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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떻게 동정녀가 아이를 나을 수 있나?

윤 베드로 2015. 8. 31. 21:53

■ 불경한(?) 질문

 

3주전 언론인과 담소 중 들은 이야기다. 어느 목사님이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극적인 탄생을 은혜에 벅찬 목소리로 스토리텔링하고 있었다.

 

“여러분, 성령께서 성모 마리아께 임하여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시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식으로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한 청년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하였다.

 

“성령께서 처녀를 임신시켰다는 그 얘기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청년은 수긍을 하지 않고, 목사님이 진도를 나갈 만하면 자꾸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참다 못한 목사님이 청년을 단상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는 청년의 귀에다 대고 한 마디 했다. “야, 임마! 당사자인 요셉도 받아들였는데, 아무 관련 없는 네가 왜 자꾸 따지는 거야?”

 

청년의 질문은 불경한 것이었을까? 나는 충분이 있을 수 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헛약은 지식으로는 너무도 넘기 어려운 고개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신비로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제 우리가 다루어야 할 주제다.

 

■ 성령을 통한 잉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는 원어에 충실하게 직역하면, ‘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가 된다.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것이고(conceptus de Spiritu Sancto) 출산은 마리아에게서(natus ex Maria Virgine) 이루어진 것임이 라틴어 원문에서 적시되어 있음에 반해, 번역문에서는 그것이 버무려진 느낌이다.

 

이 고백의 원전은 성경이다. 지어낸 교리가 아니라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압축해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헤로데 임금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1세 황제 때에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한 딸에게서 유다인으로 태어났으며, 직업은 목수였다. 그의 잉태는 성령을 ‘통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6-28).

 

이 인사말에 몹시 당황해 하며 두려워한 마리아에게 천사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전갈을 전해 준다. 그때 마리아는 딱 결혼 적령기, 열여섯이었다. 그런데 이미 요셉하고 약혼은 하고 있던 사이였다. 그래 놀란 마리아가 반문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나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천사가 답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런 표현을 지금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스라엘인은 단박에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구약에 하느님의 영광이 구름 형상으로 덮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온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탈출 40,34-35 참조).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서 ‘덮는다’는 말에 익숙하다. 이는 하느님의 ‘함께 하심’과 ‘돌보심’을 보증해 주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구약의 마지막 시대를 산 마리아가 이 말씀의 의미를 확실히 알아들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하는 분인가? 바로 ‘생명의 영’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성령이 그 위를 운행하면서 작용하셨다. 지금 이 세상에 돌고 있는 생명은 사실 성령의 소관이다. 성령이 자연 안에도 서려 있고, 흐르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 이 성령은 태초에 인간이 창조되는 순간에도 함께 했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콧구멍에다가 숨을 불어넣으셨는데 그 숨이 바로 성령이다. 그러기에 마리아한테 성령이 덮치면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이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에 주목해 보자.

 

이 신앙고백에서 ‘동정녀’는 궁극적으로 ‘평생 동정’을 가리킨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정녀로 잉태하신 후에도 평생 동정으로 사셨음을 의미한다. 요셉과 평생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평생 동정이란 말은 예수님의 잉태가 당신 모친의 동정을 손상하지 않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 교의는 4세기 이후 대중화 되어 전해 오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영원한 동정을 확인 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마리아의 평생 동정에 대하여 줄곧 반론들이 있어 왔다. 주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 문제를 들고 나온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마르 3,31-35 요한 2,12 7,3-9 참조) 얘기가 나온다. 아예 이름까지도 제시된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 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나는 다른 강의나 책에서 이들이 마리아의 친자식이 아님을 하나하나 근거를 대고 밝힌 바 있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렇다면, 왜 (사촌)형제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복음서는 증언하는가? 그것은 요셉의 사망 이후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는 동네 친척집에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일찍이 이러한 물음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출산을 몰랐으며, 주님의 죽음도 몰랐습니다. 이 세 가지 빛나는 신비는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은 무척 심오하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곧 ‘이 세상에서 가장 권력 있는 사람’이다. 쉬운 말로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정보력 있는 FBI 또는 KGB의 보고를 받는 대통령들 조차도 마리아의 동정성과 출산을 몰랐으며 주님의 죽음도 몰랐다는 말이다. 결국, 이 세 가지 빛나는 신비는 철저하게 보안유지가 되어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침묵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번쯤 묵상할 것이 우리 삶에 개입된 하느님의 지혜다.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다. 하느님이 침묵하신다. 어떤 때는 역사에서 400년간 응답이 없으셨다.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서다. 우리 삶에서는 그 정도까지의 내공이 없으니까 하느님 침묵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주일 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이 간다. 이 하느님의 침묵이 길수록 내공이 있는 사람이다. 그걸 견디고 감당하고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그러기에 침묵하시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그 가운데 작용하고 계신다. 곧 때를 기다리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다.

 

- 가톨릭신문(2013. 5. 19.)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20)

출처 :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
글쓴이 : 사랑과 기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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