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4강 현재를 위한 예언의 말씀|박병규 신부/요한묵시록

윤 베드로 2016. 8. 28. 14:06

 

 

   제 4 강 현재를 위한 예언의 말씀

 

 

안녕하십니까?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가 이제 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 네 번째 시간은 조금 분위기를 바꿔 볼까 합니다.

무슨 분위기를 바꾸느냐?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 묵시록인데 이제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을

한 번 볼까 합니다. 사실 요한 묵시록 그러면 우리 성경에는 묵시문학,

묵시록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두 권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 입니다.

 

※ 형식상 묵시록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성경

① 다니엘서   ② 요한 묵시록

 

그렇게 형식적으로는 분류를 합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호화 했는가, 표징화 했는가?

제일 중요한 게 어린양이었다 라고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생명'을 머리속에 탁 새겨 넣으라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표징화하는 묵시 문학적인 표현을 우리가

봤지마는 지금 오늘부터는 이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 다시 말해서

왜 요한 묵시록이 예언서 분류로 들어갈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한 번 촛점을 맞춰 볼까 합니다. 

 

사실 학자들 간에는 약간 이견이 많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묵시록이지

예언서냐? 물론 뭐 여러가지 특징들이 있지마는 그냥 묵시문학으로

해야 된다. 아니다. 내용은 여기 완전히 예언서 내용이다. 예언서로

분류해야 된다 라는 어떤 이렇게 서로가 주고 받고 있는 게 있습니다.

 

원래 학자들이 그래요. 그죠?

예, 우리는 학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편한대로 이 사람 

좋은 거 빼고, 이 사람 좋은 거 빼서 우리가 잘 버무려서 우리가

싹 먹으면 됩니다. 그죠?  ^*^

 

예, 그래요. 요한 묵시록이 예언서의 형식을 띠는 것을 우리가 한 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읽었던 구절인데. 1장 3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묵시 1, 3 :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거는 우리가 첫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는데요. 구절을 통해서.

아, 요한 묵시록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처럼 이렇게 무슨 집회가 있다

라고 했을 때, 그 집회하는 공동체 안에서 선포되던 전례용 어떤

성경 말씀이다 라고 제가 간단하게 말씀 드린적이 있습니다.

 

예, 다시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

낭독하는 혼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죠? 

보라, 어쩌구 저쩌구 어린양이 이렇게 죽었으나 살해되었으나

서 있고 뭐 이런 말씀 다 하고 찬미 찬송 받으소서.

영광과 권세가 우리 하느님께. 우리 어린양께.

 

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제 시작 됐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찬송가.

뭐, 노래죠. 그죠? 그것을 우리가 한 번 봤었습니다.

예, 이 모든 말씀이 묵시의 말씀입니다 하면 예, 알아듣기 힘듭니다.

 

똑바로 정신 차리고 알아 들어야 됩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입니다 라고 요한 묵시록이 똑 뿌러지게 얘기 합니다. 스스로가.

묵시록 스스로가 나는 예언서다 라고 밝히는 대목이죠. 바로 이 구절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예언서로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구요? 행복하다! 예, 행복하다도 우리가 10번째, 11번째

강의에서 요한 묵시록의 행복론에 대해서 한 번 배워 볼 겁니다.

 

우리 뭐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우리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행복

합니까? 예, 뭐 제 친구들, 사회의 친구들이 함께 이야기 해 보면

처자식 그냥 배 안 굶고 밥 잘 먹고 주식투자한 거 돈 좀 올라가고

뭐 그런 건강하고 그러면 안되겠나?

 

뭐 저의 동기들이 벌써 중학교 아이들이 있고, 그런 어떤 사회적으로

세상 안에 살아가는 어떤 막 되게 힘들어 보여요. 근데 무사히

무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한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데

이 요한 묵시록하고 이 행복론은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구하려고 하고 구하면 하는 그 구절이 있지요?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빌어라 빌면 다 이루어 진다.

예 우리 한번 빌어 볼까요? 우리 자, 우리 한 마음으로 해서 우리가

강의를 듣고 있는 이곳 세트가 온전히 다 들어져서 바다로 갈까요?

바다로 간다고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 볼께요?

