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마르코복음공부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마르 8,31-9,1)

윤 베드로 2014. 9. 6. 17:10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마르 8,31-9,1) ※1

 

                      예             수

   베 드 로

31Je께서는 고난받고-버림받고-죽었다가-다시 살아

      나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명백하게※2 가르쳐 주셨다.

①베드로의 메시아 신앙고백(8,29절)을 들으신 Je께서는

       수난당하고 부활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세번에 걸쳐 예고.

        =즉, 당신이 어떠한 그리스도인지를 설명.

        = 영광의 메시아× ⇒ 수난 - 죽음 - 부활하는 메시아.

   ※Je는 그리스도 → ‘사람의 아들(人子)’ 自稱(31절).

 

②“명백하게”(32절) : Je은 모든 가르침을

         전반부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후반부에서는 비유× ⇒

               사실 그대로를 하나도 숨김없이 말씀하신다는 것.

32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3

베드로는 “Je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으나,

수난하는 그리스도인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나무랐던 것.

33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θ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시며 꾸짖으셨다.

Je께서는 : 베드로의 이런 태도에 대해 호되게 꾸중.

 

Je는 θ의 뜻에 따라 고난의 길을 가는데

            그 뜻을 역행하려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심.

= θ의 계획과 전혀 다르고 그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베드로는 그런 유혹을 하는 사탄과 비슷한 존재로 간주.

         θ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

←성서에서

사탄이란 :

‘진리를

  왜곡하는 자이고,

  진리의 길을 가려는

  이를 가지 못하게

  막거나 방해하는이’를

   말한다.

34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불러, (제자교육)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죽기전에 θ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8,35-9,1).

 

: 8,34-9,1절 : 예수 추종 자세. ※4

8,35-38절 : 네 마디 독립어구(단절어)를 모아 설명.

9,1절 : 제자들을 격려해주는 종말론적 말씀.

예수 추종 자세

①자기를 버리고,

②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1. 이 단락은 : 8,31-33절,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8,34-9,1절,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로 구분.

⇒ 결국 후반부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교육.

 

베드로가 : Je의 정체를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고 고백하자,

⇒이제 어떤 의미의 그리스도신지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Mk는 세 번에 걸쳐 수난과 부활에 관한 예고를 실어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임을 강조한다.

 

⇒수난과 부활에 관한 三重豫告를 살펴보면,

①그 내용이 초대교회에서 선포하고 믿던 것과 같다.

       사실 선포와 신앙의 주제는 한결같이 십자가와 부활이다.

 

②아울러 삼중예고에는 수난과 부활사건을 전제하는 요소가 있다.

즉, 예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다음

     그것을 보도형식으로 記事化하지 않고

     마치 예수께서 그런 일을 예고하신 양 예언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먼저 사건을 체험한 다음에 그것을 예언처럼 꾸민 것을

                  事後豫言이라 한다.

 

③의인들이 한동안 적수들한테 고통을 당하지만

결국 θ에게 구원받는다는 주제가 구약성서에 나오는데,

       (시편 34,20 ; 지혜 2,12-20. 5,1-7).

      의인들의 고난과 구원이란 주제가

      예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삼중예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 32절,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

‘명백하게’란 말은 : ‘자유를 가지고 용기있게 그리고 분명하게’

                              모든 것을 말한다는 뜻이다.

전반부에서 :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4,33)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모든 가르침을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후반부에서는 : 비유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하나도 숨김없이 말씀하신다는 것.

 

※3.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을까? :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명백히 밝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광의 그리스도인데,

예수님께서 명백히 밝히신 말씀은 지금까지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왔던 모든 생각들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4. 8,34-9,1에서는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

1). 34절에서는 추종의 자세로 "자기를 버릴 것"과

                     "제 십자가를 질 것"두 가지가 요구.

 

                                         예수 추종의 자세

1. 자기를 버리는 것

2. 제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를 버리는 것"은

            = 자기 중심으로 하려는

               자아의 포기,

즉, 금욕주의나 자기 증오,

     자기 배척을 뜻하는 것이 ×,

신앙을 선택했을 때 수반되는

       박해와 어려움, 나아가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을 의미.

"십자가를 지는 것"은

       =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삶을 의미.

십자가는 삶이나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이나 부담을 수동적으로

               참고 받아들이는 것×,

     고통스럽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취하는 행위.

이 두 가지 길은 누구든지, 즉 누구나 예외 없이 지녀야 할 자세.

①“버린다” ⇒ “비운다” ⇒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 마련.

       “자기를 버리라”는 것 ⇒ Je를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버리라는 것.

         ⇒ 가장 큰 장애물 = 자기 자신.

         ⇒∵자기 중심의 삶(재물, 명예, 쾌락...)

                 → Je 중심의 삶(예수의 뜻에 맞게 : 사랑, 나눔).

②십자가 : 자기 중심의 삶 × → Je 중심의 삶 ⇒ 고통(십자가) 수반.

                 즉, 자기를 버리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2).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네 마디 독립어구(단절어)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35-38절) :

원래 서로 상관이 없는 네 가지 단절어인데,

        어느 전승자가 모아 집성문으로 엮었다.

 

①35절,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 :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목숨을 살리는 길이라고 설명.

 

②36절,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과,

③37절,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겠느냐?” :

               이 두 마디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값진지를

                    경제용어로 표현한 것으로,

               비록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득이 아니라 손해라는 것.

 

④38절,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

              종말론적인 동태보상률이 제시.

  이 말씀은 종말 심판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신앙을 끝까지 간직할 수 있도록

                 격려와 위로를 주시는 말씀으로,

                 초대교회의 박해상황에서 첨가된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