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13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1

윤 베드로 2016. 8. 28. 17:29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3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1

 

찬미 예수님! 예, 잘 지내셨습니까?  여름 휴가는 다녀오셨습니까?

예, 저희들은 대구 교구의 10년 사제 생활한 우리 동기 신부님들과 함께

이스라엘 그쪽 성지순례를 한번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름 휴가 겸, 연수 겸.

 

그래서 다녀 왔었는데 무엇보다도 성경 안에서 우리가 읽고 있는 어떤 복음서라든지

어떤 여러 서간문, 우리가 지금 요한 묵시록을 공부하고 있는데 요한 묵시록은 조금

이스라엘과 조금 다른 어떤 지역이지마는 그 성경 안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들이 현장

에서 이렇게 탁 가깝게 와 닿으니까 아, 예수님께서 살아가시고 활동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어떤 장소, 여기서 많은 것을 묵상하고 왔습니다.

 

이 묵상이 요한 묵시록을 이렇게 함께 배워나가는데 있어서 조금 제가 중간 중간에

또 나눠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이스라엘 다녀 오신 분 계세요? 우리

시청자분들 중에서도 다녀오신 분들 계실 것인데 그 남다른 감회가 있을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이렇게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이,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을,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마음이 이렇게 아파가지고 눈물을 흘리시는 그 예수님의 어떤

모습의 그 장소가 있습니다. 거기서 탁 보니까 성전이 그대로 보여요. 보이는데 지금

그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 이슬람교가 관리하고 있거든요.

 

예, 그래서 어떤 예루살렘 안에서 여러 종파가 함께 이렇게 아웅다웅 하는 모습.

그 모습을 또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바라보셨으면 또 안타깝게 쳐다보실

수 있겠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 "너희들 왜 이렇게 사느냐?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그 마음이 오늘부터 우리가 읽어갈 요한 묵시록

2장부터 읽어나갈 일곱 개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간문 안에 다 놓여져 있습니다.

 

이 서간문을 우리가 꼼꼼히 한번 읽어 볼 겁니다. 다른 텍스트와 다르게 한줄 한줄

읽어볼 것인데 왜냐하면 이 일곱 개 서간문 안에 요한 묵시록 2장, 3장에서 일곱 개의

편지가 있는데 4장부터 펼쳐지는 묵시적인 어떤 장면들 4장부터 펼쳐지는 모든 주제

들이 지금 2장, 3장 안에서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2장, 3장을 어떻게 보면 요한 묵시록 4장부터 펼쳐지는 22장까지 펼쳐지는

모든 내용들의 어떤 요약,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부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마음이 다 녹아져 있는 거예요.

 

* 요한 묵시록 2장, 3장: 4ㅡ22장의 모든 내용들의 요약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부탁)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2장, 3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요한 묵시록 뒤에 묵시적인 장면들,

조금 이상하고 신비스럽고 도대체 뭔가 하는 장면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직접적으로 우리가 들어가지 않았지마는 텍스트에 그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서간의 어떤 전체적인 특징을 우리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예, 여기 계신 분들은 기억하고 계시고 시청자분들은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일곱 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의 특징 두 가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집고 우리가 구체적인

텍스트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구조를 봤습니다.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서간의 구조를 봤습니다.

이 구조가 제가 1번, 2번, 3번 이렇게 적으면서 봤는데 그 구조가 일곱 개의 구조가 다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형식으로 되었다.

 

그런 저자가 어떤 특별한 관점에서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구도 안에서 그것을

일곱 개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내용만 살짝살짝 바꿨지 그조는 똑같다라는

것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 구조가 어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어떤 교회?

뭐 에페소 교회, 스미르나 교회 등 교회 등 교회가 다르지요?

 

"어떤 이가 말한다." 그 어떤 이가 모양새가 이 묘사가 조금씩 다 다른데 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교회에 보내는 어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그런 모양새로 서간이 시작하고

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는 안다. 나는 너희들이 어떤 상태인지 안다."라는

것이 또 설명되고 구체적인 교회 모습에 따라.

 

그 다음에 "그러나 나는 너를  거슬러 너에게는 이런 부족한 점이 있다. 너는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고 예수님의 본격적인 어떠한 당신이 원하시는 바가 드러나는

그런 단계. 그리고 그 다음에 "너희들은 돌아서서 회개하여라. 내가 이렇게 원하니까

너희들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라. 그러면 소위 승리하는 자,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뭔가가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귀 있는 자는 이 성령의 말씀을 알아 들어라. 여러 교회에 보내는

성령의 말씀."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가 왜 여러 교회인가? 에페소 교회에

쓰면서도 여러 교회, 스미르나 교회에 쓰면서도 여러 교회. 지금 한 구체적인 교회에

서간이 전해지고 있지마는 이 내용은 단순히 그 교회만을 위한 내용이 아니라 모든

교회. 이 교회가 지금 몇 개입니까? 일곱 개입니다.

