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6강 묵시 문학의 세계 1|박병규 신부/요한묵시록

윤 베드로 2016. 8. 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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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묵시 문학의 세계 1

 

+ 찬미예수님

예, 잘 지내셨습니까? 예, 반갑습니다.

예, 우리가 여섯 번째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강의를 시작 할까 합니다.

 

자, 지금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처음부터 읽어보지는 않았어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시 언급을 좀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제일 처음에 첫 번째 강의에서 우리가 봤던 것이

요한 묵시록이 도대체 무슨 책인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것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책이다.

 

※ 요한 묵시록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책

 

그래서 뭐 세상 종말의 신기한 사건이나 두려운 사건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쁨, 희망, 위로를 전해주는 책이 요한 묵시록이다라고

우리가 다뤘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 묵시록이 어떠한 성격이 있느냐?

를 봤을 때 우리가 예언서적인 성격이 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왜 예언서인가? 예언서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이 지금 이 자리에서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

 

※ 예언서 : 지금 이 자리에서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

 

그것이 뭐 어떨 때는 우리 심장을 막 후벼파는 것처럼 아플 때도

있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정의의 하느님, 심판의 어떤

하느님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도 있고, 동시에 또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위로의 말씀. 그래서 예언서의 특징 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하는 하느님의 말씀.

 

예, 바로 요한 묵시록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열심히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뭐 악마의 이야기

부터 해서 여러가지 징벌의 이야기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이고, 믿음을 가지라고 호소한 거다. 그러한 성격이 요한 묵시록에

있다라고 우리가 살펴 봤습니다.

 

자, 그 다음에 이제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봐야할 것이

묵시 문학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요한 묵시록이라는 제목에 묵시라는

단어가 들어 갑니다. 그죠? 그래서 묵시 문학이 도대체 무엇인가?

 

요한 묵시록 안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이 묵시 문학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묵시록. 묵시문학.

머리에 떠오르시는 게 어떤 게 있으십니까?  뭐 강하게 확 와 닿는?

 

아직까지 우리 머리 속에는 뭔가 신비한 어떤 내용들, 신적인 계시들,

이런 것들. 인간이 함부로 알아 들을 수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이 우리

묵시 문학의 주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라는 어떤 그러한 막연한 생각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다 묵시 문학,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의 묵시 문학,

본격적으로 요한 묵시록을 우리 지금 보고 있습니다마는 요한 묵시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유다이즘 안에서, 유다의 어떤 전통

안에서 묵시 문학들을 한 번 그 특징들을 살펴 보면서 요한 묵시록

과는 어떠한 관계와 차이성이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우리가 묵시라고 했을 때 우리가 처음 요한 묵시록을 이야기할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요한 묵시록이 처음에 시작하는 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아포칼리시스라고 했습니다.

 

※ 요한 묵시록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apocalypsis)

 

'아포', 무엇으로부터 떨어지다.

'칼립시스', '칼립토'에서 왔는데 '천막', '천'을 '열어보이다'

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제 묵시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묵시라는 단어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에 따라서 '묵시주의','묵시적 종말론', '묵시적인 작품'

뭐 다양한 해석들을 이렇게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외국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어떤 이런 말마디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가장 간단하게 우리는 좀 쉽게 배우고 하니까.

그죠?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 묵시라는 거. 묵시문학, 묵시적인

작품, 묵시적인 종말론, 뭐 묵시적인 내용 뭐 이런 모든 단어들이

언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게 됐냐하면, 1970년대 이후 부터입니다.

 

예, 예전에는 우리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거나 

이렇게 작품으로서 다루지 않았어요. 어떻게 다뤘냐 하면?

우리가 처음에 묵시 문학을,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처음에 딱

들었을때, 세상 끝날 때 벌어질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서 종말적인 어떤 내용만을 다루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작품이거든요. 요한 묵시록 같은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그런 작품이예요. 작품으로서 요한

묵시록을 묵시 문학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것이 1970년대 존 헨슨이라는 그분이 '묵시 문학의 여명'.

뭐 [해가 떠오르는] 책 제목이 그래요. 예, 그 책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묵시 문학이 무엇인가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1970년대부터 입니다. 얼마 안됐죠? 그죠?

 

그래서 우리 뭐 기껏 30~40년. 이것 밖에 묵시문학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게 이것 밖에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보면 긴 역사

속에서 지금 초창기의 그런식의 우리 교육을 받고 있다고 우리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시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 들어가기 전에 묵시라는 단어에 대해서 한번 이것이 어떤

의미로 1970년대부터 조금씩 공부되면서 처음에 어떠한 학문이든

어떠한 공부든 제일 처음에 중요한 것이 개념, 용어에 대한 것이

중요합니다. 

 

'묵시' 그러면 뭐 희안한 사건들, 이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무엇을 지칭 했는가를 한 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묵시라는 단어가 보통 서구 이쪽에서 들어온 단어가.

제가 뭐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불어로 써 볼께요.

이것이 묵시적이다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아포칼립시스라는 것이 있는데 Apocalytique

예, 요 묵시적이라는 형용사 입니다. 이 단어로 우리가 이것이

하나의 고유명사 개념식으로 하나의 묵시적인 모든 것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하나의 단어가 된 거예요. 이 단어가 어떤 뜻이 있냐하면.

