, 아까 제가 무당 같은 여인들이 티라티라에 많다고 그랬지요? 거기와 같은

어떤 그런 것과 연결해서 이제벨이라는 형상은 물론 구약의 인물이지마는 아, 지금

우상 숭배하는 무당과 같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예, 이러한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너는 용인하고 있다. 자, 누가 용인한다구요? 너.

너는 누굽니까? 티아티라 교회가 용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주교님의 부인이라는 전통이 있구요. 교회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여성이었다.

 

옛날에는 결혼하고 이랬습니다. 지금 가톨릭 신부들은 결혼 안 하지마는 옛날에는

결혼하고. 제가 배우기는 12세기 지나면서부터 이렇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독신으로

이렇게 바꿨는데 이 여인이 이제벨의 어떤 이름을 빌려서 이 사람을 요한 묵시록이

표현했다. 그것은 우상 숭배, 음행, 마술을 구약에서 했던 그런 이제베의 모습을

지금 겹쳐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자 한다.

 

* 묵시 2,20: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 불륜을 저지

르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다.

 

이 여인이 불륜을 저지르게 한다. 하느님을 떠나게 한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한다. 이 이제벨이 구약에서 했던 모습과 아주 비슷한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 묵시 2,21-22: "내가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지만"

회개할 시간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는 자기 불륜을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라, 내가 그를 병상에 던져 버리겠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병상이 침대입니다. 침대라고 되어 있는데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주로 아픈 사람이죠? 아픈데 무가 아프냐? 지금 보시면

"그와 간음하는 자들도 그와 함께 저지르는 소행을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속으로

던져 버리겠다."

 

자, 침대에 던진다는 건 환난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이 자녀들을"

어디로? "죽음으로 몰아넣겠다." 환난과 죽음으로 이제벨을,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몰아넣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영광을 주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환난, 죽음의 길로 간다.

 

이 완전히 이분법적인 어떤 묵시적인 어떤 구조를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 묵시 2,23: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겠다. 그리하여 내가 사람의

속과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모든 교회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한 일에

따라 각자에게 갚아 주겠다.

 

각자에게 갚아 주겠다. 마태오 복음도 마찬가지고 요한 묵시록 제일 뒤에 가면

우리가 한 행실 그대로 각자에게... 나오지요?  각자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각자가 이제벨이라는 사람에게 붙는가? 니콜라오스파에게, 발라암의 가르침에

붙는가?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거기에 따라서 내가 갚아 주겠다.

보상을 하겠다.

 

* 묵시 2,24: 그러나 티아티라에 있는 너희 나머지 사람들, 곧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자, 여기서 '사탄의 깊은 비밀' 우리 일곱 개의 교회가 모두 영향을 받는데요.

* 사탄의 비밀" 영지주의, 그노시스

 

영지주의, 그노시스 들어보셨습니까? 영지주의가 사탄의 깊은 비밀입니다.

영지주의가 뭐냐하면 약간 이원론적인 어떤 이단적인 사상이예요.

하나의 종파, 사람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영향을 미친

사상적, 정신적인 흐름입니다. 이분법적이예요.

 

뽑힌이들, 아까 제가 선민의식 말씀드렸지요? 우리는 뽑힌 이들이고 뭔가 비밀을

안다. 이런 식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탄의 깊은 비밀, 그거 영지주의는

아니다. 이거죠. 예수님이.

 

자, '사탄의 깊은 비밀'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이 다른 짐이 뭐냐하면, 우리가 바오로 사도가 다른 짐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우상 숭배하지 마라. 그리고 뭐 피들은 고기 먹지 마라. 그 외에는

내가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 다시 말해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말은 우상 숭배

하지 마라. 그 외는 괜찮다. 뭐 이런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것 절대 쳐다보시면

안 됩니다.

 

* 묵시 2,26-28: 승리하는 사람,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겠다. 그리하여 옹기그릇을 바수듯이 그는 쇠 지팡이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그 사람도 나에게서 받는 것이다.

나는 도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

 

자, 우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그랬죠? 처음에 시작할 때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라는 요한 묵시록 말씀 있지요? 아버지의 것을 다 받았어요. 하느님이기 때문에.

자, 곧 아버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승리하는 자에게

도 같이 함께 나누고. 일치죠? 요한 복음에서 봤을 때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위치에 우리가 올라가는 겁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또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 샛별? 요한계 문헌의 별, 빛 뭐죠? 예수 그리스도죠.

빛이 세상에 오셨고, 그래서 샛별을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 주시겠다는, 예수님이

나를 너에게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 묵시 2,29: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같은 말 반복이죠? 이 교회의 말씀이 곧 우리에게, 승리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직접

오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예, 이제벨 같이 이런 쪽으로 빠지지 마시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4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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