 

7이라는 표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보편적이고 전부. 그죠?

예, 그래서 이 일곱 교회에 보낸다고 하지마는 보편 교회에, 모든 교회에,

지금 우리가 처한 이 대한 민국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교회에도 전해지고

아주 유용한 말씀이 될 수 있다. 귀담아 들어라라는 것입니다.

자, 요런 구조가 일곱 개 교회가 다 똑같다.

 

두 번째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그 구조가 전하는 내용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보편 교회에 전해지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삶의 모습 안에서도 이 말씀의 의미를 담아내어야 되고 또 우리가 그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 회개의 길로 걸어가야 된다. 열려져 있는 메세지다.

 

그 한 시대 요한 묵시록이 쓰여진 그 당시  그 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 이 글을 읽는, 요한 묵시록의 그 내용을 읽는 그 모든 교회의 어떤 신자들에게

이 말씀은 계속 전해져야 되고 그 말씀이 신자들 안에서 증거되어야 된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자, 그러면 오늘부터 우리가 읽어 나갈 교회의 어떤 내용 에페소 교회부터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곱교회는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습니다. 소아시아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위에요, 밑이예요? 위에죠? 우리 너무 쉽게 잘 알고 있어요.

 

자 어디냐? 여기가 이집트구요. 여기 갈릴래아 호수. 요 밑이 요르단 강 그리고 사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요쯤 있구요. 소아시아가 어디입니까? 시리아를 넘어서 저 위쪽

에 이쯤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밖입니다. 여기에 일곱 교회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이  장소는 특별히 뭐 예컨대 여기 있거나 여기 있거나 여기 있으면 구체적

장소에 따라서 뭔가 상황과 어떠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건데 크게 잡아 봅시다.

 

 

 

 

이 지역은 이쪽에 그 소위 비옥한 초생달 지역, 이쪽이 이스라엘 지역에서 예컨대

사도 바오로가 전교를 해 나가기 위한 어떤 교통의 요지가 되는 특별히 에페소

여기는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쪽으로 넘어가기 위한 뭐라고 표현할까요?

베이스 캠프라고 할까요? 하여튼 그런 개념 늘 거쳐가던 교통의 중요 요지고

거기에 일곱교회가 다 밀집해 있다.

 

에페소 교회부터 시작해서 우리 읽어나가면서 교회의 구체적인 어떤 특징들,

지리적인 특징들 말고 그 도시가, 그 교회가 처한 상황의 구체적인 것 한두 개를

뽑아서 그렇게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서간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성경을 먼저

읽어야 되겠죠? 사실 이 읽는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을 해 봐야

되겠습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지도 교수님이 요즘 성경 공부는 단순히

역사적인 지리나 고고학적인거나 아니면 뭐 어떻게 그 당시의 사회 문학적인 어떤

배경 그런 공부만이 아니라 텍스트에 있는 글자를 읽어내는 그 어떠한 읽기의

방법론, 이런 것들에 지도 교수님이 촛점을 많이 두셨어요.

 

그래서 일반 대학 언어학과에 가서 석사 과정을 들으라고 저를 보내셨는데 거기

가니까 신기하게도 읽기라는 게 있습니다. 읽기라는 과목이 있어요. 뭐 초등학교

학생들 글 읽는 것도 아니고. 읽는다는 것은 저번에 제가 잠시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이 강좌 시간에. 읽는다는 것은 내가 미리 해석이 지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해석이 들어가고 내가 읽기를 함으로서 어떻게 텍스트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그 과정을 보통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뭐 소통의 어떤 학문에서 잠시 언급을 합니다마는

읽기라는 전문적인 공부가 있다라는 것. 그래서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가 읽으면 되지 뭐. 그냥 아, 뭐 이런 내용이구나 받아 들이면 되지. 이런 것이

아니라 한번 같은 텍스트를 다 읽어 보세요. 지금 여기 앉아 계신 분 각자가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읽기가 신기한 거예요.

 

어떤 그림을, 여기에 그림이 몇 개 있죠? 요한 묵시록에 관련 된 거.

