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요한묵시록 공부

두 증인(11,1-14)

윤 베드로 2016. 8. 30. 16:49

5. 두 증인(11,1-14)

 

앞의 묵시록 10장은 묵시록에서 전환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묵시록 11장에서는 묵시록의 무대가 예루살렘으로 바뀐다.

이제까지의 묵시록의 무대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장

파트모스 섬

2-3장

일곱 교회가 속한 소아시아

4-5장

하늘나라

6-10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전 우주

11장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는 도성

 

 

즉 11장의 무대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도성(8절)이 무대로 등장하는데, 이 도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지상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바로 이 예루살렘이 묵시 11장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묵시록 11장은 두 증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앙인들이 로마 제국에 대해 어떻게 예언자적 선교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인 두 증인을 통해 묘사해 준다. 두 증인은 온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이요, 민족들 가운데서 활약하는 예언자를 대표하는 자들이요. 모든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1-2절] 성전측량

여기서 요한은 성전을 측량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묵시자 요한은 성전을 측량하도록 갈대를 부여 받는데(공동번역에서는 측량자라고 번역), 이 장면은 에제40,3 이하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성전에서 측량된 부분들이 성역으로 보존되게 될 것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이방 민족들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이 대목은 자세히 살펴보면 아마도 예루살렘이 멸망(기원후 70년경)당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어떤 전승 자료에서 얻어낸 내용이라는 인상이 짙게 풍긴다. 즉 원래의 이 구절 내용은 유다 독립전쟁(기원후66-70년) 초기, 혹은 아직 전쟁은 터지지 않고 전운이 심각하게 감돌던 무렵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이 구절 내용대로 본다면 성전 바깥뜰은 로마 제국의 군화에 짓밟힐지언정 성전 자체는 안전하리라는 사고방식이 크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예수께서 예언한 대로(마르13,2)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불태워졌으며 그 뒤에 결코 재건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놓고 기원후 70년(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이루어진 전승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다. 요한 묵시자가 이런 비현실적인 전승 내용이 담긴 구절을 이 자리에 배치한 이유는 예루살렘 멸망의 참된 의미를 새로운 각도(두 증인)에서 투영해 보려는데 있다고 하겠다.


[3-6절] 두 증인

왜 두 증인이라는 면이 강조되는가? 이는 모세 율법이 선언하는 내용에서, 즉 “두 사람의 증언은 참되다”는 율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나쁜 짓이든 어떤 잘못이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증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고소할 수 있다.(신명19,15)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요한8,17)

 

 

학자들은 두 증인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를 밝혀내려고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 6절을 보면 두 증인은 분명히 엘리야와 모세 두 예언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3,23-24)

엘리야 예언자는 말라기의 약속에 따라 세말 직전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리라고 기대되어 온 인물이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을 깨달았다.(마태17,10-13)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이런 약속의 실현자로 간주되었다.

 

 


또한 6절의 “예언하는 기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을 권세를 가졌고”라는 문구는 1열왕17,1에서 엘리야 예언자가 실제로 행한 이야기와 같다.

 

길르앗의 티스베에 살고 있던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1열왕17,1)

 

 


한 편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한을 가졌다”는 문구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실제로 행한 이야기와 같다.

 

야훼께서 다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들고 에집트에 있는 모든 물, 강이나 운하나 늪이나 그 밖에 물이 괸 모든 곳을 향하여 손을 뻗치라고 하여라. 그러면 그 모든 물이 피가 되리라. 에집트에서는 나무 그릇이나 돌항아리에 있는 물까지 피가 되리라." 모세와 아론은 야훼의 분부대로 하였다. 그가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강 물을 내려 치자 강물이 모두 피가 되었다. 강에 있는 고기가 죽어 물에서는 썩는 냄새가 나서 에집트인들은 나일강 물을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에집트 땅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출애7,19-21)

 

 

그밖에 “온갖 재앙으로 몇 번이든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이 세상을 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문구도 모세가 에집트 땅에서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을 즉시 연상하게 해준다.(출애7,14-11,10)

그밖에도 타볼산에서의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도 연관지을 수 있는데 예수의 거룩한 변모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대등한 인물로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마태17,1-8; 마르9,2-8; 루가9,28-36)

그러므로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엘리야와 모세’라는 것이 타당한 견해이다.


