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 8강 묵시문학의 세계 3|박병규 신부/요한묵시록

윤 베드로 2016. 8. 28. 16:59

 

제 8 강 묵시문학의 세계 3

 

+ 찬미 예수님!

반갑습니다.

 

저도 이 시간이 많이 기다려지는데 왜 기다려지는고 하니

무엇보다도 공부도 공부지만 말씀을 가지고 서로 나눌 수 있다라는 것.

우리 생각들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참 좋은 것 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거룩한 독서 모임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너무 좋아요. 일방적으로 여기서는 제가 계속 말하는 게 위주인데

기회가 된다면 서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게 저의 솔직한 심정

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혼자서 읽을 때보다 같이 이렇게 보면 서로의 생각들이

되게 풍성하게 다가 올 때가 있거든요. 나혼자 발견하는 말씀보다 같이

나눔으로써.

 

그래서 이 묵시 문학을 우리가 지금 계속 보고 있는데 묵시 문학도 요한

묵시록이 요한 이라는 사람이 혼자 막 한 것이 아니라 유다 묵시문학의

어떤 전통을 다 받아서 함께 버무려서 이렇게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리고 내가 다 이렇게 정리해서 선포하고 여러 공동체에 나눠주는

그런 요한 묵시록의 어떤 모습. 이것이 말씀이 자꾸만 풍요로워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묵시 문학 작품들의

세 가지 특징들을 봤습니다.

 

※ 묵시문학 작품들의 특징

1) 묵시문학은 위기의 시대에 등장했다.

2) 묵시문학은 글로 쓰여졌다.

3) 묵시문학은 권위 있는 인물의 가명을 사용했다.

 

첫 번째 묵시문학은 위기의 시대에, 어려운 시기에 등장을 했다.

두 번째 묵시문학은 글로 쓰여졌다.

세 번째 가명을 사용 권위 있는 인물을 통해서 어떤 계시적인 내용을 전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또 한번 강조하지마는 위기의 시대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자. 그리고 글로

썼지마는 여러 곧동체에 말씀으로 선포되기를 원했다.

 

※ 요한 묵시록의 특징

1) 위기의 시대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2) 글로 썼지만 여러 공동체에 말씀으로 선포되기를 원했다.

3) 중개자, 특권, 권위 있는 인물이 아닌 형제로서의 요한이 평범하게

평등하게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네 가지가 남았는데요. 그 네 번째로

유다 묵시문학의 특징이 상징 이용을 많이 합니다.

 

※ 요한 묵시록이 특징

4) (숫자들의) 상징을 많이 이용한다.

 

왜 상징을 이용하는가? 특별히 숫자에 아주 민감합니다.

숫자를 많이 사용합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뭐 흔히 숫자 그러면

요한 묵시록 같은 경우에는 어떤 게 머리 속에 탁 떠오르십니까? 666.

여러분에게 바코드가 다 찍혀 있습니다. 시청자 분들에게도 바코드가.

 

우리 약간 좀 이상하게 믿으시는 분들이 가톨릭 신자들한테 666이

찍혀 있대요. 악마의 숫자가. 어떤 분은 심지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666 사탄의 우두머리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우리가 666은 요한 묵시록의 상징에서 집중적으로 공부를 할 때 살펴

보도록 하구요. 그런 식으로 숫자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라는데

묵시 문학 전체가 많은 숫자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상징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자, 묵시 문학이 등장한 게 위기의 시대,

어려운 시대라고 그랬죠? 그 어려운 시대가 뭡니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그 박해, 종교적, 군사적 박해, 로마의 박해

이런 것에서 "나 저사람 싫어요. 나, 저 황제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어떻게 해 줘요."라고 말해 버리면 바로 그냥 난리 날꺼 아닙니까?

예,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우리도 식민지 시절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봄이 뭘까?

뭐 꽃피는 봄, 이렇게만 생각하지 않죠? 그 상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사용된 상징적인 숫자들을 보면요.

바룩 2서에 보면 4라는 숫자가 등장을 하는데,

 

※ 바룩 2서 VI 4 :

 4라는 숫자의 사용 네 천사가 그 도시의 네 귀퉁이에 위치

 

땅의 네 모퉁이에서 네 귀퉁이에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도 분명히 그 표현이 있구요. 4가 뭡니까?

땅의 네 모퉁이 그러니까 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4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4는 죽을 4자입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있지마는 이 유다 묵시문학에서 4는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화권이 다르니까 상징에

대한 의미도 달라지죠. 유다 묵시문학에서 뭐냐? 땅의 모든 것들.

 

자, 그러면 7이라는 것도 바룩 2서에서 등장을 합니다.

7은 뭘까? 왜 완전수라 하는가? 럭키 쎄분이라는 것도 있죠.

행운 뭐 이런건대.

