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16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4

윤 베드로 2016. 8. 28. 18:09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제16강 일곱 교회에 말하는 영의 목소리 4

 

찬미예수님! 반갑습니다. 요한 묵시록 잘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서간에 계속 너무 오래 머무른다라고

생각하는 분들 계실꺼예요. 아마 오늘 이제 마지막 시간입니다.

네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좀 바빠요. 세 개의 교회를 봐야 됩니다.

 

에페소 교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보다가 두개 보다가 지금 세개로

지금 빨라지는데 이렇게 일곱 교회에 보내는 그 어떤 서간에 우리가

네 시간이나 이렇게 머무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모든 주제들이 이제

요한 묵시록 4장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반복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기 서간문의 것만 확실하게 우리가 이해를 하면 뒤에

여러가지 장면, 묵시적인 장면이 나타나는 것 쉽게 이해가 빨리 됩니다.

이게 키 포인트죠.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간이. 그래서 오늘을 세 개의

교회이기 때문에 좀 빨리 집중해서 좀 정신 바싹 차리셔서 그렇게 좀

우리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르디스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 묵시 3,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예,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누구? 예수님.

자, 여기서는 많은 호칭 중에 일곱 별, 일곱 영. 예수님께서 일곱 영을

가지셨다는 것은, 일곱 별은 우리가 잘 알죠? 뭡니까?

1장에서 나왔습니다. 뭡니까? 별이? 천사들. 뭐의 천사들입니까? 교회.

다시 말해서 일곱 개 교회, 곧 모든 교회의 권한을 가진 예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자 모든 교회를 다스시시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죠.

 

*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예수님(하느님으로서 모든

   교회에 권한을 가진 이)

 

* 묵시 3,1: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자, 여기 매번 반복하는 "네가 한 일을 안다."는 것은 이 사르디스 교회

에서는 네가 한일 그것이 어떤 일인가?

 

* 묵시 3,1: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이 말씀과 한번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그 일은 안다라는 것이죠. 이 말이 왜 나왔는가? 우리 교회

를 싹 보면서 그 교회가 위치한 도시의 어떤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는 게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이 사르디스라는 곳이 페르시아 정복기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 거기에

정복기간에 완전히 황폐했던 도시였어요.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약간

좀 이렇게 재건을 해서 거기다가 이제 신전을 막 세웠죠. 그런데 서기

17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또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런데 티베리우스

황제가 또 도시를 재건하면서 황제를 위한 신전을 또 세웠죠.

 

그러니까 죽고, 살고, 죽고, 사는. 예, 죽음과 생명 이것에 대배되는 이

개념은 요한계 문헌의 특징입니다. 사실은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마는

너는 죽은 것이다. 그것이 네가 한 일이다. 죽었다? 뭐가 죽었겠습니까?

죽었다. 살았다. 우리 신앙적인 얘기로 야고보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어떤 신앙이 죽은 신앙입니까? 행동 없는, 실천 없는 믿음.

너는 살아 있다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마는 사실은 너는 죽은 것이다.

뭐가 없기 때문에? 행동이, 실천이 없기 때문에. 사르디스 교회에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실천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지금 죽음과 생명이라는 요한계 문헌의 어떤 대비되는 개념을 가지고

말씀하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깨어 있어라.

 

* 묵시 3,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신약의 복음서에도 "깨어 있어라." 라는 말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깨어 있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메세지 안에서는 깨어 있다는 것은, 튼튼하게 있는 것은,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든다. 이 튼튼하게 만들다라는 동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테리조(sthrivzw/στηρίζω)' 라는 동사가 사용됐습니다.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튼튼하게 하다. 튼튼하게 한다면 세례는 어떤 의미입니까?

새롭게 태어나는 것.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내어나는 것. 그것이 튼튼

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들, 믿음에 실천이 없이 뭐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서 생명을 불어 넣어서

활기차게 뭔가 하도록 하여라라는 것이 튼튼하게 만들어라라는 것입니다.

 

* 튼튼하게 만들어라: 생명을 불어 넣어서 활기차게 뭔가 하도록 하여라.

 

* 묵시 3,2: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완전하다? 불완전하다? 라고 하면 내 일이 내가 만족할 만큼 뭔가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마시고요. 요것도 요한계 문헌의 특징입니다.

완전하다는 말. 이 말마디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말합니다.

 

* 완전하다(묵시 3,2):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들도 어떻게 하라고요?

하느님과 일치라라고요. 하느님 같이 닮으라고요. 하느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완전해도 하느님과 똑같을 수는 없지요?

