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스크랩] 제5강 요한 묵시록의 현재|박병규 신부/요한묵시록

윤 베드로 2016. 8. 28. 14:07

 

 

 

제5강 요한 묵시록의 현재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마치 어제 본 듯 되게 친근해 졌어요! 그죠?

예, 벌써 다섯 번째 입니다.

 

우리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봤던 것이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

그 처음 들어가는 단계를 지난 시간에 우리가 봤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예언서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스스로가 예언의 말씀이라고 1장 3절에서

 

※ 묵시 1, 3 :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 말씀을 너희가 잘 듣고 그래서 너희들이 행복해 해라.

그런데 행복의 조건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죠?

 

요한 묵시록 안에 어떠한 행복의 요소는 뭔가 풍성하게 뭔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힘들고 목마르고 그래서 힘겨운 시간을 조금 조금씩

인내를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행복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분과 함께.

 

그래서 그 행복을 지금 이 자리에서 누리고 살아 가는 것.

그것이 예언서의 어떤 특징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을 곱씹고

실천하고 살아가도록 또 노력하시고 그렇게 일깨워 주시는 분들이

예언자들이었다.

 

특별히 우리 요한 묵시록에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같은 형제 자매로써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하신 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라는 내용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습니다.

 

오늘은 그러면 지금 이 자리라고 계속해서 제가 강조를 했는데.

지금 이 자리. 요한 묵시록을 읽었던 당시의 그 사람들, 그 독자들.

 

제가 지난 시간에 이 책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같은 독자다 라고 제가 말씀 드렸는데 그렇지만 그네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있을 것이고,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이 성서를 공부하다 보면 이 삶의 자리라는 단어를 아주 강조를 많이

합니다. 뭐 독일어가 워낙 성서학에서 영향을 미친게 많기 때문에

독일어로 시침레벤이라는 이 말을 씁니다. 말 그대로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계속 강조 합니다. 

 

※ 삶의 정황(독일어 Sitz im leben)은 성서 비평학에서 쓰는 개념이다.

  독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삶의 자리'라는 뜻이다.

 

삶의 자리를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성경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요한 묵시록도 역시 그 당시에 어떤 삶의 자리가

있었고, 그 당시에서 어떤 소위 지금 이 자리가 어땠는지를 살펴

봄으로써 요한 묵시록의 내용을, 예언서로서의 그 내용을 좀 더 잘

알 수 있다라고 우리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자, 요한 묵시록의 현재는 어디인가?

요한 묵시록을 보통 리옹의 이레네오 이분이 2세기 교부죠.

이분이 요한 묵시록이 90년대의 쓰여진 것이다. 

 

※ 이레네오(2세기 때의 교부)  

   요한 묵시록이 서기 90 년경에 저술되었다고 주장

   (도미시아누스 황제 재위 기간)

 

90년대라는 그 시대적 배경에는 첫 번째로 도미시아누스 황제가

다스리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 학자들간에 많은 논란이

있는 박해가 있었다, 없었다.

 

네로 황제는 아시죠? 로마를 확 불살랐던, 네로 황제.

그것을 자기가 해 놓고 그리스도 신자들이 했다고 덮어 씌여가지고.

예, 그런 황제를 우리가 잘 압니다.

 

도미시아누스 황제 역시 뭔가 강한 물리적인 박해인 막 사람을 죽이고

막 이랬던 박해가 있었나, 없었나를 가지고 자꾸 논란을 이렇게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어떤 학자들은 당시에 그런 물리적 박해는 없었다.

근데 왜 요한 묵시록은 그렇게 물리적으로 뭔가 나팔 불 때마다 뭔

재앙이, 대접 부울 때마다 무슨 재앙이. 이런 것들을 왜 표현 했는가?

 

이것은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지금 머리속에 둘 것은

물리적인 박해보다 정신적 박해가 더 강하다. 이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읽었던 당시 독자들이 어떤 시대적 상황을

살고 있었냐를 우리가 지금부터 배워나간다면 왜 정신적 박해가 

더 강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보면 우리가 첫 번째 이 도입부분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서

뭐 황금 띠를 두르고 긴 예복을 입고, 이런 장면들이 딱 끝나고 2장부터

딱 펼쳐지는 것이 일곱개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입니다.

 

※ 묵시록 2 ㅡ 3장 :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간

 

이 편지. 편지와 서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구별을 한 번 해 볼까요?

편지는 뭐겠습니까? 우리 말로는 잘 구별이 안 되는데 편지와 서간을

왜 따로 이렇게 사용 할까요?

 

우리 사도 바오로의 편지라고는 잘 하지 않지요. 왜 서간이라고 할까요?

뭐 그렇다고 제가 꼭 요래 구별해야 됩니다는 것은 아닌데 왜 구별을

이렇게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고 있을까? 라고 한 번 생각해 좋겠는 게.

 

이 편지라고 할 때는 예컨대 연애 편지도 있을 수 있고, 아버지가

아들한테 보내는 편지도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연인끼리, 혹은 다른

친구끼리. 이 사적인 느낌이 들죠? 개인적인 안부 묻는 것.

 

그러한 편지는 사적인 거지만 서간이라고 했을 때는 약간 공적인 거예요.