 

7= 4+3 : 7은 4더하기 3이죠? 4가 앞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4가 세상을 말한다. 이 3은 유다 전통상 신적인 영역, 하느님의

영역이예요. 삼위일체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유다 전통입니다.

3을 하느님으로 4는 세상, 4+3=7 : 하늘과 땅이 닿으니까 7은 완전수다.

 

자,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라고 우리 성경은 시작을

하죠. 하늘과 땅만 만들어 놓고 그러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다

안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4+3에서 7이 완전수다. 충만한 수다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 다음에 12라는 숫자를 유다 묵시문학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12는 또 뭘까요? 예, 12지파에서 시작을 했지요. 이것이 자꾸자꾸

시간이 가면서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그죠?

 

하느님 백성에서 또 하느님 백성이 이스라엘만인 줄 알았는데 특별히

바빌론 유배를 이스라엘이 갔다오고 나서 어떻게 느겼느냐?

하느님이 우리 민족만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

그러면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이 바빌론의 신보다 못하단 말이냐?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을 한거죠.

 

아니다. 야훼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의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이방 민족도 이러한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 백성이 된다. 그래서 완전히 보편적인 보편적 하느님

백성 개념으로 12라는 열두 지파가 보편적 개념으로 등장을 하지요.

 

예, 시대가 변하면서 변한거죠. 열둘이라는 것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선택된 모든 백성,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고백하는

백성이 바로 12라는 보편적인 숫자.

 

48이 또 등장을 합니다. 이 48 같은 경우에는 12가 곱하기 4번이죠.

그러니까 12의 같은 배수기 때문에 이것도 12라는 그 숫자 개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또 뭐가 등장하느냐하면 1000이 등장을 합니다. 1000은 무엇인가?

자, 우리 아이들이 100점을 맞아오면 좋아요, 싫으세요?

100점이면 만점이 아닙니까? 우리는 100%다 그러면 완벽하다.

하여튼 최고다. 제일 꽉 찼다라고 합니다.

그와 같은 개념으로 이 1000이라는 숫자는 가장 최고의 숫자입니다.

 

우리 요한 묵시록에 보면 천년왕국이 나타납니다.

정말 어느 시점부터 어디 천년 딱 대놓고 왕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최고로 긴 그러한. 누가? 승리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그러나 우리가 천년왕국이란 또 다시 동시에 한계가 있죠?

천년이라는 숫자이기 때문에.

 

아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큰, 가장 긴 그런 시기지마는 완벽한

메시아의 도래로 완벽한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아직 그 시기는 도래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 천년왕국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가장 길고 이미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시기이지마는 완벽하게 지금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가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아직 아니다라고 해서 인간적인

최고의 수 그러나 하느님 입장에서는 아직 한계적인 숫자 그래서 1000을

사용하고 있다.

 

예, 이것은 유다 묵시문학에서 이러한 개념을 요한 묵시록이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 이렇게 7이든, 4든, 3이든, 12, 18,1000.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 보면 1000이 12와 만나서 십사만사천명

각 지파마다 이렇게 나와서 십사만사천명이 나오죠

 

예, 그러한 것도 보면 12라는 숫자와 1000이 만나서 그렇게 조합이

됐구나,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숫자의 조합, 각자 숫자

나오는 것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666이라는 숫자의 경우에도,

7보다 못하죠. 어떤 부족한 느낌, 결핍 이런 느낌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구요.

 

예, 10이라는 숫자도 또 등장합니다. 이런 것도 12보다는 못하죠.

7보다는 많은데. 예컨대 그 어떤 짐승들의 머리가 10개이고 어쩌고

하는데 7개면 충만한데 10개면 이것도 저겄도 아니고 그런 약간 또

다른 표현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7,4,3,12,48,1000 이정도만 머리에 딱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숫자의 상징들을 유다 묵시문학이 많이 사용하고

있고 동시에 요한 묵시록도 그 유다 전통을 받아 들여서 숫자적인

표현을 많이 하고 있다.

 

요것은 다음 시간에 요한 묵시록의 상징 안에서 직접 들어가서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유다 묵시문학은 숫자적인 상징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동시에

요한 묵시록은 그 유다 전통을 받아서 숫자적인 표현을 많이 하고 있다.

 

예, 네 번째 묵시 문학들은 숫자의 상징적인 그런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를 정리하시고 자, 다섯 번째 묵시문학들은 종말을 이야기 많이

합니다.

 

※ 요한 묵시록의 특징

5) 종말의 긴박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 끝날을, 세상 끝날에 뭐 이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에녹 1서에 보면

종말적 심판, 그리고 선택된 이들이 승리한다라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고.

 

※ 희년서: 종말론적 심판, 선택된 이들의 승리

 

희년서에도 희년이 종말이예요. 끔찍한 사건들이 있는데 동시에 새창조가

이루어져서 그래서 새창조 안에서 소위 올바르게 살았던 그 사람들이

구원받는 어떤 그런 내용입니다.

