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2강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박병규 신부/요한묵시록

윤 베드로 2016. 8. 28. 14:05

 

 

제2강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심판이 예언으로만 알려진 요한 묵시록 그 안에 하느님이 담아 주신 절절한

위로와 희망의 메세지를 읽어 냅니다. 요한 묵시록으로 성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박병규 신부(대구교구 구암성당)와 함께 사랑과 위로의 하느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대구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입니다.

한 주가 잘 지내셨습니까? 두 번째 시간이죠?

아직까지 조금 어색한 게 있지마는 우리가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친밀한 그런 어떤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구요.

 

특별히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 우리 시청자분들께서도 예수님을 더더욱

많이 알아가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이, 첫 번재 시간이었지요?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첫 번째로 봤던 게 요한 묵시록 1장 4절에서 7절까지 나왔던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이시고, 한 분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부활의 삶을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살아 내자!" 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주된 가르침이다.' 라고 우리가 봤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은

그 예수님을 계속해서 요한 묵시록은 이런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 주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계속해서 한 번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 하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그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시는 그 내용은 상징화 되었다. 표징화 되었다. 고지 곧대로

받아들이면 절대 안된다. 표징 너머에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봐야 됩니다.

 

뭐 쉽게 얘기해서 예수님이 어린 양이다. "아, 예수님이 어린양이 셨구나.

인간이 아니였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그 표징

너머에 있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찿아 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가 뭐 종말론. 뭐 현대 바깥 사회에서 종말이다 해가지고 이런 저런

사건들을 막 요한 묵시록에서 빼가지고 신비하고 무서운 장면을 그려 내는데

그것은 우리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볼 것은 5장 9절에서 10절.

예, 지금 우리가 큰 틀 안에서 우리의 위치,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요한 묵시록을 접근하는 관점, 아직 텍스트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요.

어떤 관점으로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봐야 되는가에 대해서를 자꾸 조금

조금씩을 우리가 배워 나갑니다.

 

그 중간 중간에 몇 구절을 빼내서 아, 이런 의미이기 때문에 이렇게 요한

묵시록을 읽어야 됩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어떤 예수님의 모습일까를 지금 살펴 보고 있는 중입니다.

 

예, 5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요. 새 노래가 나옵니다. 저 천상 어좌가 있고,

네 생물이 있고, 그리고 스물 네 원로가 있구요.

이게 새 노래를 부르는 그것입니다.

 

※ 묵시 5,9-10: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 합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받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요게 새 노래를 부렀어요. 저번 시간에 제가 요한 묵시록이 한사람이 낭독하고

공동체가 듣는 이야기. 다른 말로 표현 하자면 전례서의 성격이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요한 묵시록은 한 사람이 낭독을 하고 공동체가 듣는 이야기.

    즉 전례서의 성격을 띠고있다.

 

요한 묵시록은 공동체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공동체가 모이면 뭐합니까? 우리가 미사시간에 노래도 부르고 화답송도 하고,

여러 우리가 노래 , 시편 이런 것들로 하느님께 찬미드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례서적인 성격이 이 노래 안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보면 이 노래를 조금만 한번 우리가 바라보자면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 하십니다. 왜 두루마리가 나왔는가? 봉인을 왜 뜯는가?

 

예, 5장에 어좌에 앉으신 분께서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하나 들고 있습니다.

이거를 읽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요. 안달이 나니까 요한이 막 하늘이 열려서

천상에 올라가 보니까 천상도 열려서 다 보고 어좌도 다 봤는데 요거(두루마리)

를 지금 못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울어요. 도저히 찿을 사람이 없어가시고

누가 이거를 열어 줄까?

 

그러니까 원로 중에 한명이 바로 저기 어린양, 어린양을 지적 합니다.

물론 그전에 유다지파의 자손이고 이런 말을 합니다만, 메시아적인 호칭들이

나옵니다마는 지금 그것은 우리가 텍스트 들어갈 때 구체적으로 보구요.

 

이 두루마리를 여실 분을 원로가 소개 해 주는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어떤 예수님?  열어 보여 주시는 예수님.

제목 자체도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예수님만이 무엇을 열어 보여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열어보이는냐? 이 두루마리가 무엇이 겠습니까?

이 두루마리가 이렇게 들려져 있어요. 이 두루마리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 예, 하나의 퀴즈죠? 요한 묵시록이 바로 퀴즈 입니다.

 

예, 우리가 요한 묵시록 중에 아주 재미있는 부분, 우리가 많은 사람이 아는

부분, 신자가 아니더라도 아는 부분 666. 그 666이 나올 때 한번 알아 맞춰 봐라.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라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거든요.

 

666이 뭐냐? 우리가 다 퀴즈를 알아 맞힐 수 있는, 머리를 조금만 쓰면 그런

의미인데 그것도 나중에 우리가 배울꺼구요. 두루마리가 이렇게 있는데

제 표현이 재미있어요.