교회 공동체에 이렇게 전해 주는. 공동체에 이렇게 전해 주는.

공동체 안에서 정말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되는 것.

그것을 우리가 서간이라는 표현으로 한 번 이해해 볼 수 있다.

 

자, 요한 묵시록 역시 서간이 2장, 3장에 걸쳐서 등장을 합니다.

누가 보내느냐?  우리가 나중에 서간도 구체적으로 한 번 분석을

해 볼 겁니다. 그런데 누가 보내느냐?

 

각 교회에 보내는 서간마다 표현이 아주 다양해요. 뭐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뭐 죽음이 승리를 어쩌구 이렇게 표현하는데 한 마디로

표현 하자면 1장에 나타난 사람의 아들이 다양하게 표현돼서 등장하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곧 예수님. 예수님이 써 보내시는 거예요.

 

거기에 보면 구체적인, 교회의 구체적인 어려움들이 적혀져 있습니다.

예컨데 황제 우상 숭배로 억압 받는 것. 다른 어떠한 이단들로부터

억압 받는 것. 니콜라오스파 뭐 그러면서 등장을 하기도 하고요.

또 자기들끼리 이렇게 상거래를 하는데 동업조합을 형성해서 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 하는 것. 또 이상하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 주교의 아내라고 우리가 보통 해석이 되는 어떤 여자가 이제벨이라고

하는데, 이제벨은 구약의 인물입니다. 그것을 이제 신약으로 가지고

와서 우리도 왜 나쁜 사람하면 뭐와 같다라고 비교하는 것처럼

이제벨이라는 이름을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이 물론 형상을 자주 이렇게

묵시적인 것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못 알아 듣는데 한 번 분석을 해

보면 바로 그당시 일곱개 교회가 가졌던 구체적 현실의 문제들을 서간,

일곱개 서간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 바로 그 당시 일곱 교회가 가졌던 구체적 현실의 문제들을 서간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2장 3장까지도 구체적인 현실이구요.

4장부터 또 하늘이 열리고 그러니까 아, 이제 하늘로 갔구나.

이제 땅은 모르겠다. 구체적인 현실은 모르겠다하면 좀 오산인 게

그 묵시 문학적인 여러 표징으로 또 땅의 문제를.

예컨대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막 세상 사람들이 살해되고 사흘

반만에 또 하느님의 영이 들어가서 또 살아나고 이런 모습들.

 

※ 묵시 11, 11 :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 섰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어린 양이 19장에 가면 백마탄 기사로서 등장하는 것.

현실의 모습.

 

※ 묵시 19, 11 - 19 : 흰 말을 타신 분

 

또 5장에 어린양이 살해되는 모습이 예수님이 어린양인데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구요.

 

※ 묵시 5, 6 :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 사탄의 무리라는 그런 단어가 서간에 등장 합니다. 사탄의 무리는

유다인을 지칭하고 있거든요. 유다인과의 갈등. 더 큰 것은 악의 무리인

13장에 나타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이것은 로마를 지칭합니다.

 

※ 묵시 13, 1 - 18 : 두 짐승

 

또 18장에 대 탕녀는 바빌론, 로마제국 자체를 의미합니다.

 

※ 묵시 18, 1 - 24 : 바빌론의 패망

 

이러한 표현들이 그 당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 겪었던 삶의

어려움을 다 여러 가지 상징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왜 이런 다양한 이렇게 묵시적인 이런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표현들로 이렇게 표현 했을까?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척하면 그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려 볼께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너무 잘 아는 거지요. 빼앗긴 들은 뭐를 의미 합니까?

예, 식민지로 살아간 우리 나라, 봄은 해방을.

우리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을 다 알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도, 독자들도 이렇게 형상으로 표현 했지마는, 다른 표징으로

표현 했지마는 들으면 아, 안다.

 

그래서 666 이라는 숫자, 이것도 어떤 사람을 지칭 하는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라고 요한 묵시록이 이야기합니다. 생각하면 안다는 거죠.

 

※ 묵시 13, 18 :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르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입니다.

 

이걸(머리) 가지고 있으면. 장식품이 아닌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다 알 수 있는 쉬운 것들이었단 말이죠. 구체적인 현실의 그런 것들을

암시적으로 상징 안에 다 담았다.

 

자, 지금 우리 그래서 구체적인 현실, 그리고 그 역사가 어떤 역사였는가?

다섯가지로 한 번 정리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이 하 ~, 이런 어려움, 이거 안타깝다.

너무 슬프다.  이것의  첫 번째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의 머리속에 아주 강하게 각인 된 것.

이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요한 묵시록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 호칭들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 했던 어린양, 어린양이 어떻게 등장 합니까?

 

'살해 되었으나 서 있다', 죽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낸다. 

그래서 요것이 암시하는 바가 뭐냐? 요한 묵시록을 듣고 읽고 했던

그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아주 마음

속에  담고 있었다.

 

1) 예수님의 죽음. 예, 우리가 뭐 이 날짜를 정하고 언제 돌아 가셨느냐?

이렇게 생각 하는데 요한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대략, 대략입니다.

성서는 연도가 정확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대략 우리가 짐작해 봅니다.  30년, 예컨대 4월 17일 정도가 아닐까?