 

※ 희년서: 희년의 사건들...창조때부터 새창조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

           종말의 끔찍한 시나리오들

 

바룩2서에도 세상 끝날에 약간 부정적입니다. 비운이 다칠 것이다.

세상이 열둘로 갈라질 것이다. 확실하게 갈라진다는 거지요. 열둘로.

그렇게 바룩2서에 되어 있구요.

 

※바룩2서: 비운이 닥칠 것이다. 그날에 12로 갈라질 것이다.

 

에즈라서에서는 다가올 시간까지 내가 살 수 있겠습니까?...

너에게 한 부분만을 알려줄 수 있다. 너의 생명에 대해서는 모를 일이다.

비밀에 싹 주님이 감싸 주는듯한. 그러니까 다 종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거예요.

 

묵시문학의 특징이 그런데 확실하게 요것이다라고 말하지는 않고 그냥

그날에 끔찍한 거다. 혹은 그날이 되면 누군가는 선택받을 것이다.

약간 피부에 안 와닿죠? 좀 뭔가 뚜렷하게 오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유다 묵시문학의 그런 표현을 씁니다.

예컨대 다가올 하느님의 진노, 추수 그리고 천상 예루살렘 이렇게

와가지고 또 그날이 되면 뭐 심판의 여러 징조들, 무너지는 징벌,

이런 것들을 요한 묵시록은 사용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요한 묵시록

처음부터 등장하는 것이 뭐냐하면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바빌론의 패망이 어떤 세상의

패망처럼 그렇게 묘사가 되는데 그 패망전에 벌써 요한 묵시록이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패망하는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요한 묵시록은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무너졌다부터 이야기합니다.

 

이게 이야기가 굴러가서 나중에 무너졌다고 그래야 되는데 무너졌다부터

먼저 표현해 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고 있다면 이러한 악적인 이거는 나와 상관없고 다 무너진거예요.

그래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종말은 종말의 사건은 이미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은 아직 되지 않았다라고

그렇게 우리가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종말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종말의

시작은 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은 아직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에 보면 세상 끝날에 심판하시겠데요.

세상 끝날에 뭐에 따라 심판하느냐하며는 세상 끝날에 한번 보자.

누가 누가 잘 살았나 한번 보자. 그래 가지고 고때 고시간에 요렇게

딱 뽑아가지고. 유다 묵시문학이 좀 그래요.

 

막 징조가 일어날 때 선택해서 뽑아간다 그러는데 요한 묵시록은

지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살아가느냐? 너의 행실에

따라서 그날에 심판하겠다고. 너의 행동 지금 하는 일에 따라서.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 공부하고 있지요?

우리 시청자분들 TV보고 계시죠? 지금 머리 속에 어떤 뭐 나쁜 생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각, 앞으로 내가 이것을 해야 되겠다. 뭘할까?

지금 매 순간이 종말의 시간이란 말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관점에서.

 

지금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내가 구원을 받는 자리에 있느냐,

구원 받지 못하는 그냥 암흑의 악마의 자리에 있느냐가 이게 판가름

난다는 것이지요. 매 순간이 겁 안 나십니까? 겁나시죠?

 

예, 지금 "아유 뭐 조금 있다가 뭐 열심히 기도하지. 조금 뭐 대충 살다가

아유, 내 언제쯤 하고,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활동 좀 해야지."

이러면 절단납니다. 큰일납니다. 그러시면 안 되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든간에 지금 무슨 어떤 생각을 하든간에 지금 하느님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가지고 내가 행동하고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예,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하니까 제가 좀 찔려요. 저는 제가 죄가 많은

거 같애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하면, "아, 얼마든지 보세요."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예, 아직까지 제가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되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묵시문학들 특별히 전체적으로 막 그런 종말 사건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은 믿음이 약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면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그런 징벌이 나타나고 재앙이 등장할 때는 늘 믿는 이들은

몇번 제가 말씀 드렸다시피 요한 묵시록 7장에 어려운 환난 속에 있는데

구원을 외쳐요. 기쁨을 노래해요. 그래서 그 기쁨 구원이 그것이 단순히

내가 어렵더라도 외치는 그 기쁨 그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어렵고 두려운 마음이 들 때 그것은 " 아, 내가 아직까지

전적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신앙을 두지 못했구나."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예, 아울러서 이 종말의 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둔다라는 것.

이 신앙이라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둔다라는 것. 그래서 그분과 함께

종말을 살아간다는 것.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한번 이 신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더 고민하고 묵상해 봐야 됩니다. 신앙이 뭔가?

내가 어떠한 존재를 그냥 따라 가가지고 "아, 저 이렇게 믿습니다.