 

볼 수 있죠? 안에만 못 봐요. 그래서 많은 교부들이 어떻게 표현 하느냐 하면

겉에 적혀 있는 것은 구약성경이다. 안에 적혀 있는 것은? 신약이다.

이 신약성경을 누가 열어 보여 줄 수 있느냐? 신약성경 내용이 뭡니까?

결국엔 예수님 이야기죠? 복음서, 예수님 이야기.

 

신약성경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은?

마태오 복음입니까? 데살로니까 전서 입니까?

예, 복음서가 먼저 쓰여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급해요.

막 전하기 위해서 막 나가요. 나가고 한 참 지나고 편지 막 쓰고

사도 바오로가 그죠?

 

써 놓고 막 쓰고 있으니까 어, 큰일났다. 이거 직접 예수님 본 사람은 죽어가고

있고, 또 이거 막 편지써서 주니까 그래, 이거는 알겠는데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아느냐 라고 이제 질문제기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구야, 예수님의 삶을 정리해야 되겠다 라고 해서 70(76)년

이후에 막 이제 복음서들이 적기 시작하죠. 그래서 이 복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서간이고, 복음서고, 그 다음에 요한 묵시록까지

다 그런거죠.

 

그래서 신앙은 결국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책이 요한 묵시록인데, 예수님만이 제대로 이 안의 것을

열어 보여 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다시 표현해서 예수님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의 내용에 대해서

온전히 열어 보여 주실 수 있다.  이 내용이지요?

 

※ 예수님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의 내용에 대해서 온전히 열어보여

   주실 수 있다.

 

자, 예수님은 열어 보이시는 분으로 요약을 해서 요 대목을 우리가 이해 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민족과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해 되시다.'  너무 잘 알지요?

 

문경에서 어떤 분이 뭐, 사건은 스스로 자살로 결론 났습니다마는.

십자가가 참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보세요.

상징을 그 상징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되는 게

우리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입니다.

 

런데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가 늘 문제죠?

예수님처럼 우리가 똑같이 똑같은 십자가에 똑같이 못 박혀서 똑같이 죽기를

예수님이 바라지 않으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나."고 하셨습니다. 

내 못 박힌 똑같은 십자가에 똑같은 못에 박혀서 그렇게 따르라고 하면 아마

그리스도인들은 이단 취급 당해도 당연할 꺼예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예컨데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들은 각자의 삶 안에서 각자 구체적인 모습으로,

저는 또 신부의 모습으로, 또 어떤 수도자는 수도자의 모습대로 각자의 삶의

자기 십자가를 발견해서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예수님 뒤를

따라야지 똑같이 죽는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상징을 제대로 알아 들어야 된다. 주님께서 살해 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정말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삶을. 그건 주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었고 봉헌이었습니다.

그것은 요한 복음에 잘 나타나 있지요.

 

예, 일곱 개 표징이 요한 복음 전반에 나타나고 그 일곱개 표징의 마지막

최고의 표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신데 영광스럽게 되시다.

들어 높임을 받으시다. 왜 그 표현을 썼는가? 죽는 게 뭐가 영광스럽고

뭐가 들어 높아지는 것 입니까?

 

그러나 요한 복음의 관점에서는 들어 높여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온전히 바치셔서 하느님께 선물 드렸어요. 그러면 우리

역시 우리 삶의 구체적인 예수님 방법, 예수님의 고유한 방법은 우리가 존중해

드리고, 우리도 우리의 방법을 찿아 나서야 되는 것이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숙제입니다. 저 아주머니, 저 형제님,

저 자매님 뭐 저사람, 우리가 그래서 롤 모델을 많이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잘 아시죠? 얼마나 존경할 분입니까? 그러나 그 존경이 나에

대한 존경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분은 그분 삶에 대한 나름의 확신이 있었고, 그분 삶이 하느님께로 맞닿아

있었고, 그래서 그분을 우리가 존경해요. 동시에 나 역시 그분처럼 내 삶에서

내가 무엇을 찿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내가 또 다른 이들에게 빛과 소금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내 것을 찿으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롤 모델을 해나 놓고

그 사람과 똑같이 우리도 어디 아프리카 가서 선교하고 똑 같이 할까요?

우리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내 자리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나에게 주시는 성소, 그것을 우리가

식별하고 잘 찿아 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를 잘 찿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께서 살해 되셨다.

당신께서 돌아가셨다. 우리를 위해서. 그 당신의 방법이 죽음이었다.

 

예, 계속해서 읽어 나가면 주님의 피로, 그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다.

묵시 문학을 읽으실 때 묵시 어떤 작품을 읽으실 때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이것이 요한 묵시록 다른 부분에도 나타 납니다.

요거 나오면 한 가지로 그냥 이해 하세요. 아, 싸그리 그냥다, 그냥 사람들,

세상 사람들 다 모든 사람들.

