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7강 묵시문학의 세계 2|박병규 신부/요한묵시록

윤 베드로 2016. 8. 28. 14:08

 

 

제 7 강 묵시 문학의 세계 2

 

+ 찬미 예수님! 예,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참 무거운 주제를 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이라는 것.

묵시 문학이 뭘까?

우리 지난 시간에 묵시 문학이 어디서 어떻게 태동이 되었는가?

어떤 상황에서 묵시 문학이 등장을 하게 되었는가를 배웠습니다.

 

크게 두 어떤 근원이 있었던 게 예언서부터 그리고 지혜 문학에서부터.

다 이시대를 어떻게 하느님이 뜻에 따라 살아 갈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

고민, 그리고 사색들이 이렇게 책으로 이렇게 글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묵시 문학이다라고 우리가 그렇게 봤습니다.

 

예, 오늘은 그 묵시 문학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지난 시간에 잠시 들어갔다가 시간 관계상 다 보지 못한 것이 바로

묵시 문학적 작품들이 어떤 것이 있는가를 우리가 지금부터 봐야

되겠는데요. 크게 기원전 몇 세기부터 기원후 몇 세기까지?

예 2세기부터 2세기까지. 외우기 쉽잖아요. 2세기부터 2세기까지.

그죠? 그래서 400년에 걸쳐서 등장한 것이 묵시 문학적 작품들이다.

 

※ 묵시 문학적 작품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저술

 

그래서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한 작품들이 어떤 것이 있었느냐?

지난 시간에 봤던 희년서, 에녹1서, 솔로몬의 시편, 꿈란 공동체의

작품들, 다마스의 문헌, 전쟁의 규칙, 열두 부족장의 유언 등이

있었습니다.

 

※ 기원전 2세기 유다 묵시록들

희년서, 에녹1서, 솔로몬의 시편, 꿈란 공동체의 작품

 

이것이 기원전에 형성 되었던 작품들인데 희년서 같은 경우에는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재각색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계시 받았던 그 내용도 거기 첨가되었고, 동시에 히브리

족장들의 성조들의 어떤 탁월한 그분들의 어떤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어떤 탁월성이 희년서에 등장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희년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어떤 죄악성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

 

※ 희년서(모세의 묵시록, 아담의 묵시록)

창세 1ㅡ12장의 재해석(소창세기), 모세의 시나이산에서 받는 계시의

이야기, 히브리 족장들의 탁월성 희년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를 다룸

 

희년이 무었입니까?

희년이라는 것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서로 나누고 빚도 탕감해 주고,

이스라엘 민족의 아주 좋은 그런 전통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제대로

안 지켜졌답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으로 살겠다는 정신이 있었는 것만

으로도 아주 좋은 전통인데.

 

이 희년서,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희년을 지켜내지 않는 것에

대한 죄악성 등을 희년서에 다루면서 자, 우리가 묵시 문학 특징

보셨지요? 천상 것은 좀 좋은 것. 지상 것은 약간 조금 나쁜 것.

지상의 이스라엘 백성이 제대로 못 산다는 것죠.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회개하는데 이 천상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

히브리 족장들이 성조들이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천상의 어떤 좋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루면서 희년서의 내용이 그렇게 또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녹1서는 이 안에 주간 묵시록이. 동물들의 이야기, 동물 묵시록,

이솝 우화 같은 그런 어떤 내용들이라서 동물 묵시록이라고 하기도 하고

주간 묵시록이라고도 에녹1서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에녹1서는

총 다섯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녹이라는 인물이 지상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그 장면, 우리는 구약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죠?

 

※ 에녹1서(주간 묵시록, 동물 묵시록): 5권의 책으로 에녹(지상에서

하늘로 직접 승천, 지상의 악에 대한 내용)의 천상여행.

 

그장면을 중심으로 해서 에녹이라는 인물의 어떤 천상에서의 그런 어떤

모습들을 창세기에 있는 내용들을 더 연결해서 에녹이라는 인물이

천상에서 어떻게 막 하고 있다라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천상에서 그렇게 천상 여행이 있는데 지상은 어떻겠어요.

다시, 묵시 문학적인 작품의 특징이 지상은, 나쁜 것이다.

지상의 악들이 이런 것들이 있다. 지상의 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동시에 여기서 에녹1서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등장을

합니다.

 

※ 에녹1서(주산 묵시록, 동물 묵시록): 천상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아들(37-71장)' 등장 의인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누구?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유다 전통

안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은, 메시아로서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사람의 아들이 구체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구름' 그죠?

 

마르코 복음 13장에 바로 연결을 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연결하는 것은 이렇게 구약에서, 묵시 문학에서 등장했던 사람의 아들,

곧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다라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죠.

 

예컨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을때,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싫어하겠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다 전통 안에서 계속 기다려져 온 메시아이시다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다.

 

예,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자, 이 우리 신앙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 다음에 솔로몬의 시편, 이 시편은 시로 이렇게

하면서 이것도 천상에서 오는 메시아의 어떤 도래에 대해서 많은

시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솔로몬의 시편(메시아의 도래)

12부족장의 유언

 

그 다음에 12부족장의 유언. 야곱의 아들로부터 있는 그 열두 부족장의

유언. 이것이 무엇이냐? 어떻게 어떻게 살아요? 현실은 어떻게?

안좋고 나쁘고 잘못 됐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어떻게?

천상의 뜻에 따라서. 그런 어떤 내용들이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겠고요.

 

자, 마지막으로 기원전 2세기의 꿈란 공동체의 작품에 다마스의 문헌,

공동체의 규칙, 전쟁의 규칙이라는 이런 꿈란 문헌들 안의 내용들이

아주 묵시 문학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 꿈란 공동체의 작품: 다마스의 문헌, 공동체의 규칙, 전쟁의 규칙

(기본적으로 현실 도피적, 메시아 시대를 준비)

 

그런 규칙들이 이게 뭐냐? 공동체의 규칙이든, 전쟁의 규칙이든 그 책

안에 들어간 내용이 뭐냐하면?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면서 이 현실과는

약간 좀 거리감이 있는, 이 지상 생활과는 거리감이 있는.