당신 알아서 다 해 주세요." 이것이 신앙인가?

 

가끔씩 고해성사보면 그렇지요?

"사는 게 죄입니다. 두루두루 사해 주십시오." 뭐 이런 마음으로.

예, 그럼 두루두루 우예 사해 줍니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어떠한 그 내가 절대적인 어떤 존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첫재 말의 의미가 히브리 말에서 출발을 했는데요. 이 말의 첫째

말의 의미가 뭐냐하면, 내 삶의 충실성입니다. 지금 견고함입니다.

지금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이 막 움직이고 난리죠. 왔다갔다. 그러니까 내 삶을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지금 충실히 살아가는 삶.

 

지금 왜 충실히 살아야 해요? 지금이 종말의 때니까.

지금 내가 하는 행실, 빨래를 하나 청소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지금 충실히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정말로 종말에 이게 기준이 되는데

완성때. 이 나의 행실이 충실히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요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잠자지 말고 그냥 깨어 있으리라는 게 아니라

깨어있는 삶이란 게 매 삶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그런데 뭘 하든 기뻐하고

즐겁게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 되는데 그게 사람이 또 이일은 싫고

저 일은 또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죠? 하기 싫은.

 

예컨대 성당에서 반장하라 하면 막 피해다니고 그죠?

예, 하기 싫은데 그래도 주어지면 아, 내가 하느님의 신앙을 열심히

한 번 해 봐야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늘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이 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내용입니다.

자, 그 다음에 여섯 번째 이 메시아가 늘 등장합니다.

 

※ 6) 메시아의 등장(역활)

 

유다 묵시 문학도 마찬가지고 우리 요한 묵시록에는 메시아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죠? 특별히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것은 어떤 선택된 이.

다니엘서 표현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 그리고 에즈드라 4서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분, 그리고 다윗 가문에서 나오시는 분.

 

우리는 뭐 구약 전통에서 다윗 가문이 메시아가 늘 구약 전통입니다.

유다 묵시문학의 전통만이 아니라 구약 전체, 유다인의 전체 어떤 전통이

다윗 가문에서.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도 어디서? 다윗 가문에서 유다 전통

그대로 가지고 온 모습을 보게 됐구요. 요한 묵시록에도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저희가 바라보기에 메시아에 대한 의존이, 현실 포기가

좀 강했다는 것. 세상살이가 기원전 2세기부터 너무 어렵고 힘드니까

메시아에 기대면서 아까 제가 말씀 드렸던 신앙이지요.

그냥 절대자에게 의존 하면서 아까 제가 말씀 드렸던 신앙 있지요.

 

그냥 절대자에게 의존하고 내 삶은 그냥 아닌거예요. 이건 나쁜 거예요.

받아들이기가 싫어요. 그래서 내 삶을 똑바로 안 쳐다 봐요. 그럼 나는

스스로 나를 잃어가고, 그럼 메시아가 왔을 때 구해 볼려고 떡 보면,

예컨대 "니 어디 갔노?" 그러면 나는 없어요. 내가 포기했기 때문에.

그런 메시아 상을 어떤 의미에서 유다 전통은 간직했다는 것이죠.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 묵시록에는 메시아라고 우리가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시고자 했던 그 메시아상과

유다 전통 안에서의 메시아 상은 우리가 부딪친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도 봐도 특별히 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메시아

십자가의 메시아였습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의 메시아 개념은 어떻습니까?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오셔가지고 판을 싹 엎어 주셔야 되는데

사실 객관적인 우리 신앙을 가지지 말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일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그러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아, 예수님이 이렇게 살다 가셨구나. 그렇게 돼 있지마는 예수님이

그냥 객관적인 자료를 보면 거의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 나오는 게

갈릴래아 지역에 약간 지혜로운 사람이 설교도 좀 잘하고 이렇게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뭐 이 정도 기록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반란의 독립군이었던 그런 대장들 이런 사람들이

더 세상에는 기록이 더 잘 되어 있고 그런 거죠.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흔적도 없이 살다가 가신 거예요.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고 뭐 판을 엎어 버리는 그런 유다 전통에서

바랬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이 그러면 어떤 메시아인가?

"섬기러 왔다. 나는 너희를 벗이라 부르겠다."

