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3강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어린양의 호칭

윤 베드로 2016. 8. 28. 17:31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3강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어린양의 호칭

 

지난 시간까지 했던 것 잠시 한 마디로 먼저 요약을 하고 우리가 오늘 강의

내용으로 넘어 갈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요한묵시록이 '예수의 계시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당신

스스로 당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내용이 요한 묵시록의 내용이다.

 

※ 요한 묵시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내용

 

그래서 전혀 뭐 두려워하거나 무시무시한 내용이거나 이런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이렇게 나가니까 몇분들이 요한 묵시록을 아, 이때까지 기다렸어요.

듣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러시는데 대부분이 그 무시무시한 장면들.

그게 어떤 의미일까, 세상 종말이 어떻게 펼쳐질까?

이런데 너무 관심을 많이 두시는 같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다시금 다르게 다시 말해서

묵시 문학적인 표현으로 다시 한번 설명해 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다.

그런데 이제 표징들이 이제 문제인 거지요.

예수님을 어떻게 우리에게 묘사할 것인가?

 

그것이 요한 묵시록의 주된 숙제인데 그것이 우리가 종 요한에게

우리 지난 시간에 봤듯이 종 요한에게 표징으로 기호화 해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표징 뒤에 살짝 숨어 계시죠.

표징이 이제 무슨 의미인지를 해석을 해야 본래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표징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시간부터 계속해서 오늘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표징으로 기호로 표현한 그런 여러가지 표징들을 우리가 한 번 살펴 봐야

되겠다 라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님 특히

1장 4절에서 7절까지 우리 한번 봤습니다. 죽은 이들로부터 처음으로 태어난

맏배, 맏이로써 그렇게 우리에게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 묵시 1, 4-7의 죽은이들로부터 처음으로 태어난 맏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을 오늘 우리는 또 다른 표현으로, 또 다른 표징으로 한 번 만나

볼까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는데

요한 묵시록에서 아주 중요한 예수님을 표현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단어인데 왜 그런 하면 제가 공부할 때

제 논문 주제이기 때문에 너무 좋아 합니다.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양. 예, 어린양이라고 하면 여러분들 머리속에 떠오르는 느낌들을

한 번 이야기해 보십시오.

 

뭐 순하다, 여리다, 이런 생각들이 있을 것인데 어떤 생각들이 어린양에

대해서 떠오르십니까? 예, 답을 하시기에는 조금...

예, 아직까지는 뭐 우리가 ^*^  그런데 예쁘다, 어리다, 뭐 약간 순하다.

이런 느낌이 드십니까? "예!" 전혀 순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실제 어린양을 한번 보게 된다면 사람들이 그래요.

"아주 성질이 그냥 아주 사납고 못됐어요!"

양들을 이렇게 보면 실지 좀 그런 면이 있는데 우리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어린양, 예수님을 표현한 어린양은 이것이 단순히 여리고,

약하고, 순해 보이고, 혹은 뭐 성격이 어떻고 이런 동물적인 어린양의

개념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유다인즘, 구약 그 전통 전체 아주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것이 요한 묵시록에서 다 포함 됩니다.

 

어린양이 그러면 요한 묵시록의 어린양이다. 그러면 우리의 머리속에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양의 개념만을 가지고는 절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면 구약의 전통을 한번 처음부터 다 봐야 되는데.

아주 이게 오래 걸리는데 우리 창세기부터 볼꺼예요. 

창세기부터 어린양이 무슨 의미인가를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어린양에 대해서 요한 묵시록이 쓰는 단어가 아르니온(apvlov)

이라는 단어입니다. 예, 그리스말로 아르니온인데 이 단어가 어린양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몇번이나 쓰이느냐? 29번이나 쓰입니다. 

 

※ 요한 묵시록에는 아르니온(어린양)이란 단어가 29번이나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단어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린양을 신약에서도 찿아 볼 수 있습니다.

예, 여러분 너무 잘 아시는 거예요. 미사 중에.

 

예, 하느님의 어린양 그러지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 말입니까? 

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누구를 향해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 그 어린양은 암노스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그런데 요한 목시록에는 아르니온이라는 또 다른 어린양을 지칭하는

그리스 말이 쓰였다. 왜 단어를 다른 것을 쓸까? 같은 어린양인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는데

자, 바로 답을 말씀 드리자면 요한 복음이든 다른 공관 복음이든

무엇이 우리에게 어떤 주제를 알려 주고자 했던가 하면?