그래서 천상의 삶을, 메시아 시대에 도래할 그 삶을 미리 이렇게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들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내용이 약간 조금 멀어지죠. 그죠?

 

예, 사실 꿈란 공동체 같은 경우에 우리가 한번 제대로 봐야 되는

것이 예, 우리 대구 교구에 송창현 신부님이라고 우리 꿈란 문헌에

대해서 전공하고 오신 신부님이 계셔요. 그분이 더 전공자시니까

더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그냥 한 번 더 이렇게 크게 한 번 꿈란이

어떤 공동체인가를 한 번 바라보자면,

 

이것이 참 묵시 문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구체적인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공동체이기 때문에 한 번 살펼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 꿈란은 사해, 이스라엘에 보면 이렇게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요르단 강이 흘러서 사해가 있는데 사해 하면 떠오르는 것이?

머드팩이 떠오릅니까? 예, 대단하십니다. 머드팩이 떠오르시는데 ^*^~

 

저도 사해에 성지 순례를 한 번 갔었는데 가니까 저는 제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게 꿈란 공동체였는데 거기 가니까 우리 신자분들 하고 같이

갔습니다. 가니까 신자분들이 머드팩과 물에 뜨는 거. 정말 뜰까?

오, 정말 떠요. 신기해 죽겠어요. 물에 뜨면서 저도 꿈란은 잊어버리고

이제 물에 뜨는... 이렇게 ^*^~ 이쪽으로 많이 관심이 많았는데 ...

 

예, 그런데 거기 가면 꿈란 공동체를 이렇게 보게 되는.

아, 너무 이 가슴이 떨렸어요. 왜냐하면 거기서 세상살이와는 조금

떨어져서 우리 식으로 표현 하자면 수도 생활을, 메시아를 기다리고,

정의의 스승이라는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매일 그 뭡니까?

 

이렇게 자기 몸을 깨끗이 하는. 정결례를 하고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성경 필사하며 그러는 삶의 현장에 가서 제가 보니까

아, 너무 이렇게 꿈란 공동체에 대해서 공부도 잘 하지도 안 했으면서

괜히 그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뭉클 했는데. 우리 자매님들은,

신자분들은 어디에 가셨나? 고 옆에 화장품 가게가 있어요. ^*^ ~~

 

예, 그 사해 소금으로 만들었다는 뭐 피부에 좋다라는 거기에 가서

왁자지껄하며 이거를 살까, 말까요? 막 이러시더구요. ^*^ ~~

예, 그런데 꿈란 공동체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서 당시의 유다이즘

안에 크게 4가지 종파가 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크게 뭐가 있느냐

하면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가 꿈란 공동체이고, 그 다음에

열혈당원인 젤롯당인 어떤 무력 항쟁까지 불사하는 그런 어떤 열혈당원.

 

※ 유다이즘 종파

바르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꿈란 공동체),열혈당

 

그런데 에세네파와 관련된 어떤 꿈란 공동체 여기서 나름의 어떤 소위

도를 닦으면서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면서 거기에 준비하는, 그래서

그날이 오면 뭐 이런식의 그 마지막 때가 어떤 그런 내용들이 꿈란

문헌에 많이 들어가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봤던 요것들이 보면 묵시 문학적인 작품의 특징들.

천상과 지상의 어떤 나뉘어지고 그 나뉘어진 것 가운데에서 천상의

어떤 그런 뜻에 따라 지상이 조금 회개하고 바뀌어지기를 바라는 내용

들이 이 책에 묵시 문학적인 적품들에 들어가 있다.

 

기원후 2세기까지의 어떤 기원후에 펼쳐지는 작품들이 뭐가 있냐하면,

에즈라 4서, 바룩 2서, 바룩3서, 모세의 승천, 그리고 에녹 2서 아브

라함의 증언, 아담과 하와의 생애 뭐 이런 책들이 있습니다.

 

※ 2세기 유다 묵시록들: 에즈라4서, 아브라함의 묵시록, 바룩2서,

바룩3서, 모세의 승천, 에녹2서, 아브라함의 증언, 아담과 하와의 생애.

 

이 제목 그냥 한 번 들어 보세요. 저도 못 외워요. 한 번 들어보고

아, 이런 책들이 있구나. 그런데 이것은 여기의 내용은 또 뭘까?

기원후 2세기까지의 내용은 또 뭘까? 에즈라 4서 같은 경우에는 언제

쓰여지냐 하면 거의 요한 묵시록 시대와 조금 앞에. 그 근처.

 

이렇게 쓰여지는데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우리 배웠던 요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배우셨습니다. 그죠? 예, 우리 머리 속에 안

담아 놓으셨어도 돼요. 우리 시청자 분들은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요한 묵시록 시대적 배경 중에 우리가 66년에서 70년까지 있었던

이스라엘에 있었던 일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유다 1차 항쟁입니다. 로마에 거슬러서 독립운동이죠. 그죠?

 

※ 유다 1차 항쟁(서기 66-70년)

로마에 대항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전쟁

 

독립운동을 하다가 폭삭 로마에게 망해 버립니다. 다 절단나죠.

다 타고 엄청나게 어려운 시기가 닥쳤는데 에즈라 4서는 그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묵시 문학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 에즈라 4서

예루살렘의 멸망이후 의인의 고통문제.

 

의인들은 현실에서 고통 받는다. 여기에서도 보면, 현실은 어렵고 힘든

데라는 거죠. 그러니까 의인이 나중에는 어떻게? 하늘로부터 구원받고

이렇게 좋은 모습으로 바껴나간다라는 또 지상과 천상의 약간 이 원론적인

이분법적인 그런 느낌을 볼 수 있구요.

