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욥기 공부

주님의 말씀 ; 하느님과 욥의 대화(38,1-42,6)

윤 베드로 2017. 3. 1. 08:00

Ⅵ. 주님의 말씀 ; 하느님과 욥의 대화(38,1-42,6)

 

*마침내 하느님께서 폭풍 가운데에서 욥을 만나주신다.

하느님의 첫 말씀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오히려 욥에 대한 反問이다.

하느님의 질문들은 욥에 대한 꾸중과 질책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구성 : ①주님의 첫째 말씀(38,1-40,2)

②욥의 첫째 답변(40,3-5)

③주님의 둘째 말씀(40,6-41,26)

④욥의 둘째 답변(42,1-6).

 

주님의 첫째 말씀(38,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이제 변론을 통해서

욥에게 두 가지(38-39절과 40-41절) 말씀을 하시면서,

욥의 생각을 거의 초월하는 당신의 지혜와 권능을 드러내신다.

따라서 욥은 하느님의 역사에 대한 이유를 결코 묻지 못하게 된다.

 

네가 누구냐(38,2-3)

 

2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3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1-3, 하느님의 등장 :

①주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신다(1절)

②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자는 누구냐?(2절)

③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욥은 그토록 만나고 싶던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욥은 목마른 사람처럼 하느님을 갈망했다.

하느님은 욥이 듣고자 했던 것에 대해 차근차근 대답하지 않고(2-3절),

오히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되레 물으신다.

가장 먼저 하느님은 ‘하느님께 따지는 너는 누구냐?’욥의 정체성을 물으신다.

주님의 심오한 경륜의 일부조차 알지 못하는 욥의 한계를 지적하신다.

 

땅과 바다의 주재자(38,4-18) ; 창조과정과 신비 :

①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누가 그 치수를 정하였느냐?(1-2절).

②그 주춧돌은 어디에 박혔느냐? 또 누가 그 모퉁잇돌을 놓았느냐?

③아침 별들이 함께 환성을 지르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할 때에 말이다.

④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8-11절).

⑤너는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12-13절).

⑥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된다(14-15절).

⑦너는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고,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16-17절).

⑧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느님은 욥에게 세상의 기원에 관해 물으신다(4-11절).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기 때문이다(3장).

그래서 하느님은 우주가 태어난 이야기를 하신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바다도 하느님 앞에서는 갓난아이에 불과하며

하느님이 정하신 한계 내에 갇혀 있다.

혼란스러운 내 삶도 아기를 강보에 싸서 어르고 돌보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의 품 안에 있다.

욥은 惡人이 번영하도록 하느님이 내버려두시기 때문에

자신은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다(12-18).

그러나 하느님은 어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악인의 삶이 만천하에 드러날 거라고 말씀하신다.

어둠만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땅의 너비조차 측량 못하는 우리가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빛과 어둠의 주재자(38,19-21)

 

①빛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고,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②네가 그것들의 집에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③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하느님은 우주의 구조와 질서에 나타난 창조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욥의 무지를 일깨우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하신다.

이를 통해 창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와 통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모두 다스리신다(19-21절).

하느님은 욥에게 빛과 어둠이 어디서 오는지 물으신다.

하느님은 빛의 영역(12-15절)뿐만 아니라

어둠의 영역(16-18절)도 주관하신다.

하느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그것이 내 삶에 고난이라는 어둠의 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욥은 새벽의 은혜만을 구했지만,

하느님은 어둠의 은총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기후의 주재자(38,22-30) ; 우박과 비 :

①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②내가 환난 때와 전쟁 때를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다.

③빛이 갈라지는 길은 어디 있느냐?

④누가 큰비나 뇌성 번개를 위하여 길을 놓았느냐?

⑤인간이 없는 땅에 비가 내리고, 황폐한 광야를 흠뻑 적셔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26-27절).

⑥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또 누가 이슬방울들을 낳았느냐?

⑦누구의 모태에서 얼음이 나왔느냐?

 

⇒하느님은 우박과 비를 통해서도 일하신다(22-30절).

우박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환난을 당할 때에,

하느님이 파라오를 심판하기 위해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일곱째 재앙(출애 9, 22-26절)이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교전할 때에도

우박을 퍼부어 승리하게 도와주셨다(여호 10, 11절).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홍수도 되지만, 사람 없는 광야를 적시고,

논밭에 식물을 자라게 해 사람에게 큰 유익을 준다.

그런데 욥은 그 중 일부인, 홍수와 가뭄만 보고 불만을 토로했다(12, 15절).

우박과 비는 시련도 되지만, 한량없는 은혜도 된다.

 

하늘의 주재자(38,31-38) ; 별과 수탉 :

너는 묘성을 끈으로 묶을 수 있느냐?

②너는 별자리들을 제시간에 이끌어 낼 수 있느냐?

③너는 하늘의 법칙들을 아느냐?

④너는 구름에게 호령하여 큰물이 너를 뒤덮게 할 수 있느냐?

⑤네가 번개들을 내보내서 그것들이 제 길을 가게 할 수 있느냐?

⑥누가 따오기와 수탉에게 지혜와 슬기를 주었느냐?

⑦누가 하늘의 물통을 기울일 수 있느냐?