이건 왜냐? 파스카, 과월절과 연결되서 한 번 따져보면 그럴 것이다 라고

짐작을 하게 되지요. 이 사건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고 따르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이 돌아 가심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죠?

예, 물론 부활 하셨고, 그분에게 믿음을 둔다고 하지마는 내가 만져지지

않고, 내가 정말 이렇게 함께하지 못하는 이런 예수님. 그래서 요한

복음도 거의 요한 묵시록 같은 시대에 적혀 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표현 할 때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요한 20, 29 :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고 전에 제자들에게 손 발 다 보여 주셨거든요. 이게 뭐냐?

실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아 가셨던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다라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죠. 그래서 요한 복음이든 요한 묵시록이든 쓰여졌을

그 때는 이 실제 살과 정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님이 안 계신 거예요.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러니까 요한 복음에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요한 복음이

그렇게 적었던 거예요.

 

예, 우리 믿음으로, 살로 체험은 못하지마는, 이렇게 부딪치지는 

못하지마는 그 예수님을 믿음을 가지고 꼭 붙들어라 라는 그런 어떤

바램이 요한 복음에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자, 첫 번째, 어린양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 묵시록은 구체적 현실을 얘기하고 있구요.

 

두 번째, 아이쿠야, 이제 예수님 돌아 가시고 사도 바오로가 뭐 합니까?

전교하죠? 신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은 뭡니까?

예 가끔씩 마태오 복음입니다 라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제일 먼저 있지요. 신약 성경 안에. 그러나 먼저 쓰여진 것은

데살로니카 1서 입니다. 그게 뭐냐? 서간이 먼저 쓰여 졌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떠나시고 우리 곁에서 살과 피를 가지고 안 계시는

그 때부터 우리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은 주님 부활

하셨다는 것을 설교하기 바빴고 전교하기 바빴다는 거예요.

 

전교를 막 해나가면서, 막 하다보니까 이 목격 증인들 실제 예수님을

바라봤던 증인들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 둘씩 이제 없어지게 되니까.

"아이쿠야 큰일 났다. 빨리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해야 되겠다!"

라고 해서 적은 것이 복음서들이지요.

 

그래서 70년 이후부터 쓰여진 게 복음서이지요. 그래서 제일 급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전하는 것. 그 전하다 보니까 어떻게?

사도 바오로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지요.

 

이 사도 바오로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탁 떠오르는

이야기가 프랑스에서 봤던 어떤 영화예요. 복음적인 줄 알고 들어

갔다가 아, 이 완전히 아니구나라고 봤는건데 아주 우수운 이야기인데

이게 옛날부터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통상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딱 못을 박혔어요. 못에 박히시고 난 후에 복음서에

뭐라고 그럽니까? 로마 병정들이 "니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한 번

내려와 봐라." 그러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탁 박혀 있다가 열

받으신거예요. 이건 영화입니다. 복음이 아니고 영화입니다. 영화.

 

예수님이 "하,~ 내려가, 말어 이거!" 하면서 화가 나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내려 오신 거예요. 내려 와서 딱 쳐다보는데 예수님 아직

십자가에 붙어 있어요. 이게 뭐냐? 당시 우리 교회 안에서 '가현설'

이라고 있었습니다.

 

아플때는 살짝 빠져 있다가 영광스러울 때는 살짝 몸에 들어가는 그런

빈 껍데기로. 실제 예수님이 살과 피를 가진 참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껍데기만 빌려 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단에서

출발해서 그 영화를 만든 것 같애요. 거기에서 내려 오셔서 보고

이제 떠나시는 거예요.

 

아휴 ~, 내가 부활해야 되는데.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완전히 죽어야 되는데 죽지 않고 내려 왔고. 그러니까 털레털레 갑니다.

밑에서는 울고 불고 난리 났습니다. 그 십자가에 가짜로 못 박혀 있는

예수님 앞에서는.

 

그런데 예수님 혼자 이제 터벅 터벅 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셨겠습니까?

너무 외롭고 힘들고 할 때 보통 어디로 갈까요? 예, 마리아 막달레나한테

가는 거예요. 우리가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도 보면은? 소설입니다. 소설.

 

이런 이런 단편적인 이단의 이야기를 엮어 가지고 마치 있었던 이야기

처럼 그렇게 꾸며 놓는데 그런 이야기를 다 줏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마리아 막달레나 한테 가가지고 마리아 막달레나 하고 결혼을 해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는데 남매를 낳은 거예요. 남매를.

 

그러니까 이제 오손도손 산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가고 있는데 하느님이

보니까 같잖치도 않은거예요. 너무 황당한거예요 너무 답답하구 아니,

쟤가 빨리 올라와 가지고 내 우편에 앉아야 될 텐데. 그러니까 하늘에서

화가 나니까 뭐라 할려고 번개를 내리 쳤는데 아 요게 누가 맞았냐?

마리아 막달레나가 맞은 거예요. 맞아 가지고 죽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홀아비가 이거 징징짜는 남매 둘이를 키우게 되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도 요셉과 성모님을 통해서 루카 복음에 보면 성전에

가십니다. 유다의 전통 아닙니까? 율법 학자들이랑, 대화하는 장면들을

우리가 압니다. 그쵸?