 

지상 생활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와 똑같이 살과 피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참인간이신, 참하느님이신. 그러나 인간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묘사하기 위해서 어린양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 오시는 분."

세상 안에 오셔서 우리 죄를 없애 주는 세상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어린양을 지칭하기 위해서 암노스. 

 

그러나 요한 묵시록에서는 굳이 세상에 이렇게 사셨습니다. 

세상살이가 이랬습니다. 갈릴래아에서 뭐를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앴습니다 라는 예수님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 삶은 이미 공관 복음에서 충분히 우리가 요한 복음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것보다는 죽으셨는데 부활하신

약간 다른 어떤 관점이 다르죠. 

 

지상 생활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하여 적합한

표현이 없을까? 그래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나름 고민을 한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과는 조금 다른. 같은 어린양이신데

다른 모습을, 다른 의미를 가진 어린양을 제시하고 싶다.

 

그래서 아르니온(apvlov)이라는 다른 단어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우리 구약의 전통을 알아봐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왜 하필 어린양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우리처럼 우리에게 어린양 개념과

분명히 요한 묵시록을 읽는 독자들 당시의 그 독자들 90~100년경의 그

독자들이 생각하는 어린양의 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 사람들이 어린양을 들었을 때는 구약에 있던 다른 여러 전통을 가지고

탁 떠올릴꺼란 말이죠 어린양을. 그럼 우리가 그 전통을 지금부터 찿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우리가 봐야 될 이 어린양을 알기 위해서

대부분 우리는 크게 두 가지만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 뭐냐? 빠스카의 어린양.

두 번째 이시야서에 나타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 막 끌러가지요.

뭐처럼? 어린양 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

예, 그런데 요 두 가지 개념 이전에 우리는 어린양이 처음에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놓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됩니다.

 

어린양의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냐? 창세기 22장에 무엇이 나오느냐?

무슨 이야기인지 혹시 아세요? 제물로 바치는 것.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그런데 유다 전통에서는 제물로 바치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사악 묶기,

이사악 동여매기.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 창세기 22장(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이사악 묶기(동여매기)

 

우리는 바로 그냥 이사악을 죽이는 이야기다 라고 하는데 솔직히 우리

마음이 너무 각박한 것 같애요. 예컨대 보면 "배고파도 죽겠다!"

제가 참 신기한 것이 제가 2004년도 입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친구 신부님을 한달 동안 한국을 여행시켜 준 적이 있어요.

 

같이 들어 왔습니다. 방학 때 들어왔는데 그때 여름이어서 너무

더운 거예요.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이제 대부분 귀에 뭐가 들리느냐?

서울에서 좀 있었는데 "더워 죽겠다!" 라는 말이 지하철이나 어디가도

"아이구 죽겠다, 아이구 죽겠다!"라는 말을 계속 들은 거예요.

 

이 친구가 한국말 중 계속 반복되는 게 있으니까 "죽겠다" 라는 말을

따라 하면서 이게 무슨 뜻이냐? 저한테 묻는 거예요.

그래서 불어로 바꿔 줬지요. 바꿔서 의미를 이애기 해 주니까

이 친구가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죽고 싶어 난리냐고?

저 보고 반문하는 거예요.

 

표현에 있어서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나가 XX라!"

방송이라서 뭐 함부로 말은 못합니다 마는 ... ^*^ 

그래서 이 죽는다 라는 이 표현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애요.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을 자꾸 떠올리는데.

한 번 구약에 보십시오. 이사악 죽은 이야기 있습니까? 없지요?

예, 그리고 이사악 이야기에 신기하게 있어요.

 

그 텍스트의 그 마지막 보십시오. 아브라함 하고 이사악 하고 같이

갔는데 돌아올 때는 아브라함 혼자 돌아옵니다.

이야기를 잘 보셔야 됩니다. 이사악은 어디 갔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있다가 제가 설명해 드릴텐데 텍스트를 한 번

꼼꼼히 읽어 보면서 그 의미를 한 번 찿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2장에 자, 우리의 주제는 어린양입니다.

