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용의 패배(12,7-18)

윤 베드로 2016. 8. 30. 16:58

8. 용의 패배-하느님은 거짓과 손잡지 않으신다(12,7-18)

 

진리와 거짓 사이의 대결에서 하느님은 중립을 지키지 않으신다.

          불의한 사회를 떠받치는 거짓된 계획에 대항하시며, 저항하는 공동체를 편드신다.

12장 7-9절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본 대목에서 묵시록의 무대가 다시 하늘로 바뀐다.

악마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패배당하고 땅으로 떨어진다.

악마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체포당하기까지 짧지만

           아직 시간여유가(삼년반-묵시12,14)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악마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 기간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 날뛴다.

그러나 본대목은 악마가 비록 거세긴 하지만

          결국 정복당하고야 말 하찮은 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의도가 있다.

악마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큰 피해를 주도록 내버려져 있지만

          이런 도발행위들은 정복되고야 말 적의 최후 발악에 불과하다.

 

악마는 다시금 ‘그 여인’ 즉 유다게 그리스도 교회를 삼키려고 쫒아갔지만

          그 여인도 악마의 손길에서 능히 벗어날 수 있었다.(14절)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악마는 그 여인의 남은 자손들(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총공격을 퍼부을 계산을 세운다.

실제로 묵시7장을 보면 전반부에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마에 돵을 받은 자들로 나타나며(묵시7,1-8),

         모든 나라에서 온 군중, 즉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호된 시련을 겪어낸 사람들이라고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묵시7,9-17) 앞의 설명은 타당하다.

두 구절 모두가 그 여인이 광야로 피신하여 1260일, 혹은 삼년 반 동안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결론적으로, 묵시12,1-6에서 요한 묵시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당하고 있는 이 박해는 긴 싸움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너희 주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악마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어서 묵시12,7-17에서 요한 묵시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악마는 이제 기진맥진한 적에 불과하다. 그 악마가 아직도 광란하는 까닭은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12절)

           이 가공할 세말의 시기를 굳세게 참고 견디어라.


 

[7절] 악마가 감히 하늘 나라에 나타나서 미카엘 대천사와 싸운다는 이야기 자체가 놀랍다.

         구약성서에서는 사탄이 자유롭게 땅을 배회하면서 하느님의 현존 가까이까지

               감히 접근했었다는 점과 심지어 우주의 신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인 양 하느님께 공적 고발자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 점 등(욥기1-2장; 즈가3장)을 기억해야 한다.

         욥기 1-2장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민간전설이다.

 

“하루는 하늘의 영들이 야훼 앞에 모여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보시고 야훼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가 왔습니다.

" 야훼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하고 말씀하시자, 사탄이 야훼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 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말아라." 이에 사탄은 야훼 앞에서 물러나왔다.”(욥기1,6-12)

 

“또 야훼께서 대사제 여호수아가 야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그를 고발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즈가3,1)

 

 

욥기에 의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백성이 당하는 불행에 하느님의 책임이 있는가?

           즉 그분이 악, 거짓과 손잡으시는가? 공동체와 신앙인들이 당하는 불행은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서 악취미로 벌이는 장난의 결과인가?

 

그러나 요한 묵시자는 의심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즉 하느님과 악은 손잡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행에 처한 신앙인들이, “어쩔 수 없다. 운명이고 하느님의 뜻이다”고 생각하면서

          체념하고 무기력에 빠지게 하는 민간 전설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사실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는 ‘사탄은 악의 우두머리이며 하느님을 적대하는 무리의 괴수’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약성서적 사고방식의 흔적이 아직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장에서 “밤낮으로 우리 하느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이 쫒겨났다”(묵시12,10)는

        표현은 완전히 구약성서적 사고방식의 발로이다.

마찬가지로 ‘악마가 하늘나라에 나타났다’는 것도 구약성서적 사고방식에서 유래한 묘사이다.

어찌됬든 사탄은 전쟁을 걸어왔지만 결국 미카엘 대천사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사탄은 패망하고 하늘에서 쫒겨난다.