인간이 어떻게? 한계가 있을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완전

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

예, 그 어떤 법전,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무슨수로?

그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함의 방법, 우리가 완전해질 수

있는 방법 그거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가능한 거죠. 일치하라. 그래서

너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다시 표현하자면은 "너희들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해 있지 않다고 본다. 나는. 요런 표현이죠?

 

* 묵시 3,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자, 요기서 보면 어떻게 받아 드리고 어떻게 들었는지 고것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자, 요기 동사가 우리 한국 말로 번역하면 잘 이러헤

눈에 확 안 들어오는데 요기 자세히 다시 보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 동사는 지속적인 시간 개념, 내가 지난 시간부터,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가르침인지 자꾸 되새기는 거죠. 되뇌이는 거죠. 내가 성당에 다니

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떤 말씀을 들었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들었는지

계속 곱씹어 보고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 그것을 한번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요렇게 살펴보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고 그런데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

여라라고 그랬지요? 요 때 쓰임 동사는 일회적인, 지금 유일한, 이 순간에

바로 해야 하는 것으로 지속적이지 않다는 말이죠. 내 삶을 되돌아보고

내 지금 회개하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동사가 딱 구분이 됩니다.

 

*묵시 3,3: 살펴 보는 것(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

                회개 하는 것(지금 바로 해야 하는 것)

 

지속적인 동사, 일회적인 동사. 살펴보는 것는 계속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거고. 회개하는 것은 지금 바로 해야 된다는 급박한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은 앞에 문장과 연결해서

보자면,

 

* 회개: 튼튼하게 말들어라, 완전하게 되어라, 새로 태어나라,

           예수님과 일치하라.

 

* 묵시 3,3: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이거는 복음서에도 있죠? 하느님께서 언제 오시고 종말이 언제 오고?

도둑처럼 온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아까 제가 지속적

이라고 했지요? 도둑처럼 오니까 언제 올지 모르죠? 그때 확실한 그때를

몰라요. 모르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요? 계속 가르침을 되새기고

계속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가르침? 어떤 가르침? 무엇을 되새기겠습니까?

여러분 예컨대 신앙생활 하면서 무엇을 되새길까요? 하느님이 도둑처럼

오시는데 그걸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는데 무엇을 되새겨야 되겠습니까?

말씀? 어떤 거? 예컨대 뭐 토라? 율법? 성당에서 지키라는 거? 사랑?

봉사? 실천?

 

예, 여기서 쓰여져 있는 걸 보세요. 어떠한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 남아 있는 것들이라는 단어와 그 가르침을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는 어떻게 보면 그리스 말에는 남성이 있으면

중성이 있어요. 중성 복수가 있어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중성이.

 

그러니까 이거는 무슨 의미냐하면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 이

모든 것이라는 이 개념을 가지고 요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 무엇을

지킬까? 말씀? 가르침? 뭐 이런 식으로 자꾸 어떤 신앙적인 것을 우리가

자꾸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끔씩 보면 한국 교회의 어떤 우리가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면 우리는

너무 신앙이라는 단어를 세상살이와는 별개의 어떠한 정신적 어떠한

수양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빠져버리느냐하면 그냥 마음의

수련, 그냥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다. 그러면 내 안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거 같다. 그렇게 성댱에서 묵상을 하고 성체 조배하고 나서, "아,

이제 나는 신앙이 가득찬 거 같애. 이거는 한쪽만의 신앙, 편협한 신앙

입니다. 이것도 분명 필요하고 좋은 것인데 아까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실천이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과 우리 왜

무친다고 하죠? 파도 무치고 뭐도 무치고 하죠? 이게 버무려지지 않으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죠. 너무 이쪽으로만 치닫고 나가버리면

실제 삶이 빠져버린 그러한 어떤 신앙, 이거는 죽은 신앙이고 그렇게

됐을 때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되새기고 또 그것을 지키고 무엇을 지켜야

될 지 개념이 그냥 성당에서 묵주만 돌리면 된다라는 개념에 빠지면 안

된다라는 것이죠.

 

내가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삶,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신앙을

실천하고 살아가는가? 굳이 사랑 실천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라는 거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게 깨어 있는 것이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 묵시 3,3: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깨어 있어라는 계속해서 그런 충실한 삶. 제가 예전에 신앙이라는

단어를 설명해 드리면서 신앙은 타존재에 대해서 기대고 의지하는 것 그런

의미도 있지만 1차적인 의미는 삶의 충실성입니다. 견고함. 아까 튼튼하게

하다. 튼튼하게 만들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라고 세례의 의미와 연결

되지마는

 

* 내 삶이 새롭게 태어나려면은 내가 내 삶에 충실하고 늘 새롭게 바라보고

열심하려는 게 있어야 되겠죠. 그게 신앙이죠. 그게 깨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어떤 모습이다.