 

예, 아브라함의 묵시록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가. 아브라함에게 "나는 앞으로 심판을 이렇게 할 것이다.

저렇게 할 것이다" 라는 심판의 내용이 전해집니다.

 

※ 아브라함의 묵시록: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느님 심판의 계시,

   우상숭배로 인한 아브라함 자손의 범죄

 

그 다음에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이 지상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는 것에 강한 어떤 징벌적인

어떤 내용들, 심판의 내용들, 예, 그런 것들이 아브라함의 묵시록에

등장을 합니다.

 

바룩 2서, 바룩 3서. 이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멸망후에 바룩 2서 같은

경우에는 천상 예루살렘의 도래. 이 지상은 이제 엉망됐고 힘드니까

천상에서 뭐가 내려와서 천상 예루살렘. 이것은 요한 묵시록에 있지요?

 

※ 바룩 2서 : 예루살렘 파괴와 천상 예루살렘의 도래

 

우리 22장에 가보면 천상 예루살렘이. 요한 묵시록을 자꾸 보다보면요

다 이렇게 다른 작품들과 다 연결 돼 있어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물론 한 분은 아니십니다마는 요한 학파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아마 요즘 세상으로 보면 논문 쓰는데 짜집기를 정말 잘했어요.

이쪽 저쪽 소스를 뽑아다가 막 이렇게 참 잘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다보면. 예,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이 바룩 2서에 나타나는 천상

예루살렘이 요한 묵시록에도 등장을 하고, 바룩 3서에도 보면 이 비탄

빠진 바룩을 천상으로 이렇게 인도하는 그런 천사의 모습, 이런 것들.

이것도 지상의 비탄, 슬픔. 천상에서 기쁨, 영광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 바룩 3서 : 비탄에 빠진 바룩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천사.

 

예, 이 어떤 유다. 지금까지는 유다 묵시 문학들, 유다이즘 안에서

묵시 문학들인데 그리스도교 역시 요한 묵시록 말고 다른 묵시록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베드로의 묵시록, 베드로가 묵시록을... 베드로의

묵시록. 그 복음서에 있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베드로의 묵시록을

통해서 천상에서 어떻게 이렇게 펼쳐지는 또 이야기들이 베드로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고요. 이사야의 승천, 시빌의 신탁이라는 책들이 그리

스도교적인 묵시록들입니다.

 

※ 2세기 그리스도교의 묵시록들

베드로의 묵시록, 이사야의 승천, 시빌의 신탁(메시아 시대의 도래)

 

그 다음에 우리 영지주의라고 들어 보셨지요?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도 이원론입니다. 그죠? 선과악, 빛과 어둠, 우리 요한 복음에서 많이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특히 이집트 지역에 니그함마디라는 그곳에

영지주의적인 묵시록들이 있는데 아담의 묵시록, 야곱의 묵시록,

바오로의 묵시록 뭐 이런 것들이 우리가 또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여기도 보면 천상과 지상 이야기.

 

※ 이집트(니그함마디)의 영지주의적 묵시록을 아담의 묵시록,

야곱의 묵시록, 1.2 바오로의 묵시록, 베드로의 묵시록

 

구체적으로 내용을 하나하나다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우리 머리속에

두셔야 될 내용이 천상은 좋은 곳, 지상은 나쁜 곳. 지상은 악이 가득한

곳. 악이 가득하니까 회개를 시키던지 아니면 천상에서 뭔가 확 내려와

가지고 지상을 뭐 이렇게 하던지. 예, 천상의 뜻을 따르면 구원받을

것이고 안 따르면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묵시 문학 작품들 전반적으로 계속 이렇게 흐르고 있다.

그 정도만 머리속에 딱 넣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여러 권의 묵시

문학 작품들을 우리가 봤는데 여기에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제목들이 다 다양하죠?

 

※ 묵시적 작품들의 특징

1) 다양한 제목의 사용

 

뭐, 묵시록 이렇게 통일되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제목들이 있습니다.

이 다양한 제목의 등장이 뭐냐하면 이것이 작정해서 아, 우리 묵시 문학

작품 하나 쓰자해서 작가들이 다 모여 가지고 동호회 만들어 가지고

요런 형식으로 쓰자라고 해서 쓴 것이 아니라 쓰다보니 그러한 사조

영향하에서 그러한 글들이 등장을 했다.

 

후대에 우리가 봤을 때 아, 이게 묵시적인 특징들이 이렇게 있구나.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묵시록들이구나라고 우리가 평가를 한 것이지

당시의 사람들이 쓰면서 요거는 문학적 장르가 묵시적인 것이다.

요렇게 요렇게 해서 구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책들을 이렇게 우리가 한 번 모아서 바라 본 것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이 작품들의 내용을 보면 아까 제가 구조를 말씀 드렸습니다.

천상, 지상 뭐 이렇게 했잖습니까? 인물들만 살짝 살짝 뭐 바룩이든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살짝살짝 바뀌는 것이지 실제 그 구조 그 내용은

거진다 비슷비슷하다. 서로 베끼고 베꼈다라고 뭐 부정적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것이죠.

 

※ 묵시적 작품들의 특징

2) 작품들의 복제와 중복

 

그래서 그 어떤 내용을 서로가 복제를 하고 재사용을 하고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다시피 요한 묵시록 역시 계속해서 내용을 구약의 내용 이런

정경외에 많은 묵시 문학 작품들에게서 가지고 왔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 묵시 문학과 그리스도교 묵시 문학의

연결선입니다.

 

※ 묵시적 작품들의 특징

3) 유다 묵시 문학적과 그리스도교 묵시 문학의 전통융합

 

아까 그리스도교적인 영향 그러한 묵시록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죠?

