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소예언서 공부

하바꾹 1장 : 예언자가 탄원하다

윤 베드로 2017. 7. 18. 07:10

예언자가 탄원하다(1,1-4)

 

하바꾹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되는 고통스러움이 무엇인지

교훈해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침묵하심이다. 하바꾹은 하느님의 침묵하심이

얼마나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이와 같이 말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2-3절)

이미 서론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요시야 이후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의 邪惡함과 무기력함으로 인하여

사회는 불법과 부정으로 어둡게 되었다.

예언자는 이런 유다의 부패함을 보면서

하느님께 유다를 패역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그리고 이처럼 패역한 시대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악한 자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하바꾹의 기도에 대하여 침묵하였고

또한 유다의 패역함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계셨다.

이런 하느님의 침묵은 하바꾹의 신앙에 큰 고통과 혼란을 주었다.

그래서 하바꾹은 하느님께 나가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시다(1,5-11)

 

*1,1-11 : 하바꾹의 첫 번째 질문(1-4절)과

이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5-11절)이다.

하바꾹은 왜 하느님께서 유다의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묵인하고 계시는지에 관해 질문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을 사용하시어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대답하신다.

 

1,5-11 :

하느님은 하바꾹의 물음에 대하여 유다의 패역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민족들을 보고 또 바라보아라. 질겁하고 또 질겁하여라.

너희 시대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리니

그것을 듣더라도 너희는 믿지 못하리라.(1:5)”

여기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실 때

열국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할 나라는 “갈대아”이다.

이 나라 백성은 사납고 성급하며

그들의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납고

그들의 기병의 빠르기는 독수리와 같을 것이다(1,7-8).

 

또한 예언자는 그들의 暴惡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얼굴은 모두 앞을 향하고 저마다 폭력을 휘두르러 와서는

포로들을 모래알처럼 모아 놓는다.

그들은 임금들을 업신여기고 통치자들을 비웃는다.

어떤 성채도 우습게 여기며 흙을 쌓아 그것을 점령한다.

그러나 제 힘을 하느님으로 여겨 죄를 지은 자들

그들은 바람처럼 지나가 사라지리라.(1:9-11)”

여기 포악이라는 말은 극심한 도덕적 파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갈대아 군대들이 유다를 침략하였을 때

어떻게 행할 것인지 암시해 주고 있다.

 

예언자가 다시 탄원하다(1,12-2,1)

 

1,12-13 :

예언자는 하느님을 거룩하신 속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옛날부터 계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예언자는 이처럼 자신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을 확인한 후, 하느님께 묻고 있다.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1:13)”

예언자의 이 물음은 하느님께서 유다의 패역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보다 더 악한 갈대아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물음이다.

즉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어째서 패역한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더 악한 갈대아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예언자에게 이 문제는 자신의 신앙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안에서 안전함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이었기 때문이었다(1:12).

그런데 지금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 자신의 공의로우심에 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예언자로 하여금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혼란스런 일이었다.

 

1,14-17 :

예언자는 이미 앞에서 하느님께 제기한 자신의 질문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 “바다의 물고기”와 “우두머리 없이 기어 다니는 것”은

하느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일을 포기하실 때

강포한 자들 앞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언어들이다.

즉 그들은 무작위로 강포자의 낚시에 걸리게 될 것이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지 않으실 때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1,15-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낚시로 낚아 올리고 그물로 끌어 올리며

괭이로 모으고 나서는 기뻐 날뛰며

자기 그물에다 제물을 바치고 괭이에다 분향을 합니다.

그것들 덕분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음식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상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지배 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힘에 의하여 지배될 때, 사람들에게 힘은 숭배 대상이 될 것이다.

여기 그물과 낚시는 힘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들에게 분향한다는 것은 힘을 숭배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같이 사람들이 힘을 숭배하게 될 때

그들은 더 큰 힘을 얻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약한 자들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희생이 된다.

이처럼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약한 자를 희생하게 된다면

결국 세상은 황폐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힘을 포기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지 않는 한

힘은 서로를 약탈하게 하여 최후까지 남은 상대를

넘어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바꾹은 하느님께 “이렇게 그가 줄곧 그물을 비워 대고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도 됩니까?(1:17)”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장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되고 있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2,1 :

예언자 하바꾹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신앙의 문제에 대하여 하느님께 물었다(1장).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응답의 말씀을 기다리며 성루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