 

* 묵시 3,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자기 옷을 더럽힌다. 이 더럽히다라는 표현에는 우상 숭배에 빠져든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이 더럽히지 않는 사람?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

 

*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

 

* 묵시 3,4: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자, 흰옷? 우리 너무 잘 아는 흰옷? 구원, 영광, 기쁨, 하느님과 일치.

예수님과 함께 다닐 것이예요. 이거 친교죠?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묵시 3,4: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왜? 자기 옷을 어럽히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 묵시 3,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승리? 또 나오고, 자 여기 또 다른 주제 생명의 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친교 안으로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교에 들어가다.

 

요  내 이름있죠? 이름을 올렸지 않습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어디 소속돼

있고 일치해 있다라는 의미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분과 일치해졌다는 거죠. 생명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하느님. 그러니 하느님과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안 지우는 것이다. 거기에 적혀 있기 때문에.

 

* 묵시 3,5: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

   할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증언할 것이다. 복음서에 있지요? 누가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안다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르디스 교회.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우상 숭배 하지 않고 예수님 당신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알았다. 나도 아버지께 증언해 주겠다. 서로가 증인이

되죠. 증인이. 예, 이 보십시오. 주고 받고 일치하고 어떤 그런 모습들

그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 묵시 3,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기는 반복되는 것. 여러 교회 그 일곱 교회, 모든 교회,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사르디스에 보내는 메세지는

되게 간단하죠? 너무 빨리 왔는가요? 괜찬으셔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롭게 태어나서 나를 튼튼하게 하고 그리고 나를

완전하게 하고 이것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일치는 

단순히 내가 정신적으로 영성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 안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새롭게 완전하지도 않고 새롭게 태어

나지도 않고  튼튼하지도 않는 그냥 죽은 것이다라는 그런 의미로 받아

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자, 우리 필라델피아 교회로 가 보겠습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여기는 뭐 특별한 것은 또 없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재건 또 여기도 지진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 이렇게 파괴 됐었어요. 티베리우스 황제가 또 재건을 했고.

재건하는 동시에 또 뭡니까? 신전이 있고 그렇게 또 자기 황제 숭배를 위한 그런

것이 있었고 이 교회와 관련해서 이 필라델피아 지역은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

필라델피아 그리스도인들이 스미르나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11명이 뽈리까르또와

함께.

 

여기 교회의 어떤 순교자를 배출한 어떤 구체적인 기록이 있고 스미르나 교회 그쪽

지역으로 끌려가서 순교자가 나타난 그런 어떤 교회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한번 들어가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3,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라.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길지요?  자, 거룩한 이.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진실한 이, 참되다라는 거 요 단어를 가지고 한번 보겠습니다. 이 참되다라는

말은, 늘 진실하다라는 말은 뭐와 연결해야 하느냐 하면, 신앙이라는 단어 와 연결해

집니다. 히브리 말에 '에메트'입니다. 에메트인데 이 신앙은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요?

 

어디 이렇게 타존재에게 기대는 것 이전에 충실성, 굳건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진실한 이, 참된 이라는 것은 굳건함, 강직함 이런 의미로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 참되다(히브리어: 에메트): 굳건함, 강직함

 

요한 복음에 보면 이 참되다라는 표현이 예수님이 되게 많이 나옵니다. 참된 빛이시고,

참된 빵으로써 뭐 이런 여러 가지 어떤 참되다는 것이 예수님께 많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거 왜 참되다는 말이 적용이 되는가? 왜 굳건하다, 강직하다는 의미가 왜 이

신앙과 연결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삶을 한번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 가지고 어디에 어떻게

강직하고 굳건하셨습니까? 어디? 누구? 어떤 분의 뜻?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아주 강직

하게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어요. 신앙의 모델을. 그분의 뜻

만을 추구한다.

