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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느님?

윤 베드로 2015. 9. 10. 11:37

<해피 가톨릭 캠페인>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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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느님? ` 43

 

                                            하느님과 인터뷰하는 꿈을 꿨습니다.

             

 

 "너가 나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내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소지었습니다
"나의 시간은 영원이다... 무슨 질문을 품고 있니?"
"사람들을 보면 뭐가 제일 신기하지요?"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린시절을 지루해 하지, 그래서 빨리 자라길 바라고,
그리고는 늙어서 다시 어린시절로 가길 바라지."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 버리고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 버리지."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고,
마치 사람들은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않는 것 같아."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지." 
 
하느님께서 나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죠.
그리고 난 질문했습니다.
"부모로써 어떤 교훈들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으시죠?"
 "다른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게 강요할 수 없다는것을.
단지 자기를 사랑하게 놓아둘 뿐이라는걸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용서함으로 용서를 배우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기에는 단지 몇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상처가 아물기에는 몇년의 시간이 걸린다는걸."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걸."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중에서도
너희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걸."
"두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서도 다르게 느낄수 있다는걸."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용서해야 된다는걸."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겸손히 말했습니다.
"무슨 다른 말씀이 있으시면 당신의 아이들에게 해 주세요."
하느님께서 미소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내가 이곳에 있음을 기억하렴."

"언제나."
 "모든 방법으로."
 

 

[차례]

3-1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3-2 왜 '하느님'만 섬기라 하는가?

 

3-1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 처럼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가?

 

           구약시대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하늘을 보며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가시관의 예수님 얼굴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얘기가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

 

  어느 대학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여러 역사적 사상들이 검토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쉬는 시간에 교수가 잠시 나간 사이 당돌하게 교단 앞으로 걸어 나가 칠판에 이렇

게 적었습니다.

  'God is no where!'(신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랬더니 다른 학생이 조용히 교단으로 걸어 나가 앞의 학생이 필판에 써놓은 문장에서 w자를 앞으로 옮겨 띄어쓰기

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기막힌 문장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God is now here!'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그 기막힌 반전에 모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의 원장이 많은 수도원생 가운데 유독 한 제자만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원장이 인간 차별을 한다고 뒤에서 투덜대며 그 제자를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원장은 모든 제자들에게 새를 한 마리씩 나누어주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후, 모든 제

자들이 새를 죽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사랑하는 제자만 산 채로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원장의 말씀에

불순종했음을 비난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원장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새를 죽여 오지 않았나?"

  "원장님, 저는 아무도 안 보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느님께서 저를 보고 계셔서 새를 죽일 수가 없었

습다."

                 하느님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물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

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로마 1,20)

 

하느님의 존재증명

 예로부터 '하느님의 존재증명'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존재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

증' 그리고 '우주론적 논증'이 있습니다.

  존재론적 논증은 중세 신학자 안셀모의 주장으로 하느님이란 개념의 정의가 하느님의 존재를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안셀모 성

인은 '하느님을 하느님 그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런 분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목적론적 논증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제창했습니다. 모든 만물의 질서와 아름다움에는 그 배후에 어떤 설계자가 있음을 암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암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간다는 사길에 많은 사람들

이 동의합니다.

  우주론적 논증이란 이 세상의 만물은 다 그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최초의 원인자가 바로 하느님이라는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일리는 있지만 끝까지 하느님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공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부분이 우리가 듣지 못하

분이 훨씬더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의 믿음도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할하네"(시편14,1)

 

                                "그 모든 것들 뒤에 계신 그분을 보라." 

 

 

  우리가 눈을 씻고 대자연으 자태를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오늘도 삼라만상을 통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계신 하느님을 만

날 수 있습니다. 어느 영성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당신은 하늘을 보았는가? 당신은 바다를 보았는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보았는가? 새들과 물고기들을 보았는가? 풍경과 식물, 곤

충, 크고 작은 모든 생물들을 보았는가? 경탄을 자아내는 인간의 심성, 그가 지닌 능력, 남녀간의 오묘하고 신비한 이끌림에 공명해

보았는가?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 뒤에 계신 그분을 보라."

 

3-2 왜 '하느님'만 섬기라 하는가?

 

                                복되어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입니다. 여기에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야훼 하느님만 섬겨야 하는가? 그것은 야훼께서 든든한 빽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의 대결, 그의 전임왕 사울의 집요한 질투, 최측근에 의한 쿠데타 등의 절체절명

의궁지에서 하느님이 '빽'이시라는 것을 극적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하면 야훼를 자신의 '바위'(시편31,2), '성

채'(시편71,3), '피난처'(시편27,1) 등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시편2,12)

  다윗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신실하신 도움을 겪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증언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17,7-8)

 

복되어라, 우상에 속지 않는 사람

  다시 다윗은 다름과 같이 노래합니다.

  "복되어라. 허수아비 우상에 속지 않고 야훼만 믿는 사람이여"(공동번역 시편 40,4)

  우상에 속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허수아비이기 때문입니다. 허수아비가 뭡니까 가짜 형상입니

다. 거짓입니다. 아무런 내용도 힘도 없는 눈속임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우상이나 잡신 등을 신격화하여 섬기거나 공경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느님이 아닌 것에 의지

하여 점술이나 사주 등으로 무엇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거짓 기적이나 예언 등에 현혹되는 일과 인간 권력을 절대화하

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모두가 허수아비요 헛것입니다.

  야훼만이 참 하느님이십니다. 야훼만이 실제로 존재하며 살아 계시며 참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는 유일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전심전력으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5)

 

참 소중한 당신께(3)

 

  참 소중한 당신.

 20세기 초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시 '하늘의 사냥개'를 소개합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그로부터 도망쳤다. (중략)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중략)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들려오는 한 목소리,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

 

                                   하느님은 '모든 것'입니다

 

 

  아무리 멀리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도, 따라오고 뒤쫓아오니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하느님입니다. 톰슨

고백하듯이 하느님을 저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이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가이 없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참 소중한 당신, 당신

께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그림자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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