베드로의 묵시록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죠? 베드로의 묵시록도 그렇고

바오로의 묵시록도 그렇고. 예, 이러한 것들은 유다 묵시 문학과 연결

고리가 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공부할 때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조금 염두에

두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그 어떤 글들의 유다 문학적인 어떤 유다의

어떤 묵시 문학적인 전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했는가? 아니면

가지고 사용하면서 이걸 배척하려고 했던가?

 

여기에 대해서 조금 많이 이렇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요한 묵시록 안에 적혀져 있는 많은 내용들이

분명히 유다 묵시 문학 안에 등장을 했던 내용이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관점으로 재해석을 했는가? 그래서 유다 묵시

문학과 그리스도교 묵시 문학은 같이 같은 입장에서 봐야 된다.

 

예, 우리가 사실 이런 분들도 가끔씩 계셔요. 구약을 읽을 필요 없다.

왜 우리가 유다교 경전을 왜 읽어야 되느냐? 신약만, 복음서만, 예수님

만... 그 말의 일정부분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유다인, 유다 문화 안에서 그 전통 안에서 커오셨고, 예수님 말씀이

여러분 미드라쉬라는 말 아시죠? 그죠?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신 모든 대부분 가르침들이 유다 전통 안에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의 어떤 경전인 모세 오경부터 해서 이런

구약어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이 살았던 시절의 그 시대의 많은 어떤

유다 전통들이 우리가 배우지 않고 읽지 않고서 예수님을 이해 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구약도 잘 읽으셔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유다 묵시 문학과

그리스도교 묵시 문학 전통이 또 묵시 문학 작품 안에 서로 융합된다

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는 뭐 그냥 워밍업입니다.

 

아, 묵시록들이, 묵시 작품들이 이런 것들이 있구나라고 이 정도만

머리에 이렇게 두시고 지금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그런 묵시 문학

작품들의 특징을  한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이 특징은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 보면서 요한 묵시록과의 차이를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과연 이러한 묵시 문학과 일치하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모습이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자, 묵시 문학 작품들의 첫 번째 특징. 삶이 어려울 때,

대부분 위기가 왔을 때. 이 작품들이 등장을 했다.

 

※ 묵시 문학 작품들의 특징

1) 역사적 상황 : 위기와 흥분의 시기에 등장

 

자, 아까 기원전 2세기, 기원후 2세기라고 했습니다. 그쵸?

예, 묵시 문학이 본격적으로 팍팍팍 등장했는 기원전의 작품들을 보면

어떠한 시기가 있었는가? 어떤 시기겠어요? 기원전 2세기에 무슨일이

있었어요?

 

예, 모르셔도 되요. 지금 제가 말씀 드릴께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혹시 안티오쿠스 에피파누스라고 이름 들어 보셨습니까? 시리아의

왕이죠? 그죠? 그리스 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두 왕국으로

나뉘어 버립니다. 이집트 중심으로, 그리고 시리아 중심으로. 그죠?

 

시리아 중심으로 나뉜 거기 왕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누스 이 왕이 어떻게

하느냐? 우리 제2성전이 뭡니까? 유배 이후에 새롭게 이렇게 지으려고

했던 그 성전, 거기다가 막 그리스 문화를 막, 죄송합니다.

 

이 표현을 해서... 그리스 문화를 막 떡칠을 합니다. 그죠?

막 장식을 그렇게 하고 동시에 그리스 종교적인 것까지 강요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누스 기원전 178-164년 제2성전에

그리스 문화를 강요.

 

기원전 2세기에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자, 우리 식으로 바꾸면,

일제시대 때 우리도 조상신도 있고 다 믿고 있는데 갑자기 신사 참배를

강요를 하거나 황제 숭배를. 이와 똑같은 상황이란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그걸 강요 했을때 기분 나빠요? 좋아요?

예, 저는 일제 시대 때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것은 그 문화를 아주 그냥 거부하고 무시하는 거죠? 그죠?

예, 열받지요? 열받으니까 등장하는 인물이?

예, 그 가문이 우리 잘 압니다. 마카베오 상,하권에 등장하죠? 그죠?

들고 일어나지 않습니까?

 

※ 마카베오의 혁명(기원전 166-160년)

 

한 100년간 독립국가. 뭐 온전치는 않았지마는 그런 독립국가를 그렇게

유지를 하게 됩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것. 다니엘서에 왜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막 이렇게 등장하는 그런 안 좋다. 현실이 안 좋다 하고

등장하는 그러한 많은 것들이 뭐냐하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누스가,

그 왕이 억압했던 그 시절을 그렇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묵시 문학은 기원전 2세기부터 등장하는 묵시 문학의 이 현실의

자리가 어렵고 힘들고 악이다라는 것은 대부분 안티오쿠스 에피파누스

그 왕의 그 어떤 어려움. 그리고 그 항쟁하고 들고 일어나는 마카베오

상권 1장 64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 1마카 1,64 :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이 진노, 크나큰 진노는 뭐 종교적인 억압, 문화적인 말살 이런 것들에

대한,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는 것들에 대한 그것을 큰 진노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 27절에 보면요 이런 말이 있습

니다. 성전 날개는 황페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세워져

 

※ 다니 9,27 : 성전 날개에는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세워져

황폐하게 만드는 그자에게 이미 결정된 멸망이 쏟아질 때까지 서 있으리라.

 

이것이 뭡니까? 그리스 신들의 어떤 상이나 어떤 것들을 막 갖다가 놓는

거예요. 그죠? 예,  혐오스러운 것이 세워져 황폐하게 만드는 그자에게

이미 결정된 멸망이 쏟아질 때까지 서 있으리라.

 

예, 하여튼 세상은 힘든 거예요. 예, 그렇게 표현하고 있구요.

희년서에 보면 모든 이가 악을 행한다. 부패와 타락이 가득하다라고

또 현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 희년서 XXII 17-18

모든이가 악을 행한다. 부패와 타락이 가득하다.