 

 

 

읽고 나름 이 그림이 어떤 느낌을 줍니까?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하고 제가

여쭤보면 여러분들 다 다르게 말씀하실껄요. 그게 벌써 읽기라는 것이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각자가 고유하게. 그런 방법론은 뭐 나중에 우리가 배울 필요성도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성경을 접할  때 읽는 것이 뭔가를 우리가 조금 강조해서

생각을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요한 묵시록 강좌를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적인 것이나 아니면 어떤 상징적인

것을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그렇지마는 제가 이 후반부부터는 직접 우리 같이

읽자라고 제가 이렇게 의도한 바는 성경을 읽지도 않고 우리 성경 공부가 끝났다고

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고 옛날 우리 공부들이 그랬고 많은 성서 모임들의 공부가 그래요.

어떤 텍스트를 끄집어 내면 복음서든 서간문이든 자, 저자가 누구냐? 누구누구 가정

이 정도로 저자가 이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저자는 없다.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 신학적인 주제가 뭔가? 뭐 그리스도론, 교회론, 마리아론 그러면서 신학적인

정보 쭉 빼고 몇장 몇절 읽어봐라. 이런 내용이 있지 않느냐? 라고 그러구 끝내거든요.

 

그러면서 우리는 복음서를 공부했습니다. 서간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뭐 가톨릭

서간을 공부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공부했습니다. 신약 성경 공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정말로 내가 기도하면서 읽어 본적은 사실 없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도 게을러서 그런지 공부를 막 시험치기 위한 성경 공부를 했는데

참 아쉽고 지금 반성이 많이 되는데 우리 신자분들 정말 성경 공부 하시고 싶은 분들은

읽고 기도하실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그것을 매일 묵상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 시간에 천천히 이번 시간부터 한번 읽어 보면서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런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자, 요한 묵시록  2장 1절부터 시작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자, 여기서 우리가 한번 보겠습니다. 오른손이 뭐냐? 제대로 된 거죠.

더군다나 오른손을 내가 사용하기 때문에 힘이 있겠지요? 성경에서 오른손이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 아, 권능, 힘 이런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권능과 힘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으니까. 왼손잡이는 물론 왼손을 사용하지만, 그러니까 주된 어떤 손의 사용은

오른손이다라는 인식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권능, 힘.

 

자, 그러면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

자, 일곱 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너무 잘 알죠? 일곱 개면 권능이 어떻다고요?

일곱 개의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닌다는 것은 완전하죠.

힘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일곱 별 황금 등잔대가 뭡니까?

 

* 일곱 별과 일곱 황금 등잔대: 일곱 교회 천사들과 일곱 교회를 지칭함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분이 일곱 교회에

보편적이고 완전한 그 어떠한 권능을 모든 교회에서 다 보여 주신다.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따라 움직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교회의 어떤 주인이

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표현하여 요한 묵시록이 주님 중의 주님이고 왕 중의 왕이다.

모든 교회가 그분께 따라간다라는 그 어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권능, 주권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라는 것입니다. 자, 계속해서 읽어보면,

 

* 묵시 2,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자, 요기까지.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겠습니까? 어떤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러면

아, 예수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그러구 그냥 쭉쭉 넘어가면 나중에 남는 것이

뭐가 남아 있겠어요. 자꾸자꾸 이런 식으로 읽으면 졸음만 남아요. 이제 막 잠이

오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하나하나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하나하나 읽으면서 네가 한 일이 뭘까? 너 누구입니까? 지금 너라고 지칭하는 이가?

에페소 교회를 말합니다. 에페소 교회 네가 한 일이 무슨 일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면요. 에페소 교회가 처한 상황을 한번 보면 좋겠습니다.

 

에페소 교회는 특별히 풍요의 여신 그리고 이집트 여신 중에 아르테미스라는 여신이

있는데 그 여신한테 제사를 지냈던 그런 곳입니다. 그리고 29년부터 율리우스 체사르

에게 성전을. 왜? 우리가 요한 묵시록 역사적 배경 이야기를 하면서 로마 황제 숭배

하는. 숭배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죠? 성전이 필요하죠? 건물이.

 

거기서 이제 29년부터 에페소 교회가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에페소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그 한 일, 무슨 일을 교회가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러한 그리스 문화의 종교적인 어떤 영향, 압박. 로마 황제 숭배

하라는 그런 압박. 거기서 어떻게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저항을 해야 되겠지요? 저항을 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데 혹시 그 책 한국어로 번역된다던데 프랑스에서 근래에 책이 한권 나왔습니다.

 

[분노하라]라는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책의 내용이 뭐냐하면, 그 프랑스 사회를

예전에 이끌었던 어떠한 이런 기득권 혹은 잘못된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 요즘은

너무 침묵하고 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옳은 정의로움을 가지고 저항할 수 있는

그런 정신을 가져야 된다는 게 그 책의 어떠한 이런 요약이고 주제인데 그 책 제일

끝에 보면은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창조한다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다. 저항한다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뭐냐? 말 마디를 가지고 한번 이 에페소 교회의 처한 상황을 보면,

늘 교회가 살아 남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간직하가 위해서는 그냥 내 안에

편안하면 되지. 내가 그냥 내 신앙만 가지면 되지.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의 평화만

있으면 되지. 굳이 형제 자매들끼리 공동체에서 평화만 있으면 되지.