 

※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 세상 모든 사람들

 

보편적인 개념으로 모든 것으로 이해 하시면 되겠습니다.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그 모든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이 속량한다는 단어의 뜻을

느낌나는 대로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속량하시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예, 저는 한자 세대가 아니예요. 그래서 한문을 잘 몰라요. 그런데 이 속량한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이 그리스말의 이 단어가 뭐냐하면요. 쉽게 표현해서

우리가 가게 가면 물건을 사지 않습니까? 물건을 살 때 돈을 주지않습니까? 

돈을 주면 그 물건을 사는 것 순수 경제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보면 프랑스에도 말을 종교적 용어로

이렇게 약간 신앙적으로 바꿔 놓고 있는데 순수 현실에서 쓰이는 돈을 주고

받는 개념으로 쓰는 두 가지 번역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상스러운 거예요 느낌이. 처음에 그냥 가게에서

물건 주고 돈 줬다. 물건 샀다. 이 개념이 성서에서 쓰는 것 보다. 약간 종교적인

개념으로 약간 미화 시키는 게 안 낫겠나 싶었는데 지도 교수님이 요 단어를

쓰는 게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속량: 값을 치르다.

 

물건을 주고 사는 것. 왜 예수님이 정말로 당신의 몸을, 당신의 피를 값으로 

주는 거예요. 속량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해 주시고 이러면 마치 우리를

높은 위치에서가 아니라 이 천원 짜리 꼬깃 꼬깃 한거 막 끄집어 내 가지고

물건을 사는 것.

 

물건이 중요한 거지요.  돈 보다 그쵸? 돈은 그 값을 치른 것이고 물건!

그 물건이 뭐냐? 모든 사람이라는 거죠. 모든 사람을 사서 누구에게?

예, 이 구절을 잘 보셔요. 하느님이 여기 계셔요.

 

자, 여기 세상 모든 사람들이라고 합시다. 자, 이 세상 사람들 전체를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당신 죽음으로 사서 어디로? 하느님께로.

여기 예수님의 여기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일치 시키는 것.

일치시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닙니다. 거기에 보면 계속해서 보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 묵시 5,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무슨 나라?  한 나라, 일치,

하나의 나라예요. 모든 종족과 모든 민족이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가 되겠어요?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을 우리 집단주위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니, 내말 들어! 내 뜻대로 하나 딱 돼!" 

이거는 독재이고, 이거는 완전히 전체주위고, 집단주의죠? 

 

그게 아니라 이 하나라는 것은 모든 민족과 언어와 종족과 백성, 이것이 각기

다양하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그런 다양성의 일치 입니다.

 

※ 한 나라를 이루고: 모든 민족과 언어와 종족과 백성이 각기 다양하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다양성의 일치

 

이게 일치 개념이 어디서 오느냐? 한 나라가 어디서 오느냐?

모든 나라가 하느님께 경배 드릴 수 있는 이 일치가 어디서 오느냐?

창조 설화에서 옵니다.

 

창조 설화에 보면 그 창조를 할 때 하느님께서 다양하게 창조 하십니다.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어요. 제 종류대로 인간 조차도. 사람을 창조 하실 때

아담과 하와. 남자 여자로 창조 하셨어요. 똑같이 똑같은 사람 하나를 만든 게

아니라 다름을 통해서 하나를. 뭐 쉽게 애기해서 다양성 속의 일치죠?

 

똑같이 하나가 될려고 그러구, 똑같이 집단주의가 되려고 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느냐? 바벨탑 이야기에서 우리가 압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자, 우리 이름을 드높이자! " 모든 세상이 같은 말 같은 낱 말을 쓸 때,

사용할 때, 이게 물론 바벨론 제국의 언어 입니다마는 나중에 혹시 창세기

공부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보면 거기에 같은 낱말, 같은 낱말을 쓰면

어떻게 되느냐?

 

한 사람이 하나의 뜻만으로 가는거예요. 나머지들 다양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어떻게 해요. 이걸 부수어 버리죠? 부수어 어떻게?

같은 말을 다양한 말로. 왜 다양하게 흩어 놓으시는가?

창조 설화의 원리이니까요. 제 종류대로 각자가 다름을 통해서.

 

※ 다양한 말로 흩으신 이유:

    제 종류대로 각자가 다름을 통해서 공존해야 하기 때문

 

자, 빛을 만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기니까

"아이구, 보기 좋구나"가  아닙니다. 빛이 생기니까 뭐가 있어요?

어둠이 있어요. 낮이 있으니까 밤이 있어요. 창공위에 물이 있으니까

창공 아래에 물이 있어요.  이 지상에서도 물이 있고. 물이 있습니다.

 

서로가 구별되는 그걸 보시고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 합니다.

좋은 것만 우리는 보게 되어 있어요.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고, 니가 있으면 내가 있고, 우리가 있으면 저 사람들도 있고, 서로가 다름이

다양하게 공존해야 이것이 아름다운 거예요.