요한 묵시자는 사탄이 하늘 나라에서 이렇게 축출당하는 사건이

        세말에 있을 시련의 개시와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

사탄의 축출에 관한 다른 기록은 일흔 두 제자의 구마 행적과(루가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지어(요한복음) 발견된다.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 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가10,17-18)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12,31)

 

 

미카엘은 일곱 대천사들 중의 하나이다.(묵시8,2 주해 참조)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 또는 “누가 감히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뜻이다.

 미카엘의 신분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다니엘12,1을 보아야 한다.

다니엘서 이래로 미카엘은 중요한 대천사로 인식되어왔다.

다니엘은 이제까지 유례가 없던 큰 시련을 암시해주는 대목에서 미카엘 대천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미카엘은 선택된 백성의 수호천사, 즉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대천사로 알려져 왔다.

 

그 때에 미카엘이 네 겨레를 지켜주려고 나설 것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어려운 때가 곧 올 것이다.”(다니엘12,1)

요한 묵시자는 악마의 패배를 미카엘 대천사의 숨은 공로로 돌린다.

 

[9절]사탄’의 본래 의미는 ‘고발자’이다.

           70인역 성서에서는 사탄을 ‘디아볼로스’라고 번역한다.

         

사탄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명칭은 매우 흥미롭다.

1) 큰 붉은 용(묵시12,3)

2) 늙은 뱀(창세기3장) : 악마가 뱀의 탈을 쓰고 등장,

               이는 뱀을 숭상하던 우상숭배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던 유대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3) 사탄 : 글자 그대로 악마라는 뜻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윻속하여 덫에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애쓴다.

4) 악마 : 악마라는 말의 어원은 “갈라놓는 자”이다. 악마는 그의 본성상 일체성을 깨뜨리고

                           분열시키는 하느님의 적대자이다.


 

[10-12절] 천상 전례

교회는 고통 가운데서도 승리의 천상 노래를 듣는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승전가이다. 사탄은 패망하고 하늘에서 쫒겨났다. 이 찬미가는 하늘에서 노래했지만 땅에도 울려 퍼졌다. 승리는 연속되는 두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둘째는, 거짓에 대항하여 죽기까지 저항하는 공동체의 투쟁으로 승리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주의할 일이 있다. 용이 하늘에서 패망했지만 신앙인 공동체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쫓겨났다. 이제는 땅에서 신앙인들이 용에게 승리할 차례이다. 즉 용이 아직 전적으로 망하지는 않았다. 용이 잔뜩 화가 나 있기 때문에, 용은 공동체들에게 화풀이를 하려 들 것이고, 그 구성원들을 박해하고 죽일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셨지만, 세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종말까지는 현실 안에 악의 도사림이 상존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용의 투쟁(12,13-18)


[13-14절] 땅에 떨어진 용은 여자를 쫓아간다. 그러나 하느님은 보호하시고 자유를 주신다. 여자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삼년 반 동안 보호하신다. 과거에도 하느님은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음식(만나)을 주시며 보호하셨다. 삼 년 반이란 표현은 실제 기간이 아니라 환난 기간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기간이다. 즉 박해는 오래지 않아 지나가고(삼년 반-불완전) 용도 사라질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 갔다. 야훼께서 산에서 그를 부르셨다. "너는 야곱 일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어라.'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출애19,3-4).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에집트로부터 탈출할 때도 하느님이 독수리 날개에 태워서 데려내왔었다고 비유한다.