세족례까지 이렇게 보여 주시는. 발을 씻어 주시며 당신의 모습을

이렇게 세상 안에 봉사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묵시 문학에 등장하는 이 메시아 상은 어떠냐 하면,

지극히 높으신 분이 세상 모두를 끌어서, 어떻게 이끌어 주시는 분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 주시는 분. 이런 개념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한 문화 그러한 영향 안에서 당신이

영광스럽게 될 때 오른쪽의 자리, 왼쪽의 자리 그러면서 제자 엄마까지

오셔가지고 치마 바람을 날리면서 그렇게 하는 게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 과연 지금 우리신앙은 어떤 메시아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수님께 우리 자식 걱정, 우리 취직 걱정, 우리 건강 걱정, 우리 기도하는

주제는 당연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 내가 고통을 겪으려고 그분을

내 삶의 자리에 내가 모시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내 삶의 자리를 떠나서

분의 좋은 것 자리에 내가 옮겨 갈려고 살아가고 내가 기도드리는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구원 받는이, 구원을 노래하는 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

어린양의 피 안에 자기 겉옷을 빤다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 안에서 함께하는 내 삶의 어려움에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놓으므로써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자리가 곧 예수님과 만나는 자리라고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셨고 또 그렇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내 삶은 버려버리고

"당신 좋은 것만 주십시오." 라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 상을

그렇게 가지고 있다면 유다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메시아 상과 별반 다를

게 없고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기도할 때는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냥 당신 나의 삶에 함께 해 주십시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서로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게 끔 당신 저와 함께 해 주십시오.

이 말씀 외에는 별...

 

그래서 기도의 최고 경지가 우리 쉽게 못 들어 갑니다마는 관상기도. 그죠?

정말 현존 앞에서 일치되어 있는. 그런 것이 우리의 지금 여섯 번째까지

메시아에 대한 것을 봤습니다.

 

자, 일곱 번째 마지막입니다. 일곱 번째를 보면 일곱 번째에는

모든 묵시문학이 자, 지금까지는 제가 조금 부정적으로 조금 얘기를

했습니다. 유다 묵시문학은 약간 부정적으로 요한 묵시록은 조금... 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배우고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뭔가가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고 묵시문학 세계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한번 우리가 배워보고

있는 것이고 마지막 일곱 번째가 그래도 부정적이지마는 유다 묵시문학

안에서는 위로의 성격이 분명히 있다. 

※ 묵시문학 작품들의 특징

   7) 위로의 글(성격)이 있다.

 

어려움 속에 위로를 하고자 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희년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희년서

나는 너에게 정의와 더불어 크나큰 평화를 보여주리라...

나의 성소에 모든 이방인들이 함께 머물겠노라...

나는 주님, 그들의 하느님이다. 정의로운 이들이 감사의 경배를 드리고

영원한 기쁨 속에 머물리라.

 

이방인들이 함께 머물겠노라. 보편적 구원이죠. 자 여기 정의로운 이들이,

의인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적인 표현을 보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두는 이. 예, 고런 표현 정도로 우리가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에녹1서에 보면, 주님의 축복의 말씀이 선택 받은이와 그리고 정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 에녹1서

축복의 말씀이 선택받은 이와 정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짐

'희망을 가져라, 정의로운 아들아... 두려워 말라 고통받는 너희들아

곧 치유될 것이다... 빛나는 불빛이 너희를 위해 밝혀지리라.

용기를 내어라, 정의롭고 신심있는 자들아.'

 

의로가 됩니까?

마지막으로 바룩2서를 보겠습니다. 9개 부족에게 보내는 바룩의 편지

안에서 고통에 대한 겪려를 담아내는데요.

 

※ 바룩2서

9개 부족의 반에게 보내는 바룩의 편지 안에서 고통 속의 격려를

담아내고 있다. "위로의 말을 들어라... 높으신 분께 자비를 빌었다.

나의 형제들이여 위로를 받아라..."

 

바룩이 편지를 써서 형제들에게 위로를 받아라 합니다. 왜?

높으신 분께 내가 자비를 빌었으니까. 위로를 받아라. 위로가 되셔요?

여러분들은 그러면 정의로운 사람이고 신심있는 사람이고.

 

왜냐하면 이 위로의 글들이 이 유다 묵시문학을 전제로 보자면 누구에게

주어지냐 하면요. 아무렇게나 대충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이, 선택 받은 이, 정말 신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하느님

말씀을 벗 삼아서 살아 가는 이, 그들에게 이 위로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 입니다. 

 

자, 요한 묵시록에서는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우리가 나중에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볼 때 13장에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등장하고 저기 천상

예루살렘에 21장에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등장합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다르게 등장하는데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13장에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이 그러면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가

위로 받고 겪려를 받아야 되는데 기록되지 않는이는 저주고 뭐 어려움

이겠지요. 이 사람들이 누군가? 황제에게 숭배하는 사람. 로마에게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 어린양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천상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과 일치해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함께 누린다.

 

같은 어린양의 생명의 책인데 한쪽은 아닌 사람을 한쪽은 기록된

사람을 이렇게 두개가 나눠져 있지요? 그래서 기록되어진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이고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고

성도들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나눠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다 묵시문학과.