 

이것이 민주주의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함께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 나라를 이룬다는 것을 그래서 똑같이 된다라고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민족이 다양하게 하느님을 두고 일치하면서 서로가 동시에 서로가

존중하는 그런 공동체.

 

그런데 이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 해야할 일이 뭐냐?

사제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 전체가(속량된 사람들) 사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뭘까요?

 

지금 이 로만 칼라한 이 사제의 개념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구약 전통에 대해서 사제가 하는 일은?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제들이 해야 하는 일이 왜 필요한가?

 

이것은 우리가 쉽게 이얘기 해서 이겁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 보면 법전이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계약 법전, 두 번째 신명기계 법전, 세 번째

거룩함의 법전이 있습니다.

 

※ 모세 5경의 법전: 1) 계약 법전. 2) 신명기계 법전. 3) 거룩함의 법전

 

이 거룩함의 법전에 주로 법전에서 사용되는 말 마디가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 이 거룩하게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돼요? 뭔가 하느님께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구체적인 행태가 뭐 희생 제물을 바친다던가 혹은 뭐 다른 예식을 통하는

것. 유다 전통 안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속죄 예식입니다. 스스로 나의 때묻은

것을 다 이렇게 없애고 거룩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속죄 예식.

 

※ 사제들의 전통: 속죄 예식을 담당

 

그 모든 것을 맡아서 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제들이 전통이지요. 이 사제들이

해야할 일은 결국엔 번제물 이런 것 다 치우고 궁극적 목적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제직의 궁극적 목적: 우리 모두가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

 

거룩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

 

요한 묵시록의 표현으로 보면, 저 뒤에 21장 22장에 보면 천상 예루살렘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예,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뭐 다른 얘기입니다만 이 사제가 호세아에서도 나타나고, 이사야서도 나타나고

예언서에 보면 뭔 번제물이 소용이 있냐?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냐? 라는

하느님의 꾸중섞인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사제가 필요로 하고, 사제를

통해서 번제물을 같다 받치는 거예요. 제물만 갖다 바치면 나는 죄 씻음을 받은

거예요. 착각이죠?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인데. 창조주 하느님인데.

 

우리가 요한 묵시록 4장에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표현 되는데.

모든 것을 만든신 분께 어떤 것을 갖다 드려야 새로운 것이 겠습니까?

우리의 찬미는 하느님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니 라고 미사 경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우리는 새로운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 라틴어 속담에 "니힐 로비 숩 솔레" 라는 말이 있는데.

니힐, 아무것도 아니다. 로비, 새로운 것이 없다. 숩, 뭐 아래에.  쏠래, 태양.

 

※ 태양 아래에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라틴어 속담)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 만들어 주신

것이고 그 중에 우리 일부를 봉헌하는 건데 그 봉헌 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 사제를 통해서만 그렇게 그렇게 막 할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희들의

지혜가 중요하다. 너희들이 나에게 다가 올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 성전 정화사건 우리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 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물론 그 마음이 완전 넘쳐서 형식으로 되면 이 형식이 얼마나 값지겠습니까?

마음도 없는데 형식 갖춰라 그러면 그거는 종교가 그렇게 하면 그거는 폭력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키워야 되요. 꽉찬 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야 됩니다.

 

그 사랑이 사제의 나라가  되는 것이죠.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일치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이 일치를 처음으로 열어 주신 분, 예수님의 역활,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예수님, 부활하신 분이 하는 일, 당신을 온전히 다 바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과 일치에로 이끌어 주신다.

 

일치 해야 한다는 것이 곧 하느님께 찬미 찬송을 부르는 것.

그것이 사제의 일처럼 모든 세상 민족이 그렇게 해야 한다. 사제의 일처럼. 

 

※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예수님의 역활 당신을 온전히 다 바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이끌어 주신다.

 

예, 그 예수님 시대에 율법이 되는 큰 어떤 두 갈래가 있었습니다. 관점이.

모든 사회는 그런 것 같애요. 모든  사회는 소위 진보 개혁과 혹은 보수,

이렇게 나뉘울 수 밖에 없어요. 어떤 상황을 어떤 사건을 바라보더라도.

 

예수님 시대에 율법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혁적이고 조금 열려져 있는 그런

부류가 있는 동시에 정말 철두 철미하게 이 단어 이거 하나, 글 한 획도 바꿔서는

안되고 똑같이 지켜 내어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이 율법의

두 가지 관점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그 두가지 관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온전히 당신을 다 바치는데 저 14장에 가면

어린양이 가는데 14만 4천명이 어린양 뒤따라 막 걸어가요. 마치 그 사랑하는

연인끼리 막 이렇게 걸어가는 모습. 그런 걸 연상시킵니다.

 

요한 복음 같은 경우 요한계 문헌에 보면 이 사랑이라는 말, 사랑의 개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율법을 바라보는 두 가지 중에 조금 열려 있고 개혁적인

어떤 거기 표현이 어떻게 하냐 하면 그 쪽에 있는 랍비들이 율법은 하느님과

같이 걷는 것이라고.