 

 


똑같은 비유적 표현이 이 대목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새로운 탈출’(새로운 구출)을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독자는 알아 들으라.)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 지붕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려 내려 오지 말며 밭에 있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 가지 말아라. 이런 때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이런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 때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쳐 올 터인데, 이런 재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앞으로도 다시 없을 것이다. 주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뽑으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

광야’ : 이 대목은 아마도 마르13,14-20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세말의 시련이 시작될 때 유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광야로 피신하라는 경고는 바로 ‘안티오쿠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세 :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나타난 역사적 인물은 유대인의 박해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였다. 그뒤 이 인물의 성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재연되었다. 그는 거인족 군대의 선두에 선 강력한 지배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3명의 지배자(다니 7:8, 24의 '세 뿔')를 죽이고 하느님 백성을 박해하고(7:25),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모셔놓고 하느님의 성전을 황폐화시키는 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후대에 하느님의 적인 폭군은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예언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묵시문학 작가들은 황제 네로(68년 죽음)를 적그리스도로 생각했다.

치하에서 실현되었다.

 

 


이러한 암시적 인용들을 통해서 요한은 교회가 이스라엘 백성이 견디었던 일을 체험하고 있으며, 또 예수와 사탄 사이의 투쟁을 재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늙은 뱀인 큰 용”은 그리스도를 파멸시키려 애썼듯이 교회를 파괴하려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제 사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계신다(독수리 날개에 태워...).


[15절]토해낸 물’ : 본대목은 어떤 독특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가 없이 그저 단순하게 이야기를 실감있게 전개하고자 요한 묵시자가 묘사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옥좌로 들어높여져 거기에서 우주를 다스리게 되셨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6절), 여전히 사탄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는 입장에 있다. 즉 아직 안심할 시간이 아니다. 용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패망했어도 전능한 자,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보인다. 사탄은 자기 입으로 강물 같은 물을 토해내어 교회를 “휩쓸어” 익사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은 별 것이 아니다. 사탄은 강물을 토해 내고 있을 뿐이다. 사탄은 하느님께서 그 옛날 당신 백성들로 하여금 마른 발로 에집트 병사들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던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던, 출애굽의 하느님의 병법을 이스라엘에게 사용하고 있다. 사탄의 그러한 책략은 실패만을 맛볼 뿐이다. 땅은 오히려 여인을 구해준다.


[16절] 그러나 악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는 사탄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것이다. 교회는 악마와 전투를 벌여야 하고 신자들 안에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리를 얻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였듯이 그분의 교회 또한 투쟁과 고난을 통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17-18절]그 여자의 남은 자손’ : 이방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 당시만 해도 로마 제국은 세상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무력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보이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이라는 존재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바닷가에 섰습니다” : 이 말은 출애굽기 장면을 상기시킨다. 파라오가 자기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한다. 그 때 갈대바다가 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건너게 된다. 그러나 파라오와 병사들, 즉 박해자들은 바다가 삼켜버린다. 이와 같이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불안한 상태, 파멸과 재난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다음 장에서, 용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향해 비수를 뽑을 것이다. 용은 이제 일격을 가하기 위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13,1-10),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18), 이렇게 두 협력자들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 짐승들은 여인에게 적이었던 옛 뱀의 후손들이다.(창세3,15)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묵시자 요한은 로마 제국의 박해속에서, 로마 제국이라는 포효하는 용에게 신앙인들이 격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은 박해에 처한 신자들을 격려하는 수단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자의 공격이 심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패배당하여 절망한 사탄의 분노로 인해서라고 지적한다.

그 옛날 에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던 파라오처럼,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로마 황제를 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 묵시자는 이렇게 출애굽과 현재의 박해상황을 계속 대비시켜가며, 그리스도의 승리, 신앙인들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으며, 박해상황하에서의 신앙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의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룩하신 승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7-9절). 우리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들이 쫒겨났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10-11절)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라는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12,25; 마태16,25)와 동일한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평범한 인간적 차원에서 보면 골고타산에서 그리스도께서 사탄과의 싸움에 패배한 듯이 보였던 것처럼, 로마 형리들의 손에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도 완전히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듯이 그분의 순교자들 또한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은 사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격분일 뿐, 그의 노력은 헛되이 끝나고 말리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 조차도, 결국에는 신앙인들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고 사탄 자신은 패배하게 되는 기회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묵상해보자. 오늘날 하느님 백성이 당하는 불행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느님인가? 또한 오늘날 우리는 용에게 무슨 이름을 붙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