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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하느님을 만나고 배우는 곳

윤 베드로 2021. 1. 28. 15:29

예수는 자연을 통한 가르침을 퍽 좋아하신 분이었다.

도대체 예수는 자연을 어떻게 이해했기에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끌어낼 수 있었을까?

예수의 자연 이해를 통해 그가 하느님을 만난 길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1. 예수가 하느님을 만난 곳이 바로 자연이다.

공중의 새와 들에 핀 꽃은 세상 구석구석까지 따뜻하게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기에 더없이 좋은 예들이고,

햇빛과 비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비가 오기 전이면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남풍이 불어왔다 하면 날씨가 무더워지며,

          나뭇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곧 여름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바람은 자기가 불고 싶은 대로 불어대니

            사람이 설혹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고 하더라도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하느님이 자연을 다루는 솜씨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연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무수히 많은 암시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느님은 자연을 만드신 분이기에 그분을 제대로 알려면 자연을 잘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를 두고 자연을 통한 계시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는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접한 분이기는 하나,

분명 자연은 그 중에서도 아주 큰 몫을 차지한다.

예수는 이런 평범한 진리를 누구보다도 잘 깨친 분이었다.

 

2. 자연은 하느님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기에 더없이 좋은 교육의 장이다.

하느님의 영원하심에 비하면 인간이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은

             늙어 희어지는 머리카락 하나만 예로 들어도 충분했으며,

             인생의 덧없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자연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분이 통치하는 하느님나라는 비록 처음에는 보잘것없이 보여 그 규모나 가치가

           과소평가받기 쉬우나 그 속에는 실로 엄청난 가능성이 숨어 있다.

누룩이 들어간 밀가루 반죽을 잘 싸서 아랫목 따뜻한 방구들 이불 밑에 넣어두면

             밤사이에 놀랍게 부풀어 오르고,

크다고 할 수 없는 작은 겨자씨도 땅에 잘 심어두면 후에 큰 나무로 자라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돌보심은 일면 가라지를 선뜻 뽑지 않는 농부처럼

            무한한 인내심을 동반한 애정으로 설명될 수 있으나,

            썩은 내 풍기는 주검에 독수리가 몰리듯 그렇게 무자비할 수도 있다.

물론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농사일, 죽음, 누룩 등의 예들이 예수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더할 수 없이 친숙한 소재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 광야로 예수를 따라 나선 사람들에게

            예수는 오히려 그들에게 친숙한 자연을 가르쳐 주었다.

아니 예수 역시 자연을 통해 하느님을 알았기에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려 달라는 사람들에게

       자연으로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예수의 주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 호숫가, 곧 하늘과 들과 산과 물을 배경으로 하는 곳이다.

수없이 몰려드는 청중을 감당하려면 이 정도의 공간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여기 넓게 트인 자연 공간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를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나라에 대해 자유롭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필시 그분의 눈에는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범상치 않았을 텐데,

       언제 어디서 불쑥 하느님의 모습을 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4.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가?

혹시 문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면을 시멘트벽으로 막아 자연에서 들어오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기운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연을 차단하고 그 결과로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서 차단당한다면,

         자연스럽게인간은 하느님과 멀어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손놀림과 화려한 솜씨를 보고 느끼며

             그분을 감성적으로 느낄 기회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리고 감성은 초라해진 채 반대로 지성만 기형적으로 비대해진다면,

         하느님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여념이 없는 가련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자렛 예수 / 바오로딸, 박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