 

걸어 가면 뭐냐? 이 친구가 자연스럽게 엠마오로가는 두 자제 한번 떠올려

봅시다. 예,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가는데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

하고 있느냐?고 그러시면서 성경에 대해서 다 풀이해 주셨지요?

 

예, 그렇게 걸어가는 두 제자들, 이 모습을 떠 올려 보세요.

성경 말씀을 예수님한테 들으면서. 유법이란  그런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느님께 막 이끌고 갑니다. 어린양이 이끌고 가면서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따라서 걸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그런데 글자 하나 하나  어기면 안돼. 너 그거 잘 못했어. 그건 정말 아니야.

요 고대로 따라야 돼... 안식일 요거 해야 돼! 요거 안하면 저 절단 나!

심지어 안식일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어떤 법이 있냐하면 돌에 깔려 죽은

사람이 있으면 돌을 몇개 치워보고 죽을만 하면 놔두고 죽게. 살만하면 꺼내주고.

 

그러니까 먼저 깔린 사람을 구해 주기 전에 이 돌 두세 개만 치워 보고

이상하면 이거 안식일 어긴다는 거죠. 살만하면 구해 주고 죽을만하면 냅둬라.

이런 규정까지 있다 말입니다. 그걸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그건 걸어가는 게

아니겠지요?

 

역동적인 움직임에서 늘 살아 있는 그런 말씀을 함께 하느님과 따라 가는 게

아니겠죠? 갇혀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은 이렇게 움직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5장 분석을 한 번 구체적 텍스트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늘 역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움직이는 모습.

 

이 4장에 있는 어좌에 앉으신 분은 딱 정적으로 이래 큰 할아버지처럼 떠억

앉아 있는데 예수님은 막 움직여요. 움직이는 예수님을 우리가 한 번 보겠는데

첫 번째로 하느님께 일치 시키시는,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당신 피로써,

요게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그런 분을 우리는 어떻게 찬송할 수

있는가? 5장 13절에 보면

 

※ 묵시 5,13: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자, 이 영광 찬미,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라고 말하는 거는 이 하느님께

찬미 찬송 드렸던 4장에 나오는 그런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하느님께만

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전례의 노래였던 것이죠.

 

그런데 여기 누가 더 계시냐? 어린양.

예, 이러한 분,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예수님 그분은 곧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과 똑같은 그러한 그 영광을 드려야만 된다.

 

※ 우리들 이끌고 가시는 예수님 그 분은 곧 하느님이시다.

   (예수님께) 하느님과 똑같은 영광을 드려야만 된다.

 

예, 그래서 같이 놓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같은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 이렇게 우리 이런 예수님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7장 10절에 보면

런 예수님께 구원은 당신 것이오. 구원은 어좌에 계신 분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 묵시 7, 10: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러한 분을 바라 봤는 게,

"아, 내 못살겠습니다. 내 인생살이 힘듭니다. 내 상황이 힘듭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께 일치시키시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당신, 구원 주신 당신 우리 찬미 찬송 드립니다.

구원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요렇게 돼 있구요. 이렇게 감사드립니다.

 

찬미 찬송드리면 우리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떠할지라도 다 다를지라도

어떤 말씀을 우리가 드릴 수 있냐하면 11장 15절에 보면 세상 모든 나라가,

세상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 묵시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이게 뭐냐? 자, 제가 어떻게 사는지 여러분 아세요? 모르시죠?

네, 저는 우리 본당 소개 좀 해야죠. 대구의 구암 성당이라는 곳에 보좌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주임 신부님 모시고 우리 공동체가 아주 잘 이렇게 예쁘게 정말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는데 제 상황에 대해서 여려분들이

모르시고 여러분 역시 우리 각자도 서로 잘 모르시고 우리 신자분들은 저는

더더욱 모르겠고 너무 다 몰라요. 모르는데 각자는 다 다양하게 자기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자기 행복이 있을 수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고, 슬픔이 있을

수 있고 다 다양해요.

 

그런데 세상 모두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 모르지만

하느님과 이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으면 이분 안에서 우리 모든 이 세상

나라는 어떻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나라, 하느님 나라로 보인다는 것이죠.

 

※ 세상 모두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 모르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으면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든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 하느님 나라로 보인다는 것이죠.

 

 

요 두 가지 차원을 잘 보셔야 됩니다. 나중에 가서 계속 반복될 껀데

첫 번째 죽음이 어떻고, 두 번째 죽음이 어떻고, 첫 번째 부활, 두 번째 

부활이 어떻고, 이런 표현도 나옵니다. 이게 뭐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요한 묵시록 안에서 현실을 현실 그대로만

바라보는거예요. 아니면 현실을 정말로 하느님 관점으로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관점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세상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컨데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런데 차는 다 망가졌는데 사람은 한 분도

다치지 않았어요. 그때 어느 신자분이 계시다고 합니다. 그분이 하느님께서

도와 주셔서 한 명도 안 다치고 이렇게 큰 사고 안 나고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거예요.