 

가끔씩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지요?
사랑하셔가지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러

이곳에 오셨는가? 이 두 개를 갈라 놓는 것 자체가 좀 모순적입니다마는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을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일까? 이걸 생각하다 보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것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었지 않을까?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을 사랑했으면 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와 율법학자들과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을 조금 싫어하셨을까? 그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분들은 왜

그렇게 다 내쫓았을까? 인간적 사랑이 앞섰다기 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뜻을 강직

하게 추구하신 게 먼저 앞서지 않았는가?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을 하다보면요. 뭐라 하지를 못해요. 내가 이 사람을 인간적

으로 사랑하면 아이구, 좋은 사람인데 뭐 잘못되면 아,~~으~~(어찌 할려다가도)

이러다가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예컨대 정말 내가 뜻이, 정의가 정말 하느님의 뜻이 분명히 서 있으면 잘못된

거 보이면 뭐라 하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그 수석 제자인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그러니까 아주 멋있게 뭐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거 같지

마는 당시 상황에서 사탄아 그러면은 우리 강아지 있죠? 강아지는 붙여서 하는 욕들

많지 않습니까? ^^*~~~ 그 이상의 욕입니다. 예, 뭐뭐뭐 ^^**~~~

삐~~ 하고 방송에 나요죠? ^^*~~~ 그러한 욕을 했다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느냐? 너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사랑의 관계를 요구하고 원하셨던

예수님이 그 욕을 하셨다는 것. 이거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 개념보다 하느님의 뜻에 더 강직하게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진실한

이 이 단어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자,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예수님은 다윗 가문이죠? 다윗하면 떠오르는 게 메시아죠? 정통 안에서.

그런데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열쇠를. 이사 22,22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이사 22,22: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매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엘야킴에게 히즈키아의 왕권을 이렇게 수여합니다. 왕권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 어떤 뜻이 온전히, 하느님의 힘이 이 사람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왕권은 주어지는 거지요.

 

열면 닫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거? 그만큼 하느님의 힘이 강하다는 거죠.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진이.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어떤 힘, 절대 한번 열면 닫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가장 부합되는 일이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처음으로 이렇게 태어나신 분. 죽음을 이기신 분. 처음으로.

그러면 이 죽음의 어떤 문을 활짝 열어서 생명의 문으로 열어 젖히신 분.

그분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죽음의 문을 열어서 생명의 문을 여신 분

 

구약에서는 왕권을 이야기했지마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

그게 궁극적인 어떤 하느님의 힘이라고 우리가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 열려진 문. 열면 닫을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 묵시 3,8: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보라, 나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네 앞에

                  열어 두었다.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 오롯이 열려진 문.

자, 열려진 문이라는 이 개념을 한번 보면, 바오로 사도가 어떤 즐겨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 1코린 16,9: 적대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적대자들이 많다. 바오로 사도가 뭐하시는 분이셨습니까?
예, 선교. 이방인의 사도. 이 많은 반대자, 적대자들이 있었다? 선교를 하는데 장애물이

많았단 말이죠. 그러나 큰 열려진 문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막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 큰 문이 나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막힘이 없다.

 

지금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내 앞에 열어 두었다라는 것은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그 누구도 너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그리고 이런 복음적인 삶 이런 것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로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자, 힘이 약하다는 개념과 뒤에 보면 굳게 지킨다.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힘이 약하다는 것은 세상적인 어떠한 삶의 자리가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뒤에 거는 강하죠? 내 말을 굳게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는

엄청 강한, 힘이 약한 것은 세상적인 것.

 

왜 보통 이렇게 성당에서 우리 교회가 활동하는 걸 보면 세상에 이렇게 한번 보여줘야

되는데. 행사를 해도 좀 화려하게 사람들 이렇게 우싸 우싸 이렇게 많이 와 가지고 그죠?

멋지게 행사를 히야 되는데. 이런 사고 방식이 과연 교회적인 것인가?

 

마더 데레사가 그러셨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라고. 그런 어떤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고 이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모든 이가 되는 것이지.

 

예컨대 행사를 한다고 그래 가지고 몇 명 왔어? 교무금 얼마 냈어? 교회 신자수가 몇

명이야? 이것으로 우리 하느님 백성을 평가하는 어떤 우리 모습들. 한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들 숫자가 얼마 안 되고 너희들 작은 공동체지마는 너희들이

신앙은 너무나 강대하고 크다. 이것 한번 우리가 한번 많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 묵시 3,9: 보라, 나는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이렇게 하겠다.

 

사탄의 무리? 우리 한번 봤습니다. 그죠? 유다인들.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다인들.

그 사회에 적응해서 타협해서. 가짜 하느님 백성. 진짜 하느님 백성은? 요한 묵시록

관점에서 진짜 하느님 백성은? 어? 답이 나와야 되는데 ^^*~~~

 

자, 가짜 하느님 백성을 말하는 디아스포라의 유다 백성들. 디아스포라에서 그 문화,

그 바깥에서 문화에 융화되서 막 살아가는. 가짜라고 평가하고 그것을 사탄의 무리라고

까지 표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느님 백성은? 그리스도인. 예수께 진짜로 제대로

신앙을 가지는 요러한 관점을 요한 묵시록은 가지고 있습니다.