 

예, 우리가 지금 바다로 왔습니까? 우리 안 가지 않습니까?

문제는 보십시오. 겨자씨 만한 믿음 하나만 있다면 저 산이 바다로

옮겨지는 그런 것이 문을 두드리고 구하고 우리가 바라는 행복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것을 빌어 보세요. 상항은 안 바뀝니다.

행복한 게 뭔가? 말씀을 지키는.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고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는 게 뭔가?

심지어 요한 묵시록의 13장에 가면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면

 

※ 묵시 13, 10 : "사로잡혀 갈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로 죽을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 "행복하여라!" 하고 말해 놓고 칼로 죽을 사람은 칼로 죽을

것이다 라는 이런 표현. 이걸 어떻게 행복하다고 그럽니까?

자, 행복 그러면 떠오르는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 등장을 합니다. 

 

※ 마태 5, 3-12 : 참행복(산상 설교)

 

진복 팔단이죠? 자, 행복하여라.

다는 설명 못 드리겠고 우리는 지금 요한 묵시록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보면 자, 행복하여라 해서 바로 슬퍼하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고, 뭐한 사람은 뭐하게 될 것이고, 미래형으로 쓰이는데

지금 바로 행복 딱 주고 선물 탁 주는 두 분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 마태 5, 3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것이다. 현재 입니다.

지금 마음으로 가난하면 지금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지금 우리 것이 되는 것이 뒤에 가면 또 진복 팔단 중에

 

※ 마태 5, 6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바로 지금 그들의

것이다. 뭔가 부족 하잖아요. 부족한데 이것이 아까 우리가 말했던

뭐 구하고 믿고 빌면 다 이루어진다.

 

문을 두드리면, 열심히 두드려 봐라 열린다. 이 개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죠? 부족해요, 지금 내가 박해 받아요. 지금 힘들어 죽겠어요.

그런데 이런대 어떻게 행복을 느끼겠습니까? 또 요한 묵시록편을

더 나가 볼까요?

 

21장 22장에 천상 예루살렘이 곧 오는데 하느님의 거쳐가 나타나는데

그 거처에서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목마른 사람들. 뭐가 안 되요. 안 돼서 미치겠어요. 그래서 지금

뭐라도 지금 얻어져야 되고 구해져야 되는데 지금 목이 마른데 그 바로

그 사람이 하느님이 상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행복과 다른 이야기

입니다. 제가 왜 이런 행복을 자꾸 지금 말씀 드리느냐?

예언서의 내용을 가졌다 라고 요한 묵시록이 그렇게 하면서 이러한

행복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예언서들이 어땠는가?

 

구약의 예언서들이 어땠습니까? 조금 있다 살펴 보겠지만

난리입니다. 박해받고, 힘들어 하고, 예언자들이 도망가고.

왜 나한테 왜 그러냐? 딴 사람시켜라. 힘드니까요.

우리 세상도 안 그렇습니까?

옳은 말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왜 요한 묵시록은 이런 예언서로 이해할

있는가? 1장 3절에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우리가 어떤 의미인가를 오늘 시간부터 한 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예언의 말씀이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막 선포를

하구요. 어떤 의미에서, 구약은 크게 세 단계로 예언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나라가 잘못 살 때 정의로 말할 때,

심판을 말할 때, 실컷 뭐라 해 놓고 안됐잖아요.

 

그러니까 위로를 주다가 바빌론 유배가고 그렇게 되니까 희망을.

미래에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다. 예언서를 크게 보면 이렇게 세

단계로 심판, 의로, 희망의 메세지로 이렇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점진적으로 나가는데 요한 묵시록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이, 지금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완전히 완성 됐어요. 그것으로 끝이예요. 완전히 완성된 말씀이

요한 묵시록의 예언의 말씀이다 라는 대목이 요한 묵시록 22장

18절부터 있습니다.

 

※ 완전히 완성된 말씀이 요한 묵시록의 예언의 말씀이다.

 

※ 묵시 22,18-19 :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이에게

증언 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왜?

이 예언의 말씀은 완벽하니까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완성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서들은 말을 하다가, 말을 하다가 또 다른 세상이,

또 다른 상황이, 또 거기에 맞는 또 다른 예언자가 이렇게 등장하고

또 시대가 가면서 또 다른 메세지가. 약간 성격이 다른.

