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을 지니신 하느님(1,1-8)
1,1-3 :
하느님은 자신의 속성을 계시하심으로 대적들에게는 심판자로,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는 구원자로 나타내셨다.
여기 하느님의 속성들 가운데 열정, 보복, 진노 등은
대적들에 대하여 가지신 분노를 나타내고,
분노를 더디 하심은 백성에 대하여 가지시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회오리바람, 폭풍 등은 하느님의 능하심을 표현한 말로서
하느님은 죄인에게나 또는 자기 백성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1,4-8 :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통하여 계속 계시해 주고 있다.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능하심을 말한 후
“그분의 노기 앞에서 누가 버틸 수 있으랴?
그분의 타오르는 분노에 누가 맞설 수 있으랴?(1:6)”고 묻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자가 되실 때 어떤 사람도 그들을 해칠 수 없고,
하느님께서 대적들에 대하여 진노하실 때 어떤 사람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다와 니네베에 내리는 신탁(1,9-2,3)
1,9-14 :
하느님은 자신의 속성을 계시하신 후 이제 아시리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여기 “너희”란 하느님을 대적하는 아시리아를 말한다.
그들이 주님을 대하여 무엇을 꾀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멸하실 때
그들의 꾀는 무너질 것이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단번에 그들을 전멸시키실 것이라는 의미다.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하느님의 분노의 불 앞에서는
다만 마른 지푸라기와 같을 뿐이다.
“내가 너를 괴롭혔지만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리라.
이제 나는 그가 너에게 메운 멍에를 부러뜨리고
너를 묶은 사슬을 끊어 주리라.(1:12-13)”
하느님은 자기 백성이 죄 가운데 살 때 이방 나라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이방 나라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압제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이제 유다를 아시리아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14절, “주님께서 너를 거슬러 명령을 내리셨다.
다시는 너의 이름을 이을 자손이 나지 않으리라.
나는 조각 신상과 鑄造 神像을 너의 신전에서 없애 버리고
네 무덤을 파 놓으리니 네가 쓸모없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아시리아에 대한 경고로 그들이 자기들의 우상과 함께 멸망하리라는 말씀이다.
2,1 :
이 말은 본래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할 때 사용한 것으로서
나훔이 본문에서 동일한 의미로 인용하였고
또한 신약에서도 사도 바울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했을 때도 인용하였다.
여기 “기쁜 소식”은 평화에 대한 소식을 말하며
유다를 아시리아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기쁨의 소식을 말한다.
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다는 것은
구원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소식은 압제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생각을 새롭게 하여 대적에게 압제당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서원을 지킬 것을 준비해야 했다.
여기 “네 서원을 지켜라”는 말은 평화를 전하는 자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이 확실히 실현될 것을 믿음으로
새로운 날을 전망하고 그 날을 준비하라는 의미다.
*2장은(2,2-3,7)은 니느웨가 멸망하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다.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에서 B.C. 2,000대 강대국으로 군림해 왔다.
특별히 아시리아는 정복한 나라들에 대하여 잔인하기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이들의 잔인성에 대하여
사자가 먹이를 움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2:11-12).
하느님은 이와 같은 아시리아를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한 도구로 삼으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시리아의 교만과 잔인함을 잊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2,2-3 :
여기 “파괴자”란 아시리아를 침공한 나라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경고의 말씀은
메디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메디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심판하시기 전 먼저 그들에게
파괴자가 너를 치러 올라올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히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아시리아를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우리가 후자의 의미를 취할 때 아시리아의 심판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본문은 아시리아의 심판과 하느님의 백성의 회복을 동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2:3)”
여기 “약탈자들”이란 아시리아를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약탈하였고 또한 이스라엘의 포도원을 황폐케 하였다.
그러므로 아시리아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의미하고
아시리아의 패망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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