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예레미야서 공부

예레미야서 9장 공부 : 주님을 아는 것이 참지혜다

윤 베드로 2017. 5. 9. 07:32

진실이 사라지다(9,1-5)

 

예언자는 죄로 인하여 죽임 당한 백성들을 보며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민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패망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슬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죽임 당할 유다를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차라리 그들을 떠나 광야에 가서 나그네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비록 백성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죄 가운데 살며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을지라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그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권고의 말씀을 전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하여 유다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다는 진노의 심판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서 악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다.

유다가 이처럼 부패한 것은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기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개입하러 오시다(9,6-8)

 

하느님은 이들의 완악한 마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제련할 것을 말씀하셨다.

제련만이 이들 가운데 있는 찌꺼기(죄)를 제거해 주고

                 다시 순수함을 찾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제련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또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제련 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그것은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 제련은 범죄한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인데,

          이 제련은 그들 가운데 있는 찌꺼기(죄)를 제거해 주어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순전함을 되찾아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매인 것이다.

 

재앙의 원인을 이해하는 현자(9,9-15)

 

예언자는 이 제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산을 두고 울음과 곡을 터뜨리고 광야의 목초지를 두고 애가를 부르리라.

그것들이 초토가 되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고 가축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의 새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망쳐 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폐허 더미로, 승냥이 소굴로 만들고

        유다 성읍들을 주민들이 없는 폐허로 만들리라9,9-10)."

산과 광야 목장 등 유다의 모든 곳에 부르짖음이 있다는 것은

         그곳들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죄는 모든 것을 황폐케 한다. 죄는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조차도

         황폐케 하여 들짐승밖에는 살 수 없는 곳이 되게 했다.

이와 같은 혹독한 제련 앞에서 유다는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 하느님께 돌아가든지

                아니면 황폐한 곳에서 죽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처럼 죄를 버리지 않고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스스로 마음을 완고케 함으로 죄의 심연으로 빠져가는

               백성들에게 제련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질문 형식을 취함으로 유다를 심판하시기 전

                그들이 어째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가르쳐 주셨다.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치 않았기 때문이고(9:12),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9:13).

말씀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따라야 할 법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이 말씀에서 떠나는 순간 모든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하느님의 백성들이 말씀에서 떠날 때 결국은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데,

            우상숭배는 하느님께서 다른 어떤 죄 보다도 미워하시는 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이 백성에게

                  쓴흰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겠다.

내가 그들도 그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지게 하겠다.

또한 내가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을 뒤쫓아 칼을 보내겠다.(9,14-15)”

 

여자 곡꾼들을 부르다(9,16-21)

 

여기 “여자 곡꾼들”이란 초상집에 다니며 곡해 주는 여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너희는 잘 생각하여 여자 곡꾼들을 불러오너라”란

                유다에 하느님이 심판이 임박했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유다에게 곡하는 여자들을 불러와서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고,

                이웃에게 장송곡을 가르쳐서(9:19), 유다의 황폐함을 애곡하도록 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인하여 유다가 황폐할 것이고

              그곳에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을 말한 것이다.

하느님은 이때 유다의 참혹함에 대하여 20-21절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님을 아는 것이 참지혜다(9,22-23)

 

지혜도, 용맹도, 富도 자랑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들이 자랑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이 지식만이 하느님의 백성들을

             모든 환란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하느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주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줌으로

                  하느님의 축복가운데 살게 해 주기 때문이고

                  또한 위험 가운데 있을 때 하느님만이 그 위험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무엇보다 기쁨이 되는 것은

                자기 백성들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는 것이다.

 

몸의 할례도 징벌을 면하게 하지 못한다(9,24-25)

 

할례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입증해 주는 언약의 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구별하실 때

                 그들 가운데 할례의 표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시고 구별하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의 후손 모두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시고 만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백성들 가운데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창17:14).

하느님은 이방인들 가운데 할례의 표를 볼 수 없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느님은 마땅히 할례의 표가 있어야 할 유다에게서도

             이와 같은 표를 찾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유다 역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할례의 표를 찾으실 수 없음에 대하여

                “이스라엘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이처럼 하느님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유다 가운데서도

             할례의 표를 찾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에

              이방인과 유다 모두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