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소예언서 공부

아모스 5장 : 이스라엘을 위한 애가

윤 베드로 2017. 7. 8. 08:43

이스라엘을 위한 애가(5,1-3)

 

*5-6장은 아모스의 세 번째 설교이다.

아모스는 이 설교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면도 하지만,

탄식어린 경고도 하고 있다.

즉 예언자이기도 하면서 같은 동포로서 애타는 심정을 드러낸다.

 

5,1-3 :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그들에 대하여 지은

애가를 들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애가”란 문자적으로 죽을 자를 위한 애곡이나 통곡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이스라엘)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이란

이스라엘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는 계속하여 이스라엘에게 애가가 필요한 것은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졌기 때문”이고

또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처녀”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그들이

지금까지 이방인에 의하여 정복되지 아니한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이방의 침략을 받을 것이고

그 전쟁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성읍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남게 될 것이다.

 

삶이냐 죽음이냐(5,4-7)

 

하느님은 이처럼 심판으로 멸망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뿐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가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돌이켜야 할 것은 형식적인 예배였다.

이스라엘은 부지런히 성지를 순례하며 희생제를 드렸지만

그곳에서 만나야 했던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배 행위는 신앙의 갱신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다만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주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는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결코 그들의 삶을 갱신하는 능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생명력을 잃어버린 종교적 관습을 버리고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으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우리는 5,4-6절의 권고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짓 신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벧엘과 길갈 그리고 브엘세바는 聖地다.

벧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에게

신앙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세속화로 인하여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마다,

또는 환란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할 때마다

그리고 영적 각성이 필요 할 때마다

벧엘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신앙을 새롭게 하였다.

브엘세바도 믿음의 조상들에게 벧엘과 같은 신앙의 고백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한 곳이고(창세21:22-34),

하느님께서 이사악과 야곱에게 나타나 주신 곳이다(창세46:1,2).

길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르단을 건넌 후,

요르단을 가르신 하느님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곳이다.

이스라엘은 요르단에서 제사장들이 밟고 있던 돌을 갈갈로 옮겨 그 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길갈은 가나안 정복을 앞에 두고 광야 여행으로 인하여

할례 받지 못한 세대들(광야에서 난 자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그들이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임을 고백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그곳들은 이스라엘의 성지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만났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단순히 그곳들을 하나의 성지로서 순례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 뿐 그곳에서 역사하셨던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곳들이 이스라엘에게 성지가 된 것은

그곳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런 곳들을 순례할지라도

하느님의 임재하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그들의 순례는 단순히 평범한 여행일 뿐이다.

또한 하느님의 임재 하심이 그곳으로부터 떠나 있다면

순례자들이 그곳들을 순례할 이유도 없어진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의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스라엘이 벧엘과 갈갈 그리고 브엘세바를 특별한 곳으로 알고

그곳을 성지로 삼았던 것처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특별한 곳으로 알고 신앙의 중심지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하느님의 임재하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교회는 신앙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이 들어야 했던 메시지 중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너희는 주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였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도 동일한 메시지다.

 

영광송과 경고(5,8-17)

 

예언자는 4:1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이 만나야 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해 주었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해준다.

이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진수(眞髓)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시간을 잃어버린다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홀연히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강한 자가 홀연히 임하여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고 또한 그들의 성읍을 무너뜨릴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강대국의 침략으로 임할 것임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을 말씀하실 때

앞에서는 그 길을 “주님을 찾아라”는 말씀으로 표현했고(5;4-6)

여기서는 “선을 찾아라”는 말로 표현했다(5,14).

그러므로 “주님을 찾아라”라는 말과 “선을 찾아라”는 말은

언어적 표현만 다를 뿐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언어들이다.

그러므로 두 말을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주님의 날(5,18-20)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슬피 통곡할 날이 올 것을 선포하며,

그들이 모든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는 기쁨의 날로

고대해 온 주님의 날이 도리어 그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날로

임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 “사자를 피해 도망치다가 곰을 만나고 집 안으로 피해 들어가

손으로 벽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으리라.(5:19)”는 말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구해 줄 것을 고대하던 주님의 날이

오히려 그들에게 심판의 날이 될 것을 말해 주는 표현들이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신앙은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범한 오류를 동일하게 범하는 것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배를 배척하시다(5,21-27)

 

하느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강조하셨다(5:21-22).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어떤 신앙의 행위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리하면 살리라(5:6)”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분주함으로 잃어버린 하느님, 종교적인 의식 가운데서 잃어버린 하느님,

무관심 가운데 잃어버린 하느님,

그리고 무지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느님을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과 함께해야 하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임재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이러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날인 주님의 날이 오히려 심판의 날,

통곡의 날이 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時流에 따라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하느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