여기에 어린양이 나옵니다. 어린양이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옵니다. 어린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대목이

어디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저기 하느님께서 가리켜 주신

그 산, 무슨산, 모리야산 입니다. 이거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 창세기 22장의 모리야 산은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을 가리키는데 그 산으로 단 둘이 갑니다.

둘이 가는데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제물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자, 첫 번째 우리가 이 제물로 바칠 어린양입니다.

요거를 설명하기 전에 잠깐 다른 것을 설명해야 되는데

테스트를 읽으실 때, 성경을 읽으실 때 과거에는 19세기부터는

당시의 역사가 어땠는가? 실제 저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 

그 시대적 사회적 배경은 어땠는가?

 

그것을 알면, 혹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그것만을 안면

성경 텍스트를 온전히 다 알 수 있다 라는 생각에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우리가 흔이 말하는 설화학이라는 학문이

등장을 했구요. 이것이 1960년대부터 프랑스 권에서 많이 발전을

했는데 요즘은 많은 분들이 하고 계셔요. 여기는 무엇이 문제인가?

 

실제 역사를 알아도 텍스트의 세상이 따로 있다 라는 거죠.

예컨데 우리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 할 때

말로써 표현하거나 글로써 표현하면 그 사실이 똑같이 글이나 말로

전달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렇지요?

 

제가 오늘 하루 있었던 것을 일기로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제 느낌이 들어가고 제가 그 어떤 사건에 대한 저의 해석이

들어가고, 그러다보면 텍스트가 조금씩 바뀌지요? 사실 그 자체보다.

 

우리 뭐 신문을 통해서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죠?

우리가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어떤 정치인이 있었는데 무슨 사건

이런 거를 바라보면서 각 신문의 논점마다 다르게 표현을 한단 말이죠.

 

그래서 적혀진 글은 그 자체로 그게 그 나름의 세상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글을 꼼꼼히 읽어보고 어떻게 이 어린양이, 이 형상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여기에 촛점을 맞추는 그런 성서 공부가, 그런

방법론이 등장 합니다.

 

나중에 한번 그런 성경 읽기 방법론도 한 번 공부해 보시면 좋을

꺼예요. 그러한 텍스트 중심의, 테스트를 보면서 어린양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를 꼼꼼히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양, 자 첫 번째 이사악 묶기.

아버지 아브라함한테 제물로 쓸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여쭈니까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하느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다." 자, 하느님께서.

 

두 번째 조건은 어린양이 제물로 쓰이지만 아브라함의 말을 통해서

텍스트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라는 번역을 하는 우리 현대 성경이

있구요. 이것이 여러분 다 잘 아시는 말입니다. '야훼 이레','보다'

라는 것입니다. 동사가 하느님께서 보실 것이다.

 

※ 야훼 이레: 하느님께서 보실 것이다. (마련하실 것이다.)

   arnion(아르니온).  amnos(암노스)

 

그래서 야훼 이레는 "하느님께서 보실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자, 이 두 조건이 창세기 22장에 등장을 합니다.

어린양이 될려면 먼저 제물이 되어야 되고 하는님께서 마련해 주셔야

된다. 이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자 이야기의 끝에 바로 가서.

자, 이사악을 탁 제물로 바치려고 하니까 천사가 탁 나타나셔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그만, 이제 알았다. 너의 무엇을? 믿음을."

 

원래 자기 외아들을 바치라는 것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죠? 그래서 이제 죽이려고 탁, 제물로 바치려고

하니까. "이제 너의 믿음을 알았으니까 그만 해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양 한마리가 있거든요.

또 다른 양이 있지요? 그 양을 잡아다가 대신 바쳤다 라고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은 혼자 돌아 옵니다.

 

이 아주 미스테리한 부분인데 왜 같이 갔다가 왜 이사악이 어디 갔을까?

이 이야기는 잠깐 남겨두고요.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한

어린양. 이 단어가 히브리말로 '쎄'입니다. 우리 쎄쎄쎄 하죠? 그죠?

어렸을 때.

 

'쎄'라는 단어를 히브리 말로 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본 숫양은

아일이라는 히브리 말로 다른 단어가 사용됩니다. 자, 단어를 왜 굳이

다르게 표현 했을까? 제물로 쓰여야 되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보실 그 어린양의 단어와 다른 단어를 취함으로써 차별화

시킵니다.

 

자, 그 조건이 아브라함이 봤지요? 눈을 들어.

