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소예언서 공부

말라기 3장 공부 : 심판과 정화

윤 베드로 2017. 7. 27. 09:25

심판과 정화(2,17-3,5)

 

2,17 :

이스라엘의 더 큰 문제는 죄를 범하고도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 “너희는 말로 주님을 싫증나게 해 드렸다. 그런데도 너희는

‘저희가 어떻게 싫증나게 해 드렸습니까?’ 하고 묻는다.

너희는 ‘주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자마다 다 좋고

그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좋아하신다.‘ 하고

‘공정의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하며

주님을 싫증나게 해 드렸다.”라는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강퍅했는지 말해 준다.

그들은 의로운 것을 악하다고 말했고 불의한 것을 선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하심까지 의심했다.

 

3,1-5 :

1절은 주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여기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서

 “내가”는 메시아로 오실 주님을 가리키고,

“나의 사자”는 세례자 요한을 말한다(마르1:2-5).

또한 2절,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있게 될 세상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이처럼 1절은 주님의 初臨과 再臨을 동시에 예언한 말씀이다.

즉 주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지만 장래에 회개치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심판의 주로 서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심판 가운데서도 변함이 없으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행하시는 심판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심판의 고통을 통하여

그들을 단련함으로 거룩함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판은 오히려 그들에게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았다.

이와 같은 목적의 심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3절).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임할 것과 그 심판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후,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심판하러 너희에게 다가가리라.

나는 주술사와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팔이꾼의 품삯을 떼어먹고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이방인을 밀쳐 내는 자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거슬러

곧바로 증인이 되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3:5)”

 

올바른 십일조와 예물 봉헌(3,6-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자신은 변하지 않는 者이심을 말씀해 주심으로

심판 중에서도 이스라엘을 소멸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3:6).

물론 여기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약을

변함없이 지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이 계약을 지키시는 한 이스라엘은 소멸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열조의 날로부터 지금까지 규정을 떠나 불순종하여

왔음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회개의 메시지였다.

여기 회개는 하느님께서 죄를 범한 자들이 하느님께 돌아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초청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저희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3:7)”라고 물었다.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슬픈 일은 無知와 믿음의 결여로 인하여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거나 또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지라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여 받지 못하는 경우일 것이다.

 

하느님은 이처럼 영적 無知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개로 이끌기 위하여

십일조를 예로 들어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께 돌아간다”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십일조를 택하신 것은

이 주제야말로 그들의 삶 가운데 직면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은 삶 가운데 부딪치는 현실적인 것을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할수록 효과가 더한다.

하느님은 십일조를 하느님의 것으로 규정하고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행위를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거역하는 것이 바로 죄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한 이스라엘이 받게 되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 온 백성이 나를 약탈하고 있으니 저주를 받으리라.(3:9)”

하느님은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율법이 정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약속하신 대로 복을 내려 주시지만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율법이 정한대로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한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은 불순종 가운데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3:10)”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불순종한 죄로부터 돌이켜

다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일조에 적용한다면 하느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들은

다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참된 회개란 반드시 그릇된 행위로부터 바른 행위로

돌이키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그러면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행복하다고 하리니

바로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11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회개한 자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회개한 자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게 된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메뚜기를 금하여 주시는 것이고,

포도나무의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한 자들은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힘을 다하여 수고함으로 가꾼 나무가 열매도 맺기 전에

메뚜기나 재해를 받는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낭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낭비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면

우리는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에게 이런 축복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므로 회개한 자들은 삶을 낭비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본문은 회개한 자들이 사는 땅은 아름답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회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에 가르쳐 주고 있다.

진정한 회개란 내적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앙으로부터

깊은 신뢰로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외적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동기가 되어

그릇된 행위로부터 돌이켜 하느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처럼 참된 회개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수고들이 풍성한 열매를 가져오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주님의 날에 드러나는 정의(3,13-21)

 

3,13-15 :

여기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대적하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나에게 무엄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지 말해 준다.

또한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라고 말했다(14-15절).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을 떠나게 했던 이 문제는 모든 시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도 신앙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문제였다.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이 믿음에 굳게 서 있다면 언제나 “지금 여기(Now & Here)”에

주어진 환경을 최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이로 인하여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3,16-18 :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불신앙 가운데 빠져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느님은 그들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고

그들이 피차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들을 하느님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비망록에 기록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것과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다(묵시20:12-15).

 

3,19-21 :

본문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하느님은 대적하는 자들을 화덕 같은 불에 던져버릴 것을 말씀하셨다.

그때 그들은 마치 불에 가지와 뿌리 모두가 태워진 나무처럼 멸망할 것이다.

뿌리조차 불태워졌다면 소생할 소망은 전무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대적을 심판하실 때 이처럼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 때 하느님은 경외하는 자들에게 의로운 해와

치료하는 광선으로 임하셔서 그들의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실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3,22-24)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대언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인지,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인지 들었고

또한 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게 될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대적하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스스로 어떤 길을 택하여 살 것인지 결단할 일만 남아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고 말씀하시며 결단을 촉구하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돌이켜

율법에 따라 하느님을 경외하며 산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거역하고

하느님을 대적한다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른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날이 이르기 전까지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이야말로 하느님께 돌이킬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확실한 시간이고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후6:2)”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