 

아까 말씀 드렸던 다마스의 문헌 이 꿈란 문헌에 보면

※ 다마스의 문헌: 길에서 벗어나 이들, 반란을 일으키는 암송아지,

이스라엘이 반란을 일으킨다...계약의 저주...

 

길에서 벗어난 이들, 반란을 일으키는 암송아지, 왜 암송아지를 반란을

일으키는 그 어떤 동물로 사용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다음 이스라엘이 반란을 일으킨다. 계약에 대해서 계약의 저주가 이제

펼쳐질 것이다. 완전 다 뭔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그래서 묵시 문학

이거를 자꾸 쳐다보고 있으면요 세상이 참 다, 세상 꼬라지가 다 힘들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자, 바룩 2서에도 보면

 

※ 바룩 2서,XI, 2 : 끝없는 고통

 

끝없는 고통, 이 현실에 대한 어떤 어려움 이런 것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기원전이었다면 기원후 2세기의

어떤 등장하는 묵시 문학 작품들의 어려운 시기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66년부터 70년까지 있었던 유다 1차 항쟁. 그죠?

 

유다 1차 항쟁 때문에 어려운 시기. 그래서 끝없는 고통이 계속 된다라는

것입니다. 또 특별히 기원전 63년의 그 폼페이우스 장군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점령해서 로마의 완전히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도 와서 예루살렘 사람들을 십자가 형에 못박아 많이 죽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세상 아이구 살기 좋겠다. 세상 정말 즐겁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 것인가?

 

말 묵시 문학 작품들이 이 세상을 악간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그렇게 어려웠으니까. 그런 것에서 희망과 용기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이게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희망과 용기를 찿기 위해서 저 천상인 보이지 않는 곳의 메시아에

대해서 기다리는 그 간절한 기다림의 시기에 예수님 한 번 보십시오.

딱 중간에 기원전 2세기, 기원후 2세기인 딱 중간에 예수님께서 딱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시절이 평탄한 시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신자분들과 복음서를 읽을 때 보면, 어떤 것이 있느냐하면,

예수님이 마치 우리 평화방송에도 나옵니다. 그죠?

 

예수님 영화 같은 것도 나오고 다른 어떤 이런 다큐멘타리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편안한 평화스러운 곳에 초원에 탁 앉으셔 가지고 이렇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렇게 분위기 있게 가르치십니다.

그죠? 그러나 실상 예수님께서 오신 그 시절은 너무나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힘들었기 때문에 묵시 문학적인 사조가 팽배했었던 그 시기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예수님 시절에 그것을 기룩한 역사서 이런 것들을 보면요.

성서 외적인 것을 보면, 요세푸스라는 유다 학자가 기록한 것을 보면

갈릴래아 지역은 강도들의 소굴이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방천지 자꾸

죽고 반란 일어나고 이런 피흘림이 있는 곳에서 편안하게 초원에 앉아서

가르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런 시절에 예수님께서 행복을 주러 오셨지요. 복음을 주러 오셨지요.

누구에게?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소의 그러한 권력이나 아니면 사두가이

파를 보듯이 로마에 힘 입어서 잘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에게,

백성을 배반한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정말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예수님의 비유 전체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비유를 가만히 보면

서민적인 비유들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대한

기쁜 소식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묵시 문학을 배우면서

시대가 힘들었을 때 묵시 문학 작품들이 막 등장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뭐 할려고?

 

지상은 완전히 나쁘니까 넌 끝났다가 아니라 이 안에 뭔가 하느님의 뜻이

이 안에 뭘까? 한번 전해주기 위해서 희망과 위로를 조금이라도 전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묵시 작품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 유다 묵시 문학들은 어려운 시기에서 고통이다,

힘들다, 어떻하냐, 막 인제 저주다, 큰 환난이다 라고 하는데 요한

묵시록은 예수님을 통해서 약간 다른 관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는 어려웠죠? 우리가 요한 묵시록 시대 역시 다섯 가지로

얘기하면서 다섯 가지 구체적 역사적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요한

묵시록의 어려운 시기를 우리가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첫 번째 뭡니까? 예수님의 돌아 가심, 두 번째 사도들의 순교(베드로,

바오로), 세 번째가 유다 1차 항쟁의 어려운 시기, 네 번째가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이단

취급을 해서 완전히 결별을 하고 유다인들한테 들들 볶이게 되는 거죠.

 

그다음 다섯 번째가 로마의 황제 숭배에 대한 혹은 군사적인 어떤 박해.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어려운 시기에 요한 묵시록이 등장을 한 것이지요.

 

※ 요한 묵시록의 어려운 시기

1) 예수님의 돌아가심

2) 사도 베드로, 바오로의 순교

3) 유다 1차 항쟁의 어려운 시기

4) 유다인들과의 갈등

5) 로마의 황제 숭배 강요와 군사적 의협

 

그러나 유다 묵시 문학처럼 "힘들다, 큰일났다, 이제 희망도 없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하면?

죽음에서 처음으로 태어나신 분, 죽음이들의 맏배로서 살아계신 분,

부활하신 분, 부활하신 분과 함께 희망을 가지고 승리를 같이 나누자.

그런 관점에서 요한 묵시록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관점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함께 희망을 가지고

                       승리를 함께 나누자.

 

물론 세상은 힘들다라고, 세상은 다 부패했다. 세상은 너무나 지금

비참하다. 땅의 삼분의 일은 완전히 없애버리는 그런 표현도 요한

묵시록에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나고 기쁨을, 영광을 누리고 구원을 외칠

있는 사람은 누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 고백하고

인내하면서, 증언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과

더불어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이 삶의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다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특징입니다.

 

요한 묵시록이 유다 묵시 문학과 약간 관점이 다르지요.