 

※ apocalytique : 묵시적

 

크게 네 가지 뜻이 있습니다. 네 가지 뜻이 있는데

1) 어떠한 세상 끝날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런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다라는 어떤 막연한 사건에 대한. 우리 대중적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죠?

 

예, 묵시 그러면, 뭐 요한 묵시록, 그리고 이야기를 딱 들으면 세상

끝날의 뭔가 벌어질 것 같은 우리가 흔히들 아, 며칠에 세상 망한다

하더라. 막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죠?

예, 그러니까 대중적인 세상 끝날 이야기를 요 단어로 이해를 합니다.

 

1) 대중적 세상 끝날의 이야기

 

뭐 불어가 조금 그러면 여기에 Apocalyti 마지막으로 tic 이래

끝나면 영어가 되는 거거든요. 예, 쉽죠? 그죠? 그러니까 이 묵시적

이라는 형용사가 지칭하는 것. 그것 네 가지를 보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세상 끝날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중적 용어로 이해를 하고 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이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 묵시작품들

묵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묵시적 작품들을 말합니다.

 

2) 묵시적 작품들

 

오늘 우리가 계속 이 시간에 묵시 문학이, 묵시적인 사조가

팽배했던 시기 안에도 어떠한 작품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 작품들을 통해서 아, 묵시문학들이 이런 특징이 있구나라는 것을

보게 될 텐데요. 작품들을 통칭해서 지칭을 할 때에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묵시적인 그 신학적이고

정신적인 사조. 예컨대 우리나라 뭐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기를

우리나라가 뭐 자본주의 사회다. 신자유주의 사회다.

뭐 이런식으로 우리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죠?

 

예, 돈의 흐름에 따라서 우리가 휘청 휘청하고. 예, 그런 어떤

것처럼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정신적 사조

혹은 종교적 신학적 사조 전체를 이야기할 때 묵시적이다

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정신적 혹은 신학적 사조를

이야기 할 때. 예, 요렇게 세 번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3) 정신적 / 신학적 사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아까 우리가 묵시적 작품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지요? 그죠? 작품들의 특징을 이야기 합니다. 묵시적인 작품.

어떠한 왜 카테고리를 딱 정해 놓으면 이 작품들의 어떤 특징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시는 시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그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작품의 특징들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또 사용하게 됩니다.

 

4) 작품의 특징들

 

우리가 묵시문학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개념을 묵시라는 단어가

어떤 것을 지칭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네 가지의 경우에 대해서

한 번 살펴 봤습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묵시록하면 개념이 확 안

잡혔는데 묵시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아, 크게 이 네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구나.

 

예, 처음에 이거 1)번 같은 경우에는 세상 끝날의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이거 약간 조금 뭐라고 그럴까요. 조금 구체적인 묵시

작품이나 정신적 사조와는 다른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요것은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 좀 거리가

있는 것이구요.

 

요 밑에 2), 3), 4)번 요기서 우리가 주로 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작품들 그리고 당시의 정신적 사조, 신학적 사조 그 다음에

작품들의 특징. 무슨 작품들? 작품들의 특징들이 어땠길래.

이 작품이 자꾸 조금 중점적으로 바라보죠? 그죠?

 

이 작품들이 또 그 정신적 사조 안에서 많이 등장을 했다는 것이지요.

주로 보자면 특징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천상의 세계. 뭐 하늘에서 뭔가 이렇게 요한 묵시록에도 보면

4장부터 천상의 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 그분께서 어떻게?

탁 앉으셔 가지고 그것도 한가운데에 어린양이 등장하고 그 위에서

막 찬미 찬송 막 노래도 하고 그죠? 이런 것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많은 묵시 문학들의 특징이 천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감히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천상을 너무 좋은 곳으로 이야기 하니까 지상은

상대적으로 나쁜거가 되는 거예요. 지상은 악의 어떤 구덩이가

되는 거예요. 우린 지상에 살고 있죠? 그죠? 악속에 살고 있습니까?

막 어려움 속에 살고 있어요? 막 어려워 죽겠어요?

 

예, 묵시 문학은  그렇게 본다는 조금 약간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있습니다. 요게 하나의 특징이구요. 천상과 지상을 나눠서

천상은 좋은 것. 지상은 약간 부정적인 것.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상 생활을 어떻게 해야되요? 기쁘게 해야되요? 뭣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믿습니까? 예수님, 예, 아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천상에 계신 분이 지상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그랬으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이 지상 참 즐거운데 이 묵시 문학이 '아포칼립시스'라는 이 단어가든

작품들을 이렇게 쭉 보면요 천상은 좋은 곳, 지상은 약간 나쁜 곳.

약간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특징은 어떤 게 있느냐면, 현실이, 이지상이 약간

부정적이다 보니까 지상 현실을 약간 개혁하고자 하는 주로 심판의

모습이죠? 아, 현실이 이러니깐 현실을 한 번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것을 왜 요한 묵시록 같은 경우를 보면 우리가 다다음 시간에

요한 묵시록의 상징들을 보게 될 것인데 그 상징들에 보면 막 요한

묵시록이 많은 상징들을 사용 하면서 실은 천상의 내용이 아니라

지상의 내용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게 현실 약간 개혁적인. 현실을 어떻게든 부정적으로 보지만

동시에 아, 현실이 이렇게 안 좋기 때문에 어떻게? 아, 돌아서야

된다? 피해야 된다? 무엇을 통해서? 심판이나 징벌 그런 무시무시한

것을 통해서 현실이 바뀌어져야 된다라는 개혁적인 요소도 있다.

