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시편 공부

제142편 하느님은 나의 몫(6절)

윤 베드로 2023. 1. 14. 16:58

142: 개인 탄원시편,

작가는 하느님께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보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원수들이 어떻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는지 말하고(2-5),

             하느님께 구해 달라고 애원한다(6-8).

 

1. 비참한 상태

1 [마스킬. 다윗. 그가 굴에 있을 때 드린 기도]

2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간청하네.

3 그분 앞에 내 근심을 쏟아 붓고 내 곤경을 그분 앞에 알리네.

4 제 얼이 아뜩해질 때 당신께서는 저의 행로를 아십니다.

                제가 다니는 길에 저들이 덫을 숨겨 놓았습니다.

5 오른쪽을 살피소서. 그리고 보소서.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도망갈 곳 더 이상 없는데 제 목숨 걱정해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2. 구원 요청

6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며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

7 제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저는 너무나 허약하게 되었습니다.

   뒤쫓는 자들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그들이 저보다 드셉니다.

8 제가 당신 이름을 찬송하도록 감옥에서 저를 빼내 주소서.

    당신께서 제게 선을 베푸실 때 의인들이 저를 둘러싸리이다.

 

142:

이 시가 표제대로 다윗의 작품이라면 이때야 말로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엔게디 굴에 숨어 있을 때일 것이다(사무하24).

이처럼 시인이 무고히 고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시인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큰 환란을 당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인이 당하고 있는 환란은 모함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자신을 모함한 자들이 자신보다 강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시인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삶의 여정에서 이런 종류의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린 것도,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노예가 된 것도,

            페르시아에서 하만의 모함에 의하여 유다가 전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도

            모두 힘에 의하여 강요된 시련들이었다.

힘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이런 종류의 고난을 당한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수 없이 당하지만

            그때마다 우리의 오른편에는 우리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환경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을 좌절 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때에도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 바로 기도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간청하네(142,2).”

하느님께 부르짖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길이다.

실제로 출애굽의 역사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으로 이루어진 일이고,

             판관시대의 부패함의 고리를 끊고 왕정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부르짖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처럼 환란 가운데 하느님께 나가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다.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142,4).”

여기 내 길이란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환경에서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말한다.

 

시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피난처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환란 날에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142,6)”

󰡒주님은 저의 피신처라는 말은 주님께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환란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고백이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오른편에 도움을 줄 사람이 없을 때에도

            주님께서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환란을 당할 때에도 하느님께 나가 부르짖을 수 있었다.

또한 시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몫이 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환란 날에도 부르짖을 수 있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142,6).”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느님께 자신을 환란에서 건져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저는 너무나 허약하게 되었습니다.

뒤쫓는 자들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그들이 저보다 드셉니다.

제가 당신 이름을 찬송하도록 감옥에서 저를 빼내 주소서.

당신께서 제게 선을 베푸실 때 의인들이 저를 둘러싸리이다(142,7-8).”

그러나 그의 간구는 단순히 자신을 환란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환란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체험함으로

            그 은혜를 감사하기 원했다.

이런 자들에게 환란은 하느님을 보다 더 깊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은혜의 수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