 

예, 그것처럼 이제 유다인이니까 애들 데리고 성전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났는가하면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 부활했다고 

"믿어시오! 믿으시오!" 이러는 장면이 옆에서 펼쳐지는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오로에게 달려가셔서 멱살을 잡고 내가

예수라고, 나 안 죽었다고 아직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막 그러면서 둘이서

엉켜 싸우고 아주 희안한 이야기가 영화에 표현이 돼가지고 거기서 꺼

버렸어요. 제가 더이상 안 봤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 잘못된 어떤 이단의

어떤 이야기를 엮어서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고 그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하고 강조드리고 싶음 것은 예수님께서 그러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사셨고 어떻게 부활 하셨나?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교회가,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 공동체가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노력했던 것은 바로 사도 바오로

같이 전교했다. 부활하신 분을 어떻게 전해 드려야 되는가?

막 전해 다니는 거죠. 너무 열렬히 전하다 보니까 사도 바오로는 몸도

안 좋은데 그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베드로는 또 이스라엘 땅 안에서 또 그렇게 제자로서

열심히 살아갔지만 두 번째 요한 묵시록에 나타나는 아쉬움이 안타까움이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를 합니다.

 

2) 베드로와 바오로 순교 (64년)

 

64년 또는 65년. 정확하게 그 시기는 우리가 탁 꼬집을 수 없습니다

마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를 하는 것? 11장의 두 증인.

하느님 말씀 때문에 증언하다가 목숨을 잃는 그 어떤 모습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세 번째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냐?

예, 요것은 그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그 갈등 바로 직전에,

지금 벌써 여기서부터(두 번째 베드로와 바오로 순교에서부터) 벌써

갈등들이 펼쳐집니다.

 

유다인들은 유일하신 하느님인데 하느님이 땅에 오셨다.

땅에 오셔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고 가셨다.

부활하셨다 이러니까 유다인들과 갈등이 시작되었죠.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아주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데 유다 1차 항쟁이 그것입니다.

 

3) 유다 1차 항쟁(66-70년)

 

70년에 유다 1차 항쟁이 일어납니다. 66년에서 70년까지 입니다.

2차 항쟁은 135년, 135년에 완전히 이스라엘이 망해서 외국으로 떠돌게

된 것이지요. 유다 1차 항쟁이 요한 묵시록의 그 독자들이 겪었던 그것의

안타깝고 너무나 슬픈 역사로 남아 있던 시간적 배경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렇게 유다인들 세계 안에서 또

유다계 외국에 있었던 사람들 소아시아 그쪽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다가 가장 강하게 부딪치는 부류가 있었으니 유다인과의 그런

갈등인 것입니다.

 

4) 유다인과의 갈등, 유다인/그리도인 

 

요한 묵시록 2장에 나타나는 서간에도 유다인들을 가리켜 사탄의

무리라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뭐가

떠 오르세요? 귀신, 더러운영, 막 희안하게 생긴 이런 모습들이죠?

 

그런데 사탄은 우리 말로 말그대로 '비방하는 자' 남을 비난하고

이러한 것이 사탄입니다. 자주 우리가 붕뜬 영적인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내가 비난하고, 본래 본 뜻을 왜곡하고, 바꿔버리고

그래서 아 ~  안된다고 내 뜻대로 하고 이러면 나는 사탄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도 그러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모르고

그러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여기서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니까 머리 속에 탁 떠오르는데 이게 욕입니다. 욕.

 

불경스럽게도 이 성경을 공부하는 요한 묵시록을 공부하는데 왜 이

욕이 떠오르는가? 당시의 그리스어에서 이 영적인 것이 어떤 그리스

철학, 문화에서는 최고입니다. 영육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의 어떤

철학의 영향이구요. 영적인 것을 갖대어 놓을 때는 그것이 더러운

영이다. 뭐 사탄 쪽으로 이렇게 몰고가는 것이 가장 안 좋은 욕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욕을 뭐로 합니까? 욕해보시라고 하면 못하지만 이런 말들로

표현하죠? 신발끈, 뭐 십자생,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욕들을 하죠?

그런데 대부분 성적인 것과 빗대어서 많이 욕을 합니다.

 

당시의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뭐 이런 쪽으로 욕을 합니다.

당시의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뭐 이런 쪽을 욕을 합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 했을 때는 엄청난 욕이 됩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탁 있어 가지고 그 뉘앙스 그대로 못 느끼겠지마는

어쨌든 욕보다 그 이상의 강한 타격을 주는 거예요.

'사탄아, 물러가라!'를 아주 점잖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예컨대 또 어떤 것이 있느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저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욕입니다.

예, 점잖게 번역해 놓으니까 그렇게 하지만 성경을 어떤 때 가끔씩

보면요.

 

야, 진짜 느꼈던 그 뉘앙스 대로 한 번 번역을 해 봤으면 완전히 욕도

많겠다 이런 생각도 들곤 합니다. 예, 유다인을 가리켜 사탄의 무리라고

하면 엄청난 비난이고 욕이겠지요?

 

왜 유다인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그런 강한 반감이 있었는가?

당시의 상황을 한 번 봐야됩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처음에

커나갈 때 아, 유다교 종파 중에 하나의 종파로만 생각 했습니다.

