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두 짐승(묵시록 13장)

윤 베드로 2016. 8. 30. 17:00

9. 두 짐승(묵시록 13장)


요한 묵시자는 이제 사탄이 지상에서 부단히 제 일을 계속해 나가는 방식들을 기술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여전히 지상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듯이 악마들도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활동한다. 묵시록에서 사탄을 대표하는 자로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다.(1절)

앞의 묵시록 12장의 주연배우는 ''이었다. 이제 13장의 주연배우는 '짐승'이다. 묵시록 전체를 놓고 볼 때, 전반부(1-11장)에서는 '하느님 아버지'(4장)와 '어린양'(5장)이, 후반부(12-22장)에서는 ''(12장)과 '짐승'(13장)이 각각 짝지어 나온다.

묵시11,7에서 '짐승'에 관한 짧은 언급이 있었는데, 이제 13장에서 본격적으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 '짐승'은 '네로'(Nero)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박해자 로마제국'을 의인화시킨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묵시록 11장 7-10절 해설 참조)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죽은 네로황제가 다시 귀한하리라는 민간신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묵시13장은 다분히 다니엘서의 묘사를 빌려쓰고 있다. 다니엘7장에서는 '바빌론 제국', '메데스', '페르시아', '그리이스'가 네 마리의 무시무시한 짐승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다니엘 7장에서 처럼 왕과 왕국이 동일시되는 경향을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묵시록에서 처음에는 '짐승'이 단순히 로마 제국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가 차츰 장이 바뀌면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죽이는 괴력을 지닌 한 인물, 즉 황제를 뜻하게 된다.


  1) 첫째 짐승-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묵시13,1-10)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권력의 상징인 쇠지팡이를 받는 모습

 

[1절]바다에서” : 다니엘7장에는 네 마리의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이 짐승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은 그것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사실로 인해 극대화된다. 성서적으로 볼 때 짐승이 체류하고 있는 바다는 악과 죄와 죽음의 본거지이다. 지형적으로 볼 때 이 바다는 로마인들이 건너 온 지중해일 수밖에 없다. 요한 묵시자의 상징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대신하는 사람, 즉 지방 총독이 해마다 해로를 통해 로마에서 자기 나라에 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것이다.

 


일곱머리” : 묵시17,9-10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일곱 왕들’을 뜻한다.

앞의 12장3절에서는 이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짐승도 용과 비슷하다. 머리는 일곱이고 뿔이 열 개이고 머리마다 관이 씌워져 있었다. 머리가 명령과 조직의 상징이라면, 그리고 뿔이 권세와 힘의 상징이라면, 그리고 관이 정치적 통치의 상징이라면, 이는 절대적인 통치권을 뜻한다.

묵시록의 짐승은 머리가 일곱 개라고 하는데 그 ‘일곱’이란 숫자는 아마도 다니엘7장에 나오는 네 마리 짐승들의 머리 수를 저부 합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7장에서 표범은 머리가 네 개이고, 사자와 곰과 넷째 짐승은 머리수가 각각 하나씩 이니 모두 합치면 일곱 개가 된다.

다니엘서가 아니더라도 머리 수가 일곱 개인 괴물에 관해서는 고대 신화들-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근동지역에서는 어디서나 두루 퍼져 있었다-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요한 묵시자가 과연 어느 것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열 뿔” : 의심할 바 없이 디니7,7에서 왔다. 다니엘서에서 ‘열 뿔’은 ‘열 왕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묵시록에서는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일곱 머리’를 내세운다. 그렇다고 묵시록의 ‘열 뿔’이 그저 단순하게 다니엘서의 비유적 표현을 답습한 것은 아니다. 묵시12,3에 나오는 ‘’의 ‘열 뿔’과 관련시키는 것이 좋다.

또 묵시17,12에서 그 ‘열 개의 뿔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것은 민간신앙에 널리 퍼져있던 네로와 함께 로마로 처들어 오리라고 예상되는 “파르티아의 열 명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느님께 모독이 되는 이름” : 그 당시 로마 제국 황제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이라 지칭했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황제숭배사상을 의미한다. 이 짐승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폭군처럼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로마 황제는 에페소와 스미르나에 그의 성전을 가지고 있었고, 베르가모에서는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권세는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정치제도인 것이다. 이 짐승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절대적인 왕국을 강탈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거슬러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백성에게 사자처럼 대하고 표범처럼 길목에서 노리며...(호세아13,7)”

표범, 곰, 사자” : 다니엘7,4-6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또한 호세아 예언자는 이 동물들을 합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우상숭배에 대한 엄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에 비교하곤 했다.