예, 누가 마련해 줬는지는 우리는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우리 성경 공부하시는 분들이 여기를 출발 점으로 두는 것

자체가 왜? 여기에 제물로 쓰이고, 하느님께서 보시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어린양은 창세기 22장 이사악 묶기, 이사악 동여매기, 혹은 우리 표현인

이사악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믿음 위해서 펼쳐진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믿음을

위한 어린양, 제물로 바쳐질 어린양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자, 그러면 어린양을 찿아서 여행을 이제 떠나가 봐야 됩니다.

 

자, 그래서 '쎄'라는 단어가 중요 하겠지요?

'쎄' 이걸 찿아서 나가야 됩니다. 자, 이 단어가 어디서 발견 되느냐?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대목입니다. 탈출기 12장에 등장합니다.

 

자, 여기 파스카 너무 잘 알지요? 그죠?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 이집트의 마지막 밤에 열번째 재앙이 뭡니까?

맏배들은, 맏이들을 다 죽인다.

어우, 너무.... 하느님이 어떨 때는 되게 그래요. 그죠?

다 동의 하셨습니다. "네!" ^*^ 

 

우리 하느님 믿지마는 제가 어디서 잠시 봤는데 이거 웃자고 하는

소린데 성서에 구약성경에 하느님께서 사람을, 인간을 죽이게 한 숫자가 

이천육백만명 정도 된데요. ^*^ 

근데 악마가 직접적으로 죽인 숫자가 60명이래요.

 

자, 그거는 뭐 믿지 않는 분들이 이렇게 우스게 삼아서 적어 놨는데 

뭐 이렇게 적어 놨어요. 밑에. "어떤 놈이 더 나쁜 놈이고?"

이렇게 적어 놨어요. ^*^  여러분 판단은 어떻습니까? ^*^  

누가 더 나빠요? 아, 대답 못하시겠지요? ^*^ 

 

예,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역사를 하시는데 나중에

이야기 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 설명하면서.

 

예, 그 만큼 우리가 이 성경을 하느님 자체, 하느님께서 직접 쓰게 했고.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뜻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면에서는 유치하고, 나약하고, 한계있고,

인간의 어떤 전쟁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뭔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다.

 

똑같이 사람 죽였다고 하느님은 "나쁜X!" 이렇게 해 버리면 이거는 우리

신앙이 아니라 인간적인 그 방법을 믿고 있는 아주 이것도 근본주의적인

어떤 성경 해석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무틑 우리가 탈출기 12장의 어린양의 주제로 돌아와서 어린양이

여기서 어떻게 등장 하는가? 맏배를, 맏이를 죽이는 하느님의 영이

이렇게 그 밤을 사~악 거닐고 있는데 어떻게 해요? 어린양을.

 

자, 고기는 다 그날 먹고, 남으면 태워버리고 피는 문설주에 발라라.

예,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건너 가시는데 보십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보신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제물.

 

이 제물은 단순히 희생, 죽음, 이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 파스카라고

그랬지요?  예, 건너가기 위해서. 어디에서 어디로?

물론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자유로운 해방을 이야기 하겠지만

신학적으로 더 접근 해서 보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자!

생명을 위해서 제물로 쓰이는 거예요.

 

그 어린양이 그것을 위한 하나의 표징으로 되고 기호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어린양의 피를 보지 않았다면 절단 내셨겠지요?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발랐는 그 문설주를 보고는 하느님의 영이

"아, 이집은 아니구나!" 이 집은 생명이 있어야 되는 집이구나."

그래서 건너가십니다.

 

그래서 탈출기 12장 어린양의 개념은 '생명' 우리게게 생명을 주는

개념이다. 자, 이 어린양이 탈출기 12장에서 똑같은 단어가 쓰이면서

하느님께서 보시고, 제물로 쓰였고, 그러나 생명으로 의미가 지향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 탈출기 12장에 나왔던 이 어린양은 아까 우리가 나눴던 이사야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이사 53장에 등장합니다.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마는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고, 죄도 없는데.

 

예, 이거 누가 떠오릅니까? 예수님이 확 떠오르세요?

예, 그 만큼 우리가 제가 이런 표현을 쓰면 우리 신자분들 화들짝

놀라시는데 그 만큼 우리가 세뇌되어 있다는 거예요.