 

이런 것이 계속 되는데 요한 묵시록은 이제 최종 결론. 마지막이다.

이 말씀이 완벽하다. 완전하다. 누구에 의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말씀이 완전하기 때문에 말씀을 잘 지키고

살아가라 라는 아주 강한 표현이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 요한 묵시록의 이 예언서 우리가 기본 도입 단계인데 예언의

말씀이다. 예언은 완성 됐다 할때 우리가 어디로 방향을 좀 틀어서

생각해 봐야 하느냐?

 

먼저 차근 차근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을 살펴 보는데 있어서

첫 번째로 우리가 봐야될 것이 예언자 입니다. 예언서가 나오려면

예언자가 있어야 되잖아요. 누가 예언자인가?

요한 묵시록의 예언자는 누구일까요? 우리가 벌써 배웠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말씀이라고 첫째

강의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서? 종 요한을 통해서 입니다.

물론 요한 묵시록 끝에 가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마는 처음에 종 요한에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께 주신

계시를 종 요한에게 기호화 했다. 표징화 했다라고 해서 전해

준 그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이제 요한이라고 봅시다. 자, 이 요한은 누굴까?

자, 지금 우리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의 문제에 지금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그 요한 묵시록이 쓰여진 시대를 살아갔던 그 사람 요한은

누구일까의 문제 저자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누구이겠습니까?

 

요한은 제자,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 그리고 혹은 네 번째 복음인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그 십자가상에

있을때도 성모님하고 요한하고 있을때에 서로 엮어 주시지요?

한 가족으로.

 

※ 요한 묵시록의 '요한'은 누구인가?

① 예수님의 제자 제베데오의 아들

②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정말 사랑하셨던 것 같애요. 그 사랑했던 제자 요한이냐?

혹은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이냐? 그건 잘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네 번째 복음인 요한 복음의 저자도 확실히 잘 몰라요.

요한 묵시록의 저자 문제도 누구인지를 확실히 잘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상, 교부들의 전통상, 2세기의 교부 이레네오가

사도요한일 것이다 라고 추정을 하셨습니다.

 

※ 2 세기의 교부 이레네오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추정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추정이죠. 지금 우리가 2011년에 사는 우리보다

2세기이니까 뭐 기원후 180년에 살았던 그 이레네오 교부를 통해서

아마도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의 저자일 것이다 라고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로서의 이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예컨데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같이 묶어 갔을 때 그러면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이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면 같은 면,

맥을 같이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야 된다.

 

그러면 그것을 살펴 보면 아, 이 저자가 동시에 다 같이 적었구나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의 공통되는 점들을

한 번 찿아 보자, 그것을 찿아보니까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증언, 생명, 생명은 요한 묵시록에도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요한 복음도 마찬가지고.

 

※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의 공통단어

증언, 생명, 생명의 물, 만나, 승리, 말씀, 어린양

 

요한 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에 보면 물을 달라는

얘기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 다음에 만나,

참 만나는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지요.

 

그 다음에 승리, 요한 묵시록에 엄청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도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용기를 내어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구절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 요한 묵시록에도 예언의 말씀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마는 요한 복음에도 말씀이 곧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말씀, 아주 중요한 단어 입니다. 그 다음에  어린양. 지난 시간에

봤지만 어린양의 개념들, 이런 것들이 보면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다 같은 저자가 썼을 수도 있겠다라고 우리가 추정해 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쉽게 가면 뭐, 뭐하려고 공부하는 사람 필요하고 또

성서를 왜 하겠습니까? 그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뚜렷하게 잘 구별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그리스말의 표

현들을 보면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이 아, 같은 사람이 쓰기에는 좀

맞지 않다라는 것이 등장 합니다.

 

요한 복음 그 자체도, 요한 묵시록 그 자체도 같은 사람이 이 한권을

다 썼지는 않을것 같다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데 요한 묵시록을 보자면

저 뒤에 천상 예루살렘에 가서 보면 천상 예루살렘이 두 번째는 뭐가

하늘에서 이렇게 도시가 내려 오는 모습으로. 왜 굳이 두 개로 따로

묘사를 했을까? 하나로 매끄럽게 묘사를 했으면 될 텐데.

