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소예언서 공부

요엘서 2장 :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

윤 베드로 2017. 7. 3. 07:07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2,1-11)

 

*2,1-17절은 앞장의 메뚜기떼 재앙을

하느님의 심판의 날과 연관시켜 교훈을 주고 있다.

즉 요엘은 여기서 메뚜기떼 재앙을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심판과 연관시켜,

보다 상세히 설명한 뒤에(1-11절) 간곡하고 결연한 어조로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12-17절).

따라서 요엘은 이제라도 백성들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로 돌아오면(13절)

그분께선 그들에게 보다 큰 은총과 자비를 주시겠다는 기쁜 소식도 담고 있다.

 

2,1-3 :

여기 “주님의 날”이란 유다에게 임하게 될 심판의 날을 말한다.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 될 것이며

또한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이

많고 강한 군대가 유다를 침략해 오는 날”이 될 것이다(2절).

여기 주님의 날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나타내 주는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에 임하게 될 심판은

어떤 사람도 스스로의 힘으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날은 지나간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다가올 미래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前無後無한 날이 될 것이다(2:2).

이 날에 임할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유다를 황폐케 할 것인지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는 불이 삼켜 버리고 그들 뒤에서는 불꽃이 살라 버린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이 땅이 에덴동산 같았지만

그들이 지나간 뒤에는 황량한 광야만 남는다.

그들 앞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3절).”

이 말씀에서 “그들 앞에서는 불이 삼켜 버리고

그들 뒤에서는 불꽃이 살라 버린다.”라는 표현은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먹어 버렸다.(1:4)”라는 말과 동일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들은 누구도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심판을 통하여 유다가 철저히 파괴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참혹한 심판이 유다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경고의 소리를 지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팔은 전쟁을 위하여 병사들을 소집할 때(판관 6:34),

하느님을 찬양할 때(시편150:3), 중대 사건을 알릴 때(열왕상1:34) 등과 같은 일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시온에서 나팔을 불라는 것은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2,4-11 :

본문은 “주님의 날”에 유다 땅을 덮을 군대의 진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군대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 군대가 잘 훈련된 군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그 힘이 커서 어떤 군대도 이 군대의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놀라운 사실은 이 군대의 지휘자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군대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신다.

정녕 그분의 군대는 많기도 하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는

막강하기도 하구나! 정녕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2:11)”

여기 하느님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묘사한 것은

이 전쟁이 하느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전쟁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군대란 어느 나라의 군대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미 1장에서 언급한 “메뚜기떼”를 擬人化하여 “군대”로 표현했을 것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앗시리아 군대일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장은 메뚜기떼를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1:6).

그리고 유다의 역사를 보면 예언자의 예언 이후 유다는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았다.

 

회개하여라(2,12-17)

 

2,12-14 :

12절, “이제라도”라는 말은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지금이라도”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유다에게

회개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말해 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유다에게 구원의 길이 되는 회개는 종교적 형식으로서 하는 회개도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느님 앞에 통회하며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회개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가질 수 있는

소망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누가 아느냐?(13-14절)”

 

2:15-17.

하느님은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심판이 임박했음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후(2:1),

또 다시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백성을 모으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유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범한 죄로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불러 왔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또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심으로

그들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개만이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유다의 모든 백성,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원로들과 제사장,

그리고 율법의 의무로부터 면해 주고 있는 新婚의 남녀까지도

집회로 모여 회개하고 하느님께 자비와 자애를 구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주님의 응답과 강복(2,18-27)

 

2,18-20 :

유다가 회개할 때 하느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은 회개한 유다에 대하여 가지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 백성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회개하기까지 기다리심으로,

그리고 회개했을 때에는 무조건 받아주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그들의 구원을 위한 행위로 나타난다.

하느님은 유다가 회개할 때 죄로 인하여 황폐한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셨고,

또 하느님은 그들이 회개할 때 민족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2,19).

하느님은 유다를 지배하던 북편 군대를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게 할 것이다.

그 군대들 가운데 전군은 동해로, 후군은 서해로 쫓아내실 것이다.

 

2,21-27 :

여기 “주님이 큰일을 하였다”라는 말은

회개한 유다를 위하여 황폐한 땅을 회복시켜 주신 일을 말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실 때 늦은 비와 이른 비가 땅을 적실 것이고

이로 인하여 땅은 전과 같이 소출을 풍성하게 내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소출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 모든 것들

즉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은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특별히 이 회복의 은혜는 유다를 위하여 베푸신 것임으로

본문은 회복의 은혜로 인하여 유다가 누리게 될 축복들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이 누리게 될 풍성한 은혜를 이렇게 묘사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2:24).”

그리고 하느님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너희를 거슬러 내가 보낸 나의 대군 메뚜기와 누리 황충과

풀무치가 먹어 치운 그 여러 해를 갚아 주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다시는 내 백성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2:25-26)”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유다가 회개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