 

왜 유다교 종파가 크게 뭐가 있습니까? 유다이즘 안에 크게 알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 젤롯, 네개가 있지요?

그러한 종파인 줄  알았는데 인간인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하니까,

안되겠다 이건 우리 종파도 아니고 몰아내야 되겠다며 이단 취급해

버립니다. 이단 취급해서 완전히 갈라집니다. 언제?

 

90년에 완전히 갈라져서 그 때부터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박해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상처를 그 현실을 그리스도인들이 다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소수. 유다 공동체가 각각의

소아시아에서부터 각각의 디아스포라가 많이 형성되어썼는데 거기서

신앙을 가지고 막 일어나려고 그러는데 유다인들이 얼마나 이단이라고

박해를 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 갈등들을 우리가 요한 묵시록

에서도 볼 수가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처음에 말씀드린 도미시아

누스 황제의 어떠한 정신적인 박해 입니다.

 

5) 도미시아누스의 박해 

 

이 황제가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불렀느냐?

'도미누스 에 데우스 노스떼' 라고 했습니다. 라틴 말인데.

도미누스 = 주님,  테우스 = 하느님, 노스떼 = 우리들의.

우리들의 주님 이고 우리들의 하느님이라고 스스로 자기를 이야기 합니다.

 

※ 로마 제국의 도미시아누스 황제

   스스로를 신이라고 지칭함.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인데, 내가 신인데 너희들 빨리 경배하고 숭배를

해야 된다. 그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요구를 하는 거지요. 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도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들이 많이 세워집니다.

가서 빌어라 이거죠, 신으로써 모셔라 이거죠.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겠습니까? 뭐, 할 수야 있겠죠.

그러나 신앙을 버리지 않는 다음에야 그렇게 하면 안되죠? 그죠?

예,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다섯 가지 시대적 배경 안에서 살아 갔던

사람들이 바로 그 요한 묵시록의 독자들, 그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의 시간적 배경입니다.

 

1) 예수님의 죽음.   2)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60년).

3) 유다 1차 항쟁(66-70년).  4)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

5) 도미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이러한 것들이 요한 묵시록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이러한 로마와 크게 봤을 때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했는 것.

 

이 순교는 누구 때문에 순교를 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순교 했지마는

이 순교가 본격적으로 순교를 한 것이 로마에서 순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로마가 우리 로마 가톨릭에서 중요한 자리가, 중요한 교회가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존경해야 할 예수님의 제자로서

(베드로 사도) 그분과 너무나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순교하신 이

바오로 그분들의 순교하신 자리이기 때문에 로마 교회가 그렇게

초기부터 대우를 받고 로마 가톨릭의 중심이 된 것이지요.

 

그 다음에 유다 1차 항쟁, 이거는 유다의 어떤 역사지만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어떤 갈등, 도미시아누스 황제의 박해. 큰 두 축으로

보자면 로마와의 관계와 유다인들과의 관계가 이 두 축이 요한 묵시록

읽는 독자들에 있어서 중요한 대립되는 두 축인 거예요. 그래서 요것을

가지고 요한 묵시록 전체를 한 번 구상해 보면 아주 쉽습니다.

 

예, 2장에서부터 11장까지는 뭐가 중요하느냐? 유다인과의 갈등을 그려

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2장 이후부터 20장까지는 뭐냐?

로마와의 갈등을 그려 냅니다.

 

※ 요한 묵시록의 대립되는 두 축

- 유다인들과의 갈등(2 ㅡ 11)

- 로마와의 갈등(12 ㅡ 20)

 

이 시대적 이 두가지 축이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탁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 이것이 유다인과의 어떤 신앙적인 어떤 갈등이구나.

로마와의 어떤 군사적 정치적인 어떤 억압의 문제구나 라는 것이

명확하게 확 들어나게 되는데요.

 

자, 그래서 우리가 봐야될 것이 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당시 삶의

자리에서 유다인들과의 갈등, 아까 제가 잠시 언급 했습니다마는 그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한 번 더 문제 삼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원 문제인 것입니다.

 

자, 2장에서 11장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들과 어떤 갈등이 있었는가?

갈등이면서 동시에 포기를 못하는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가 어디인가?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구약을 왜 읽습니까?

한 분 하느님이 구약의 하느님이 우리 신약의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고, 그리고 그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하셨다. 같은 하느님이다 라는 것이지요.

 

뭐, 예컨대 지금도 그런 책들이 나옵니다만 '구약의 하느님은 신약의

하느님이 아니다', '신약의 하느님은 구약의 하느님이 아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고 폭력의 하느님이고 신약에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뭐 이런 식으로 나눠 버리는 거. 이거, 요것도 그렇게 보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미워하지마는 자기들의 신앙의 삶의 문화적인

모든 정체성의 뿌리가 유다인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거 같이 가야 되는데

같이 가자니 야들이 현실적으로 나를 싫어하고 있고, 우리를 이단 취급

하고 이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고민이 2장에서 11장까지

다 나타납니다. 예, 그래서 2장 9절에 보면

 

묵시 2, 9 :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예, 서간문인데요.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묵시 2, 9 : 그러나 너는 사실 부요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자, 이거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신 말씀인데

"그들은 사실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이거 되게 심각한 문제인데.