 

분명히 다른 사람이 다른 관점으로 적은 글의 투가 있다. 그리고 요한

복음도 이렇게 보면 처음에 1장이 약간 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한국말로 번역해 놓으니까 그게 잘 안 사는게 아주 하나의

시입니다.

 

시. 로고스, 말씀에 대한 시로써 이렇게 등장하는데 그것과 뒤에

연결하는게 매끄럽지 않고 문맥이 조금 다르고 중간 중간에 다른

관점으로 다른 문체로 삽입된 부분도 많고, 아무튼 우리 한국

번역에서는 잘 안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또 등장을 하고 있고요.

 

그 다음에 이제 장면들, 이야기의 장면들이 이렇게 쭉 가다가 자꾸 뜬금

없이 다른 것들이 툭 툭 들어와 가지고 이야기가 끊기는 어떤 그런,

이거는 이야기의 어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그렇게 또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우리가 앞으로 계속 요한 묵시록 강의 하면서

요한 복음과의 관계 안에서도 살펴보게 될 겁니다. 지금은 다 말씀드리기

그렇고, 주제적인 면에서도 차이점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자, 결론적으로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이 같은 주제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있자마는 동시에 다른 것이 있고 또 동시에 각 권이 그

안에서 조차도 다른 어떤 관점, 다른 문체, 다른 글 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예, 이렇게 봤을 때 요한 묵시록은, 요한 복음은 한 사람이, 이레네오

교부처럼 한 사람이 이것을, 사도 요한이 다 적었다라고 볼 수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 사람이 손을 다 댔다. 손을 대서 각색을

하고 꾸미고 다시 편집하고 이런 것이 있다.

 

그래서 아마 요한 학파라는 것이 이미 요한 제자들, 제자 무리들이

모여서 그런 어떤 공부하고 요한의 사상을 따르려고 하는 그런 어떤

학파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우리가 추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저자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요한 학파 추정)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든 요한 복음이든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쓰여

졌다고는 생각하면 안 되고 이 요한이라는.

감히 이제 요한 묵시록이 아까 예언서라고 되어 있으니 예언자를 보자.

예언자는 누군가?

 

구체적인 요한을 찿으려니까 어때요 지금. 요한 학파 뭐 이런 분위기가

흘러버려요. 누구하나 잡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 찿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지요.

 

사실 제가 신학교 때 고등학교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성서부터

이렇게. 물론 철학도 배우고 다른 것도 배웁니다 마는 성서 배우면서

가장 조금 황당했던 것이 그거예요.

 

자, 우리 일반 고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보면 이 작품은

누구, 저자가 누구, 이 사람의 사상이 어땠고 시대를 어떻게 살아갔고.

이런 것이 딱 있으면 작품이 막 ... 이 사람이 좋아서도.

여러분, 이상 아시죠? 저는 되게 좋아 하는데.

 

아, 조금 이렇게 차 차원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그런 어떤 저자의

구체적 삶을 알면 더 땡기는 거예요. 작품이. 그런데 신학교에 딱

들어가보니 제가 뭐 그래도 열심히 읽어야 될 이 책의 각 권마다

공부하고 나면 맨날 저자는 확실치 않다. 뭐 추정은 이래이래 해 볼

수 있는데 확실한 건 없다.

 

와, 그 때마다 뭔가 이 해소되지 않는. 그 신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실컨 철학적으로 아주 단어들을 설명을 다 해 놓고 나중에 가서는

'신비'다 믿어라. 이런 식의 결론이 우리가 신학도 그렇고 성경도

그렇고 많이 납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게 답답함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어떤 뜻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고, 인간의 방법으로 표현된

게 성경인데 이것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고, 누가 어떻게 또 한 사람만

에 위해서 또 적혀진 것은 불가능한 거겠지요.