 

자, 혹자는 '종교는 아편이다' 해가지고 또 사고는 사고지 뭐 뭘 그걸

감사하다고 생각하냐고 바라보는 분명히 믿지 않는 분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이 보는 관점은 다릅니다.

 

사고가 크게 안 나서 정말로 다친데가 없어서 너무 감사 합니다라고 말할

있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여기 물잔이 있는데 물이 가득차 있어요.

그런데 요렇게 가득차 있어도 여기 빈 틈이 있지 않습니까?

왜 가득 안 따르고 왜 비어 놨느냐고 바라보니 적은 거예요.

 

그런데 어이구, 이렇게 많이 따라 놓으셨네. 어유, 고맙습니다 라고 같은 양을,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판단 하는 것. 우리는 그래서 긍정적으로 우리 생활이

힘들다 해도 그 고통을 넘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과

일치 하면서 기쁨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하느님과 어린양이 함께 있는, 함께 한다면 세상 모든 것은 부활의

기쁨이 가득찬 곳이다. 설사 내 삶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할지라도 그래서 많은

성인들이 그랬지 않습니까?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다고.

 

내가 어떻게 바라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세상 문제를 다른 각도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요. 늘 안 되요 보면.

살아가면서 저도 아직 어리고 철이 없습니다마는 마음을 이렇게 기도하면서

뭔가 이렇게 다시 한 번  다잡아 볼려고 노력하지마는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하느님 계심을 느껴요. 하느님 계심을 딴데서

신비한 때문에 느끼는 게 아니라 내가 한계가 있어 가지고 못하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 예수님께서 실제 보여 주시는 것들에서

"야,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이런 것을 느끼는데 우리가 그래서 세상을

바라볼 때 있어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어때야 되는가?

 

그건 또 우리가 '세상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라고

외치는 11장 15절의 그것은 뭐냐? 예수님과 일치 하려는 그 노력,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예수님과 일치하려는 노력,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19장 6절에서 7절을 보면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어린양과 혼인잔치.

 

※ 묵시 19,6-7: 어린양과 혼인잔치.

 

자, 그분만을, 어린양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꿈을 살려고 노력하고,

부활하신 기쁨을 살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결혼하는 거예요.

이 혼인의 개념은 우리 구약에서 워낙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히 제가 보좌 신부하니까 우리 중고생들 한테 19금이라고

읽지 말라고 그러는데. 아가서 ^*^~~~

예, 아주 예, ~ ^*^~~~ 화끈 화끈하게 애들 앞에서 한번 읽으면...

그 얼마나 사랑의 그 부부관계의 어떤 그런 끈끈한 사랑을 드러내는.

 

 

저는 아직 경험이 없습니다마는 가능성 상태에 있지마는 ^*^ ~~~

하느님과 결혼한 관계로.

 

예, 그런데 그러한 그 어떠한 사랑의 일치, 정말 그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일치가 있으면 이게 혼인이다.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도 저 하늘에서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하나의 도시가 내려오는데 이 어린양의 부인으로 나타납니다.

예, 신부.

 

※ 천상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로 나타남.

 

신부, 그러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하고 어떤 아시는 분이 웨딩샵에 다른 신자분과 함께 거기에 갔는데

워낙 성당에 열심히 하시는 분이니까 이렇게 보다가 뭐 고르고 있는데

"어머, 신부님! 어서 오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거예요.

 

웨딩샵에 웬 신부님이  왜 들어 오시나 하고 돌아 보니까? ^*^ ~~~

예, 우리 신랑님 신부님... ^*^ ~~~ 신부님이라  그러죠? 이 신부 말고.

어린양의 신부, 웨딩 드레스 입을 수 있는 신부, 그 신부의 어떤 용어로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 모습이거든요.

 

예, 그런 결혼의 모습으로 우리가 표현이 된다.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죠. 그 어린양의 신부가, 그 신부가  같은 성도들이 "주 예수여 오소서!"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이요.

 

그 첫날 밤에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그 어떤, 얼마나 간절하겠어요.

이것도 저도 모르는 거지마는 ^*^~~~  그냥 이론적으로나  ^*^~~~ 

이렇게 예, 아주 고 부분에 대해서 아쉬워요. ^*^~~~

 

사랑에 대해서 인간적인 이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과

일치 한다고 베네딕도 교황님께서 쓰신 회칙에 보면 그런 게 있는데

육체적 사랑이 결국에는 신적 사랑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 사람을 서로가 사랑해 보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 사랑을

못 느끼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요 우리 신부님들이 상당히

약점(?)이 있다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 결혼하신 분들, 그리고 결혼 안하신 분들  결혼하셔

가지고 아들 딸 많이 낳고 그 사랑을 우리 성직자, 수도자들 한테 나눠주시는

그걸 하셔야 돼요. 그게 여러분들의 몫이고, 또 저희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몫이고 그런 것 같습니다.