 

이거는 아까 처음에 그 특징 천상과 지상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예, 지상에서 뭔가 바뀌어지기를

바라는 이런 큰 두개의 틀이 어떤 묵시 문학의 작품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우리 많은 묵시 문학을 공부하시는 어떤 학자분들이 많이

이렇게 다뤄 놨는데 혹시라도 우리 참고 삼아 혹시라도 여러분 책을

한권 소개해 드릴테니까 그 책을 한 번 보시면 묵시 문학에 대해서

유다 묵시 문학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런 개념 정립이 잘 되어

있는 책이 있는데 아주 쉽게.

 

김 혜윤 수녀님이 쓰신 [봉인의 시선을 넘어 〕라는 그 책이 있습니다.

얇은 책인데 그 책을 한 번 읽어 보시면 구체적으로 이 개념 정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할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 우리는 내용으로 그 묵시라는 이러한 것들의 개념을 가지고 탁

봤을 때 어느 시기에? 뭐 세상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다 묵시적인

작품 다 골라 낸 것이 아니라 이러한 특징을 가진,이러한 묵시적인

작품들 사조가 어느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는가?

예, 이시기가 중요하겠지요? 크게. 그래서 기원전 2세기,

기원후 2세기, 총 크게 한 400년 간에 걸쳐서 이 묵시적인

어떤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구요.

 

※ 묵시 문학 : 기원 전 2세기부터 기원 후 2세기까지 주로 등장함

 

그 다음에 정신적인 어떤 신학적인, 종교적인 사조가 그 400년에

걸쳐서.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던 이런 어떤 작품들의 어떤 특징들이

그 당시에 많이 일어 나게 됩니다.

 

예, 이 시기, 이 역사적인 어떤 크게 400년이라는 이 시기동안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 이거는 우리 묵시 문학의 어떤

각권을 한 번 보면서 볼 것이고. 흔히 묵시 문학의 이 400년.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400년 이것이 어디서 이렇게 나타났는가?

 

왜 이시기가 묵시적인 어떤 사조와 작품들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배경을 알아야 되겠지요?

왜 뜬금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요 시기가 묵시 문학 작품 쓰자.

아니면은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생각하자 라고 등장한 것이 아니라.

뭔가 배경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배경이.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설명해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 우리가 어디로 이동을 하느냐하면,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비참했다. 가장 어려웠겠다. 언제시기 같아요? 바빌론 유배.

바빌론 유배가 가장 힘들었던것 같애요? 예,  그전에 잘살았고? ^*^ 

못살아서 유배간 거예요?

 

그러면, 아, 예, 우리가 종교적으로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우상숭배하고 못되게 살아서 하느님이 벌

주시려고 유배를 갔다고 우리가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맞죠?

예, 맞습니다. 그죠?

 

약간 좀 신앙적이고 후대 사람들이 조금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의

어떤 종교를 가지고 우리가 바라본 관점이고요. 사실 이 강대국들의

어떠한 그런 힘있는 나라들이 막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계속 이렇게 외세의 침입을, 한국하고

되게 많이 닮은 것 같애요.

 

한국이 역사 속에서 한 900번 이상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많이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힘겨웠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보면 바빌론 유배다.

 

※ 바비론 유배시기(기원 전 597 - 538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힘겨웠던 시기

 

예, 유배를 가서 돌아 왔습니다. 돌아왔는데 유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못 살았다. 성경에 어떤 적혀 있는 대로

보자면 우리가 못 살았기 때문에 잘살아야 된다. 너 그렇게 살면

안된다. 왕부터 시작해서 사제들, 예언자들, 너희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외쳤던 사람이 유배 끝나갈 무렵까지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으켜 누구? 예언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언자들.

이 예언자들은 요한 묵시록 저번 시간에 말씀 드릴 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죠? 하느님 말씀이 뭐

미리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런 점장이가 아니라

지금 현재 하느님의 말씀을 필요한 곳에 전해주는 사람이다.

 

※ 예언자 : 지금 현재 하느님의 말씀을 필요한 곳에 전해주는 사람.

 

그러니까 대부분 뭐냐? 이스라엘 백성이 왕부터 해서 제대로 못살 때

하느님 말씀을 전해 주면서 어떤 정의 똑바로 살아라. 그래서 심판

하신다. 너 똑바로 안 살면 절단난다라고 뭐 말을 할 때 그죠?

 

예, 그건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생활상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으로 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벌

받을 것이다라는 게 예언자들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유배를 가고 이러니까 지금 힘들어 죽겠는 사람보고 "너 똑바로

살아라.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면 얼마나 이게 조금 더 힘들게 만들

잖아요. 그죠? 지금 너무 힘든 사람한데. 그러면 뭐를 해줘야 하겠어요?

위로, 격려. 그래서 예언서에 보면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도 분명히

존재를 합니다. 그래 예언자들도 이렇게 너무 왕성히 활동을 했어요.

그게 언제부터? 기원 전 8세기부터.