 

혹은 안 좋은 모습 보여도 "아이구, 뭐 그냥 내가 좀 참고 내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

가지면 되지!"라는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이게 개인주의적 신앙이 되어 가죠.

공동체가 되지 않겠지요. 공동체는 아무리 교회 공동체지마는 잘못된 게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아,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혹은 좋은 거는

"아, 이거는 좋은 거 아닙니까?" 칭찬하고 서로 말들을 주고 받는 가운데에서 교회가

커나가는데.

 

예컨대 에페소 교회 같은 경우에 그 여신에 대한 어떤 종교적인, 그리스 문화에 대한,

로마 황제 숭배라는 압박이 오면, "아이, 뭐 내 혼자 믿으면 되지. 야유 뭐 그냥..."

이렇게 있는 거 보다는 거기에 대해서 저항하고 거기에 대해서 맞받아 치고, 내 신앙을

증거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곧 저항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창조하는 것일 수

있겠다. 왜?

 

내가 늘 새롭게 거듭날 수 있으니까. 어떤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직면해서 내가 용감히

맞설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승리하는 자, 인내롭게 승리하

는자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니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니가 지금 그런 상황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음을

어렵게 살아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완전히 빽도 이런 빽이 없겠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 살아가시는데 있어서 "아, 나 이제 너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다."라고 한 마디만 들어 버리면 우리 인생 살기가 얼마나... 이거 보증수표 하나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데.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이 요한 묵시록을 읽다보면 이 서간문을 읽다보면

"난 니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니 잘한다."라고 해 놓고 아까 그 구절을 보셨지요?

하지만 너를 거슬러  몇 가지 얘기할 것이 있다." 이 교육 방법 참 좋은 거 같애요.

칭찬 싹 해놓고 나중에 그런데 요거는 조금만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이 방법

어머니 되시는 분들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거기 보면 니가 한 일이 뭔지 알겠죠?

 

*묵시 2,2: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도 사도라고 지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억압과

압박에서 견뎌내고 있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 노고라는 단어를 가지고 한번 우리가 살펴 보겠습니다.

 

이 노고라는 단어는 그리스 말로 코포스라는 건데요. 노고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이? 자, 노고 그러면 어떤 느낌이 옵니까? 수고, 고생, 어려움 뭐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누구에게 쓰였졌는가? 이게 중요한 겁니다. 누구에게 쓰여졌는가?

 

"아이구, 너희들 다 각자 어려움, 우리 복음서에서 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각자 어려움 다 있다고 그러는데 이 노고라는 게 그리스 말로 코포스라는 단어가 쓰였

는데 이 단어가 어디에 쓰였는가? 고 단어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자면요.

이 어려움이라는 이것이 주로 어디에 사용되었는가?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사용됐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한 공동체를 끌어가기 위해서

거기서 일을 하기 위해서. 단순히 내가 인생을 살아 가는데 "지지리도 애들이 말도

안 듣고 남편도 속 썪이고 우예 삽니까? 예수님!" 이라는 그런 삶의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이 노고라는 개념이 신약 성경 안에서 교회에 봉사하고 교회 일을 하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 그 일을 해 나가는데 대한 어려움이 여기서

시작되는데 성바오로는 이것을 사도직을 나타낼 때 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안다라는 표현은 너희들 에페소 교회에서 지금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한 너희들의 어려움을 나는

잘 알고 있다라는 의미로 우리가 받아 들이면 좋겠습니다.

 

자, 다음에 보면 묵시 2,2: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건 악적인 것. 이건 너무 쉬운 거고요. 그 다음에 묵시 2,2: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지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저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자, 에페소 교회가 지금 잘한 것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 나가는데 사도가 아니면서도,

거짓 사도를 말하는 것이죠? 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이제 점점점 이제

사도 바오로가 이제 전교를 하고,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지역 교회

이렇게 나뉘면서 이렇게 점점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문제는 설교가들이 등장을 많이

합니다.

 

복음서에도 보면 예수께서도 약간 미래에 대해 예언하시는 것처럼 "그때가 되면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고 내가 주님이고 주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그러고

이렇게 말하는 그런 때가 올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죠? 이것은 복음서를 쓸 당시의

분위기가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기보다는 복음서가 작성될 그 시기의 분위기가 거기에.

복음서가 언제부터 쓰입니까? 60년대 후반부터 쓰였단 말이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30-40년 후부터 그 당시 사회 분위기,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런 가르침이오.