 

유다 묵시문학에는 정의로운이, 선택받은 이라고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과 이렇게 조금 차별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 묵시록에서는 특징이

아주 새로운 게 뭐냐하면, 예컨데 셀 수 없는 군중이라는 표현과 그리고

천상 예루살렘의 도성의 문이 사방으로 다 열려져 있는데 열두 개 문이

열려져 있는데 아까 12가 뭐라고 그랬죠? 12가? 하느님 백성 전체.

 

문이 열려져 있다는라는 그리스말의 뉘앙스가 있는데요.

이게 안으로 열려 있다는 게 아니라 바깥으로 향해서 바깥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천상 옐루살렘을 묘사할 때 모든 민족들이 거닐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구하나 특정을 잡아서 요사람이라고 꼭찝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

셀 수 없는 군중, 어떻게 세겠어요. 셀수 없는데. 열어 놓은거죠.

완전 보편적이다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온전히 누가 꼭찝어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정의로운 이사람은 

요사람은 구원받고, 요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열려져 있다라는 것이죠. 누구든지

구원으로 위로의 말씀으로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에로 초대를 하면서 부활하신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위로를 받을 수 없다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러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겪려를

어려운 시절에 받아 누리기를 바라는 것.

 

※ 유다 묵시 문학은 차별화를 했지마는 요한 묵시록은 차별화가 없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를 주고있다. 

 

자, 지금까지 묵시 문학의 작품의 특징 7가지를 지난 시간에 걸쳐서 이번

시간까지 전체적으로 봤습니다. 자, 일곱가지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위기의 시대에 묵시 문학이 적혀졌다.

두 번째, 글로 쓰여 졌다.

세 번째, 환시자, 선견자, 중개자의 어떤 역활이 있다.

네 번째, 상징적인 특별히 숫자가 쓰여졌다. 1,000은 꽉 찼다.

다섯 번째, 종말의 긴박함, 곧 종말이 온다.

           종말에 대한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섯 번째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표현들이 많다.

일곱 번째는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이다.

 

이러한 일곱가지 특징이 유다 묵시문학 작품,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 전반적으로 다 등장을 합니다. 물론 일곱 가지 요 특징만 다

가지고 있다가 다른 묵시 문학들은 분명히 있어요. 어, 야는 이게 없네.

이런 내용이 없구나. 야는 묵시문학이 아니네. 이게 아닙니다.

그냥 전반적인 공통적인 특징을 한번 생각해 본 것이지 이것이 모든

묵시문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요한 묵시록은 이것을 약간 다르게 각색을 하죠.

이러한 7개의 관점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 봤다시피 요한 묵시록은

조금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다른 관점을 두 가지 단어로

한번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다.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은 천상과 지상을 나눈 것이 아니다.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 지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셨던 그분이

   바로 메시아고 천상의 사람이고 사람의 아들이고 천상의 기쁨을 이

   지상에서 주셨다. 이분법이 절대 아니다.

 

동시에 평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계시, 묵시 그러면 아주 신비적인 어떤 차원의 모두가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히 선택된 이들에게 이랬지마는 우리 요한 묵시록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모두에게 낭독되어져야 하는, 모두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어야

되는 그런 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의 특징이다. 나누지 말고 그죠?

 

그래서 평등하게 모든이에게 열려져 있는 그런 것. 그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의 어떤 특징이다. 유다 묵시록과 조금 다른 어떤 차원의 이야기를

우리가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러한 묵시문학의 전반적인 어떤 내용을 다 가지고 우리가 요한

묵시록의 안에 이제 들어가야 됩니다. 이 요한 묵시록이 이제 우리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희망과 위로의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하면서 예언문학과 연결을 해서 봤습니다.

 

예언문학,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부활하신 분의 기쁨을 전해주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묵시문학을 지금까지 살폈으면서 이 묵시문학적 기법들,

표현들이 요한 묵시록 안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이 묵시문학적인 표현들, 상징들, 그 의미를 조금씩 알아야

우리가 다음에 텍스트를 읽을 때 아, 이건 이런 뜻이구나라며 쉽게 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색깔의 상징과 숫자의 상징의 이 두 가지

축을 가지고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먼저 요한이 어떠한 상징들을 사용했는가? 요한에 의해서 어떤 것은

던져 놔 놓고 알아 맞춰 보세요라며 설명도 없이 던져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던져 놔 놓고 자상하게도 설명해 주는 게 있습니다. 요한이 사용한

상징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먼저 첫 번째 요한이 스스로 설명해 주는

상징들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상징들

   1) 요한에 의해 풀이된 상징들

 

1장 20절에 보면 일곱 별하고 일곱 등잔대가 나옵니다.

요한에 의해 풀이된 상징들(1장 20절)

일곱 별과 일곱 황금 잔대(일곱 교회의 현실)

 

일곱 별하고 일곱 등잔대가 뭘까요?