포효하고 난도질 할 수 있는 강한 이를 가진 이 짐승은 능란하고 예측 불허하고, 기운이 넘치고, 음흉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어떠한 권세도 갖지 못한다.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 즉 “”은 악마로서 ‘짐승’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다.

요한 묵시자는 과거사를 살펴보면서 로마 제국주의가 역사 속에서 이미 사라진 모든 억압적 제국들의 화신임을 발견한다. 사실 그 짐승은 표범(페르시아 제국의 상징)을 닮았고, (메디아 제국의 상징)의 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자(바빌론 제국의 상징)의 입을 가지고 있었다. 셋이라는 숫자는 전체를 상징한다. 이 숫자는 로마 제국주의가 과거의 모든 억압과 잔인함을 뭉뚱그려 지니고 있다는 표시이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 결코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잔인하게 신앙인들을 짓밟고 죽였다.

그 짐승은 “용으로부터 힘과 왕위와 권세를 받았다” : 로마 제국은 네로(54-68년)가 죽으면서 사라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를 계승한 장군들(베스파시아노, 디도, 도미티아누스)이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모두 황제들을, 심지어 자살한 네로가지도 흠숭하도록 강요했다. 거부하는 이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은 바로 네로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3-4절] 묵시록 주해 가운데에서 이 절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구절은 두가지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첫째로, 이 절은 전체 내용으로 볼 때 죽은 네로 황제에 관한 민간신념에서 비롯된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네로는 지상에서 일삼던 악행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뗀 것이 아니라, 그는 결국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졌다. 이런 관점에서 “그 짐승은 머리 하나에 치명상을 입어서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 상처가 나았습니다” 라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것이 장차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겠지만 마침내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묵시17,8a)

이와 똑같은 사상이 묵시17,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여기서 치명상을 입은 “머리 하나”는 죽은 네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제 잔인함과 미친 짓으로 명성을 떨치던 네로도 신으로 흠숭을 받고 있다. 그 사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비웃고 있다.


1) 어린양에 대해서

  묵시5,12 :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묵시13,8 :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2) 짐승에 대해서

  묵시13,3 : “....치명상을 입어서 거의 죽게 되었지만...”

둘째로, 이 구절에서 짐승에 대해 묘사되고 있는 내용, 용어들이 어린양에 관한 언급과도 병행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는 그 짐승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 역시 죽었다가 부활했으며, 한편 예수의 지상과업도 완전히 끝난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오실 것(재림)이라고 신자들은 믿고 있다. 이런 똑같은 표현법이 어린양과 짐승에게 동시에 적용되고 있다.

 


앞 장에 나오는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이 “누가 감히 자신을 하느님과 같다고 하는가?” 였지만, 이와 똑같이 4절에서 짐승을 따르는 이들은 용과 짐승에게 경배하며, “이 짐승처럼 힘센 자가 어디 있는가?”라고 외친다. 이들은 하느님 대신에 황제를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5-6절]  그 짐승은 마흔 두달(삼년 반) 동안 권세를 휘두르는데, 그 기간은 앞 장에서 용에게 허락되었던 기간과 같다(12,6-14). 그 짐승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하느님의 집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모독한다.


[7절] 네로가 기원후 64년의 로마 대화재 사건을 전후란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가혹한 박해자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묵시록은 그의 사후에 쓰여 졌으며, 당시 신자들은 네로의 박해를 체험한 이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만일 재등장하는 날에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더욱 가공할 박해를 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은 세상 전체였다. 그래서 로마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자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절] 천지창조 이래 하느님은 인류의 죄를 계속적으로 참아 오셨음을 보여준다.

비옵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셔야 하겠습내다. 만일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려거든 당신께서 손수 쓰신 기록에서 제 이름을 지워주십시오.”(출애32,31)

책에 이름이 오르다”는 식의 표현은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축애굽기의 모세가 야훼께 기도하는 대목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9-10절] 묵시록13장 전반부의 끝은 인내와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직 인내와 믿음으로 박해자들의 만행을 극복하라는 의미로, 전반부의 결론과도 같은 구절이다.