 

왜?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아,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미리 예언 했다고 그러지마는 구약 성경은 누구의 경전입니까? 

유다교의, 유다인들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전입니다.

 

거기 가서 이거(이사 53장) 예수님 지칭한다고 그러면은 받아들일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그 문화, 그 시대적 배경의 그리고 거기에서 적혀진

성경 말씀들은 그네들의 어떠한 해석을 먼저 존중할 수 있는 마음들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이것이 예수님을. 무조건 이것(이사 53장)이 그리스도교와

관련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도 우리의 욕심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핍박받고 박해받고, 아무 죄가 없는데.

이것은 당시의 이사야서에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예, 뭐 해석마다 약간씩 조금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마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한 번 보십시요.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는 조금 아니까.

맨날 두드려 맞습니다. 그죠?

 

떠돌다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기껏 나라 잡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니까 외세에, 앗시리아에, 바빌론에, 페르시아에,

리스에, 로마, 뭐 그러고 예수님 시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후에

유다 1차 항쟁, 예 70년경, 그 다음에 2차 항쟁 135년경.

 

완전히 나라가 망해 가지고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나라

다시 찿은 것이 뭐 불과 얼마전 일이지 않습니까? 전체 역사를 봤을 때.

그만큼 핍박받는 민족이었지요?

 

이사야서 53장의 이사야의 어떤 관점을 봐도 핍박 받고 아무 죄도 없이

두드려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53장의 마지막에 이 핍빅 받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다시금 들어 높이는. 그러나 죄없이 끌려가는 그 모습은

마치 어린양처럼.

 

여기서 어린양은 그럼 무슨 의미일까?

여기(이사 53장)에 어린양이 나타나는데 자, 잘 보십시오.

어린양 자체가 표징이 아니라 어린양을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드러내는 

또 다른 표징으로 씁니다. 

 

※ 이사야서 53장 어린양은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을 드러내는

   또 다른 표징이다.

 

죄없이 핍박 받아요. 예, 죄 없으신 분이라고 한 번 봅시다.

예, 어떤 존재 입니까? 죄 없으신 분이 핍빅을 받지마는 이 어린양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침묵하고 있었다고 그러거든요.

말을 하지 않았다. 다 내가 짊어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이 이 어떤 존재가 나중에 들어 높임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다. 왜?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죄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들어 높일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금 해방과 자유를 얻어 누린다 라는 그런

표현이겠습니다마는 이것이 이런 의미로 핍박 받았으나 들어 높인다.

그것을 지칭하고 묘사하기 위해서 어린양이라는 개념을 썼습니다.

 

자, 구약의 전통에 있어서 한 요정도만 살펴 본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 그리고 이 생명은

핍박 받겠지마는 다시금 들어 높일 것이다 라는 이 개념이 머리속에

유다인이라면 들어 있는 거예요.

 

자, 어린양은 동물적인 개념이 아니죠? 그죠?

예, 우리에게는 신학적인 의미가 다 가득히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요한 복음 1장에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이 왜 굳이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가져 왔는가? 이런 의미를 예수님한테 적용시켰던 거예요.

 

그러니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굳이 어린양이라고 표현을 썼다는

자체가 이런(앞에서 설명한 내용들)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 여기서 우리에게 너무나 기가막힌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처음에 제가 믿음이라고 크게 한번 써 보자고 했습니다.

첫 출발이 어린양의 첫 출발이 믿음을 위해서 입니다. 믿음은 뭡니까?

하느님과 인간이 온전히 일치할 수 있는. 그분께만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

 

마치 에덴동산에 어떤 함께 살아갔던 그 모습. 그 믿음을 위해서 제물로

써야 되는데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셔야 되는데 제물이 동물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이분(예수 그리스도)이 직접 세상에 오셔서 이분이 직접

죽으시고 제물 되시고 그래서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처음으로 들어 높임을

받아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 하는 길을 위해서

하느님 스스로가 제물되시고 하느님 스스로가 들어 높여서 그 길을 열어

주셨다. 이거는 기가 막히는 겁니다.

 

우리가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어린양이나 동물을 했지만 다른 고대 근동에서는

사람(아이들)을 갖다 바치는 그런 문화도 있었단 말이죠.

신과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필요 없다. 하느님의 논리는 그거 다 필요없다.