 

자,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분과 일치, 하느님과 일치의 관점에

대해서 몇 구절을 가지고 살펴 봤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수님을

드러내는 호칭들이 있습니다. 

 

* 예수: '구원하시다'란 의미 = 여호수아

* 그리스도: 마샤(메시아: 기름을 붓다) 

마샤라는 히브리 동사 메시아가 되고 메시아를 그리스말로 번역하면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음은 결국 하느님께 선택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죠.

우리 사울, 다윗, 기름 부음을 받고, 그건 하느님께 선택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충실힌 증인: 요한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시다.

* 죽은이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태어난이: 첫 번째로 부활하신 분.

* 땅의 임금들의 지배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지배자(?) 좀 억양이 어색합니다만.

땅의 임금들의 지배자란 임금 중의 임금이다 라고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 땅의 임금들의 지배자: 임금들의 지배자: 임금 중의 임금

 

* 그 다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당신 피로 씻으신분:

  사랑으로 당신을 다 바쳐서 우리를 살리신 분

 

※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당신 피로 씻으신 분:

    사랑으로 당신을 다 바쳐서 우리를 살리신 분

 

죄를 씻으신 분, 우리 죄를. 죄라는 것은 '하마르티아'인데

제가 신학교 때 우리 성경 가르치시는 분이 우리 분도회 장학권 신부님이라고

계시는데 이 분이 늘 요 대목에서는 아주 목소리를 강하게 '히마르티아!'하고

이렇게 하셔요. ^*^ ~~~

 

늘 이 단어는 절대 잊혀지지가 않아요. 이게 뭐냐?  죄란?

그분이 강조하셨던 게 윤리 도덕적인 뭐 우리가 법에 따라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느님과 나 사이를 이렇게 가로막는 것입니다.

 

※ 하마르티아(Hamartia): 하느님과 나 사이를 가리는 것(죄)

 

아무리 옳은 것을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것을 앞에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느님을 이정(移定) 한다면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잘 한다. 나는 이거다. 예컨데 우리 신심 활동들, 좋은 거죠.

 

신심 활동들 우리 교회의 다양한 그 신심 활동들 너무 좋습니다.

나는 이래야 되고, 너는 이래야 되고, 또 너도 이래야 되고,

이런 관점으로만 있으면 신심 활동이 목적이 되는 거죠.

신심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을 하느님을 이정(移定)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죄를 씻어 신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데 더 가깝게 만날수 있도록,

우리 원죄가 하느님과 멀게 했잖습니까? 가깝게 할 수 있는 것.

 

※ 죄를 씨으시다: 하느님을 만나는데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

 

예컨데 우리가 많은 경우에 레지오 활동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레지오 활동들을 하시는데 있어서 많은 분들이 열심히 하느님을 만나고

계시지마는 간혹 이런 분들 묵주기도 하면서 성모님이 목적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레지오 하시는 분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모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예수님께

나아가는 거거든요. 성모님이 사령관이시죠? 성모님이 이끌고 어디로?

하느님, 예수님께로 나갑니다. 그런데 성모님께 비는 거예요.

 

"성모님 요거 해 주세요!"  이런 관점을 가진 분들을 간혹 만납니다.

이거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윤리도덕적인 잘잘못이 아니라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는 것. 그것을 빨리 없애야 되는.

 

예,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참된 분. 예수님은 참된 분이십니다.

진리 자체이십니다.

 

* 진리: 참으로 정말로 옳으신 분이십니다. 

 

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오직 참된

그분만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우리 모습이 되어야 되겠구요 이 호칭에서

 

※ 예수님은 참된 분이십니다. 진리 자체이십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오직 참된 그분 만을 생각해야 한다.

 

* '하느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라는 창조의 원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뭐냐? 요한 복음에도 말씀은 하느님이셨고 하느님이 말씀이시고,

태초에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다. 예, 창조의 원리가 되시는.

 

※ 하느님의 창조 원리: 말씀은 하느님이셨고 태초에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다.(요한 1,1-3)

 

*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자손

이 표현은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메시아적 표현이죠.

 

※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자손(묵시 22,16)

    유다 가문에서 사자같이 힘이 있으신 분이 구약의 전통.

 

유다 가문에서 정말로 사자 같이 힘이 있으신 분이 구약의 전통입니다.

메시아를 드러내는 예, 그 다음에 하느님의 말씀, 로고스.

이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 로고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그 다음에 임금들의 임금이고, 주님들의 주님이라는 표현 그 다음에 알파와

오메가. 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이것은 하느님께만 적용되죠?

구약전통에 의하면.

 

※ 알파와 오메가(묵시 1,8) : 구약 전통 안에서는 하느님께만 적용되었으나

    묵시록에서는 예수님께도 적용이 됨.