그러면서 막 이야기를 해 나간다는 겁니다.

 

이곳 저곳에서 설교들을 많이 했는데 식별을 해야 되겠지요? 어느 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그 식별을 위해서 우리가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 에페소서입니다. 여기 요한 묵시록에도 나오지만은 우리가 서간문들

중에 에페소서가 있지요? 4장 4절에서 16절까지 한번 내용을 보면,

 

아, 당시에 어떤 것이 진정한 사도로서 활동하는 모습인가? 거짓사도가 아닌.

사도 식별 기준이 되는가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 에페 4,4-6: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고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자, 여기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단어 하나는 만물입니까?^^*~~~ '하나'이지요?

몇 번 등장을 했는데 일치, 희망, 하나. 몸도 하나, 성령도 한 분, 주님도 한 분 계속

하나로 등장합니다. 이 일치의 문제를 한번 봅니다. 주님도 하나니까 우리 일치해야

된다. 자, 사도에 대해서 식별 기준 첫 번째가 일치, 하나여야 됩니다.

 

우리도 신앙 고백에 있어서 공번 된 교회 이게 일치 되어야 되는 거예요. 일치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 거죠. 일치를 깨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예, 사탄이죠 뭐. 사탄의 마음이 뭡니까? 이간질하고, 불평하고, 분열하고

'디아스볼리스', 갈라지고 뭐 뜻은 연결됩니다만는 '바리사이'도 구별되는 이런

의미가 있거든요.

 

"나는 너희들과 달라." 이런 식으로 나가면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 공동체, 특별히

사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7절부터 읽어가면요.

 

*에페 4,7-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데로 오르시어

포로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자, 이 선물은 은총의 양에 따라입니다. 저마다 다르게 받습니다. 일치되어 있으나

다양하게 받습니다. 자, 어떤 직분을 받냐하면 11절로 넘어가서 보면

 

* 에페 4,11-12: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자, 여기서 보면 어떤 이들은 뭐도 하고, 뭐도 하고 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개념을 우리가 지금 에페소 교회가 아까 노고는 누구에게? 지도자, 책임자,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 봉사자. 왜 해야 되겠습니까? 직분은 다양하지마는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한분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컨대 신심 운동 할때 약간 부작용들의 드러나는 게 그런

것들이 있어요. 내가 예컨대 성령 세미나 가서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하거나 혹은

다른 어떤 신심 활동을 가서 내가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해서 "야, 너 거기 한번 가 봐라.

내 정말 은혜 많이 받았다. 니 아직까지 초보적이고 너 아직 잘 모르는 거 같은데 ,

신앙이 좀 약한 거 같어. 너 거기 가봐!" 이렇게 판단하는 것. 이것?

 

자, 이 몸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합니까? 다 중요해요.

하여튼 몸 중에 다 중요하죠. 다르지 틀린 것이 아니죠.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로 성장해 나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

나가야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도들의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이 에페소서에서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어떠한 일치의 어떤 길을 걸어가는 교회의 모습 봉사자로서, 사도로서

교회를 책임 맡아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일치의 모습을 걸어 나가야 되는데 그것이

힘들다라는 것입니다. '너의 노고와 인내' 그 일치의 길을 만들어 가기 위한 그 어려움.

어렵지마는 그래도 해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에서 봤을 대는 때는 보기 좋아 보인다

라는 것입니다. 자, 다시 묵시록으로 다시 돌아가서 2장4절을 보면요.

 

*묵시 2,4: "그러나 너에게" 본격적으로 나옵이다. 칭찬하시고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무랄 것이 있다. 무엇을 나무라나?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첫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여기서 첫 사랑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

하느님 아버지와의 , 예수님과의 사랑이겠죠.

 

우리가 너무 이 사랑, 혼인 관계는 우리가 구약 성서부터 아가서는 특별히 거의 19금

수준이고요. 그 어떤 남녀간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그렇게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를

표현합니다. 요한 묵시록 역시 천상 예루살렘의 어린양의 그 어떤 부인으로서 그렇게

나타나 있는데 이 첫 사랑은 관계로서의 하느님과의 관계가 돈독했는데 그런데 나무랄

것이 뭐냐? 이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잊어버리고 있다.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저항하면서 잘하고 있는데 어떤 그 관계성을 하느님 관계에서

보통 그렇습니다. 어떤 운동을 하시는 분들, 이념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몰두하다 보면 정작 처음에 왜 내가  이것을 지향했던지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어떤

행동, 거기에 너무 빠져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옥죄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가 첫 마음으로 한번 되돌아가 보자. 무엇이 궁극적 목적인가?