⑧먼지가 덩어리로 굳어지고 흙덩이들이 서로 붙게 하겠느냐?

 

⇒천체의 질서와 기후를 다스리신다(31-38절).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질서를 제정하신 분께서 별의 운행과 날씨도 통제하신다.

사람이 어떻게 어마어마하고 무수한 별들을 만들 수 있으며, 조화를 유지하겠는가?

따오기와 수탉은 시간과 기후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감한다.

크게는 하늘의 별과 작게는 수탉 한 마리도 만들거나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이 고난을 해결하겠다고

하느님을 끌어오고, 내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가당하기나 하겠는가?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느님이 내 삶도 유지하고 이끄신다.

 

동물 세계의 주재자(38,39-39,30)

 

*38,1-18절에서는 마침내 하느님께서 폭풍 가운데 욥을 만나주신다.

하느님의 첫 말씀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오히려 욥에 대한 反問이다.

하느님의 질문들은 욥에 대한 꾸중과 질책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38,19-38절에서 하느님은 우주의 구조와 질서에 나타난

창조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욥의 무지를 일깨우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하신다.

이를 통해 창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와

통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여기38,39-39,30절에서, 하느님은 우주에서 자연으로,

다시 신비한 야생동물의 세계로 이어가며

그것들을 누가 돌보는지 욥에게 질문하신다.

총 다섯 쌍의 동물들이 소개되는데,

각각의 동물들은 생태적 특징별로 한데 묶여있다.

 

동물 세계의 주재자

 

39-41, 사자와 까마귀 :

①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그것들이 보금자리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 말이다.

②누가 까마귀에게 먹이를 장만해 주느냐?

 

⇒여기부터 동물 세계의 경이로움이 새롭게 시작된다.

하느님의 은혜가 인간이나 강한 짐승뿐만 아니라

매우 하찮고 쓸모없게 보이는 동물에게까지 임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39,1-4, 바위 산양과 암사슴 :

①너는 바위 산양이나 사슴이 産苦를 치르는 것을 살펴보았느냐?

②너는 그것들이 해산하는 시간을 알 수 있느냐?

③어린것들은 들판에서 튼튼하게 자라 어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바위 산양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이나

돌이 많은 황무지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위 산양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더욱이 그것의 분만 시기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와 돌보심은 그러한 바위 산양에게까지 미치며,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한낱 바위 산양의 분만 시기조차 모르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불만을 터뜨리거나 불의하다고 비난함으로

자신의 無智와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5-12, 들나귀와 들소 :

①누가 들나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느냐?(5-8절).

②들소가 너를 섬기려 하겠느냐?(9-12절)

 

⇒욥이 나귀나 황소를 가사나 농사일을 위해 활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더 큰 힘이 필요하다고 해서 들소에게 써레질을 시키지는 못한다.

또한 밭일을 시켜서 소출을 얻도록 만들 수도 없다.

그것은 들소가 자기를 위해 기꺼이 일해 줄 것이라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들소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느님의 계획과 일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13-25, 타조와 말 :

①타조의 날개가 황새의 깃이나 털이 될 수 있느냐?(13-18절)

②너는 말에게 힘을 넣어 줄 수 있느냐?

또 말을 메뚜기처럼 뛰게 할 수 있느냐?(19-25절).

 

⇒일반적으로 타조는 모래 속에 알을 넣고

태양열로써 부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조의 많은 알들 가운데 일부는 모래로 덮혀 있지만,

상당수가 모래 위에 그냥 방치되어 있다.

그러기에 자기의 발에 밟힐 수도 있고,

다른 들짐승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조도 자기 새끼를 위해 고통과 수고를 아끼지 않듯이

하느님도 욥을 돌보신다.

미련한 타조도 제 살길과 지혜를 주셨듯이

욥에게도, 우리에게도 고난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신다.

 

26-30, 매와 독수리 :

①네 슬기로 매가 날아오르고 남녘을 향해 그 날개를 펴느냐?

독수리는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든다(27절)

③그것은 바위 위에 살며 밤을 지내니 바위 벼랑 끝이 그의 성채다.

④거기에서 먹이를 찾아 살피고 그 눈은 멀리까지 바라본다.

 

하느님은 모든 동물들을 기르시는 분이다.

가축이라면 인간이 어느 정도 알고, 손쉽게 다루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필요에 순응하지 않고 인간의 질서 밖에 존재한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도 무력하고,

거친 대자연을 헤집고 다니는 야생 세계에서도 무지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욥이 겪는 고난도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며,

욥도 동일하게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 없는 고난도

최종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다.

사자는 길들일 수 없는 맹수다.

인간은 굶주린 동물의 왕을 위해 사냥할 수도,

배부를 만큼 먹일 수도 없다.

바위 산양과 암사슴은 새끼인데도 척박한 빈들에 금세 적응한다.

들나귀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들소는 사람이 만든 외양간에 가둘 수 없다.

밭을 경작하거나 타고 다니지 못한다.

욥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그러나 하느님만이 능히 하는 것들을 계속

나열하시면서 누가 야생동물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질문하신다. 답은 하느님이다.

내 삶에 야생동물처럼 길길이 날뛰는 고난도 하느님이 통제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