이 현실의 이 자리가 곧 구원의 자리이고 여기서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가 인내하고, 정말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중에 보게 될 것인데 구체적으로 텍스트에 들어갈 때 7장에

보면요 셀수 없는 군중이 있는데 그 7장에 셀 수 없는 군중들이  구원을

막 외쳐요. 구원을. 하느님 어좌 앞에서. 어린양 앞에서 구원을 외칩니다.

 

※ 묵시 7,9 :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근데 이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인가? 원로 하나가 요한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요한이 "원로, 당신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고온 사람이다.

 

겪고 왔다기보다 겪고 있는 중의 사람입니다. 현재 분사로 사용됐기

때문에 말마디가. 지금 환난 속에 환난을 겪고 있는데 거기서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 안에서 빱니다. 이게 뭐냐?

 

어린양의 고통 안에 함께 지금 그 환난을 겪고 있는 중이예요.

겪고 있어요. 이 겪고 있는 사람이 구원을 외치는 거예요. 왜?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께 온전한 의지를 하고 신뢰를 그분께

두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믿음

안에서 정말로 용기를 가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위기의 시기에 묵시 문학이 등장을 해서

이 위기를 위기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요한 묵시록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이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보는 그런 관점을 여기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그래서 유다 묵시 문학과는 약간 다른 긍정적인 차원이

분명히 있다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우리 현실의 모습에서 한번 저는 연결해 보고 싶은 게 있는 게

여러분들 서점가에 가시거나 요즘 세상 모든 것을 보면 많은 교육들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죠?

 

그래서 제가 책들을 이렇게 주욱 보면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꾸 나를

뭔가 바꾸는 거예요. 가꾸는 거예요. 어떻게? 어려운 것은 안 볼려고 하는

거예요. 자꾸 책을 보면 긍정적이다. 너는 소중하다. 뭐 너는 대단하다.

뭐 그리고 현실을 자꾸 비판적으로 보지 말고 현실은 좋은 것이다.

 

긍정적 사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요즘 유행하는 끌어 당김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요. 좋은 것을 자꾸 생각하고 내가 심지어 어떤 것은 돈까지

생각해요. 나한테 몇억이 들어온다고 계속 생각하면, 진실되이 생각하면

내 통장에 그 생각하는 금액이 들어온다라는 그런 끌어당김의 법칙을

막 책들마다 대부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해지려고.

 

그런데 요한 묵시록의 관점은 어려운 이것이 어려움을,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인내하고 용기를 가지게끔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 요한 묵시록의 관점 : 어려움(고통)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인내하고

                       용기를 가지게끔 우리를 이끌어 줌.

 

어려움을 무시하고 안 볼려고 하면요. 상처를 안 보고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됩니까? 덮어두면? 더 썩어 갑니다. 상처를 보고 똑바로 내가

정말 아프지마는 맞서야지요? 그럼 강인한 용기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 복음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당신과 함께 세상에 맞서기를 세상 안에서 힘겨움을 극복하기를

바라시는데 힘겨우면 "모르겠다. 모르겠다" 그래서 나를 자꾸만.

제가 몇권을 읽어 봤는데. 읽을 때는 제가 뭔가된 거 같애요. 왜?

 

현실은 안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한테 주어진.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을 정말 힘겨운 상황에서도 더더욱 아, 이 안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 하시고자 하시는지. 내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는 그런 구체적 기회를 한 번 삼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요것이 묵시 문학의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이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구요.

자, 두 번째 특징이 뭐냐하면 계시의 기록입니다.

※ 묵시 문학 작품들의 특징

2) 계시의 기록

 

묵시 문학 작품들은 씁니다. 글로 씁니다. 자, 묵시 문학이 태동하게

배경 중에 예언서를 말씀 드렸습니다. 예언 문학의 특징은 뭐냐하면,

예언자들은 뭡니까? 제가 나비라고. 날아다니는 나비가 아니라 스피커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피커 이게 뭡니까? 말을 해요. 말을.

 

설교를 하죠. 어디에 가가지고 들어라, 어느 사람들아,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 그렇게 살아라. 이런 식으로 말씀의 사람이 바로

예언서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묵시 문학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 글로

쓰는 그것이 등장 합니다.

 

※ 예언 문학 : 말씀

묵시 문학 : 글

 

그리고 이 글로 쓰는, 그래서 기록의 사람들이 바로 묵시 문학을 작성한

사람들입니다. 예언 문학과 묵시 문학의 차이점이 나죠. 말씀이냐? 글이냐?

그래서 보면 에녹 1서를 보면요. 에녹이 쓴 시와 비유들에 대한 글로 많이

썼습니다. 에녹은 자기 시를 아주 좋아 했다. 이런 내용이 나오구요.

에녹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환시가 그에게 드러났는데

글로 이렇게 표현하는 그런 것이 등장을 합니다.

 

※ 에녹 1서 1.2 (시와 비유들로 엮어진 책)

"에녹은 그의 시를 좋아 했다. 에녹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환시가 그에게 드러났다"

 

바룩 3서에도 보면,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숙고한 비밀스런 것들이

바룩에서 전해지는데 바룩이 계시를 받고 이렇게 글로 적어 놓는 것.

 

※ 바룩 3서 1,1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 숙고한 비밀스런 것들에 대한 바룩의 이야기와 계시

 

에즈라 4서에 보면 일곱 개의 장면이 나타나는데 "저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표현이 등장을 합니다. 그분이 그 일곱개의 장면을 다 설명해

주는 그런 글들이 에즈라 4서에 등장합니다.

 

※ 에즈드라 4서

일곱 개의 장면... 천사 우리엘 혹은 지극히 높으신 분에 의해 해설된다.

 

요한 묵시록은 글로 쓰여졌는 것인가?에 대해서 한 번 이 묵시 문학

특징들이 말의 선포가 아니라, 선포하려고 적혀진 글이 아니라 어떻게?

