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소예언서 공부

아모스 4장 : 이스라엘의 고집

윤 베드로 2017. 7. 7. 08:00

사마리아의 여자들을 거슬러(4,1-3)

 

*4장은 아모스의 두 번째 설교로,

①이스라엘의 사치한 부유층에 대한 심판(1-3절),

②더욱 깊어지는 우상 숭배의 범죄상(4-5절),

③하느님의 경고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탄식(6-11절),

④하느님의 더 큰 심판에 대한 최후의 경고(12-13절)를외치고 있다.

 

4,1-3 :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바산의 암소들”로 묘사하고

백성들을 그들에 의하여 학대받는 “가난한 자”로 묘사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을 볼 때 한편으로는 살찐 암소 떼를 연상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대받고 궁핍한 가난한 자들을 연상하게 된다.

하느님은 이런 두 모습을 대조시킴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학대함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처럼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셨다.

때가 이를 것인데 그들은 갈고리에 꿰어 끌러갈 것이고

또한 낚시에 걸린 고기처럼 잡혀가게 될 것이다.

여기 “갈고리,” “낚시,” “뚫린 성벽” 등과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이 대적의 손에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해 주는 표현 들이다.

 

겉치레뿐인 예배(4,4-5)

 

벧엘은 하느님의 문이라는 뜻을 가지며

이스라엘의 신앙에 관계된 유서 깊은 곳이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단을 쌓은 곳이고(창세12:8)

야곱이 꿈에 하느님을 만난 곳이며(창세28:11),

또한 계약궤를 두는 성소가 있었던 곳이다(판관20:18).

길갈 역시 이스라엘에게 동일한 의미를 주는 곳이다.

길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할례를 행한 곳이고 또 첫 번째로 유월절을 지킨 곳이다(여호4장).

특별히 이곳들은 사무엘이 매년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세 곳 중에 속하는 곳이었고(사무상7:16),

여로보암 때에는 벧엘(그리고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번제를 드리도록 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성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이처럼 유서 깊은 곳에 가서

믿음의 조상들의 자취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하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기보다는 오히려 죄를 더한다고 책망 하셨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침에 너희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너희의 십일조를 바쳐라.

누룩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즉 일 년에 한번 드릴 수 있는 희생을 매일 드린다고 할지라도

삼년 만에 드리는 십일조를 삼일 만에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예배가 진정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예배의 진정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예배가 형식화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들은 벧엘과 길갈을 찾을수록 오히려 죄를 더하였다.

그들은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벧엘과 길갈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리는 희생은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드리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오늘의 우리 시대 가운데서도 이런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스라엘의 고집(4,6-12)

 

이스라엘이 범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죄는 하느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은 죄이다.

6-11절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는구체적인 다섯 가지 예를 들고 있다.

즉 그들은 양식이 떨어져도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고(4:6),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이 없을 때 물을 구하기 위하여

다른 성읍을 찾아갈지라도 하느님을 찾지 않았다(4:7,8).

이스라엘은 마름병과 깜부기, 또는 메뚜기의 재난 등을 만났을 때에도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았고(4:9)

이스라엘 가운데 흑사병을 돌게 하셨을 때에도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무너뜨리셨을 때에도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사람을 의지하거나 또는 세상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지만

진정 그들의 구원이 되시는 하느님을 찾지 않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스라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오늘의 우리 시대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하여 친구를 찾아가고 권력을 추구하고

물질을 쫓아가지만 하느님께 나가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불신앙 시대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모습이다.

 

12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행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단순한 심판에 대한 선언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심판이 불가피할지라도

그 심판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광송(4,13)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12절).”

이스라엘이 만나야 하는 하느님은 “산을 빚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분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알려 주시는 분

아침노을을 어둠으로 만드시는 분

땅의 높은 곳을 밟고 가시는 분

그 이름 주 만군의 하느님이시다.(4:13).”

여기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는 말씀 역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하느님의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의미다.

즉 그들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를 창조주요 만유의 주시며

만군의 하느님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