사도 바오로는 묵시록이 쓰여지기 40년 전에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벌을 대신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서뿐만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도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 가지 세금을 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그와 같은 직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국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13,1-7)

 

그러나 이제 묵시록이 쓰여 지던 시대의 상황은 40년 전과는 다르다. 유다인 회당과의 결별이 이루어졌으며, 권력과의 투쟁은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세를 수호하고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 카이사르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짐승을 흠숭하지 않는 자, 그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 짐승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 짐승이 성도들과 예언자들까지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용으로부터 받았는데, 누가 그 짐승에게 맞설 수 있는가? 상황이 심각하다.

제국의 권세는 막강하지만, 박해를 통해서만 권세를 펼칠 수 있다. 다시 말해 제국은 무력을 통해서 신앙인들의 육신에 해악을 끼칠 수는 있지만, 정신과 믿음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 제국의 권세는 제한적이다. 짐승의 세도는 마흔 두 달 동안일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고 묻거든 ‘야훼의 말씀이시다’하고 이렇게 일러 주어라. ‘어디로 가든지 염병으로 죽을 자는 염병에 걸리고, 칼에 맞아 죽을 자는 칼에 맞고, 굶어 죽을 자는 굶고, 사로잡여 갈 자는 사로잡히리라.(예레15,2)

그래서 복음과 제국이 서로 화합할 수 없다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를 감수하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 때문에 유배를 떠나야 한다면, 기꺼이 가야만 하고, 칼에 맞아 죽어야 한다면 맞아 주어야만 한다. 공동체는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 승리할 것이며, 하느님의 계획도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짐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인내하고 정치권력의 명령을 과감하게 거부하는 것 이외의 다른 무기가 없다. 이제 그러한 정치권력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2) 둘째 짐승-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18)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보다도 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거짓의 제국은 네로가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 그를 계승한 장군들(베스파시아노, 디도, 도미티아누스)이 제국을 다시 일으켜 신자들을 박해한다.

그리고 이제 강력한 이념으로 선전을 계속한다. 사람들은 불의를 정의라고, 죽이는 일을 살리는 일이라고 속이는 제국의 이념에 속아 넘어간다. 둘째 짐승은 바로 그점을 지적한다.

묵시록19,20에서 그것이 바로 ‘거짓예언자’라는 것과 황제숭배에 종사하던 이교제관들의 전형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12절 이하에서, 둘째 짐승이 사람들로 하여금 첫째 짐승에게 절하도록 조장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는 666이란 숫자를 통해, 네로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민간신념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는 첫째 짐승에 대한 언급-“그의 치명상은 곧 나았다”(3절; 12절), “칼을 맞고도 살아난 첫째 짐승”(14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두 짐승이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고 있다

[11-13절] 이제 또 다른 짐승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는 땅에서 즉 에페소 동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짐승은 요한 묵시록 공동체에 빗장을 지르려고 오는 것이다. 둘째 짐승은 가면을 쓰고 있다. 그 짐승의 외적인 모습은 어린 양과 비슷한 위장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짐승은 흉물스럽게 어린양(예수님)인체 가장하지만 용처럼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 짐승은 두말할 여지없이 거짓 예언자이다.

 

이 구절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마태7,15)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처럼 보인다.

첫 번째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았다.(2절) 그 권세가 이제는 첫 번째 짐승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짐승에 의해서 행사되고 있다.


[14-15절] 이 구절들은 황제숭배와 직결된다. 묵시록을 지배하고 있는 용어는 짐승에 대해서 10번이나 사용되고 있는 “우상”이라는 용어이다. 15절의 “우상이 말을 한다”는 묘사는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대목은 다니엘3장에 나오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이 금신상을 세워 놓고 유다인들에게 절하고 강요했던 사건과 유사하다(다니3,1-30).

그러나 이 경배는 “하늘에서” 우리려 퍼지는 경배와는 분명 다르다. 하늘에서의 경배는 사랑에서 기인하지만, 여기서의 경배는 강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두 그룹이 형성되어 감을 볼 수 있다. 한 그룹은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룹이고, 또 한 그룹은 불편과 박해를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하는 그룹이다. 이 두 그룹은 다시 말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그룹과, 영과 진리로 참다운 종교를 살아가는 그룹이다.