우리가  본당에서 신앙활동 뭐 모든 활동 많은데 그 활동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노력 하잖아요. 이건 이렇게 되야 된다. 목표가 정해져요. 모든 활동에.

 

우리 신심 활동 뿐만 아니라 사목에 관련된 모든 활동들 이건 이래야 되는데, 요거

잘해야 되는데라며 여기 빠져들다보면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 다른 의견 내면, 그게

아니야! 이건 이렇게 돼야 돼. 막 거기서 소위 지지고 볶고 갈등 겪고. 그런데 알고

보면 왜 합니까? 이거를.

 

우리 잘 지내고 형제 자매들끼리 좀 잘해보고 하느님께 좀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궁극적 목표가 있잖아요. 그래서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듭니다. 교회 일이라는 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일이 아닌가? 굳이 인간적으로 꼭 이래야만 되는 이런

일이 도대체 세상에 있는가? 하느님과의 관계가 머리 속에 늘 가득차 있다면 그래서

그 관계 안에서 우리가 같이 잘 지낸다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거 아닌가?

꼭 목에 핏대 세워가지고 꼭 이래야만 된다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측면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제가 예전에 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있지요? 서울 관구도 있고 대구 관구도 있는데

그 수녀님들이 보시는 회보라고 해야될까요? 수녀님들끼리 돌려보는 그런 잡지가

있는데 한번은 저한테 연락이 와서 첫 마음에 대해서 한번 글 좀 써달라고.
제가 이 논문 쓰고 있을 때였거든요. 교회의 일곱 개 서간문.
첫사랑 이 단어가 그렇게 쉽게 잊혀지진 않더라구요. 

 

나는 하느님께 대해서 어떠한 첫사랑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러면서 첫 마음에 대해서 글을 써 달라고 해서 글을 쓴 것이 있는데 거기에 어떤

말씀이 있었냐하면 신부가 될 때 왜 사제 서품식 보면 이렇게 엎드려 있잖아요.

엎드려서 이렇게 있을 때 뭐 신자분들은 그때가 가장 이렇게 뭔가 크게 와 닿는다고

그러시는데, 전적으로 우리 삶을 봉헌한다.

 

봉헌하면서 인제 옆에 동기들은 막 옆에서 울어요. 그런데 이제 그때 제가 생각했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데 글에는 이렇게 적었어요. 글에는 기도 뭐 영성적이고

뭔가 훌륭한 신부고 뭐 이러한 것들이 너무 구체적으로 안 잡히는 거예요. 제가 사제

서품식 준비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만 지키자. 하나만. 구체적 생활 삶에.

 

그래서 신자분들이 조금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그때 제가 결심했는 게

뭐냐하면 "골프는 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아주 지금 조금 우스개 소리 같은데

이게 제 삶의 어떤 목표가 됐습니다. 왜 골프를 치지 않을 것인가?

 

제가 신학생 때부터 봐왔던 모습의 사제들의 모습은 아니었거든요. 그것이.

특히나 우리 촌에 있는 본당 같은 경우에 몇 퍼센트 신자가 골프를 치겠습니까?

신부님께서 골프채를 드는 순간 신자분들은 아, 우리와 다른 존재구나. 경제적이든

어떤 사회입지적인 부분이든. 사목이 되겠나? 이런 제 어린 마음에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골프라는 어떤 단어 그 스포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골프가

대명사가 돼서 그 수반하는 모든 어떤 경제적인 측면이라 할까요? 그런 것들을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한번 가난하게 살아보자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그렇게 가니까 아, 요고 요렇게 살기 위해서

요것도 필요하지 저것도 필요하지 이런 것들이 자꾸자꾸 더 나에게 막 쌓여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때 글을 부탁하셨을 때 수녀님들이 다시 첫 마음을 생각해 보면서

아, 골프는 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런 마음을 한번 다시 되잡아 봤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가 제가 예전에 프랑스 신부를 데려 와 가지고 한국 한 달을

이렇게 보여 주면서 이 친국가 말하기를 한국 교회는 너무 교회와 다른 어떤 부요함,

교회 실제 어떤 삶의 모습과는 다른 부요함에 젖어 있다고 특별히 사제들의 삶에

있어서 제 개인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래서 너무 이렇게 부유하다. 그런 어떤 좀

친구로서의 어떤 비판이라고 할까요? 충고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제 이렇게 사제로 살면서 신자분들이 많은 것들을 챙겨 주셔요. 그런데

그것이 제가 똑바로 못 살면 사제가 똑바로 못 살면 그것이 독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골프뿐만 아니라 아주 으리으리한 식당에서의 그 어떤 음식

문화, 신부님들 잘 대접한다고 ... 거기에 맛들이면 사실 그랜져 타는 사람이 티고

타겠습니까? 인간인데. 그런 것들을 우리가, 우리 공동체가 지켜나가야 되겠습니다.

