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소예언서 공부

요나서 4장 :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자애를 깨우쳐 주시다

윤 베드로 2017. 7. 13. 09:45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자애를 깨우쳐 주시다(4,1-11)

 

*4장에서 요나는 니느웨 구원을 선포하신 하느님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하느님과 쟁론을 벌이며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탄원까지 했다.

이에 하느님은 미소한 “아주까리”의 가지를 이해시켜주심으로써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의 정당성을 주장하셨다.

 

4,1-4 :

요나는 하느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기로 하신 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하여 몹시 싫어했다.

2절은 요나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싫어했는지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로우심과 노하기를 더디하심이었다.

하느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었다.

요나는 니느웨가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니느웨조차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를 용서해 주신 하느님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조차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다르시스로 도망간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요나는 불만이 가득하여 하느님께 이렇게 청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3)”

용서받은 죄인이 동일하게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신 하느님께

이처럼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그래서 하느님은 요나에게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 것이다(5:4).

요나가 진정으로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니느웨가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기뻐할 일이고

감사할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삶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생길 때

먼저 그것이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만한 일은 아닌지 생각해 보도록 요청한다.

 

4,5 :

요나의 이같은 모습은 니느웨성이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고

또한 하느님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은혜를 상실한 자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은혜를 상실한 요나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에 대하여 조금도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니느웨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것이 그 성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무관심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뜻과 반대로 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은혜를 상실한 요나를 회복시키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모습이다.

 

4,6-9 :

하느님은 요나를 위하여 아주까리로 초막을 덮어 주어 요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벌레를 준비하시므로 이튿날 새벽에 초막을 덮고 있던

아주까리를 씹게 하여 모두 시들게 하셨다.

그리고 뜨거운 동풍과 해를 준비하여 요나로 하여금 기진하게 하셨다.

이로 인하여 요나는 더욱 하느님을 원망하며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4,10-11 :

하느님은 아주까리로 인하여 불평하는 요나에게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은혜를 상실한 자들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실 때,

때로는 축복을 허락해 주심으로 그것을 잠시 누리게 하시고,

때로는 허락해 주신 축복들을 거두어 가심으로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예를 들면 건강의 축복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은혜로 알지 못할 때

하느님은 그로부터 건강을 취하여 가신다.

허락해 주신 일용한 양식으로 평안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은혜로 알지 못할 때 하느님은 양식을 취하여 가심으로

지금까지 일용한 양식을 누린 것이 하느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하심으로 은혜를 잊어버린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요나는 이처럼 아주까리에 대해서는 민감했지만

니느웨성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만일 요나가 하느님께서 니느웨성에 대하여 가지신 뜻을 알았다면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불평과 감사는 하느님께서 보시고

관심을 두시는 일에 관심을 갖느냐에 의존되어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한다면

그것은 감사의 이유가 될 것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한다면

언제나 불평과 불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