“삼 년 반”(마흔 두 달, 일천 이백 육십 일)

묵시록을 읽다 보면 비슷하거나 똑같은 기간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용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 마흔 두달(묵시11,2; 13,5), 일천 이백 육십 일(묵시11,3; 12,6), ‘삼 년 반(묵시12,14)’

이렇듯이 똑같은 기간을 날 수나 달 수 혹은 년 수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사례를 구약의 다니엘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서에서 ‘한 주간’은 ‘7일간’이 아니라 ‘7년간’을 의미한다. 즉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하루’는 ‘1년’(일정한 기간)을 표시하는 것이다. 다니엘9,27의 ‘반 주간’이라는 말도 엄밀하게 말해 ‘사흘 반’이 아니라 ‘삼 년 반’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묵시록에 나오는 ‘삼 년 반’이라는 수자는 다분히 다니엘서의 ‘7년 주기 표현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묵시록에 나오는 ‘삼 년 반’은 세말 직전의 시기를 의미한다. 7년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그중 전반기 삼 년 반 동안에 ‘두 증인’이 예언자로 등장하고, 그 뒤 후반기 삼 년 반 동안은 ‘적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적대자, 반 그리스도)가 주권을 쥔 기간으로서 더 큰 시련과 함께 묵시 13-19장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삼 년 반’이라는 수자 가운데서 묵시11,2의 42달과 11,3의 1,260일 동안만 두 증인이 활동하는 전반기를 의미하며, 그밖의 묵시12,6의 1,260일과 12,14의 삼 년 반과 13,5의 42달 동안은 모두가 폭군이 지배하는 후반기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두 증인은 베옷을 입고 1,260일동안 예언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옛날 대예언자들이 회개를 촉구하던 모습이다. 베옷 애통함과 회개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이 베옷을 걸쳤다는 것은 영광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의미한다.

 

그날, 주 만군의 야훼께서 너를 불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베옷을 입으라고 하시지 않았느냐?”(이사22,12)

 

 

4절의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불”은 즈가4장과 관련이 있다. 즈가4장에서 두 올리브나무는 ‘즈루빠벨’(정치지도자)과 ‘여호수아’(종교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귀환한 시기인 기원전 520년경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백성들이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의 재건 사업을 펼친 인물들이다. 이 두 증인은 엘리야와 모세와 유사하게 활동한 사람들이다. 이 두 증인은 과거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처럼, 우상들로 가득 찬 사회 하느님의 거처가 되기까지 예언하고 저항하는 일을 했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이 대목에서 의미하는 바는, 그 어느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의 예언자적인 사명을 중단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에 반대하고 해치려는 자들은 두 증인들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불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예언자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것은 원래 “”이다. 이 말은 “”에 비유될 수도 있다.(1,16; 2,16; 19,15.21) 여기서는 그 말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에 비유된 것이다. 예수를 반대하고 해치려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말씀은 태워 버리는 말씀이고, 죽음을 초래하는 말씀이 된다. 이러한 묘사는 전형적인 성서적 은유법이다.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나 야훼는 만군의 하느님으로서 선언한다. ‘저들이 이런 말을 지껄이므로, 나는 너의 입에 불같은 말을 담아 준다. 그 말은 이 백성을 섶처럼 살라 버릴 것이다.’(예레5,14)

 

 

이 대목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존재한다. 두 증인들이 특별히 거룩한 변모 사건의 장면(루가9,30)과, 부활하신 분의 빈 무덤 발견의 장면(루가24,4), 그리고 예수의 현양에 대한 믿음의 장면(사도1,10)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은 에집트에서 처럼 누구든 그 말씀에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재앙으로 변화된다. 또한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7-10절] 짐승이 두 증인들을 죽이고 승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 시간은 상징적으로 삼년 육개월(42달) 동안 지속된다. 그렇다고 그 기간이 나자렛 예수가 공생활을 수행하던 역사적인 실제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은 성서에서의 메시아 시대를 표상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락(깊은 구렁)에서 짐승이 올라오게 된다.