[16-17절]오른손이나 이마에 낙인을 받게 했다” : 둘째 짐승의 추종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어떤 낙인을 받아 자기들 편임을 표시하고 있다. 짐승의 낙인은 짐승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황제숭배자요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자라는 의미이다.

이 낙인이 없으면 물건을 사지도 팔지도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요한은 모든 사람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돈, 즉 황제의 이름과 상이 새겨진 주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짐승의 낙인’은 사방에 깔려 있어 그 누구도 그것과의 접촉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요한은 돈의 의미를 넘어서 훨씬 더 깊은 어떤 것을 의도하고 있다.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14,1) 즉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표를 받아 이마에 하느님의 도장을 지니고 있었다. 제자라면 누구도 짐승의 낙인과 성령의 표시를 함께 지닐 수 없음은 분명하다(14,9).

이 짐승이 로마 제국의 권세와 특권과 부와 사치를 의미한다면, 그 짐승을 숭배하는 것은 탐욕과 야심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와 권력에 매료되어 이런 우상들의 유혹에 금방 빨려든다. 요한이 심중에 생각하는 것은 바로 치명적인 이 짐승 숭배이다. 그리스도인은 거기에 승복할 수 없다. 복음은 그와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다란 부와 사치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나 반드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6,24).


[18절]666

네로황제 (54-68년 재위)

 

  이 숫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그 당시에는 금방 알았을 것이다. 이 숫자는 6이라는 숫자의 기능에 기초하고 있다. 6은 완전한 숫자 12의 반이기 때문에 단절, 파기, 불완전을 의미한다. 666은 6을 세 번 연속해서 배열해 놓았기 때문에 불완전의 최고 절정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것은 6✕7, 즉 42개월(3년 반, 1260일) 등이다. 그러므로 이 짐승의 숫자는 그가 지배하는 시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의미한다.

 

또한 이 숫자는 ‘네로 황제’(Nero Caesar)를 의미한다. 또한 잔인함에서 네로에 지지 않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뜻하기도 한다. ‘네로 카이사르’를 히브리어로 표기했을 때 그 각 알파벳이 의미하는 수가(數價)를 합쳐보면 666이 된다.



당시에는 아라비아숫자가 도입되기 이전이었으며, 숫자를 히브리어 각 알파벳에 대입시켜 사용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로마황제라는 호칭을 가지고 박해자라고 부르면 교회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더 가열되겠기에, “네로 황제”라는 글자가 갖는 수가(666)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암호처럼 통용되었을 것이다. 네로의 숫자는 일곱(7)이라는 완전한 숫자에 세 번씩이나 미달되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완전성과는 가장 거리가 먼 숫자이다.

 

이와 비슷한 예가 “예수 그리스도” 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희랍어로 쓰면 “ιησους χριστος(영어식 음역을 하면 iesous christos)”이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란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물고기를 뜻하는 희랍어 ιχθυς(영어식 음역을 하면 ickthys)로 쓰거나 혹은 직접 물고기 형체를 그려서 서로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도록 했다. 이 경우 ι(i)와 χ(ch)는 “ιησους χριστος”의 각 첫 글자들과 일치한다.

(참고로, “χριστος”의 첫 두자인χ(kappa)와 ρ(rho)를 따서 표시한 심볼이  이다.)

 

우리가 묵시록에 나오는 666이란 숫자를 놓고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은 숫자가 상징하는 것에 대한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666이란 숫자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면 족하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든 네로 황제와 같은 교회 박해자는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666이란 숫자가 상징하는 인물을 ‘역사상의 네로 황제’라기 보다는 ‘교회 박해를 일삼는 네로 같은 인물’이라고 보면 무난하다.(예를 들어 나치의 히틀러,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정일)


지금까지 요한은 교회와 악의 세력 간의 끊임없는 투쟁을 묘사해 왔다. 그는 로마 제국이 지상에서 사탄을 대표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짐승의 정체를 밝혀 주었다.

앞으로 진행되는 14장에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참고 견딘 이들이 받을 보상(14,1-5)과 짐승을 예배하는 자들이 받을 벌을 깨우쳐 줌으로써(14,9-20) 요한은 독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으로 이끌고 있다.


[묵상]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는 과거 모든 ‘짐승들’의 화신이 아닐까?

또한 오늘날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선전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