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욥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그런데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하시는데 우리는 보통 보고 싶은 것을 볼 때 행복하고, ‘것’이 아니라 ‘분’을 보게 되었을 때 더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간극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과 보고 있는 사람이 다른 것 말입니다. 아주 안 좋은 예이지만 내가 지금 껴안고 있는 사람과 내가 껴안고 싶은 사람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좋은 것은 껴안고 있는 사람이 내가 껴안고 싶은 사람인 경우이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것이면 좋겠지요. 이것을 영성적으로 바꾸어 얘기하면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 안에서 재발견하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연예인이 보고 싶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예쁜 여자가 보고 싶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나이를 먹게 되니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가 좋고 어머니처럼 푸근한 여자가 좋은데 지금의 나의 남편과 아내가 천생배필, 곧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배필임을 신앙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욥의 경우를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욥은 이제 자기 눈이 주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욥이 한 고통 중에 있을 때 갈망하던 바가 이루어진 겁니다. 욥기 19장에서 욥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저는 욥의 절규 중에서도 이 부분이 마음에 크게 울립니다.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내 몸으로 그러니까 존재로 하느님을 뵙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살갗이 이렇게 벗겨진 뒤라도 내 몸으로 하느님을 보겠다니 욥은 가슴앓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앓이’, 몸살까지 하며 하느님을 뵙고자 한 것이고 마침내 그 하느님을 오늘 욥기의 끝에 만난 겁니다. 오늘 욥기는 재산도 전의 몇 배가 되고 훌륭한 자식들도 다시 얻은 행복을 얘기하는데 사실은 이런 것은 해피엔딩의 신파극과 같은 것이고 욥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제가 욥기를 쓴다면 이런 얘기는 쓰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느님을 온 몸으로 봐야 하고, 뵙기 위해서 가슴앓이는 물론 몸앓이까지 해야 함을 욥기에서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