 

* 묵시 3,9: 그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사탄의 무리. 유다인이 아니다. 유다인인데 진짜 유다인인데 유다인이 아니다.

 

* 묵시 3,9: 보라, 나는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엎드리게 하겠다.

 

자, 요기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디아스포라에 살아가는, 지금 필라델피아

그 안에 살아가는 유다인들. 유다 공동체 그 애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다. 저짓말을 한다.

얘들이 너에게 와서 엎드리게 하겠다는 거예요. 엎드리게 하겠다. 요거 이사야서 45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이사 45,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집트의 재산과 에티오피아의 소득과

   키 큰 족속 스바인들이 너에게 건너와서 너의 것이 되고 너의 뒤를 따르리라. 그들은

   사슬에 묶여 건너와서 네 앞에 엎드려 빌며 말하리라. "과연 당신에게만 하느님이

   계십니다. 다른 이가 없습니다. 다른 신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면에서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른 힘센 이집트가 너에게 와서 "당신에게만 하느님이 계시다."며

완전히 찬미 찬송을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와 희망의 메세지죠. 왜 이 말을

하는가? 이 마지막 때에 정말로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들어 높여질 때에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니까 모든 다른 민족들은 너희들의 그 참됨을

보고 경배할 것이다.

 

요 전통 요것을 이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킵니다. 유다인들이 너 앞에 와서, 네 발 앞에 엎드리게 하겠다. 참된 백성은

그리스도인이니까. 유다인들은 가짜이까. 이건 어떤 개념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예, 그래서 내가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많은 민족들이 그것에

대해서 존경하고 존중하고 그래서 엎드리겠다.

 

* 묵시 3,19: 그리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자, 요한계 문헌의 특징? 사랑 나오죠? 또. 사랑한다는 것을 하느님과 인간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도인의 일치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다른 비신자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행사 멋지게 하고, 아~~따, 자들 돈 많다. 자들 뭐 멋지게 하네. 이걸로 우리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 누구 유명인 신자라더라. 누구 정치인 가톨릭 신자라더라.

이것으로 우리 이름 날리면 안 되죠? 서로 사랑하는 모습 안에서 이름을 날려야죠.

 

하느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어떤 행동

실천을 사회가 알게끔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민족이 우리 교회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 들어높여 가지고, 멋진 건물 세워가지고  멋진 어떤 행사 하는 것이 우리를 드러내

는 행동이 전혀 아님을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묵시 3,10: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땅의 주민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 올 때에 나도 너를 지켜주겠다.

 

자, 요 문장을 잘 보시면요. "니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무슨 말을 지켰다구요?

인내하라고. 요래 말하면 예수님은 요러구 옆에 살짝 빠져 있다가 어려움 당하는데

"야, 좀 참아라." 그러면 "예, 참겠습니다." 하고 참는 요런 의미가 있지요? 번역이 중요한

거예요. 물론 이 번역도 맞다고 할 수도 있지만 원문 그대로 하면 말이 좀 딱딱하니까.

 

* 네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나의 인내가 뭐겠습니까? 뭘 예수님이 참았습니까?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 꽈악 참는 거예요. 예수께서 피땀을 흘리셨다고

그러지요? 그거 가능하다고 그러네요. 의학적으로. 정말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는

이 땀이 피가 섞여 나온대요. 예, 그게 가능하다네요.

 

그렇게 어려운 고통을 당하시고 그렇게 하셨던 예수님의 인내의 어떤 모습. 그것을 의미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너희들이 나의 고통, 나의 인내에 함께 참여하라는 거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예수님의 삶의 어려움, 삶의 인내에 너희도 참여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살아가다 불편한 거 그거 인내해라. 무조건 내 십자가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뭐 쉽게 얘기해서 다른 표현으로 해 봅시다. 내가 돈을 벌어야 되는데, 주식 떨어지고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 예수님, 예수님!" 이런 식의 이건 십자가가 아니예요. 이건 예수님의 인내

에 참여하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어떤 삶의 모습을 따라 갈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거

이것이 우리의 십자가가 되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니가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는

무조건 참는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 그렇게 참여 했을 때

지켜 주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땅의 주님들, 이 땅의 주님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계에 시련이 닥쳐

올 때에 나도 널 지켜 주겠다. 이 시련은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는 이가 아니라 온 세계의

시련이 닥쳐오는데 땅의 주민들에게.