 

그래서 또한 이것이 인간의 한계고, 인간의 나약성이고 그래서 무한

하신 하느님을 또 조금이나마 알아 가는데 있어서 지금 모른다고 해서

지치지 말고, 계속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자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을 그 안에서 만나면, 우리 그래서 성경의 원래 저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우리가 쓰여 졌다고 그렇게 믿어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날 분은 이 역사적 저자가 누군가 여기에 빠져 있으면서

그것만을 찿으려고 하는 모습, 그것은 조금 우리가 한번 어떤 중간

단계를 고민하는 거지요. 궁극적 목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러한 예언자의 요한이 구체적으로 우리는 모른다.

자, 요기까지 결론을 딱 냅시다. 모르죠? 아시는 분은 저에게 즉시

연락 주시면 제가 사례 하겠습니다. ^*^

 

예, 이분을 구체적으로 안다는 건 이제 불가능한 거예요.

요한의 어떤 학파 그런 분위기가 이었다. 자, 그러면 문제가 우리가

이 예언자를 찿아야 되는데 이 예언자,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예언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우리가 이사야서다, 호세아서다, 아모스서다 그런 구체적인 어떤 역사의

인물을 알 수가 있지만 그 안에 또 적혀진, 그 문학작품 안에 등장하는

묘사되는 그 아모스, 호세아, 그리고 미카, 이사야,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요한 묵시록 요 안에 역사적인 실제 저자는

우리가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 안에 묘사되는 그런 예언자로서의

요한의 모습은 우리가 알 수 있죠?

 

이거는 글에 나타나 있으니까? 그죠? 예,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성경공부에, 아주 최근 공부인데 역사적 저자와 문학적

저자를 구별 합니다.

 

저자의 문제에 있어서 제가 역사적 저자와 문학적 저자를 구별하라는 말,

이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이 저를 보면 누구라고

느끼십니까? 저는 누구예요? 예, 신부죠? 집에 가면, 우리 부모님한테

가면? ...  사회 친구들에게 가면? 저는 그냥 제 이름 석자로, 석자도

필요 없죠. 성 띠고 병규야! 그러면 끝나 버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신부로 바라보지 마는 또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

과의 만남에서는 그냥 친구가 될 수 있고, 어떤 누구의 아들이 될 수

있고, 그죠? 이게 상황 마다 어때요 다르단 말이죠.

 

이 요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역사적 인물이 이 텍스트안에 문학 작품

안에 딱 들어오면 어떤 한 모습을 가지고 여기서 설명을 해 나가는

것이겠죠? 제가 만약에 성당 안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글 안에 들어

오면 신부로서 제가 활동하는 모습을 적을 수 있겠고, 친두들에게는

재미 있는 어떤 우정을 나누는 친구의 모습으로 기술 될 수 있겠지요.

 

요한도 그렇게 찿아보자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역사적인 저자와 문학

안에 표현된 저자 구별 하는 것, 감이 오십니까?

예, 그렇게 구별 해 보면, 요한 묵시록에는 그러면 요한을 어떻게 표현

했는가? 어떤 모습으로.

 

요한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크게 처음부터 봐야 되는게 뭐냐

하면? 이 요한이 환난 속에 있습니다. 요한이 있었던 지리적 장소는

파티모스 섬이라고 합니다. 그죠? 파트모스 섬에 왜 갔습니까? 

 

※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 간 이유 하느님 말씀을 증언하고 말씀을

  살다가 말씀 때문에 박해 받음.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당시 요한 묵시록의 그 시대의 공동체의

사람들, 모든 신자들이 고통 속에, 억압 속에 박해 속에 있었단 말이죠.

요한 역시 박해 받는 인물로 자기를 묘사 합니다.

 

이거는 그냥 같은 형제 자매로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동시에

요한은 스스로 당신은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고 동시에 같이 있는 아까

형제 자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종으로서 형제 자매로서 너와 내가

똑같다라는. 그 환난 속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요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거는 구약의 예언서들과 약간 좀 차이가 있습니다.

자, 구약의 예언서 보면 어떤 소명을 받지요? 이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른 차별이 있지요? 제가 제일 싫어 하는 말이 차별화, 계급화를

저는 제일 싫어 하는데. 예, 서로가 차별되어 가지고 니는 뭔가

영웅이고, 우리는 중생들이고, 뭔가를 줘야되고 이런게 아니라

요한 묵시록의 요한을 보면 되게 좋아요.