 

하느님께만 되어 있는데 지금 예수님께도 적용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 하지마는 요한 묵시록은 한 분 하느님이신 유다 이즘에서

말하는 한 분 하느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요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라고 우리가 저번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 수게 아침에 빛나는 별,

 

* 아침에 빛나는 별

※ 빛나는 샛별(묵시 22,16): 아침에 빛나는 별.

 

요한 묵시록에 아침에 빛나는 별이라는 거 요한계 문헌 안에서 우리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낼 때 보면,

꼭 빛이 있을 때만 나타 납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제자들과 만나서 아침 식사를 하시는데 제자들이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고 없으니까 실망하고 모든 게 이제 끝장 난 상태에서

어떻게 하느냐?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 갑니다. 고기 잡으러 가죠?

 

고기 잡으러 가서 그물을 칩니다. 밤새 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약간은 얄미울 때가 있는게 ^*^~~~  진작 나타나 가지고 좀 확 건져주지

꼭 밤새 고생하고 난 후에 나타나서 저기 한 번 쳐봐라 하시면서.

 

자, 사실 밤샘해서 지칠대로 지쳤는데 저기 한 번 쳐봐라 하면?

" 아, 쳐도 없더라!" 고 하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이죠?

예, 더구다나 낯선 사람이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낯선 사람이고, 나는 어부인데 밤새 내가 물고기 있을만한 데는

쳤는데. 없는데 나타나가지고 저기 좀 쳐봐라 그러면 말 듣겠습니까?

잘 안 듣지요? 그래도 치니까 엄청난 고기가 잡혔지요.

 

그 때가 해가 떠 오를 때 입니다. 여기에 그 아침에 빛나는 별.

아침에 떠오르는 이 빛. 빛이신 분. 요한 복음의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우리가 잘 아는 영지주의 영향으로 이원론적인 어떤 개념이 영향을 미쳐서

요한 복음이 탄생을 했다.

 

그래서 이 요한 복음의 빛과 어둠이 대비 하는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분은 빛 자체 이시다라는 거죠.

요한 복음 1장에도 있잖아요.

"빛이 어둠속에 왔으나 어둠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 요한 1,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도 같은 관점에서 아침에 빛나는 별 이라고 그렇게

22장 16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요렇게 여러 가지로 호칭을 봤았는데 요것이 어디에 집중되느냐?

 

보통 3장 2절까지 다 집중됩니다.  22장 전체에 걸쳐서 이 많은

호칭들이 앞에 다 집중됩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가?

요한 묵시록은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돼 가지고 새로운 장면들이 

막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설보면 다 뭐랄까?

 

다 드라마 좋아 하시죠? 드라마 안 좋아 하세요? 아, 안 좋아 하시는구나.

아, 우리는 성경만 보니까? ^*^ ~~~

예, 성경만 보니까 드라마 같은거 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죠? ^*^~~~

 

제가 유학할 때는 뭔가 재미 있는 드라마가 있으면 그것 뉴스에난 것 아닙니까?

그거 딱 봐 났다가 시험이나 뭐 리포트나 하나 크게 써 놓으면 좀 쉬어야

되잖아요. 그 때 24부작, 뭐 36부작 한꺼번에 받아 가지고 옆에 컵라면

쌓아나 놓고 먹으면서 한방에 다 보고 이랬었어요. 학생 때.

 

그런데 이 요한 묵시록 전체는 이야기가 그렇게 드라마처럼 뭘까?

뭘까? 막 이렇게 보는게 아니라 처음에 이런 예수님, 이러한 호칭들,

이러한 것을 한 번에 다 해나놓고 나머지는 선포인거예요.

바로 이런 예수님이시다.

 

바로 이런 예수님이시다. 다른 표징, 다른 상징으로 계속해서 반복해서

들려주는 그런  것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하나의 선포입니다.

 

※ 요한 묵시록은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이러한 예수님, 이러한 호칭들을 한번에 모아 놓은 뒤,

나머지는 선포예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이다. 다른 표징, 다른 상징으로

계속해서 들려주는 하나의 선포입니다.

 

자, 말씀을 낭독하는 이, 듣는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일치 시키시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빛으로써 우리에게 이 세상살이가 어려움과

고통이 아니라 바로 부활의 기쁨에 살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라는

그 장엄한 선포가 바로 요한 묵시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여러 몇군데 텍스트를 보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호칭을 요렇게 간략하게나마 전체를 보면서

우리 머리 속에 담아야할 내용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한 분이시고, 하느님께 우리를 일치 시키는

분이시고, 그 일치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고, 세상살이의 모든 것을

그런 하느님과의 일치 부활하신 분과의 일치 안에서 바라보도록

부활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그렇게 우리를 이끄는 책이 

바로 요한 묵식록이다 라는 관점을 우리 머리 속에 딱 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자, 그 호칭들 중에 가장 중요한 호칭이 있어요.

어린양이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의 호칭을 한 번 길게 한 번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어린양의 호칭이 계속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출처 : 여정성경공부
글쓴이 : 하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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