 

※ 예언자들의 활동시기 시작: 기원전 8세기부터(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아시리아의 영향으로 남유다까지 위태로웠을 때)

 

기원전 8세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아시리아의

어떤 영향 때문에 남유다까지도 위태위태한. 예, 거기에 뭐 왕들도

이렇게 막 이 강대국이 워낙 커지니까 막 이렇게 우리 경상도 식으로

이렇게 쪼라 있었던 거예요. ^*^ ~

 

그러니까 무서워 떠니까 이사야 예언자 같은 경우에는 "쫄지마라.

떨지마라. 하느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임마누엘 신탁을 알려

주시고 막 그렇게 활동을 많이 했고. 특히 유배 가서는 에제키엘

예언자 같은 경우 사제로서 거기에서 또 "힘을 내라. 우리가 곧 돌아

가면 거기는 새로운 탈출기. 그죠?

 

다시 이스라엘 본토로 돌아가는 걸 탈출기 개념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묵시주의적 사조 묵시 작품외에 등장하는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거든요. 유배를 갔다가 돌아와서 어떻게

해요? 우리가 나라 한 번 똑바로 세워보자. 이제 제대로 한 번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한 번 제대로 살아 보자라고 그런 노력을 하기

위해서 등장한 두 분은?

 

예, 에즈라, 느헤미아죠? 그러니까 율법과 성전을 정리를 하고 성전도

제2성전 시대라고 하죠. 세우려고 햇는데 율법 중심으로, 하느님 말씀

중심으로 그 동시에 이 건물 성전을 중심으로 이렇게 딱 민족의 어떤

정체성을 모을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많이 배우기로 "아, 이스라엘이 인제 드디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겠구나!" 하는 식으로 약간 긍정적으로

우리가 성경 공부하면 많이 배웁니다. 그죠? 그러나 실상 또 우리가

다른 이면을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역사라는 것은 한쪽으로만 자꾸보면 자꾸 그것이 좋다. 좋다. 그러면

정말 좋은게 돼버려요. 비판의식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다양한 관점으로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부분은, 율법 중심, 성전 중심으로 가다보니 어떻게 되냐하면,

예언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이 왜 사라지기 시작했던가? 사제들이 급부상하면서 율법을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소위 죄인이고 지키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제 잘사는 것이다. 동시에 성전 중심으로 성전을 확고하게 새롭게

건립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외국에서 살다가 본토에 돌아왔는데,

사실 돌아온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바빌론이라는

유배가서 이미 정착을 해서 50년 입니다. 50년이면 거기서 먹고 살기에

기반 다 닦았겠지요?

 

예, 우리식으로 표현해 볼까요? 뭐 아파트 분양도 해놓고, 애도 키우고

이제 다 자리 잡았는데 그걸 버리고 가라. 힘들겠지요? 그죠?

그래서 돌아온 사람들은 정말 뜻있는 사람이, 신념 있는 사람이 돌아

왔는데 와서 자, 이제 다 무너진데서 먹고 살아야 되는데

"성전 짓는다 돈 좀 내라." 이러면 쉽게 안내죠. 그죠?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말씀 드릴까요?

 

예, 제가 군대를 입대를 했는데, 입대를 하고 훈련을 받으려면 몸이

튼튼해야 되잖아요. 조금이라도 막 상처만 나도 되게 신경 쓰입니다.

훈련소에서. 그래서 이제 건강하게 훈련을 받아야 된다. 몸을 아낀다.

제가 이때까지 살면서 가장 제 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챙겼던

게 아마 군대 훈련소 같은데요.

 

이렇게 제가 군에 입대하는 그 첫날 군대에 딱 들어가서 저녁밥을 딱 

먹는데 이게 먹힙니까? 이게. 밖에서 그 맛있는거 먹다가. 이게 전혀

안 먹히는 거예요. 이래 먹는데 완전 모래알 같이 안 먹히는 거예요.

 

근데 뜬금없이 이 교관이 탁 나타나더니만은 헌혈할 사람 손 한번 들어

보래요. 누가 헌혈을 하고 싶겠습니까? 이제 갓 들어와서 훈련 받아야

되는데. 아무도 안 들었지요.

 

"예, 알겠습니다" 하면서 식사 하시라고. 밥을 먹는데 갑자기 어디서

우당탕탕하고 난리가 난 거예요. 밥 똑바로 안 먹는다고 얼차를 주는

거예요. 그거 끝나고 난 후에 또 "자, 헌혈 하실분, 손 한번 들어

보세요!" 하시는 거예요.

 

앞에서 얼차를 하는 걸 봤으니까. 그 사람들이 손을 바짝 다들은

예요. 이제. 안 맞으려고 그래서 피를 뺏어요. ^*^ ~  그래서 뭐

본의 아니게 좋은 일을 하긴 했는데. 이게 자꾸 떠 오르는 거예요.

 

제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왔을 때 성전을 짓자 하고

십시일반하자라고 했을 때, 많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조금

힘들어겠다. 또 힘들었다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이 솔로몬 시대의 성전보다는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죠.

어떤 면에서 볼품 없었죠. 그래서 유배 이후에 등장하는 뭐 제3이사야

라든지 다른 어떤 책들의 성경에 보면 성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예, 새롭게 지었지만 볼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전중심, 율법중심으로 하니까 아까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치고 사제를 통해서 율법에 따라서 제물을 바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하면, 속죄예식입니다.