글로 읽혀지기 위해서 쓰여진 그런 특징이 있다면, 요한 묵시록도 그런가?

요한 묵시록도 그렇습니까? 글로 쓰여졌지요. 예, 1장 19절에 보면,

요한에게 네가 지금 본 것을 앞으로 볼 것을 기록하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죠?

 

※ 묵시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기록의 임무가 분명히 요한에게 주어졌습니다. 그죠? 그래서 요한이 글로

보는 것마다 다 씁니다. 우리 그림이 요기 몇군데 있는데 보면 요한이

연필로 들고 막 쓰고 있는 그런 어떤 모습을.

 

 

 

뭔가 신적인 계시, 초월적인 계시 내용들을 알려고 했던 것에 반해서

요한 묵시록 역시 글로 작성하라는 임무가 분명히 요한에게 주어졌지만

동시에 이글은 예언서와 같이 선포되어야 했다.

(예언자들의 말씀과 같이)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한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을 선포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글로 적어요. 유다 묵시 문학은 글로 적어요. 신비한 내용을

기록을 전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요한 묵시록 관점이 이 신비한 어떤 계시된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면서 어떻게? 널리널리 이것을 전해 주면서

요한 묵시록 1장 3절 겉은 경우에는 전해주면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행복하여라" 이 복음이 되어야 되는 거죠. 그죠?

 

그래서 말씀을 우리가 공부를 하고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포해야 할

역활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면 우리 이웃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 공부하면서 "야, 요거는 내가 아는 계시. 요거는 정말로

아, 여기서 좋은 것을 깨달았다." 깨달았으면 선포해야 될 역활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분명히.

 

그런데 요거는 내만. 내가 조금 더 좋은 거 배웠다.

우리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죠?

우리가 바로 저하고 같이 요한 묵시록을 공부를 함께하고 있는데

아, 공부 안 한 사람보다 내가 뭔가 특별하게 뭔가 소중한 거를

배웠다고 이렇게 남에게 기쁨을 전해주기 보다는 "나는 너와 조금

다르다" 라는 것들이 있으면 우리 절대 안된다는 거죠.

 

가끔씩 신자분들을 보면 성경 공부를 하고 나신 분들 가끔씩 간혹 그런

분들이 계셔요. 성경 읽으면 "아, 그거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거 그렇게

읽어서는 안돼." 왜냐하면 이게 이렇기 때문에. 아, 공부해봐, 그건 다

알꺼야라며 아주 이렇게 조금 자신만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이렇게 생각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말씀은 전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널리 읽혀져야 되고, 낭독되어져야 되고, 선포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만큼 어떻게 하면 이것을 더 나눠줄까 고민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닌가? 말씀 앞에서 그런 생각도

조금 해 보게 됩니다.

 

자, 이제 세 번째입니다. 일곱 가지인데 일곱 가지 중에 세 번째 입니다.

예, 뭐 따라 오실만 합니까? 예, 괜찮으셔요? 이거 일곱 개 다 넣으실라

하면 머리가 용량이... 우리가 또 하나 하나 배우셔도 돼요. 아, 이런

것이 있구나. 쉽게 쉽게 편안하게 우리가 좀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꼭 선견자, 환시자가 등장합니다. 유다 묵시 문학들은.

 

※ 묵시 문학 작품들의 특징

3) 선견자(창시자, 중계자)의 등장

 

아까 우리가 살펴 봤던 많은 묵시록들을 이렇게 보면,

모세든, 아담과 하와의 생애든, 또 누가 있었습니까? 베드로든, 바오로든,

열두 부족장들 우리가 볼 수 있는데 그 요한 묵시록에 이 글로 쓴 것은

아, 이런 내용이 있구나 이렇겠구나라고 그렇게 읽고, 아, 이런 내용들이

종말에 펼쳐지는구나를 알라고 신문 보듯이 보라고 적혀진 것이 아니라.

요한 묵시록 1장 3절을 우리가 머리속에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1장 3절에 뭐가 있냐?

 

※ 묵시 1,3 :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낭독하는 이와. 낭독을 하고 있어요. 낭독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낭독을 해요. 그죠?

낭독을 하는 이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마지막에 행복하다라고 했어요?

 

자,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그랬죠? 그때에 제가 이 구절을 말씀

드리면서, 벌써 예전입니다. 말씀 드리면서 이것은 단순히 책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례 집회 때 같이 모여 있을 때 어떻게?

선포되었던 전례서와 같은 내용이 요한 묵시록의 어떤 내용이다.

 

유다 묵시 문학들이 글로 쓰여지면서 글 안에서 뭔가 신적인 계시,

초월적인 계시 내용들을 알려고 했던 것에 반해서 요한 묵시록 역시

글로 작성을 하라는 임무가 분명히 요한에게 주어졌지마는 동시에

이 글은 선포되어야 되요.

 

예언서와 같은, 예언자들의 말씀과 같은 그런 성격으로 요한 묵시록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것도 유다 묵시 문학과 조금 차이가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유다 묵시 문학들이 글로 기록되면서, 글 안에서

 

또 뭐 있습니까? 이름? 바룩, 에녹, 뭐 이런 유명한 사람들 많지요?

이런 사람들이 그 작품 안에서 등장을 하면서 이 사람들이 뭔가 신적

계시와 이 지상의 악의 고통속에 있는 여기에 연결 고리로 중개자로

등장을 하는 그런 게 많이 있습니다.

 

요렇게 등장 하면서 이 사람들이  실재 그 사람들이 경험하고 느꼈던 게

묵시 문학에 적혀져 있는가? 그것이 아닌 것이죠. 가명을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환시자들, 이 선견자들이 실제 사람이 아니라 후대 사람이

그 사람 이름을 차용해서 가지고 와서 거기에다가 이렇게 이 사람이

마치한 것처럼 표현을 했다. 가명을 채택을 합니다.