 

* 땅의 주민들(묵시 3,10):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지 않는 이

 

예수님의 심판은 예수님과 관계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뒤에 가서 우리 묵시

문학적인 장면 안에서 많은 징벌들이, 뭐 대접을 갖다 붓고 이러는 거. 그것을 내가

이제 당하는 거, 세상 모든이에게 징벌이 오는 것처럼 이해하지 마시고 징벌의 모습이

등장할 때마다 보면, 신앙이 없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굳건함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

게 주어지는 겁니다.

 

예전에 말씀드렸지요? 땅의 주민들 혹은 땅의 3분의 1 이러한 표현들이 한계적인 어떠한

신앙이 없는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만 징벌이 주어진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아무런 걱정

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신앙에 한번 속했다고 뭐 우리 해병대 그러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한번 해병 갔다 왔다고 영원한 해병이 되는 거가 우리 신앙이 아닙니다. 한번 신앙이

영원한 신앙의 아니라 한번 신앙인이었다가 바로 또 내일 악마가 되고 사탄이 될 수

있는 게 우리 신앙이기에. 그래서 깨어 있어라. 꾸준하게 가야 되는 거죠.

 

* 묵시 3,11: 내가 곧 간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 아무도 네 화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자, 요기서는 되게 희망적인 메세지입니다. 아무도 네 화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다른 교회에 보면 이렇게 이렇게 지키고 나면 화관을 주든 생명을 주든 뭐를 주는데

여기서는 이미 화관이 있어요. 니 화관, 너의 화관, 이미 화관이 있어요.

이 필라델피아 교회는 굉장히 잘나가는 교회예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예, 인내하라는 말을 지켰고 또 화관이 이미 있습니다. 안 뺏기게 지금.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에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 이 가진 것 그거 어떻게 꿋꿋이

지커라라는 격려의 메세지가 아주 강한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지금 그랬지마는

그거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지켜라라는 것입니다.

 

* 묵시 3,12: 승리하는 사람은 내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

 

자, 여기서 성전의 기둥입니다. 유다 전통에 보면 아브라함은 세상의 기둥이라고

불리워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기둥. 왜?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이 하느님의 어떤 작품을 참된 신앙인으로서 떠 받치는 어떠한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자, 여기 성전의 기둥입니다.  자, 우리 건물로 생각하시면 안 되죠?

여기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성전이라는 것.

 

* 성전(묵시 3,12): 하느님과의 일치된 어떤 모습, 하느님의 현존 안에 하느님 백성이

   함께 있는 것.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하느님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이죠. 일치의 기둥이 된다.

일치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뭡니까? 그 일치를 절대 깨뜨리지 않는 어떤 참된 버팀목.

이 필라델피아 교회 신자들이 얼마나 이렇게 칭찬을 많이 받고 있습니까?

 

교회의 반석으로 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어떤 일맥상통합니다. 그죠?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는 어떤 그 반석이 되는 것. 필라델피아 교회 신자들이 교회의

기둥이 되고 하느님의 현존의 기둥이 된다는 것. 이거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묵시 3,12: 그리고 네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

   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

 

자, 새 예루살렘, 새 이름이 나옵니다. 새롭다라는 거 제가 설명드렸습니다. 그죠?

새로운 것은 신상품이 아니라 내가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새롭게 다가가는 것.

 

예루살렘, 예루살렘이라는 그 어떤 표징은 옛날 구약부터 예루살렘, 예루살렘이죠.

그러나 나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은 내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내가 참가할 때, 일치

할 때 나에게는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이름도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는

것이구요.

 

* 묵시 3,13: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니까 모든 교회의 메세지다.

필라델피아는 우리가 이미 가진 신앙을 굳건하게 열심히 지키자라는 말이 여기

있습니다. 그 지키는 어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그 어떤 의미

에서 내가 가진 신앙을 표현하는 것. 그거 이웃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해 나갈 때

그것이 꿋꿋하게 잘 표현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게 필라델피아

신자들에게 보내느 말씀이었습니다.

 

자, 숨가쁘게 여섯 개 교회까지 왔습니다. 자 마지막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라오디케이아는 사실 이름이 그러니까 동명이인이라고  하죠? 우리가 이름 같은

것을 여러 명이 함께 쓸 때. 열 개 남짓 라오디케이아로 불리웠습니다. 이 성경에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리코스 지역에 세워진 도시로

뭐 많아요. 라오디케이아가. 10개나 되는데 기원전 3세기에 세워졌구요. 에페소하고

동아시아를 연경하는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고 교통의 요지다보니까 주위의 어떤

여러 도시들과 연합을 합니다.