 

왜냐? 내가 거룩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어야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문제는 속죄를 할려면 내가 그냥 어디

꿇어 앉아서 빌면 속죄가 되는게 아니라 속죄예식을 해야 되는거.

제물을 받쳐야 되지요? 동시에 누가 필요합니까? 사제가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제와 더불어서 율법이 백성들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치를 시키는데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이게 너무 권력이 집중화 됐다고

해야되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비판의 목소리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비판하면 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이렇게 비판해 버리면 이 성전 하느님의 현존을 가지고 지금 이야기

하는데 내가 비판할 근거가 없어요.

 

예언자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유배 이후에는 예언자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유배 이후에는 예언자들의 활동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죠?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됐느냐?

율법을 내가 다 지키지도 못할 것 같고 근데 너무 힘들고. 그 다음에

사제들은 우리 공동체를 꽉 쥐고 있는 것 같고, 그런 상항에서 서민들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이 흐르느냐?

 

현실에 대해서 약간 좀 힘들다고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는 거예요.

더더군다나 그러고 있는데 그리스제국, 뭐 로마부터 해서 그 바빌론에

이어서 큰 나라들이 자꾸 이스라엘을 이렇게 소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식민지화 한다는 거죠.

 

그런 어떤 현실의 어려움, 각박함. 이런 것에서 서민들이 자꾸 마음이

뜨는 거예요. 율법은 정말 법이예요. 법.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열열한 마음. 느헤미아 8장 보면요. 율법을 막 이스라엘 본토에 돌아

와서 막 설명해 주니까 사람들이 마음이 뜨거워져서 울고 막 그러는

장면이 등장을 합니다.

 

※ 느헤 8,6 :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서서히 식어가고 현실로부터 어렵다, 어렵다 이렇게

되면서 예언자에 대한 어떠한 그런 비판의 목소리 격려의 목소리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서서히 현실에서 떠나서 천상, 뭔가 누가 와서

좀 이것을 좀 바꾸어주기를 바라는 이런 식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

하는 문화가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 문학의 태동하는 그 배경을 어디서 찿느냐 하면 예언서,

예언의 어떤 문학, 예언자의 어떤 분위기에서. 예언자 시대가 끝이

나면서 조금 섭하니까 이제 어떻게 살아? 옆에서 막 비판해 주고

격려해 주는 목소리가 없어지니까 천상에서 기대는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현실에

대해서 격려의 메세지나 위로의 메세지를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 그냥 우리 신자들끼리, 우리 서민들끼리 주고

받는 이야기 "아, 저기 용하다 하더라, 저기 뭐 신기한 거 있다

하더라." 이렇게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성당가서 정말로 위로, 격려의 메세지를 확실하게

강론이나 강의나 여러가지 교육을 통해서 듣고 내가 마음이 뜨거워

지면 성당에 자리가 꽉꽉차고 넘칠꺼예요. 그죠?

 

그런데 그게 못 얻어졌을 때, 예컨대 제사 중심, 혹시 막 "이거 지켜,

안 지키면 너 죄인이야" 이렇게 나오면 내가 거기서 감동이나 하느님을

막상 못 느끼지 않습니까? 그리 되면 자꾸 딴 데로 새게 되어 있어요.

 

얼마 전에 전체 우리 한국 교회 이야기입니다마는 광주 대교구장님께서

다시 한번 나주에 대해서 공지문을 내셨어요. 우리 대구에 계시는

신자분들도 이렇게 좀 가시고 하시는 것 같애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내 안에서 영적으로 뭔가 채워지지 않는 어떤

현상일 수 있습니다. 가면 안돼요. 정통 우리 신앙 안에 머물러야

됩니다. 그럼 머무르는데 있어서 우리가 예언자들의 어떤 격려, 위로,

심판과 정의의 목소리, 이런 것들이 내안에 채워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우리 교회가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제니까 사제로서 제일 첫 번째 직무가 저의 스승

이셨던 정광진 신부님, 교회론 하신분께서 제일 강조했던 부분이

뭐냐하면, "사제는 말씀의 선포자다" 예, 말씀의 선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에 대해서 충실히 살아라하고 늘 수업시간에

강조하셨습니다.

 

"미사드리는 제사, 이것 못지 않게 말씀에 대해서 내가 무장을 하는

것이 사제의 본분이다."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사제들이 많이 말씀을 전해 드리고 말씀 공부를 하고, 신자분과

나누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까 우리 지금 교회의 모습이 자꾸

딴데로 가고 책도 이상한 책들이 나오면서 거기 너무 빠져 있는.

 

예컨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가지고 천상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하면서.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대한 그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 걸 봤다.

너는 구원 받았고, 너는 구원 못 받았고. 난 보고 왔다. 이렇게 말하는

은 이것이 제대로 된 어떤 우리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이죠.

죽었던 사람이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은.