 

아담, 에녹,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이사야, 바룩, 다 구약 안에서

유명한 인물들이죠. 대단한 인물들. 왜 이사람들 이름을 차용을

했겠습니까? 우리 뭐 예전에, 예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지 않습니까?

아, 나 청와대 누구 누구군대, 그러면서... 왜? 그러면서 약간

사기치시는 분들...^^*~~~

 

왜 그 사람의 이름을, 그런 직함을 도용을 하겠습니까?

너무 부정적인 예를 들었나? 예, 그런데 이건 권위 때문이예요. 권위.

제가 지금 글을 써가지고 예컨대 책을 낸다고 하면 누가 읽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데. 그러나 누구 할까요? 우리 가톨릭 신자분 중에 좀

유명하신 작가분, 공지영씨나 이런 분. 제가 공지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글을... ^^*~~~

 

물론 잘못된 거지마는 그렇게 내면. 아, 공지영씨가 책을 냈구나라며

사람들이 시선을 확 이렇게 막 꽃힐꺼 아닙니까? 책에.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유다 묵시 문학들 대부분이 가명입니다.

가명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 유다 묵시 문학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가명을 사용한 동시에 가명을 사용하면서 이분들이 워낙 유명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분들의 특권적인 어떤 그런 위치를 말해줘야 됩니다.

예, 이 사람은 남들과 다르다. 남들 평범한 사람과 다른 어떤 위치에 있다.

 

그래서 바룩 2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룩에 대해서.

"가라, 그리고 너를 거룩히 하여라" 신적 계시 입니다. 바룩더러 "너를

거룩하게 하여라.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말라." 사람이 아니죠?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와라. 내가 너에게 참된 것들을 알려주고 시간의

질서에 대해서 알려 줄 것이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별 됐다는 느낌이죠? 딴 사람은 안 가르쳐 주는데 너만 일단은 내가

가르쳐 줄테니까 가서 거룩하게 되고 속된 것, 인간들이 먹는 것 먹지

말고 마시지도 말고 인간들의 말을 또한 하지 마라. 예, 그래서 와라.

그래서 거룩하게 되면 내가 무엇을 알려주겠다라고 뭔가 새로운 그런

신적 신비에 대해서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를 해 놓고 있습니다.

 

※ 바룩 II. XX 5-6

가라, 그리고 너를 거룩히 하여라.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말라.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오라.

내가 너에게 참된 것들을 알려주고

시간의 질서에 대해서 알려줄 것이다....

 

예, 여기에 보면, 그래서 유다 묵시 문학들에 보면 이러한 가명 채택했던

이 사람들을 등장시킴으로 해서 권위를 주고, 동시에 권위 안에서 이 사람

들의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요한은 책에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하느님 말씀 때문에, 그 증언 때문에 어디로 유배를 가요? 파트모스 섬.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표현할 때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형제, 종 같은

형제로서 종들 중에 같은 종이예요. 그죠? 그런식으로 묘사를 해요.

자기가 특권적인 위치를 어떻게? 차지를 안 합니다.

 

※ 요한 묵시록의 등장 인물에는 중계자가 없다.

 

다른 묵시 문학들은 신비한 계시를 받는 어떤 중계자의 모습을 하는데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이 요한이라는 인물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예요.

다 똑같이 다른 성도들처럼 똑같이 고통속에 있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처음에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 그리스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줍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끝에 가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나오지 않습니까?

"주 예수여 오소서" 하니까 "그래 내 곧 가겠다."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중계자가 뭐 필요합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특별한 인물도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는데 특별한 인물이

필요 없고 특별한 권위가 필요 없다. 이거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느님 말씀 앞에, 하느님 말씀 앞에서 제가 아무리 뭔가 공부를 해서

여러분에게 전해준다 해서 여러분보다 더 말씀을 잘 안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고요. 또 아무리 높으신 분이 우리 교계 제도가 있으니까

교황님이 우리 각자보다 말씀을 더 잘 다른 사람보다 차별되게 더 잘

받아 들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데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각각 고유하게 평등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요한 묵시록이 그렇습니다. 이 요한이라는 인물이 요한 묵시록을 썼는

이 저자들이 얼마나 얼마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겠습니까?

 

많이 알고, 구약 전통에 대해서 많이 아니까 이 글을 썼고 그것을 전해

줄려고 했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떤 의미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자기의

위치를 높이 올려 놓을만도 한데. 그죠?

 

예, 높이 올려서 다른 사람보다 다르게 어떠한 유다 묵시 문학처럼

이렇게 나는 다르다라는 표현도 할만 한데. 나는 똑같은 너희들과

같은 종이고 똑같은 형제로서 같은 환난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를

낮출 수 있다는 것. 예수님 모습과 되게 닮아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직접 말씀을 듣는다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관점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관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다.

 

그것이 유다 묵시문하과 조금 다른 관점이죠.

자,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이 묵시 문학의 특징들 3가지 입니다.

4가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죠?

 

4가지는 다음 시간에 보고 이 세가지가 뭐였습니까?

처음에 위기의 시대에 묵시 문학들이 사용되었다.

두 번째: 묵시 문학들은 글로 쓰여진 것이다.

세 번째: 선견자, 환시자, 이 중계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위기의 시대를 희망의 시대로 기회의 시대로.

동시에 글로 쓰여졌지마는 선포되어야 될 말씀으로.

리고 선견자 역활, 환시자의 역활 그것이 독특한 차별된 것이 아니라

형제들과 평등함 안에서 요한 묵시록은 스스로를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정리하시고 우리가 다음 시간에 아직 남은 네 가지 묵시 문학의

특징과 요한 묵시록과의 차별성, 다른점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공부

하면서 묵시 문학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8 강 묵시 문학의 세계 3  이어집니다.

 

출처 : 여정성경공부
글쓴이 : 하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