깊은 구렁으로부터 올라온 그 짐승” : 이제 묵시록에 비로소 이 사악한 존재가 등장한다. 이 짐승에 대해서는 묵시13장에 가서 좀 더 자세히 묘사되고 있으며 거기서 그는 세말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어 온 악의 대표자로서 비추어진다. 즉 나락의 천사(9,2.11)와 13,1에 나오는 유혹자 사탄이라 할 수 있는 괴물(짐승)을 연계시키고 있다.

묵시록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죽음을 영광을 표현해주는 용어로 묘사되지 않고 있다. 묵시록은 박해가 교회들을 강타하고 있는 현실에서 겉으로는 실패한 것 같은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더 선호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는 사탄이 승리자처럼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증인들을 죽이고 승리하는 “그 짐승”는 묵시록 시대에 로마 제국주의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다시 돌아온 네로황제이다. 즉 그 짐승은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네로의 재복귀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네로 황제와 재복귀설

 

로마 황제(54∼68). 로마 귀족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小)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사후, 소아그리피나가 네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황제의 둘째 비(妃)가 되자 네로는 그의 양자가 되었다.

권력욕이 강한 소아그리피나비는 철학자 세네카를 네로의 가정교사로 만들고 네로를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시켜 그의 동생 브리타니쿠스에 우선하는 제위 후계자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기다리지 못한 소아그리피나비가 황제를 독살하였고 네로는 제위를 차지하였다.

네로는 치세 초기 5년간은 세네카와 근위장관 브루루스의 보좌를 받아, 해방노예를 중용하고 매관매직의 폐해를 시정했으며 감세·원로원 존중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소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지원하자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마침내 정부(情婦) 사비나의 꼬임에 넘어가 59년 모친을 살해하였다.

그 무렵 브루루스가 죽고 세네카도 은퇴하자 네로의 폭군적 행동은 극에 달하여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유형을 보낸 뒤 그녀를 살해하였다. 왕비가 된 사비나도 마침내 급사하였다. 한편 네로는 소년시절부터 예술에 관심을 갖고 시를 썼으며 특히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며 하프연주를 즐겼다.

64년 7월 로마시의 대경기장에서 시작된 원인 모를 화재로 시가지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민중들이 네로를 의심하여 동요하자, 네로는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돌려 많은 사람을 체포·화형시켰다. 65년 5월 원로원의원 피소를 중심으로 한 음모가 발각되자 세네카의 가담을 의심하여 자결을 명하였다. 66년 네로는 그리스로 가서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하고 올림픽, 델포이의 경기에 참가하여 미리 짜고 벌인 경기에서 많은 영관(榮冠)을 획득했다.

그러나 68년 갈리아에 이어 에스파냐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네로는 원로원과 군대에서 버림을 받고 로마를 탈출하였으나 추격이 심해지자 자살하였다. 그는 마지막에 <얼마나 아까운 예술가가 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도 네로가 다시 돌아온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네로에 대한 이야기는 중세에까지 전설로 이어졌다.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하는 큰 도성” : 예루살렘을 묘사한 용어치고는 우리 눈에 가장 생소한 표현이다. “큰 도성”이라는 말은 묵시록에서 항상 하느님의 적대세력인 바빌론-로마제국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 여자가 받는 고통이 두려워 멀리 서서, "무서운 일이다! 이 강한 큰 도성 바빌론에 화가 미쳤구나! 네가 일시에 하느님의 벌을 받았구나!" 하고 부르짖습니다.(묵시18,10)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악한 지도자들을 가리켜 ‘소돔의 고관’(권력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사악한 무리가 득실거린다는 점에 있어 예루살렘이 소돔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꼬집는 혹평이다.(이사1,10; 3,9)

 

만군의 야훼께서 조금이라도 살려 두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소돔같이,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으리라.(이사1,10)

뻔뻔스런 얼굴에 죄가 서리어 있고 소돔처럼 죄를 자랑하며 숨기지도 않는다. 아, 멸망을 자청하는 그들, 처참하여라.(이사3,9)

 

 

또한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에집트에서 배워 온’악습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고 단죄하고 있다.