요거는 우리가 머리속에  뭘까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요한 묵시록 저자가 바로 뒷 구절에 설명해 줍니다.일곱 별은 일곱 교회

천사. 등잔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라고 말 합니다.

 

그러면 일곱 별이 뭘까? 황금 등잔대는 뭘까? 라고 고민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그죠? 예전에 요한 묵시록하면서 일곱 별이 뭘까요?

황금 등잔대가 뭘까요? 그러면 그게 뭘까요. 가르쳐 줘야 알죠.

이러시던대. 성경을 읽어 보시면 아십니다.

 

성경을 안 읽어 보셔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을 해석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으시다

보면 이제벨이라는 여인도 나타나고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요.

이제벨이 누구냐? 가르쳐 주세요. 그러십니다. 구약을 읽으세요. 구약을.

구약에 이제벨이 어떤 여인이예요? 이것도 우리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한번 볼 것입니다.

 

예, 그런 식으로 성경을 꼼꼼히 읽는다면 많은 수가, 반 이상의 상징들의

의미를 내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징들이 너무 많아서 그거 어려워서

못 보겠어요라고 말하는 거와 어떻게 보면 같을 수도 있어요. 성경을 잘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1장 8절에 보면 소돔과 이집트가 나옵니다. 이것도 상징적인 어떤

장소의 개념이죠. 그런데 이게 우리 새로나온 성경번역에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리스 말에 보면

영적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라는 표현으로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예, 상징적으로 소돔과 이집트입니다. 소돔과 이집트가 뭘까?

실제 장소 소돔을 이야기하고 이집트를 이야기할까?라고 머리 속에

떠올리지마는 바로 뒤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요한에 의해 풀이된 상징들(11장 8절): 영적으로(상징적으로) 소돔,

이집트: 예루살렘의 상징적 표현(그곳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소돔과 이집트예요. 이 도시가 빚대어서 말하고자

하는 게 있단 말이죠. 여기서 우리 요한 묵시록 저자는 거기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곳이다. 이것이 무슨 표현입니까? 여기가 어디

입니까? 소돔과 이집트는.

 

곧, 예수님 어디서 돌아가셨어요?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어요? 맞습니까?

예, 예루살렘을 의미하겠죠. 그죠? 예 골고타. 갈바리아. 모르셨어요?

아시잖아요. 예루살렘이라는 상징적 표현.

 

13장 8절에 드디어 우리가 제일 궁금해 하는 것. 요한 묵시록 이야기만

나오면 등장하는 것, 666. 이것은 요한 묵시록 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알아 맞춰 보세요라고 퀴즈를 냅니다.

 

※ 요한에 의해 풀이된 상징들(13장 8절)

어떤 사람에 대한 식별(666)

 

666이라는 숫자는 뭐 어떻게 완전히 모르는 숫자를 제시한 것도 아니구요.

666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하면서 다 아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숫자

입니다. 한 번 알아 맞춰 보십시오라고 요한 묵시록은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알 수 있다는 겁니다. 666을.

 

예, 그 당시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이 요한 묵시록을 읽는, 선포된 말씀을

듣는 독자들이 666이라는 숫자를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바코드가

찍혀 있는 우리를 아는 것은 아니겠죠? 그죠? 그러니까 그런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 숫자를 들으면, '아, 이사람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탁 떠오를 꺼예요.

우리가 나중에 이 사람이 누군지 한 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17장 5절에 보면 대바빌론이 나옵니다. 바빌론은 누군가?

 

※ 요한에 의해 풀이된 상징들(17장 5절): 대바빌론(로마)

 

기원전 587년에 유배간 그 바빌론을 가리키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빌론이라고 말을 해 놓고 쭈욱 설명이 나오는 게 뭐냐하면

당시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만한 묘사들이 펼쳐지는데 뭐냐?

로마의 경제적인 상황들을 쭈욱 이야기 합니다. 걔 대바빌론이다.

 

예컨대 뭐 서울이 대바빌론은 아닙니다마는 서울이 대바빌론이라 말해

놓고 서울에서 뭐 동대문 이야기하고, 남대문 이야기하고, 시장 이야기

하고 실컷 이야기 해 놓고 대바빌론이라 하면 우리가 알 수 있죠?

아, 서울을 이야기하는구나를.

 

예, 요한 묵시록 저자 역시 대바빌론이라고 해 놓고 로마의 상황을 설명해

나가기 때문에 로마구나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17장 9절에

일곱 개의 동산을 이야기합니다.

 

※ 요한에 의해 풀이된 상징들(17장 9절): 7개의 동산(로마)

 

로마가 일곱 개의 작은 동산이 있습니다.