아이구 여기 유다인인데, 같은 신앙인인데,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 이 고민에서 해결책이 "유다인 아니다."

그럼 고민이 없어지겠지요? 진짜 유다인 아니다. 왜?

사탄의 무리고. 그럼 진짜 유다인은 누군가?

그러면 진짜로 하느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그런 관점에서 지금 서간문을.

되게 조금 강한 표현이죠.

 

※ 진짜 하느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관점에서 서간문은 강조한다.

 

진짜 유다인을 유다인이 아니라고. 사탄의 무리고, 정말로 하느님 백성

으로서의 유다인은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 4장, 5장, 7장, 11장에 어떤 표현들이 있느냐 하면,

이게 정말 재미있는 게 4장에 24원로가 등장을 합니다.

 

※ 요한 묵시록 : 4장 24원로와 옥좌에 앉으신 분

                 5장 봉인된 책

                 7장 구원된 군중과 이스라엘의 부족

                 11장 두 증인

 

5장에는 봉인되 책이 등장 합니다. 7장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등장하고 또 셀수 없는 군중이 등장 합니다. 11장에는 두 증인.

아까 두 증인을 제가 베드로, 바오로라고 했는데 약간 다른 관점도

있습니다. 이따 제가 설명을 할 텐데

 

자, 요걸 잘 보면 스물 네 원로, 어디서 등장하는가?

다윗 시대에 성전에서, 우리 식으로 표현 할까요. 성가대예요.

스물 네 원로가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도 하고 그랬겠지요?

 

예, 성전에 봉사하는 그룹이예요. 자, 이게 유다인이 아니라고 이렇게

아닌 거, 없는 존재처럼 이야기해 놓고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그러면 구약 전통 싹다 어떻게 해요? 무시해야 되죠?

유다인들이 우리를 괴롭히니 현실적으로.

 

그런데 무시하지 아니하고 요한 묵시록 저자는 요것을 사용한단 말이죠.

그래도 손잡을라고. 같이 할라고, 예, 그래서 스물네 원로라는 표현,

하느님의 어좌 주의에서 하느님께 찬미 찬송을 드리는 그 역활을 맡긴

그 스물네 원로. 다윗 전통, 다윗 시대의 그 모습을 가지고 오고 있지요?

그러면 5장에 봉인된 책. 이 두루마리.

 

예, 제가 간단하게 설명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5장 텍스트 더 구체적으로

볼 때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이 두루마리 안에 적혀 있는 것은 보여지지 않고, 바깥에 적혀 있는 것은

보여진다. 이미 보여지는 것은 구약의 전통이다. 감추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린양만이 열 수 있다. 어린양만이 보여 줄 수 있다.

신약이 만나죠. 유다인이 싫어서 무시하고 걔들은 유다인이 아니다

그러면 구약이 필요 없을껀데 같이 엮어 놓고 있는, 그 요한 묵시록의

어떤 저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7장에 더더욱.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12지파, 열두지파. 이 열두지파는 유다인

자체죠. 그죠? 유다인 자체를 가지고 와가지고 얘들만 얘기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존심 상할거 아닙니까?

 

그래서 7장에 또 뭐가 나옵니까? 셀수 없는 군중을 얘기합니다.

 셀 수 없는 무한대로 열려져 있는, 영원한 생명에로 무한대로 초대

받은 어떤 누군지는 몰라요.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뭐 이런

표현들이 있었지요? 그죠? 이 표현은 보편적인 표현입니다.

 

예, 그리고 우리가 예언서 처음에 시작할 때 예언서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요한 묵시록이 이 예언서 처음에 시작할 때 예언서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요한 묵시록이 이 예언의 말씀이 모든 이에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로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유다인, 이스라엘 백성 그 전통에서

모든 이들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겠지요. 같이 연결 해 놓고 있다.

유다인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다.

 

※ 요한 묵시록 저자는 유다인, 이스라엘 백성 그 전통에서 모든

이들까지 같이 연결하고 있다. (유다인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음) 

 

그들이 현실적으로는 박해를 하고 우리를 이단 취급을 해도 나의 뿌리는

유다이즘, 유다의 안에서 발견할 수 밖에 없다. 구약의 전통 안에서

그렇게 얘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11장에 제가 아까 베드로와 바오로를 1

1장의 증인. 숨겨논 두 증인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모세와 엘리야로 표현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두 증인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모세와 엘리야로 표현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두 증인에. 왜 이 두 증인이라고 했는가? 히브리 성경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모세 오경입니다. 왜?

 

모세 오경은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 책이라기 보다 하나의 법입니다.

율법서 입니다. 그죠? 율법서로서의 모세 오경에 모세. 모세라는 인물이

최고로 중요한 인물이죠.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고. 물론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그대로 탁 받았다기 보다는 십계명은 율법 전체를

요약하는 요약문입니다.

 

모세가 그 중심적인 역활을 했다는 것은 모세가 그만큼 율법의 상징적인,

영웅적인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엘리야는 누구 입니까? 예언자의 아버지

입니다. 예언자의 출발점입니다. 예언서의 모든것이죠. 그래서 모세오경을

해석한 것이 예언서 입니다.