 

예, 그런 책에 우리가 솔깃해지는. 당시의 문시 문학이 태동할 때도

그랬다는 거죠. 제도적인 유다이즘이 형성되고 율법 중심이 되고 성전

중심이 되고, 사람들 마음에는 점점 각박해지고, 율법 못 지키면

죄인 되고, 그런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을 천상에서 찿자. 지상은 다

썩었구나. 지상은 힘든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묵시 문학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묵시 문학의 태동 배경

제도적인 유다이즘이 형성되고 율법(성전) 중심이 되고 사람들

마음은 점점 각박해지고, 율법을 못 지켜 죄인 취급을 당하고,

위로해 주는 것을 천상에서 찿음.

 

동시에 어떤 학자들은 이 묵시 문학의 태동을 지혜 문학에서 또 발견

하기도 합니다. 왜? 아까 제가 묵시 문학의 특징을 두 가지로 말씀

드렸죠? 그죠? 하나는 천상과 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

또 하나는 현실에 대해서, 현실을 바꾸어 가고 개혁하려고 하고,

심판이나 어떤 징벌을 통해서. 그죠?

 

요 두 번째 부분 때문에. 현실에 어떤 안 좋은 면이 있으니까 이것을

자꾸 사색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컨대 뭐 그리스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 괴롭히고 로마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 괴롭히고 로마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 괴롭히고.

 

이게 다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됐던 어떤 이야기들인데 이러한

시대적 현실의 아픔 안에서 이 현실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더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힘겹고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습니까? 닥칠 때에 "하느님, 이게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왜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십니까?"

라고 고민을 하게 되지요?

 

그 고민의 끝은? 절망입니까? 희망입니까? 희망을 느끼는 게 저는...

어우, 우리 신자분들이 사시는 거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막 이렇게 소위 신앙 상담. "신부님 이야기 좀 하고 싶은

데요" 하시면서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들 쭈욱 하시죠.

 

그런데 꼭 결론은 "그래도 이게 하느님께서 뭔가를 나에게 말씀하시

면서 나에게 주시는데 참으로 감사히 받아들여야지요." 말씀을 듣고

있는 제가 오히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가 되게

많아요.

 

예, 저희들은, 저 같은 경우에 이게 사투리인지 모르겠으나

"포시랍게 컸다" 라는. 이게 뭐냐 너무 온실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큰 거 같애요. 신학교 들어가서는 늘 신자분들이 챙겨주시고,

신부가 되서도 이렇게 쭈욱 커 오면서 너무 어떤 온실에서 보호받고

컸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 아픔들을 잘 모릅니다.

 

예, 그래서 많이 배워야 되고 이 현실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런데 이것을 희망으로 재 해석해 내고, 묵시 문학들 보면 현실의

어려움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느님이 무슨 뜻을 나에게 주시고자

이런 것을 주셨을까?

 

그래서 징벌, 심판, 정의 개념으로 해석을 했다가 동시에 나에게

이런 사건을 통해서 아,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느님의 뜻으로 나를

불러 주시는구나라고 하는 내용들이. 위로의 내용들이 묵시 문학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 문학적인 특징이죠. 지혜 문학서.

우리가 공부를 하셨으니까. 그죠?

 

그 지혜 문학들을 쭉 보면 현실에 대한 재해석, 신학적 해석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한번 바라보고 거기서 이 현실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고 재해석해서 그래서 그 결과물들이 지혜 문학

들이죠. 그래서 묵시 문학의 그 어떤 특징. 이것이 어디서 태동했는가

보면, 예언서, 지혜 문학 이 두뿌리에서 등장을 해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그렇게 묵시적인 어떤 그런 사조와 작품들이 그

시기에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 묵시 문학의 태동 : 예언서, 지혜 문학에서 등장.

 

자 이제 묵시 문학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그리고 어떤 이 태동된

그 뿌리, 그것을 가지고 어떤 묵시 작품들이 있는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안의 묵시록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 너무 잘 알아요. 예, 두 권 밖에 없어요 성경 안에 정경으로

인정된 책은 다이엘서와 요한 묵시록. 끝났어요. 너무 쉽죠?

 

※ 정경이면서 묵시 문학의 성경 : 다니엘서, 요한 묵시록.

 

문제는 많은 묵시적 작품들이 정경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

아까 말씀 드렸던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400년에

걸쳐서 많은 묵시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딸랑 두권만 정경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책이 다니엘서, 요한 묵시록 이 두권은 전체가 묵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묵시 작품 분류에 넣어도 되는 거지마는

군데 군데 조금씩 묵시적인 특징 아까 제가 말씀 드렸던 특징을 다

안고 있는 책들이 정경안에 있는 예언서 혹은 복음서에서 조차도

묵시적인 특징을 가진 부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 어떤 책이 있느냐하면, 이사야서 24장에서 27장까지 보면 어떤 게

있느냐하면, 막 땅을 심판하는 거. 땅이 부서지고 갈라지고 흔들리고.

이사야서는 예언서지요? 예언서로 분리하는데 예언의 말씀들이 쭉

있는 가운데서 갑자기 심판할 때 땅이 흔들리고 어떻게 갈라지고.

막 이런 모습들. 동시에 의인의 길을 또 말하고. 의인의 길은

올바르고, 의인은 구원 받고 이런 내용들이 이사야서에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레비아탄을 뭐 죽이고 용을 죽이고. 예, 뭐 이러한

내용들도 분명히 등장 합니다.

 

※ 묵시 문학적 요소의 성경 구절 : 이사야 24 ㅡ 27장

땅을 심판, 의인의 길, 뱀 레비아탄과 바다속 용을 죽임.