우리가 이사야서나 다른 예언서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더냐? 무엇을 너희들이 갖다 받친들

그것이 나에게 기쁘겠느냐? 나에게 뭐가 즐거움이 되겠느냐?

다 내 것인데.

 

그래서 하느님이 택한신 방법은 중간에 뭔가 끼어드는 것 말고

직접 당신이 제물로 되시어 우리에게 당신과 일치하는 길을 보여주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자, 이 개념을 요한 묵시록은 어린양, 이 전체를 가지고 요한

묵시록의 '아르니온'. 29번이나 사용한 그 어린양의 개념이 이런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입니다.

그 일치는 무엇이냐?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죽음의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앞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자 라는 의미가

어린양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모습을 보면,

요한 묵시록 5장 6절에

 

※ 묵시 5,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살해 되었으나 서 있다라는 표현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죽었으나 동시에 서있다. 죽음을 뛰어 넘고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우리게게 다가오신다. 그 부활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분을 표징으로 삼아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 라는 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어린양의 개념입니다.

 

※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어린양의 개념: 죽음을 뛰어넘고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 분을 표징으로 삼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하는 이 어떤 대목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분'입니다.

 

예, 죽음으로 내몬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완전히 떨어져서 영원히 죽음으로

계속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죽을 운명으로 오셔서 우리를 부활하는

그길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

 

'살아 있는 분' 이라는 이 표현이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요한 묵시록의 표징입니다.

예, 어떤 표현이냐 하면, 엘이라는 표현인데  

 

 

 

엘이라는 이 말 자체는 우리 너무 잘 알지요?

 

하느님이라는 뜻이죠? 하느님이 '하이'. 요게 형용사 입니다.

살아 계시다 라는 살아 있는 하느님. 이 표현이 성경에 너무 잘 나옵니다.

예켄대 여호수아 3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여호 3,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 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이 일이 뭐냐? 요르단 강을 건너서 여호수아가 들어가서 하느님께서 주신

그 복지. 뭐와 뭐가 흘러요? '젖과 꿀이'.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른다 라는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참 난감

예리고 사막이죠? 너무 척박하죠? 하느님이 주셔도 뭐 이런 땅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자기 신앙 안에 흐르는 거예요. 

사막의 유목 생활, 광야를 떠돌다가 드디어 정착할 수 있는 땅 하나에도.

이게 후대에 기록했다 말이죠? 정착할 수 있는 땅덩어리 하나만 있어도

젖과 꿀이 흐른다. 제가 지난 시간에 한 번 말씀 드렸을꺼예요.

 

어떤 사건, 상항을 보고 "아이구야, 절단이다!"라고 표현하는 그렇게

우리가 보는 관점. 객관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라보면

"거짓말 덩어리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신앙을 가지고 바라 봤을 때

그 땅덩어리 하나에도 그리 척박하지마는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라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이 모습은 우리 예수님 모습 안에 나타 납니다.

빵을 나누는 기적 안에서도. 자, 보리빵 다섯 개, 물고기 두마리에

"어이구, 감사합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인데 감사할 턱이 없죠?

우리 같으면.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예수님 제자들이 그러지 않습니까?

200 데나리온 어치라도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평가하는 게 우리의 본래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는 작은 것에도 일상의 것에서도 감사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것들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막 들어 갈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그 일로써

 

※ 여호수아 3,10 :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면서,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기르가스족, 아보리족, 여부스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쫓아내시리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두렵겠어요. 하느님께서 땅을 주셨다고 하지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 하지마는. "오, 저 미지의 땅에 들어 가는데

얼마나 두렵고, 거기 가서 또 노예 생활 하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요르단강을 팍 못 건너지요?

 

좀 한참 있다가 정탐꾼들 보내서 확인하고 주저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두려운 마음, 흔들리는 마음, 그래서 돌아갈까?

이런 마음 안에 바라봤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두려울 수도 있겠지요? 미지의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이렇게 다가 왔을 것인데 거기에

생명의 하느님을 알아 봤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들어갈 때 힘 있는 하느님, 다 무찔러 주시는 하느님,

완전 군사적으로 완전히 힘 있고 뛰어나신 그런 하느님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쳐 없애주시는 하느님을.

 

그런데 생명의,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아주 독특한 신앙 고백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시편 42편에 보면 3절에 너무 잘 아시는 부분인데.