 

요한이 너와 나는 같은 종이고, 같은 형제고, 같이 고난을 받고 있고,

같이 우리가 예수님께 믿음을 두자 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소개 한단

말이죠. 전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평등한 이런 모습을 드러 냅니다.

 

예, 간혹 이것을 묵상하다가 제가 공부하면서도 요한의 어떤 문학적인

저자로서의 요한의 이 모습을 묵상하다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신부로서 살아 가면서, 우리 한국 교회에서 신자분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신부라는 그것 때문에 이거 아주 우리가 조금 깊이 생각해 봐야 될

부분입니다. 신부라는 그것 때문에 소위 대접을 받아요.

 

제가 처음에 유학 갔다가 아무 생각 없이, 프랑스에 있을 때는 이렇게

가방 그냥 메고, 청바지 입고 난방 입고 이렇게 대충 다녔거든요.

그러니까 전혀 뭐 신부인지 뭐 모르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다니다가

어는 본당에 갔는데 그 사무장님이 청년인 줄 알았던 거예요. 

뭐 액면가가 청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  

 

그러니까 청년인 줄 알고, "얘 ~ 이러면서 너 어디서 왔는데 막

이런... ^*^  당연하죠. 그랬더니만 제가 아는 분을 거기가서 이제

만나려고 갔는데 그 분이 오셔서 "아이구, 신부님!" 이리 된거요 ^*^ 

순간 확 바뀌지요. 태도가. 되게 씁쓸 한 장면 입니다.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 우리를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제든 평신도든, 수도자는 조금 다르죠 수도자는 정말로 제가

배우기는 천상의 삶을 지상에서 미리 보여 주는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소위 도 닦으시는 분들이라 우리와 다른 정체성을.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고유한 역활을, 저는 사제로서 역활, 여러분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로서의 역활, 고유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사제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굳이 절을 하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야 하나? 제가 저와  똑같은 동기, 나이를 같이 가진

청년이었다면 그 연세 있으신 분은 당연히 저에게 반말을 하고,

당연히 그냥 일반 청년 같이 대하죠.

 

모습, 똑 같은 모습으로 저를 왜 못 대하는가? 사제이기 때문에.

물론 좋은 의미에서 존경과, 사제직에 대한 어떤 고귀한 어떤 이런

배려 등이 너무 감사하지마는 평등이 사라진, 실종된 상태에서의 배려는

이것은 계급입니다. 차별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죠.

 

이 요한이 스스로를, 자기가 얼마나 대단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를 지금 받았는데 그 받았는 요한이 어때요?

너와 나는 같은 형제 자매고 환난을 같이 겪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것,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소위 우리가 비판하기에 간판이라는 것 때문에 많이

우리가 조금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간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세상을 요한 묵시록에서 좀 많이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소임을 주시는 거예요. 

예언자로서의 소임, 그것이 뭐냐? 예, 제가 적겠습니다.

1장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셔 가지고 요한에게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주는 것이 뭐냐?

 

지금 네가 보고, 앞으로 보게 될 그 일들을 그 모든 것을 기록하여라.

왜? 무엇 때문에? 아까 1장 3절에 우리가 봤듯이 공동체 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이 계속해서 들려 질 수 있도록 이 완전한, 완성된 이

예언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질 수 있도록 기록하여라.

이 요한이 해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 요한의 사명 : 공동체 이 예언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들려질

   수 있도록 기록 하는 것.

 

이러한 기록물로서의 그 어떠한 요한 묵시록, 그래서 우리가 글로서

지금 발견하게 됩니다. 그죠? 그 형제 자매와 같은, 환난 속에서 함께

살아갔던 요한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이제 책입니다. 글입니다.

 

자, 이 책을 예언서의 어떠한 관점 안에서 예언서 부류 안에 넣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 안의 예언서 안에 이 책을 이제

넣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준 거는 책 밖에 없어요. 그죠?

책이 남았기 때문에.

 

자, 넣습니다. 넣어 보면 예언이라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예언? 그러면 어떤 것이 떠오르 십니까?

요한 묵시록을 예언서 안에 탁 넣고, 예언서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 보는데 예언하면 머리 속에 뭐가 떠오릅니까?

