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예레미야서 공부

예레미야서 8장 공부 : 호되게 휘두르시는 주님의 채찍

윤 베드로 2017. 5. 8. 07:50

비길 데 없는 완고함(8,4-7)

 

하느님은 자연의 이치를 예로 들며, 유다의 회개치 않음에 대하여 책망하셨다.

여기 말하는 자연의 이치란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람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 본성이고(8:4),

                 철새들은 정한 시기가 되면 자신이 가야할 곳을 향하여 날아가는 것이 본성이다(8:7).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 가운데 살게 되었을지라도 권고의 말씀으로 인하여 스스로 죄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본성이다.

그러나 유다는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는다(8:5).

그들 중에 아무도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회개하는 자가 없다.

하느님은 이처럼 악으로 치닫는 유다를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에 비유했다.

 

거짓된 말과 주님의 말씀(8,8-12)

 

유다가 이처럼 완고하게 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지도자들의 부패함이다.

서기관들의 거짓 붓이 거짓을 만들어 내었고(8:8),

                   예언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모두가 거짓을 행하였다(8:10).

서기관과 예언자 그리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침으로 그들로 하여금 심령을 각성하게 하여

                 義의 길로 인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패하여 거짓을 가르침으로

             백성들이 가르침을 통하여 각성할 기회를 빼앗았다.

이로 인하여 유다는 총체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그릇 해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筆寫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율법을 거짓으로 해석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짓으로 해석한 율법을 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오해 할 수밖에 없다.

 

그들뿐만 아니라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까지 모두 거짓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진노가 회개치 않는 유다를 향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가운데 평화가 있다고 거짓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신앙이 민족주의 이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이스라엘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부르심의 목적으로부터 떠나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만을 세우는 일에 집착했다.

이로 인하여 부르심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 되지 않았고

         그릇된 선민사상을 세우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죄 가운데 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 대신 그들에게 평화가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유다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

 

호되게 휘두르시는 주님의 채찍(8,13-17)

 

예언자는 유다가 회개치 않음으로 인하여 고생할지라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로 하여금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신다면

                    우리 중 어떤 사람도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복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전쟁이나 재난을 두려워 하지만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 가장 두려운 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

하느님께서 포도나무 열매를 빼앗아 가실 때 우리는 포도 열매를 맺게 할 수 없고

                   무화과나무 잎을 마르게 하실 때 그 잎을 푸르게 할 수 없다.

 

유다는 구원을 위하여 보다 견고한 성읍으로 피하였지만 거기서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셨기 때문에 그들이 피할 수 있는 곳은 세상에 아무 곳도 없었다.

작은 성읍과 견고한 성읍은 인간적인 눈에 보이는 차이일 뿐 하느님에게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작은 성읍이 위험하다고 하여 보다 더 견고한 성읍으로 피하여도 소용없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죄인을 찾으실 때 그들이 어느 곳으로 피하든지 그곳까지 그리고 끝까지 찾으신다.

예언자는 예언의 눈을 통하여 바빌론의 군대들이 회개치 않는 유다를

                심판하기 위하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평화롭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백성들도 예언자의 외침을 외면하고

                거짓 지도자들의 말을 더 신뢰함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예언자는 이처럼 死地로 향하여 가고 유다를 보며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있다.

 

예언자의 탄식(8,18-23)

 

이처럼 위급한 때 시온은 위급함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조각한 神像과

            이방의 헛된 것으로 하느님의 진노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를 보내심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권고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추수 때가 지나간 것처럼 회개할 기회도 지나갔다(8:20).

예언자는 구원의 하느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소망 없이 멸망으로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을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약(유향)과 의사가 있지만 고침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자로서 묘사하였다(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