 

※ 시편 42,3 :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하느님. 우리가 만나 뵈어야 될 분은 죽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다 라고 시편에서 또 그렇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요 바로 요 표현이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는 요한 묵시록 4장에서 등장을 합니다. 4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 묵시 4, 9 - 10 :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 마다,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살아 계신 그분께 라고 표현이 있지요? 똑같이 요한 묵시록 저자가

구약에서 생명의 하느님, 살아 계신 분을 그 똑같은 하느님을 지금 스물네

원로들이 경배드리는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 살아계신 그분,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죠.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신 분.

 

예, 그 살아계신 분을 가지고 온 거예요. 굳이 다른 하느님 묘사된 게

많을껀데 구약의 살아 계신 분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왔다.

자, 이제 이 표현이 이제 하느님 아버지께 계속 표현이 되었는데

요한 묵시록에서 이것을 어디로 땡기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적용시키는,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이 된다는 것입니다.

1장 17절 그리고 18절에 보면

 

※ 묵시 1, 17 - 8 :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 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라고 당신을 표현 합니다.

여기 살아 있는자, 요 표현이 '존'이라는 표현입니다. '자오'라는 '살다',

'살아 있다' 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그것을 현재 분사로 표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늘, 지금, 현재 우리들과 살아계시다는 겁니다.

우리 하느님 표현 지난 시간에 봤죠?

예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오고 계신 현재의 하느님.

 

구약에 표현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늘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 그래서 늘 현재 새롭게 만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새롭게 못 만나면 하느님 아닌거예요.

 

어제의 하느님, 어제의 감동, 어제는 내가 강하게 뭔가 느꼈는데

오늘은 왜 이 모양이고!" 이래 나가면 이거 큰일  난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아니라 어제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거. 예 강조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의 표현 어떻게 보면 신성 모독이예요. 늘 살아계신

그분의 표현을 예수님께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표징으로서의 어린양.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요한 묵시록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생명, 이것이 너무 중요한 예수님께 포함된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간직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분, 하느님 자체이시다.

생명 자체이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생명에 대한 강조는,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은 루카 복음에서 어떠한

예수님께 적용시키느냐? 예, 루카복음 24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루카 24, 5 :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찿고 있느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죠? 부활하신 분을 표현하는데 살아 계신 분.

자, 하느님 아버지 살아 계신 분,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분,

이 분은 곧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에서 우리가

보게 됩니다.

 

※ 루카 24, 6 :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 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자, 여자들도 그렇습니다. 지금 여자들이 땅으로 향하지요?

근데 부활 했다는 게, 부활을 표현할 때 일어섰다라는 동사를 써서

일어서다. 땅으로 넘어지면 죽음을 의미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땅에 떨어졌다. 어디서

떨어졌을까요? 우리 말에서 라는게.... 성경에 말은 안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가 여러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게 예전에 중세 때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가는 길을 그림으로 표현을 하죠?

왜냐하면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말을 타고 가는.

 

당시에는 기사들이 워낙 많으니까. 그 모습을 사도 바오로에게 그려

넣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떨어지는 모습이 말에서 떨어진다고 그러는데

성경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말은 안 나옵니다. 아무튼 넘어졌다.

죽음을 의미 합니다.

 

다시 이제 보게 되고, 비늘이 떨어져 눈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것을 보게 됐다. 부활의 세상을, 부활하신 분을 참으로 뵙다

라는 신학적인 어떤 표현이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요한 묵시록에도 요한이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기에 대비되게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죽음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는 분이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런 살아 계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가 한번 이 실생활하고도 연결해 볼 필요가 있는 게

요즘 한국에서 너무 죽음의 어떤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의 표현, 살아 있는 분으로서의 이 표현이 생명을

지향한다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생명을 지향해야 됩니다.

 

얼마전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연예인들, 그런 분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 또 스스로 삶의 어려움 그것이 뭐 사회적인 전체 다 모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마는 여러

노동자들의 어떤 그런 자살들 이런 모든 우리의 삶을 보면서 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또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 이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 예수님께서 생명이시고 지금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 생명의 문화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야 됩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 간다면 우리 세상 모두가 어떻게 될까?

 

주님을, 예수님을 참으로 왕으로, 생명의 왕으로 주님으로 모신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또 다른 표현, 주님 중의 주님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고, 세상 모든 것의 지배자이시고, 그래서 어떤 표현이 있냐하면?