 

예, 미래? 뭐 어떤 점치는것, 그것이죠? 뭔저 이 예언이라는 것에

대해서 단어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pro - phem(프로 페미) 이라는

말 이것이 이제 '예언하다' '예언' 그와 같은 그런 의미인데, pro

라는 말은 '앞서다', '먼저' 이런 뜻입니다. phem는 '말하다' 라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앞서서 말을 하다는 것이 바로 예언하다라는

것인데.

 

※ pro - phem : 먼저 앞서서 말을 하다.(예언 하다)

 

자, 아까 방금 말씀 했다시피 예언이라고 하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뭡니까? 미리 일어나지 않는 것을 먼저 말하는 것.

예, 그러니까 예언이 지금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앞날의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예언자는 점쟁이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어떠한 모습인데, 그 예언이라는 것.

자꾸 그렇게 미래의 뭔가 우리가 전혀 모르고 경험치 않은 것이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888888수정 검토 하세요

 

 

우리 예언서들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스라엘 문학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그 고유한 전통에 있어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예언 개념이 바로 미래에

펼쳐질 것이 아니라,이것이 미리 말한다고 해서 미래의 것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 하느님의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 예언은 미래에 펼쳐질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일깨워 주는 것이다.

 

우리가 8세기의 예언자들, 예컨대, 호세아, 아모스, 미카, 제1이사야

이분들이 했던 것이 뭐냐? 그당시의 현실에서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어떤 불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너희들 왜 이렇게 사느냐?

 

예, 제1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왕에게 직접 말하고 그리고 미카 예언자

같은 경우에는, 사회에 일어난 불의 예컨대 누가 한 사람의 돈을 독점해

버리고, 땅을 독점해 버리고, 못사는 사람이 많은 이런 상황,

이거 비판을 엄청 했거든요.

 

그리고 사제들도 갖다가 비판을 했어요. 그렇게 살지 말아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

거기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예언자들이 노력을 했다.

 

예언은 미래의 점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반성에서 그렇게 하느님 뜻을 전하는 사람이어죠.

그래서 예언자를 '나비'라고 합니다.  히브리 말로 '나비'

 

이게 뭐냐? 영어로 한 번 표현해 볼께요.

스피커 입니다. Speak

하느님의 말씀을 지금, 예, 전하는 겁니다.

도구죠. 하느님 말씀 전하는. 지금 이자리에.

 

그것이 요한 묵시록의 그러한 성격, 예언서로서 요한 묵시록이라 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무엇을 전할 것인가? 미래에 펼쳐질 재앙들,

그게 절대 아닙니다. 재앙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전하고자 했는가?

 

자, 우리가 앞으로 재앙들도 보고, 여러가지 무시무시한 것, 대접들도

막 쏟아지고, 나팔들도 부니까 땅의 1/3이 어떻게 되고 이러한 모든

모습들 이거 구약에서 다 있었던 예전의 이야기를 다시 각색했던 것들

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들이 하느님 말씀, 지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려오는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지않는다면,

그것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예전에 너 경험 했지 않느냐?

예전에 이런 사건들이 있지 않았느냐? 다시 일깨워 상기시키는 것이지요.

 

예, 우리 애들 한테도 마찬가지죠.  애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말을 안

들으면 "엄마가 뭐라고 그랬어! 예전에 너 이게 뭐 하다가  잘못 해가고

엄마가 막 이렇게 회초리로 때렸지, 기억 안나?"  이렇게 말하는 것

이거와 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보면서 저 종말에 펼쳐질 여러 가지

사건들그 사건들이 "어우, 이런 게 생기면 어떻해, 큰일이네!"

막 그러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이라고 자꾸 생각하는데 그 촛점을 지금

현재, 이 자리로 가지고 와서 지금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

 

"지금 열심히 살아라!" 그래서 끌려갈 사람은 끌려가고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아 죽고 뭐 어떻게 되든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들이

가져야 될 것이 인내와 믿음이다 라는.  지금의 말씀을, 지금 우리를

위한 말씀을 던져 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예언서와 같다. 물론 그 전해지는

방법이 묵시 문학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상징들로 이렇게 하지만

그 상징들 하나 하나 이렇게 해부해 나가보면 결국에는 지금 너희들이

부활하신 분을 맞아들이고 그 분께 인내,  그리고 믿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봐라 라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우리가 성서에서 말하는 그 예언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

하시는 하느님의 그 말씀, 예언자를 통해서, 그것이 요한에게 문학적

요한이라고 얘기 했습니다.