로마 성지순례 가시면 보시게 될껀대 그동산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

7개의 동산이 있는 그 장소하면 로마. 이 상징들은 너무나 요한 묵시록을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아주 쉽게 와 닿는 상징들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요한 묵시록이 지금 우리에게 지금 우리의 지식과 문화적인

배경 안에서는 상징들이 상당히 어려울 수가 있고 모를 수가 있는데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쉬운 것이었다 정도를 우리가 알 수 있겠구요.

또 동시에 우리 모두가 이런 문화를 접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상징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상징들

  2) 보편적 의미를 지닌 상징

 

예컨대 6장 4절에 칼이 등장을 합니다.

칼, 그러면 칼로 뭐 요리하겠습니까? 기사가 칼을 들고 나타났는데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걸로 밥하겠습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칼은 전쟁이죠. 그 칼이 사용하는 용도야 다양하겠지만 기사가 칼을

쓴다고 그러면 아, 전쟁을 하는구나, 죽일려고 하는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보편적으로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큰 칼이 뭘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죠?

 

※ 보편적 의미를 지닌 상징(6장 4절)

큰 칼 : 전쟁 혹은 기사

 

지금 요한 묵시록의 상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7장 1절

그리고 9장 14절, 15절에 땅의 네 귀퉁이, 네 모퉁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리니까 바로 세상 전체, 땅 이렇게 대답하셨죠.

 

※ 보편적 의미를 지닌 상징(7장, 9장 14-15절)

땅의 네 귀퉁이(사방천지, 동서남북) : 세상

 

우리가 이거는 문화적인 어떤 배경 지식, 고유한 문화적인 독특한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징들이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유다 백성, 유다 전통 안에서 등장하는 상징들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상징들

   3) 구약에서 가져온 상징들

 

예컨대 사람의 아들, 생명의 나무, 숨겨진 만나, 네 생물, 어린양,

두 증인, 용, 짐승, 이러한 표현들은 다 구약의 전통에서 왔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컨대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을

우리가 알아야 메시아의 전통을 알아야 아, 그것이 천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는 존재구나. 사람의 아들, 인자.

 

우리가 처음에 신앙을 가지지 않았을 때 사람의 아들 이라고 탁 들었을

때 그것이 뭔대라고 모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은 유다

전통 안에 등장하는 메시아를 표현하는 그런 용어구나라고 알 수 있겠고. 

 

※ 구약에서 가져온 상징들

   1) 사람의 아들(다니엘서 7장)

 

생명의 나무 그러면 떠오르는 것이 있으십니까?

예, 창세기의 에덴동산이죠. 생명의 나무하면 따 먹지마라 하셨는데

괜히 따 먹어가지고 우리가 원죄를 뒤집어 쓰게 되는. 물론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우리가 뒤집어 쓴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한 어떤 생명의 나무도 어떤 창세기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 구약에서 가져온 상징들

생명의 나무(창세기)

 

숨겨진 만나는 탈출기를, 사막의 어떤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이야기.

숨겨진 만나(탈출기)

 

네 생물은 에제키엘서에 등장을 합니다.

 

※ 구약에서 가져온 상징들

네 생물(에제키엘), 어린양(탈출기, 이사야서), 두 증인(모세와 엘이야),

용, 짐승.

 

어린양은 탈출기부터 이사야서에. 고난 받는 야훼의 종.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침묵했다라는 이런 어린 양의 전통, 탈출기에는 그

희생되는 어린양, 파스카를 위해서.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 용.

우리에게 용은 아주 신비하고 경배해야 될 동양적인 사고는 그러하나

서양적인 사고에서 용은 어떤 악마의 상징입니다.

 

요한 묵시록 12장에도 용이 미카엘 천사와 싸우는 존재로 등장을 합니다.

그 다음에 짐승, 이 짐승이라는 것은 요한 묵시록 13장에 어떤 로마를

빚대서 표현하는 나쁜 어떤 존재로 그렇게 묘사를 하죠.

 

이러한 어떤 상징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잘 아는 것.

요한 묵시록이 스스로 설명해 주는 것. 보편적인 상징들.

구약의 전통에서 오는 상징들,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고 그런 상징들입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자 이러한 상징들을 어떻게

배치시키고 특별히 색깔이나 숫자를 통해서 이것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해 내고 있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살펴봐야 되는데 요것은 다음 시간에 요한 묵시록이 이제 구체적으로

고유하고 이 상징들을 엮어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묵시문학, 특별히 요한 묵시록 안에서

등장하는 많은 상징들을 통해서 정말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상징들이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 요게 요걸 의미한다더라. 아,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많이 안다.

그것이 아니라 이 상징들을 왜 간접적으로 왜 표현했던가?

더 풍부한 우리의 사색과 묵상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그러한 상징들이

될 수 있다는 점. 그것을 기억하시고 다음 시간에 기쁜 모습으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요한 묵시록 안에 나타나는 숫자와 색의 상징들이

계속 됩니다.

 

출처 : 여정성경공부
글쓴이 : 하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