 

에페소 교회 보면은 그 서간 안에서의 책임자들의, 교회 공동체에서 봉사직에 있는

그런 사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노고'입니다. 하느님 일을 하기 위해 불편함,

어려움입니다. 내 삶이 편해지고 불편함이 없어져가고 늘 군림하고 지시하는 삶이

돼 버리면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 아예 말씀도조차 칭찬할 꺼리가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첫 마음, 첫사랑에 대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원래 여러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도

처음에 세례를 받거나 처음에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아, 이거는 이상적인

어떤 나의 모습을 가꿔나가야겠다. 신앙적인 모습 그런 거 다 있을 겁니다. 그것을

다시 한번 늘 되뇌이면서 한번 생각해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 그려면 첫 사랑, 이제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잘 보셔야 됩니다.

너와 내가 어떻게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그 다음에 다시 한번 다시 계속해서

보면요.

 

* 묵시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억, 기억해라.

어디서 추락했을까? 자, 과거의 어떤 내 삶의 자리에서 어떤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아, 이게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내가 되돌아 보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되돌아보니 멀어졌으니까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갈라졌다는 것이지요.

회개하라고. 당연하죠. 갈라졌으니까.

 

회개가 뭡니까? 돌아서라는 거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다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복음 말씀, 우리가 물 위를 걷는 예수님

이야기 복음 말씀 너무 잘 압니다. 물위를 걷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 배가 있어요. 배에 제자들이 타고 있지요? 제자들이 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저기

걸어 오세요. 완전 유령입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아, 유령이다! 라니까 "나다 안심하라."

하십니다 자, 그러면서 베드로가 주님이시거든 오라고 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배에

타고 있고 예수님은 물 위에 서 계시고.

 

그렇게 이제 베드로가 한발 디뎌서 가다다 막 무서워가지고 빠집니다. 예수님이 건져

주십니다. 자, 우리의 모습을 여기 구조로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는 배 위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교부들이 이 배의 어떠한 풍랑이 마주치는 이 배를 인생살이

정도 인생의 어떤 역경, 신앙적인 어떤 역경, 예수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의 역경

그런 것들로 많이 묘사를 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떠나야 예수님을 만날 게 아닙니까? 내 인생의, 삶의 어떤 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놓여진 내 삶의 자리, 이 자리를

떠나서 예수님께 나아가야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물에 빠지면 건져 주기라도

하실 것인데 나는 늘 어떤 의미에서 배 위에 있으면서 주님을 봐요. 주님, 주님하고

불러요. 당신 가르침 압니다.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압니다.

나 당신이 가르치신 거 다 공부하고 있습니다. 배 위에서

 

단 한번도 우리가 배 위에 벗어났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 삶의 자리를 떠나서

내 삶의 가치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서 작은 것 하나라도 포기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사상으로 나아갈려고 하는 그 어떤 발걸음이 있는지 아니면

요거는 버리면 안 돼. 요거 있어야 예수님 따라갈 거 같애. 요것만 해 주시면 내가

예수님 따라 갈꺼 같애요. 요러한 상황에 있어야만 내가 신앙 생활 잘 할꺼 같애요.

여기 한번 바람이 확 불어서 흔들어 놓으면 예수님도 인제 모른다. 배만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된다라는 생각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 어디서 추락했는지. 회개하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라. 우리가 어렵지마는 물 위에 발을 한번 내디뎌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걸아가기 위해서.

 

요한 묵시록의 표현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증거의 삶이고 이것이 순교의 삶이고

이것이 인내의 삶이고 동시에 그래서 승리의 삶이 된다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다시 한번 회상합니다. 7장에 있는 말씀. 어떻게 돼 있냐하면,

"네가 끌려갈 사람은 끌려갈 것이고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까닭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번도 저항하지 않고 한번도 예수님께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그냥 "알고 있습니다."

배 안에서 박혀가지고 "무슨 얘기인지 압니다." 내 안에서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은 애시당초 서간문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추락했는지 한번 살펴보자."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추락했는지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해라.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다구요?

* 묵시 2,5: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처음에 저항하고 이겨내고 견뎌내는 것.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되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가서 뭐를

치운다고요?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 등잔대가 뭡니까?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저항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지 않고 개인적인 신심이나

내 마음의 평화나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의 자리를 위해서 그러한 삶의 도구로써 교회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가 교회가 아니게 되는 것이죠.