 

이렇게 연합을 해서 자, 예컨대 큰 도시가 있으면 주위에 위성 도시가 있죠? 위성 도시

들이 큰 도시로 몰리겠어요? 큰 도시가 위성 도시로 가겠어요? 큰 도시로 몰리죠?

몰리면 뭐가 몰리느냐? 예, 많은 일 때문에 저번에 노동조합 같은 거 말씀드렸죠?

그런데 여기도 동업끼리 모여서 같이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뭐가 많이 쌓이냐 하면

돈이 많이 쌓여요. 그래서 은행, 요즘식으로 하면 은행 이런 것들이, 금융 이런 것들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섬유 공업이 아주 활발합니다.

 

* 라오디케이아: 동업 조합이 번성했고  섬유공업, 향유와 연고를 통한 제약업이

   발달했음

 

제가 있는 대구도 이 섬유쪽이 아주 유명한데요. 여기도 섬유가, 그리고 향유, 연고

 우리가 이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면 눈에 바르는 안약도 만들고 연고도 있고 뭐

정련된 금 이런 거 다 재화와 관련된, 돈과 관련된 그런 어떤 활발한 그런 산업이

있구요. 그래서 아주 잘 삽니다. 부자 동네입니다. 서울의 부자 동네는 어디죠?

예, 강남이예요? 하여튼 그러한 어떤 모습이 있는.

 

그러면 그리스도 신자는 잘 살았겠습니까? 못 살았겠습니까?

예, 조금 참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세상하고 참 적응이 안 됩니다. 제대로 살려면.

그래서 약간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질투까지는 아니고 약간 반감? 잘 사는 것에,

부유함에 대한 반감이 약간 요 라우디케이아 교회에 약간 들어 있습니다.

예, 그래서 어떻게 들어 있는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묵시 3,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들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시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아유, 여기는 인제 하느님의 창조 근원까지 튀어 나왔습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예수님이 당신 표현 하는데 있어서 호칭들이 이제는 뭐 끝까지 갔어요. 인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습니다. 창조의 근원까지 가버렸습니다.

 

자, 그런데 처음에는 아멘, 아멘이라는 뜻은 우리 진실되다. 뭐 이런 어떤 형용사적인

어떤 의미인데 이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호칭을 사용하는 게 이게 유일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내 이름은 아멘이다. 이게 좀 그런데 아멘, 진실 이 단어를 우리가 뒤에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인이가 말한다라고 돼 있지요?

 

그래서 왜 성경 어떤 주석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게 아멘이 아니고 아마도

아몬이 아닐까? 이 막 적다보면, 필사를 하다보면 잘못 적을 수 있거든요. 아멘

아몬 비슷하죠? 우리 말로도. 그러니까 히브리 말로 적어도 되게 비슷합니다.

 

이게 왜 그런고 하니, 잠언 8장 30절에 보면, 아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뭐냐하면,  * 아몬(잠언 8,30): 어떤 작품의 주인. 그러니까 창작자 뭐 이런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아멘으로 요기 적었는데 물론  이거는 하나의 가설

이겠지요. 어떠한 이 주석 학자가 그 아몬으 아멘으로 잘못 적었지 않았을까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아멘이라고 적혀져 있으니까 아멘이라는 단어를 가지고도 우리는 또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당신 말씀은 진실

되고 그래서 내가 진실되이 따르겠다. 참되게 당신 뜻을 따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멘 그 차체죠. 하느님 말씀에 아멘 그 자체죠. 그렇게 뭐 이해를 우리가

하셔도 되겠습니다.

 

뒤에 이제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이니까 동시에 아멘이니까 창조의 근원이라는 말

때문에 아마도 창작자, 어떤 물건 만드는데 있어서 주인, 주된 역활을 하는 이라는

아몬이라는 것이 매치가 되니까 그런 가설을 이해하는데 아멘이라고 우리가 이해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참되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받으신 이니까

그 자체로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이가 말한다.

 

자, 여기 창조의 근원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근원, '아르케'입니다. 그리스 말로

아르케인데 이 아르케는 뭐와 연결해서 꼭 같이 가야 되느냐 하면, 처음과 끝. 끝이라

는 단어를 꼭 염두에 두는 끝과 대칭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자, 태초에 하느님께서. 태초 할 때 '브레쉿'이라는 히브리 말인데 그 안에, 그 때에

브레쉿 그러면 태초에 브레쉿입니다. 히브리 말로. 그 태초라는 말은 이 단어도 동시에

끝날에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뭔가를 만들었다 히지마는 실상 그 의미는 처음

에 고 때만 만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창조 사업은 계속된다.