 

나는 네가 다시는 음란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 에집트에 있을 때부터 피우던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다시는 에집트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에집트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에제23,27)

 

 

9-10절에 보면 두 증인은 깊은 구렁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패하여 살해된다. 두 증인은 무덤도 없이 큰 도성의 광장에 내던져졌기에 11절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소생(부활)은 시체를 바라다보는 모든 이들에게 대단한 감명과 충격을 준다. 이처럼 묵시자는 “예수의 빈 무덤”에 관한 복음서의 주제들을 멋지게 갖다 쓰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예수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로마-바빌론을 상징하는 대창녀의 의미로 사용되던 “큰 도성”이 되어버렸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를 광장에 널어 놓는 그 대도시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요한 묵시록은 여기서 다만 암시만 할 뿐이다. 즉 그 대도시는 소돔(하느님의 전령들을 거절하는 사회를 상징)이라는 도시명을 지니게 되었다.(8절) 성서에서 소돔이라는 도시는 눈멀고 타락한 주민들로 가득찬 도시였다.(창세19,11)

나아가 종살이하던 땅인 에집트(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상징)라는 이름도 지니게 되었다. 에집트는 태양신을 믿고 파라오 왕을 신으로 받드는 우상숭배를 하는 민족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살이를 시키던 민족이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맞아들이도록 불리운 곳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였으며(루가13,34; 마태23,37), 주님이신 예수께서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신 곳 역시 그곳이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10b)


이렇게 묵시자는 두 증인에 대해 말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죽음은 온 세상에 교훈을 준다. 예언자들의 시체가 저주받은 이들로서 무덤도 없이 광장에 널려 있게 되고, 그 광경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즉 불의한 이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다(10절). 그들은 심지어 죽음의 축제를 지내며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고 예언자를 영원히 제거한 줄 안다. 또한 예수를 영원히 제거한 줄 알았던 것처럼, 순교자들이 영원히 제거된 줄 안다. 제국주의의 칼이 예언자의 정신보다 더 강한가? 그 짐승의 힘이 예언을 제거할 수 있는가?


[11-13절] 두 증인의 부활과 찬양-순교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흘 반이 지난 후 두 증인들에게 에제37,5.10이 예언했던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에제27,5)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에제37,10)

에제37,10은 하느님의 영이 말라 비틀어진 뻐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환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박해당한 순교자들의 죽음은 결정적인 실패가 아닌 것이다. 순교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짐승의 권력은 순교자들과 그 정신을 영원히 제거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려 개입하시는 모습이 그 점을 분명하게 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이다.

 

 


이렇게 소생된 두 증인은 하늘에서 “이리로 올라오너라”는 소리를 듣고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 :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두 증인들은 하늘로 불려 올라갔는데, 이는 엘리야의 첫 번째 승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난데 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 갔다.(2열왕2,11)

이렇게 엘리야의 승천에서 영감을 받아 묵시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현양-승천, 곧 예수의 승리이다.

 

 

그리하여 13절에서 이 두 증인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불신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무서운 일련의 사건들-큰 지진으로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그 지진으로 주민 7천명이 죽음- 을 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악한 길에서 회개한다.


[14절] 결론

우리는 묵시록에서 일곱이라는 형태(편지, 봉인, 나팔, 대접)로 된 내용을 한가운데 와 있다. 일곱이라는 형태 위에 형성된 내용들은 그리스도요 주님이신 나자렛 예수의 신비를 다루고 있다. 이제 일곱 번째 나팔, 즉 최후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곱 번째 나팔소리는 생명의 주인, 역사의 주인이신 분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신다. 이제 ‘죽은 자들’-불의한 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멸망시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