 

이건 예언의 어떤, 지금 현실에서 하느님 말씀을 통해서 정의와 심판,

위로를 주는 그 말씀과는 약간 좀 거리감이 있는. 그래서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들이 벌어질 것 같은.

 

아까 천상과 지상 얘기 했죠? 지상은 나쁘고,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고

이런 것들이 이사야서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65장

에서 66장을 보면 여기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심판, 지상에서 우상을

경배하는. 뭐 그러한 어떤 바알신 같은 것을 막 경배하는 그런 것을

심판하고 동시에 새로운 창조를 얘기를 합니다. 새 세상에 대한 것.

새 하늘 새 땅이 이사야서에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 묵시 문학적 요소의 성경 구절 : 이사야서 65 ㅡ 66장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 새로운 창조, 새 하늘 새 땅

 

예, 새 하늘 새 땅이 등장을 하는. 우리가 요한 묵시록에도 새 하늘

새 땅이 있지요. 요한 묵시록이 요 이사야서의 새 하늘 새 땅 개념을

살짝 가지고 와서 .

 

상당히 묵시적인 특징이죠. 예, 하늘과 땅, 땅은 조금 안 좋고,

무너지고 갈라지고, 심판 받을 것이고. 하늘에서는 뭔가 천상의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고.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 요엘서, 즈카리야서, 예, 예언서들이

이러한 특징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 묵시 문학적 요소의 성경 구절

에제키엘, 요엘, 즈카르야

 

예, 동시에 복음서에도 보면 우리가 제일 유명한 복음서에 등장하는

묵시 문학적인 어떤 특징의 한 부분이 있는 게 마르코 복음 13장에

보면 성전 파괴부터 이야기 합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가능한 게 아니죠? 거기에 그때 성전을 허물어라는 그 성전은 무슨

성전이냐 하면, 대헤로데 왕이 다시 그리스식으로 새롭게 건축한

그 성전입니다.

 

예, 이것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짓겠다. 이거는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 성전 파괴 다음에 바로 말씀하시는 

것들이 뭐냐하면 민족과 민족이 맞서서 일어나고... 아버지와 뭐

가정이 뭐 하여튼 풍지박살 나죠? 콩가루 집안이 되는 어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곳곳에서 지진과 기근, 고통이 시작된다라는

게 마르코 복음 13장에 등장을 하게 됩니다.

 

※ 묵시 문학적 요소의 성경 구절 : 마르코 13장

성전 파괴,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

고통의 시작,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우리가 지금 지진도 많이 일어나고 유럽에는 화산이 터지고.

미국 토네이도가 어쩌구... 막 이러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렇게 해석해서 곧 이제 종말이 오는가보다 막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예,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의 이러한 시간의 끝에 뭐가 등장을 하냐

하면,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등장을 한다고하는 마르코 복음.

그러니까 이 종말의 사건을 우리는 자꾸 두려움 무서움으로 이야기

하는데.

 

자, 마르코 복음 13장에 나오는 나타나는 종말, 끝은 어떻게 되는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등장을 하는데 이게 무서운 겁니까?

좋은 겁니까?  좋은 거예요? 좋은 거 같애요?

여러분은 다 믿고 계셔서 그런 거예요.

 

예, 그런데 예수님 안 믿으면 지진 일어나고 막 이러는데

"사람의 아들이 누군데, 니 뭔데!" 뭐 이런 식으로 이래하면 무서운

것 밖에 안 보일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이렇게 묵시적인 어떤 대목을 만났을 때, "아이구야, 끝날이 우예

될라는고..." 막 이러면서 무서워 하기 시작해 버리면 믿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도 우리 조금 후에 나중에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대해서 다루어 볼 것인데 뭐냐? 이 승리를 줄려고 오시는, 승리를

주기 위해서 전 단계가 이러한 어려움이 있는데 이 어려움 이것은

어떤한 표징이냐?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렇게 보여지는 표징이죠. 

믿지 않으면 이렇게 끝날은 두려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습니까? 우리가 이해를 했을 때 죽음이 두렵습니까?

무섭죠? "예!" 길가다 죽으면 어떻게? 되게 무서울 거 아닙니까?

저는 아직까지 뭐 조금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문에 보니까.

뭐 71년생이 평균 연령이 94세까지 산다라는 신문에 어떻게 한번

봤는데, 하여튼 앞으로 계속 오래 살 것 같애요. 오래 살 것 같은데.

 

아이구, 우리 어르신들 이렇지 않습니까? 매번. 이렇게 물으면?

"아이구, 내가 곧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어야 카는데..."

실제로는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죽음이 두렵죠?

그런데 우리가 죽음이 끝이 아니요. 또 다른 삶의 시작이다라고

믿어보면 죽음을 기다려야 됩니까? 기다리지 말아야 됩니까?

"기다려야지요" ^*^  반갑게. 새로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반갑게 기다려야 되겠지요?

 

예, 그렇다고 자꾸 죽음을 또 좋은거다. 좋은거다 막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약간 조금 그런게 있겠습니다마는 고통속에 분명히

어려움 속에 분명히 우리가 지향해야할 바는 희망, 기쁨이라는 것이죠.