 

동등한 평등한 형제 자매로서 환난을 함께 겪고 있는 이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이 기록물, "기록하여라"  그 책에 지금 나에게 어떻게 살아

가느냐?  그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요한 묵시록이 쓰여진 그 당시의 독자들, 그 말씀을

듣는 이들과 우리는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왜? 요한 묵시록의 그

문학적인 저자 그 요한이 소임을 받은 것이 "기록하여라" 였습니다. 

그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지요.

 

이천 년 전의 그 독자들이나 지금 우리가 책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 같은 독자들 그룹 안에

우리도 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1장 3절을 다시 우리가 한 번 상기시켜 본다면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우리도 거기의  행복의 자리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이 "똑바로 살아라, 너 이렇게 살면 안된다" 라고

이야기한 그 것은 직접적으로 듣는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처럼 우리가 거기 들어가서 우리들이 해야할 것은 행복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행복해야 된다" 는 것 다시 한 번 강조 할께요.

 

절대 내자식 잘 되고, 내 건강 잘 챙기고, 우리 어떻게 뭐 월급도 많이

받고 이런 개념이 아니라 지금 목마르고, 지금 힘들고, 지금 아쉽고,

뭐에 대해 아쉬어요? 하느님에 대해서.

 

예, 요한 묵시록적인 표현은 부활하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지금 상황이 힘들더라도 그 분께 인내를 가지고 믿음을 두는 그 생활을

살아 가야 되는 것. 그것으로 이끌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이다.

 

지금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 갑니까?

지금 하루 하루를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또 신앙을 가지고

살아 가는지 한 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우리는 세상 것과 하느님

것을 분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 요한 묵시록은 세상 것과 하느님 것을 분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성당 안, 성당 담장 안,

우리끼리 모인, 신앙인 끼리 모인 그 모임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11장 15절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상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 묵시 11, 15 :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래서 신앙의 대상이요. 신앙인들이 고민하고 함께 해야

할 것이라는 거죠. 세상 모든 것이. 예, 구약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아까 제가 네 분  BC 8세기 예언자만 얘기 했는데요. 호세아, 아모스,

미카, 제1 이사야. 왕들에게도 비판했고, 사회 불의에도 비판 했고,

사회의 독점적으로 자기만 배부리는 사람을 비판했고 사회에서 정의롭지

못하는 상벌의 장사하는 사람.

 

그리고 사회에서 정의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제들, 지도자들, 그리고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들, 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들을 비판하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 충고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이렇게 나누면서 우리끼리 좋고, 우리끼리 함께 나누고, 사회가 어떻게

되든, 세상이 어떻게 되든 그렇게 옹졸하게 살아가는 것은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아주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지금 이 자리, 예언서에 있어서 예언 문학의 지금

이자리 요한 묵시록이 부활하신 분을 지금 이자리에서 살아내라고

우리를 인도해 줬고, 요한 역시 환난을 겪으면서 형제 자매로써

요한이 그 말씀을 전하고자 했고, 그렇다면 우리 삶 전체가.

 

성당은 고작 주일미사 나오는 한시간 두시간이지만 우리 삶의 전체의

순간,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이웃 안에서든 그 자리가 바로 요한

묵시록의 부활하신 분을 살아내는 자리 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게 아니라 내가 생명을 지향하고

이웃 안에서 살아 있음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우리 모든 움직임, 몸짓들,

우리의 만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분을 드러내는 예언자로서 또 다른

예언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 이 강의는 자, 예언 문학에 조금 들어 가는 자리 입니다.

우리가 수체적으로 지금 이 자리를 제가 계속해서 강조를 했는데 다음

시간에는 이런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이 당시 그 사람들이 독자들이

처해 있던 그 자리, 그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위로와 희망과 혹은

심판을 줬는지 그것을 다음 시간에 한 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ㅡ 제 5 강  요한 묵시록의 '현재'가 계속 됩니다.

출처 : 여정성경공부
글쓴이 : 하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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