 

※ 예언서 : 모세 5경을 예언한 책

 

새로운 다른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모세 오경의 하느님의 법을

너희들 왜 안지키느냐? 지켜라" 라는 것이 예언서죠 그것을 새롭게

다르게 표현한 것이 성문서 그래서 타나크라는게 구약성경입니다.

 

※ TANAK(구약성경)

   Torah(율법) + Nvi-im(예언서) + Ktuvim(성문서)

 

타, 토라의 첫자,  나, 너비임,  예언서.

커투빔의 첫자들을 따서 타나크라고 해서 히브리 성경의 아주 중요한

세 부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두 증인.

하느님 말씀 때문에. 그 증언 때문에.

 

자, 하느님 말씀 자체를 율법으로서의 모세.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로서의 엘리야. 이 두 증인이 하느님 말씀이 11장에

어떻게? 살해 되었으나 다시 부활한다.

 

이 자리에 동시에 베드로와 바오로를 이렇게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렇게 받아 들였던 것이지요. 나아가서 이것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게

있습니다. 유다이즘과 그리고 저 그리스도교 온전히 하나되는 그게 어디냐?

천상 예루살렘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를 보면 저 밑에 제일 기초되는 부분.

 

우리 자매님들 같은 경우에는 화장하시지 않습니까? 화장을 하면 제일

먼저 밑에 하는 기초 화장을 뭐 베이스라고 그럽니까? 

파운데이션 한다는 것은 언제 바르는 것이 파운데이션입니까?

아, 베이스 다음에 파운데이션이예요? 오, 그러면 않되는데 ^*^  ~~~~

파운데이션부터 먼저 바르세요 ^*^  ~~~~ 

예, 파운데이션 되는 것이 바로 글자 그대로 말하면 파운데이션인데

그것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이 들어가 있고, 그 다음에 뭐 있느냐?

 

예, 그 위에 뭐가 있느냐? 열두 사도와 열두 지파가 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백성의 온전한 결정판인 이 천상 예루살렘을 지탱해

주는 파운데이션이 어린양 예수님이고 예수님 그 위에 이스라엘 백성과

열두 사도.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열두 사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열두 지파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장면이 등장을 합니다.

 

※ 하느님 백성의 온전한 결정판인 천상 예루살렘을 지탱해 주는 파운데

이션(기초)이 어린양 예수님이고 예수님 위에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

인을 대표하는 12사도,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12지파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장면이 요한 묵시록에 등장합니다.

 

요것도 나중에 볼꺼예요. 아직 볼 것 많습니다.

예, 그것이 하나로 일체되어 있다. 이게 뭐냐? 유다인과의 갈등은

현실적으로 있지마는 지금까지 쭉 살펴본 이러한 내용들이 그래도

유다교 전통을 껴 안으려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노력을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어렵지만, 현실적으로 얘들이 우리를 박해 하지만 우리를

이단 취급 하지마는 그래도 껴안아야 되겠다 라는 이 고뇌, 번민,

이것이 2장에서 11장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

 

자, 두 번째로 아까 로마와의 갈등을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죠?

로마와의 갈등. 자 로마는 12장부터 저기 20장 끝까지 계속해서 등장

한다고 봤습니다. 자, 크게 로마와의 갈등을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오냐 하면? 두 짐승.

 

처음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다는 성서 전통상 하느님이 안 계시는.

하느님 뜻과 어긋나 있는. 그래서 하느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창세기 첫 구절이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에 어떻게?

물 위에 하느님의 영이 떠돌고 있었지요.

 

하느님 그 손길이 딱 들어가면서 빛이 생겨라 해서 이제 자리를 잡히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죠? 그 전에 하느님이 안 계신 곳을 바다. 바다를

오히려 죽음, 뭐 이렇게도 표현 합니다.

 

그래서 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게 죽음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이 올라오는 괴물이 이 짐승이 뭘 하느냐? 거기 쓰인 용어들을 보면요.

이 그리스 말 용어들을 보면 전쟁할 수 있는 권한이고 이런 것을 보면

군사적인 힘을 상징 합니다. 어디의 군사적인 힘인가? 로마제국의 그

군사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바다에서 올라오는 괴물이예요.

 

※ 두 짐승 (묵시록 13장)

○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종교적인 로마의 힘을 상징)

 

두 번째 나타나는 게 땅에서 올라오는 괴물인데 이 괴물이 괴물이라고

그러니까 조금 자꾸 ^*^ ~~~ 짐승이, 짐승이 하는 그 일이 뭐냐 하면,

비방하는 거, 고발, 고소, 막 헐뜯는 것.

 

아까 사탄이라는 단어를 제가 말씀 드렸지요? 그 역활이 고 땅에서 올라

오는 짐승에게 부여 됩니다. 요거는 종교적인 로마의 힘을 상징합니다.

거짓된 것을 자꾸 황제 숭배를 자꾸 강요하는 것.

 

황제 숭배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였던 것이죠. 로마가 황제 숭배를 강조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

하는 것이다.

 

예, 그래서 땅에서 올라오는 그 짐승에게 모독하는 언사가 그 능력이

주어졌다고 황제 숭배를 지칭하는 종교적인 어떤 힘을 말 합니다.