 

1장 5절에 세상 모든 임금들을 다스리는 임금들의 지배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임금들의 지배자는 정치적인 것처럼 뭐 정치 권력,

군사권력의 그런 임금이 아니라 생명을 지향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살아

있음에 대해 감사 드리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실천하고

런 세상 안에서의 주님. 왕.

 

이분을 우리가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모든 죽음의 문화를 다 걷어내고

정말로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말과 행동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 : 생명을 지향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살아 있음에

대하여 감사 드리고 살아 있음을 실천하고 그런 세상 안에서의 주님. 왕.

 

간혹 그렇지요? 우리가 뭐 장난스럽게도 뭐 말로도 죽는다, 죽는다

표현 하지마는 그것이 다른 어떤 간단한 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상처가 되고 그것이 말이 살인을 불러 올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의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생명의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것,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면 거기에 맞춰서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

그런데 이 왕이라는 표현을 왜 썼을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왕. 왕은 당시에 우리가 다음 시간에 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시대적 상황, 로마 황제가 막 이렇게 종교적으로

억압하는 가운데에서 거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로마 황제가 최고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생명의 왕이 있다.

예수님을 왕처럼 꾸미는 거예요. 꾸미니까 1장 6절에 보면

 

※ 왕의 표상(메시아 요래를 염원)

* 묵시 1, 5 :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시편 89,28)

* 묵시 1, 6 : 사제들의 왕국을 만드시다(탈출 19,6)

* 묵시 1,13 : 긴 예복과 황금 띠(1마카 10,89 ; 11,58)

* 묵시 3, 7 ; 5, 5 ; 22,16 : 다윗의 후손(2사무 7. 시편 89)

 

다윗의 후손이 누군가? 왕이라는 거예요.

예, 로마 황제와 이렇게 주눅 안들고 우리 예수님도 왕이다.

이걸 강조하기 위해서 왕.

예, 그렇게 또 예수님을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님은 자, 생명의 하느님, 생명의 주님, 생명의 왕,

어린양부터 쭉 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우리가 절대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것, 절대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것.

그러나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다.

 

앞으로 오실 분이다. 예, 요한 묵시록 제일 끝에 가면

'주 예수여, 오소서!' "오냐, 내 곧 가께!" 라고 말씀을 하시지만은

지금 까지 아직 안 오셨어요. 그럼 우이 하라고? 기다려야 돼요?

기다리면 뭣 하면서 기다려야 되겠습니다까?

이 기다림의 시간이 바로 교회의 시간이 라는 거지요.

 

※ 요한 묵시록의 교회론 :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것,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지금 기다리면서, 실천하면서

실천의 제일 중요한 핵심은 어린양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이다.

그리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와 그것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앞으로

다가오실(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요한 묵시록의 교회론인데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준비 하는 것.

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지요?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지금 기다리면서 실천하면서 그 실천의 제일 중요한 핵심은

어린양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와 그것에 대한 실천,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

다가오실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그래서 우리의 역활이

계셨던 그리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주는 역활을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주 숙제가 커요. 너무 커요.

 

그래서 한시라도 이렇게 잠들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깨어서 어떻게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사회를 살릴 수 있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살아가야 됩니다. 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 우리에들려 주시고자 했던 내용입니다.

 

래서 처음부터 나왔던 게 "나는 성실한 증인이고, 나는 죽음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맏이다." 라고 부활한 예수님을 드러내셨던 것이죠.

나중에 저 끝에 가서도 천상 예루살렘에서 그 생명수가 흘러나와서

하느님과 생명을 공유하는 그 모습. 생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입니다.

예수님의 호칭에 있어서는 당신을 드려 내는데 있어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이것을 머리속에 팍 넣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호칭 중에 제일 중요한 건 어린 양인데 어린 양은 결국에는

생명을 지향하고 우리 모두가 생명 안에서 영원히 하느님의 그 어떤

주시는 생명 안에서 영원히 사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론이다 라고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예, 오늘도 강의 들으신다고 수고 하셨구요. 우리가 또 나가서 이제

다른 사람 다 살리는 말 그렇게 많이 하면서 또 한주간을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제4회  현재를 위한 예언의 말씀이 계속 됩니다.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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