 

마르코 복음 13장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려운 이러한

상항에서 궁극적으로 종말의 시기는 사람의 아들이 와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희망을 주는 그 시기가 종말의 시기. 그래서 우리

사회적으로 종말이 언제 온다 끝이 언제다라고 이래 가지고

"아이구 지진나면 어떻하지? 무너져 깔려 죽는 거 아닌가? 종말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내가 세상 끝날에는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지복지관 할 수 있는 그런 기쁨이 우리에게 등장을 한다.

나타난다.

 

예,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조금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다.

예, 그래서 이 정경에 들어가 있는 정경으로서의 묵시록은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이지마는 이러한 묵시적인 특징을 가진

어떤 문학적인 표현들, 이런 것들이 다른 어떤 책에도 들어가 있다.

군데 군데. 그 정도만 머리 속에 넣어 두시고요.

 

자,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제 봐야 될 것이 그외에 정경에 들어가지

않는 그런 묵시 문학 작품들에 대해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묵시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 이름들이 너무 다양해요.

 

그러니까 묵시록이라는 거를 아, 아까 우리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400년 동안 나타났던 작품들은 모두 다 뭐뭐

묵시록, 요한 묵시록처럼 막 그렇게 다 묵시록이라는 단어로 제목을

붙인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아닙니다.

 

묵시록이라는 제목이 붙기 시작한 거는 기원후 1세기 이후에 그러니까

처음에 묵시 문학적인 사조가 등장하면서 이 작품들이 등장할 때는

이름이 희안한 것들이 많아요. 희년서, 에녹서, 솔로몬의 시편,

열두 부족장의 유언, 뭐 이런 식의. 뭐, 이것이 묵시록인지 뭔지

제목을 보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읽어보니 아, 이 시기에 등장하는 책들이 다 이런 성격들을, 유사한

성격들을 이렇게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아, 묵시록이라고 해서 다

묵시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기원전 2세기부터 한번 유다에서 나왔던 묵시록들을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제일 처음에 이제 기원전 2세기 등장하는 것이 희년서,

에녹서, 솔로몬의 시편, 열두 부족장의 유언 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이 좀 생소합니까?

 

예, 기원전 2세기입니다. 예, 여기에 희년서가 있구요.

그 다음에 에녹1서가 있습니다. 에녹서는 1서, 2서, 3서.

이런 게 있어요. 바룩도 1서, 2서. 우리 마카베오 상,하권이 있듯이

이런 식으로 있습니다.

 

그 다음에 솔로몬의 시편, 그 다음 열두 부족장의 유언입니다.

열두 부족장은 누구일까요? 12사도가 아직 나올 때는 아니죠. ^*^ ~ 

기원 2세기인데. 예, 열두지파, 열두지파 어디서 시작했죠?

예, 야곱의 아들들이 열두 부족장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 다음에 꿈란 공동체라고 들어 보셨지요?

 

예, 꿈란 공동체에서 나온 문서들이 있습니다. 예, 다마스의 문헌,

그 다음에 공동체의 규칙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다음에 무시무시한

전쟁의 규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 이 책들이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을 해서 딱 고 연도까지는

꼬집어서 말할 수 없지마는 기원전 2세기부터 유다 묵시 문학이

형성이 됐던. 기원후가 아니라 기원전 2세기부터 쭈욱 그시기에

나타났던 책들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 우리 다음 시간에 한권 한권 우리가 보도록 하구요.

이 책의 특징이 뭐냐? 이 책의 특징이? 아까 제가 그 어떠한 천상과

지상을 구별한다고 그랬지요? 구별한다고 그랬을 때 예컨대 희년서

같은 경우에는 창세기 1장부터 12장까지 등장하는 좀 신화적인

 이야기죠. 뭐 창조 이야기도 나오고. 막 노아 홍수가 나오고...

 

이것을 재해석합니다. 재해석을 해 가지고 여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창조와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어떠한

그러니까 천상의 세계를 꾸미면서 천상 위에 어떠한 그런 내용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줄까? 재해석해 내는 것.

 

그 다음에 이제 시나이 산에서 받는 계시의 이야기가 여기에 또

역사를 한 번 더 재해석을 하는 것이죠. 여기에 다 등장하는

이런 책들,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보면 미리 있었던 먼저 있었던 이야기 그런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우리 다음 시간에 한 번 살펴보구요.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봤던 것 제일 중요한 것은, 묵시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디서 출발 했던가? 율법과 성전 중심으로 했던

그 시기에 어떠한 이 채워지지 않는 어떤 그런.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시기를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현실에 대한

반성.거기서 어떤 천상과 지상에서의 그 어떤 삶의 그 의미를 한번

고민하고 사색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지금 무엇인가 한번 현실의 삶을

한번 되돌아 보는 그런 것이 묵시 문학의 어떤 중요한 포인트다.

 예,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본격적으로 묵시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조금 조금

이제 들어가고 있는 중이예요. 요한 묵시록이 아닌 묵시 문학전반에

걸쳐서 한번 살펴보고 있는 중이니까 우리가 이번 시간은 이제 시작

이니까 다음 시간에 한번 보시면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묵시 문학을

알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예, 지금까지 수고 하셨고, 다음 시간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7 강 묵시 문학의 세계 2  이어집니다.

 

출처 : 여정성경공부
글쓴이 : 하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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