 

또 한번 강우일 주교님의 강론 말씀이 떠 오르는 게 이해 관계에 따라서, 인간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모인 그런 교회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동호회와 같은 계모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우리끼리 모여서 취미생활 하는 그런 공동체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관계 회복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아무리

겉모습만 화려하게 했을지라도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죠. 자기들끼리 모여서 소위

예수님 이름을 팔고 사는 그냥 인간적인 공동체죠.

 

예, 지금 우리가 에페소에 가보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성지순례 가보시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은 걸 묵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다 사라졌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뭐 도시 전체가 그쵸? 그래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한번 반성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요. 계속해서 6절

 

*  묵시 2,6: 그러나 너에게 좋은 점도 있다. 네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좋은 점도 한번 칭찬 하시는데 자, 여기서 니콜라오스파가 무슨 파냐?

사도행전 6장 5절에 보면 니콜라오스는 부제로 등장합니다.

 

*사도 6,5-6: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피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부제가 어떤 역활을 합니까? 초대 교회에 살림 살이를 챙기는,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이 부제였던 니콜라오스를 따르던 파가 왜 악행을,

교회가 싫어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나갔는가? 거기에 보면 이 니콜라오스라는

말이 참 재미있는 게 발람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그 말의 동의어입니다.

 

* 니콜라오스 = 발람(발치참)

왜냐? 발람이 발치참이라는 단어를 써요. 히브리 말인데 '참'은 백성이고

'발치'는 부수다. 멸망시키다.

 

* 발람(발치참): 백성을 부수라라는 의미(니칼라운)

 

발치참이란 말 자체가 뭐냐? 발치참에서 왔으며 '백성을 부순다.'라는 의미를

거기에 담고 있습니다. 니코라오스 이것이 발참이 그리스 말로 바뀌면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니칼라운이 됩니다. 니콜라오스, 니칼라운 비슷합니까?

비슷한 느낌이 드셔요? '니칼라운'에서 '라운'은 백성이고 '니카'가 부수다.

멸망시키다. 이런 것입니다.

 

니칼라운, 발치참 같은 말이죠. 발람, 니콜라오스 다 같은 동의어입니다.

자, 백성을, 교회의 일을, 교회의 부제로써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면서 교회를 어떻게 한다구요?

부시고 있다. 부셔 버리고 있다라는 것이 이러한 어떠한 니콜라오스파라는 어떤

통칭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짐짓 신자고, 내가 짐짓 사제고, 내가 짐짓 수도자라고 그러면서

자기 고집대로 자기 것을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한 노고가 아니라 자기 뜻을 실현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은 교회를 좀 먹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 것만을 생각할 때 그것은 등잔대를 치워 버리는, 교회가 없어지는 그런

행실들을 하는 교회 인물들을 통칭해서 일컫는 것이 바로 니콜라오스파 그 이단들

그것을 싫어하는 거죠.

 

우리 공동체 안에서 어떤 그런 남을 무시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이러한 어떤 행동

움직임들 그런 것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 그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다는

것입니다. 7절 마지막에

 

* 묵시 2,7: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

 

자, 7절에 있는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서 '여러 교회'는 '그 교회들'

이라고 직역됩니다. 여러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그 여러 교회들, 일곱 개 교회죠?

다시 말해서 보편 모든 교회에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 들어라.

 

제가 이 설명을 하면서 계속해서 제 이야기도 아니면 한번 생각해보자라는 이야기

계속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느냐?  이 메세지가 우리에게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서 7절에 있는 것 이 말씀이 여러 교회, 보편적 교회에 하는 것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야 됩니다. 여러분 각자도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내가 현실에

살아가는 내 삶 안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것을 생각하셔야만

귀 있는 자가 되고 그것은 이 메세지를 내가 듣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한다면 승리하는 사람, 앞에 노고를 견디고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고

어떤 내 신앙의 위협을 막아내고 이런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낙원,

에덴 동산을 떠 올리시기 바랍니다.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주겠다.

아, 대단한 겁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서는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라고

했는 게 생명 나무 열매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해요? 그거를? 에덴 동산보다 더 가깝게 됩니다. 하느님과

에덴 동산에서의 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일치된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했는데 그보다 더 일치된 모습으로 바꿔 놓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고, 생명 나무. 하느님의 영역 안에 너희들도 함께 머물게 하겠다.

 

천상 예루살렘, 천상 예루살렘 안에 성전과 등불이 된 게 하느님이고 하느님 백성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겠다. 완전한 일치죠.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

이는 대단한 하느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자, 에페소 교회가 우리가 좀 천천히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좀 길게 천천히

읽어 봤습니다. 에페소 교회에서 말하고자 하는 첫 사랑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관계 잊지 마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관계 안에서 열심히 나는 어떤 노고를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고 그런 또 한주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강의 안내: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소리2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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