 

여기 창조의 근원이라는 말씀은 창조할 때 고 때만 딱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르케는 끝과 함께 가야 될 단어이기 때문에 창조 그것이 끝까지 가는.

* 근원(아르케: 그리스 말) : 끝까지 가는(알파와 오메가)

그래서 쉽게 얘기해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이것이 우리가 아르케라는

이 근원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해해야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만들었다 그러면 언제 만들었을까? 그때가 언제일까?

몇십만 년 전, 몇백만 년 전 일까? 이런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 순간에도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라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 묵시 3,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안다.

 

어떻다구요? 미지근하다. 예, 라오디케이아를 비롯해 이 일곱 교회 전체가 어떻게

보면 지진을 겪고 온천, 화산 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온천수와 비유해서 말씀

하신 건데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미지근함.

 

* 미지근하다: 사회와 타협하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사회와 타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어떤 표현을

당시에 어떻게 했냐하면, 그리스도교 덕목은 비타협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의 덕목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영지주의 입장에서는 사회에 타협하라는 거죠.

적응하라는 거죠.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어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타협을 안 해요. 완고하고

고지식하다는 거죠. 왜 좀 "아이, 좋은 게 좋은데 좀 안 되겠냐?" 이렇게 막 합니다.

그렇게 하는 그 타협하는 거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미지근하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다. 확실히 하라는 거죠. 타협하지 말고

똑바로.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 묵시 3,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제 일곱 개 교회 마지막 편지 안에서 강합니다. 이것이. 아주 강하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관계 단절을 하겠다는 말은, 이때까지 다 어떻게 하셨나? 관계를

하겠다, 일치를 하겠다 불러 주셨는데 니가 확실히 신앙을 지키지 않으면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라는 것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묵시 3,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

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부자라고 그랬죠? 이 지역이. 그런데 가난하다. 이것을 복음하고 연결하면 쉽습니다.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이가 행복하다죠?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는 세상적인,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 친교 안에서 부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너는 그런 어떤 물질적인 것에 휩싸이다보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사회와 타협하고

대충 이렇게 살아가고 하느님의 뜻은 나중에 인제 옆으로 밀쳐나 놓고 돈벌이에 바쁜

그런 모습에 대한 경고일 수 있습니다.

 

* 묵시 3,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불로 정련된 금은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흰옷. 알죠? 일치, 영광 속에 들어가라.

 

* 묵시 3,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하느님께 돌아오라. 예수님께 일치라여라는 것이죠.

 

* 묵시 3,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요. 함께 먹어요. 아가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가서 보면.

 

* 아가 5,2: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

 

문 열어 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이렇게 돼 있죠?

사랑하는 사람, 요때 사랑이 필레인이라는 동사를 씁니다. 신적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필레인이라는 인간적인 사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 묵시 3,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요기의 사랑(필레인)은 신적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닌 인간적인 사랑을 의

 

참으로 인간 안에서 인간다운 사랑을 하겠다는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이렇게 "문을 열어 다오!" 하는 거와 같이.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여기서 먹는다라는 의미는 뭐냐? 성찬례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예수님을 함께 나누는 것이죠.

 

*묵시 3,20: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라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자, 함께 나누었으니까, 예수님의 성체를 나누었으니까 내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되어서 함께 앉아 있죠.

 

* 묵시 3,21: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자,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는 부자 동네라고 했습니다. 강남이든

그 어디든 예, 부자 동네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 그 부유함 거기에 휘둘려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뭐 제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뭐 신앙적인 것도 포기하는 것도

아닌 그냥 그렇게 성당을 취미 생활을 하듯이 다니거나, 신앙을 정말로 끼리끼리,

유유상종하기 위해서, 내 이해 관계에 맞게 끔 그렇게 따라 다니고, 성당에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면에서 강한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은 필요하죠. 재화는. 그러나

필요한 것을 절대적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적인 것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어떠한  정말 사

랑처럼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나를 사랑해 달라!" "

사랑 안에 함께 있게 하자!"

그러한 사랑을 무시하지 마시고 재화를 사랑하기 보다는, 재화는 필요한 것이고

사랑해야 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가 믿어 고백하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천상 예배,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양

출처 : 성서100주간
글쓴이 : 小花 글나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