요 두개가 어디에서 만나나 하면 18장에 대탕녀 바빌론이라고 무너지죠.

 

왜 바빌론이라고 했는가? 왜 바빌론. 철천지 원수거든요.

로마를 지칭하는데 시대적으로. 왜 바빌론이라는 나라 이름까지 사용하나?

바빌론은 이미 없어진 나라예요. 그죠?

 

예, 요한 묵시록이 등장했던 시기에는. 그러나 이 50년 유배생활 그것이

이 마음 안에 꽉 차가 있는 거예요. 꽉차가 있으니까 바빌론, 아유 저거

저거 저 바빌론 같은. 그렇게 로마를 지칭하면서 그것도 대탕녀.

 

그런데 요 표현에서는 제가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왜 탕녀라는 표현을

로마의 그 못된 사람에게 부여했는가? 예수님은 창녀들과도 친구가 되셨던

분이신데. 여기 요한 묵시록은 약간 겨루는 느낌이 있지요?

요한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인과 계속 이렇게 조금 대립하는 구조가 요한 복음에도.

요한계 문헌 자체가 당시의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의 갈등 구조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대립적인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 사랑으로 보듬으려는 모습이 있는데.

 

예 아무튼 돌아와서 대탕녀 바빌론이 완전히 무너지죠.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힘을 가졌던 두 짐승이 바빌론, 곧 로마이고.

로마는 다 무너진다. 뭐에 위해서? 19장에 등장하는 백마탄 기사.

그의 날카로운 말씀으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나중에 천상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이렇게 내려온다. 그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 로마제국과의 갈등. 아까 제가 초반부에 군사적인 어떤

물리적인 그런 박해는 없었지마는 이런 정신적인 억압들이. 제국은 커

보이면서 군사는 대단한 것 같고, 동시에 군사적으로 힘이 이래 있는데,

"빨리 황제 숭배 해!" 종교적으로 막 억압하는 이것이 너무 그리스도인

들에게 부담이 됐다는 것 입니다.

 

사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도미시아누스 황제가 스스로 자기를

하느님, 주님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이것은 이미 기원전부터 기원전

27년부터 아우구스토 황제가 이미 신격화 작업을 시작을 했구요.

네로 황제는 너무 심하게 자기가 신처럼 이렇게 행동을 했었고. 그렇게

어떤 이 로마제국의 계속되는 이 로마제국 전체에 대한 억압들, 정신적인

박해들, 이것이 요한 묵시록 저자에게 아주 강인한 그런 어려움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부분은 요한 묵시록이 어떻게

예언서인가? 예언서로서 그 시대의 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것이 예언서의 어떤 특징인데 요한 묵시록 역시 실제 삶의

자리에서 있었던 그 억압과 힘든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고자 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들이 겪었던 이러한 시대적

흐름 바로 이 자리에서 뭔가를 전해주고자 했던 것이 요한 묵시록이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예언서와 같다고 말할 수가 있다.

 

※ 요한 묵시록 역시 실제 삶의 자리에서 있었던 그 억압과 힘듦, 그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 가고자 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들이 겪었던 이러한 시대적 흐름 바로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전해

주고자 했던 것이 요한 묵시록 입니다.

 

무엇을 전해 줬는가? 그 결론은 너무나 뻔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조금만 용기를 내서 그분을 믿어라.

이렇게 세상이 힘들지마는 믿게 된다면 너희와 함께 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다. 생명의 화관을 주겠다.

 

그리고 뭐 흰돌을 주겠다. 흰 예복을 주겠다. 뭐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

생명나무를 먹게 해 주겠다. 뭐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이 우리 서간에

계속 나타납니다. 그렇게 참고 견디어 내는 사람들. 그리고 7장에 가다

보면 7장에 보면, 이 셀수 없는 군중이 환난 속에서 자기 겉옷을 어린

양의 피에 겉옷을 빠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뭐냐? 어렵다는 거지요.

힘들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빨고 자기 겉옷을 빤다면 옷이 하얗게 된다.

 

예, 그렇게 인내롭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분께서 너희에게 분명히 보상을 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제일 마지막에 가면요. 너희들이 한 일을 가지고 내가 보상

하겠다 라는 글이 나옵니다.

 

※ 묵시 22, 12 :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하느님께서 가만히 있는데 구원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내가 하느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잘

꿋꿋하게 인내를 가지고 살아 가는가? 거기가 바로 심판의 자리이고

보상의 자리이고 거기에서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예언서를 보면서 삶의 자리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 묵시록이 예언서일 수 있는 것? 부활하신 그분을 지금

내 삶 안에서 꿋꿋하게 삶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살아 내어야 하는.

 

부활하신 분과 함께 살아 내어야 하는 그런 숙제 그것을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도 던져 주고 있기 때문에 요한 묵시록이 예언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괜히 저 딴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언, 저 미래에

일어날 일. 그것을 기다리지 마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부활하신 분을 증거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부활하신

분께 기도드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요한 묵시록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예언서 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는. 점집에서 통하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의 삶의 지침서가 된다는 것을 머리 속에

기억해 두시고 다음 시간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6강 묵시 문학의 세계1이 이어집니다.

 

출처 : 여정성경공부
글쓴이 : 하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