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이사야서 공부

이사야서 40장 공부 ; 위로와 구원의 선포

윤 베드로 2017. 4. 11. 07:53

위로와 구원의 선포(40,1-11)

 

이사야서 제1부(1-39)에서는 심판의 메시지가 중심이었으나(심판의 책),

                제2부(40-66)에서는 소망의 메시지가 중심이 되고 있다(위로의 책).

그러므로 제1부에서는 지상과 현실에 관한 메시지라면,

                제2부는 天上과 理想에 관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40,1-2 :

1-2절 말씀은 하느님께서 친히 예언자들에게 명하신 말씀이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을 통하여 유다와 열방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셨다(1-39장).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들을 통하여 유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에게 “너희는 위로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예언자들이 유다를 위로하기 위하여 전해야 할 소식은

                   “복역 기간”이 끝났고 “죗값이 치러졌다”는 것이다.

여기 “복역 기간”이란 유다의 바빌론 유배 기간을 의미할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히스기야를 통하여 유다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셨고(39:6-7), 그리고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의 말씀대로 칠십 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40,3-11 :

예언자는 계속하여 그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에게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아라고 말하고 있다(40:3).

이것은 구원자 하느님께서 곧 언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실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시도록 하려면 먼저 길을 평탄케 해야 한다.

4절에서처럼 길을 평탄하게 하려면 골짜기를 돋우어야 하고

                      높은 곳을 낮아지게 해야 한다. 이것은 비유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임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높아진 마음을 낮추어야하고, 낮아진 마음을 은혜로 메워야 한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은 그 영광을 볼 것이다(40:5).

여기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다.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6-8)

여기 “한 소리”란 예언자들의 외침을 말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인생의 덧없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함”을 외치도록 명하셨다.

하느님은 이 외침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육체는 의존적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처럼 의존적 존재인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의 영원함을

        믿음으로 하느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다.

이처럼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예언자들에게 이 소식을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에 선포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신 구원자 하느님은 강하신 분이시지만

                    또한 그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는 목자시다.

그러므로 이 하느님이 임하시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구원이 되며 삶의 보장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위대하심(40,12-26)

 

우리 가운데 임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은 全能하시고 또한 全知하신 분이시다(12-13절).

이처럼 우리를 구원해 주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이시므로

            그 앞에 민족은 두레박의 물 한 방울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다.

또한 사람도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없는 것은 존재일 뿐이다(40:15-17).

여기 세상이 하느님 보시기에 티끌과 먼지 같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크고 대단한 것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느님의 뜻을 막거나 방해할 수는 없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을 고백할 때 세상은 작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마다

하느님의 크심을 묵상하며 그 문제를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온전히 맡기면 언제나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8절, “너희는 하느님을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그분을 어떤 형상에 비기겠느냐?(18절)”는 말씀은 우상숭배자들과

           우상을 하느님과 비교하고자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하느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래서 만물이 그에게 나와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 돌아간다.

즉 하느님은 만물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땅의 주민들은 메뚜기 같을 뿐이고(40:22),

               귀인들일지라도 하느님의 손아래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폐하실 때 그들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40:23-24).

사람의 어리석음은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부터 온다.

그러나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든 것이다.

여기 “우상은 장인이 쇠를 부어 만들고 도금장이가 금으로 입혔으며

         은사슬을 만들어 걸친 것이다(40:19)”는 말은

           우상은 능력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나무 조각이나 쇠붙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세상에 사는 동안 범할 수 있는 어리석음들 가운데

                 가장 큰 어리석은 일을 범하는 자가 될 것이다.

 

신뢰를 가져라(40,27-31)

 

우리가 범하는 어리석음들 가운데는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야곱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백성이면서도 자신의 사정이 하느님께 숨겨졌으며,

            또한 자신의 원통한 일이 하느님께 수리하심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참으로 그가 하느님을 만물의 주님으로서 또는 목자로서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평화와 축복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야곱을 향하여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40,27)” 라고 물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28-31절처럼 말씀해 주셨다.

즉 하느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힘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느님의 백성이 언제나 독수리의 날개 침같이

                새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창조주 되시고 만물의 주되시며

만물에 대하여 절대주권을 행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