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최후의 국왕들
1. 요시야 :
어느 면에서나 유다 왕국의 가장 훌륭한 군주였다.
그러나 609년 므기또에서 에집트 파라오와 접전하다 전사한다.
요시야의 치세는 철저한 종교개혁을 특색으로 하며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유다 왕국과
사마리아 왕국의 통일을 모색해 본 시기이다.
이 시기의 예레미야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의 회개촉구는 요시야의 종교개혁과는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었다.
예레 2-6장을 읽노라면 호세아와 아모스의 설교 주제가 연상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야훼의 관계가 약혼, 혼인 그리고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신적 체험의 근본을 이루는 사건과 주제가
거듭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광야의 체험, 계약 사상, 약속의 땅, 야훼의 현존과 가호, 목자요 영도자,
남편이요 아버지이신 야훼…등의 표현과 주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예언자가 촉구하는 회개란 야훼와의 정든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데에 있으며,
아시리아나 이교도들의 신들과 맺고 있는
허황한 관계를 청산하는 데에 있다.
2. 여호아하즈 :
요시야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재위 3개월만에 파라오에게 에집트로 끌려가
그곳에서 볼모로 죽었다(2열왕 23,31-34).
예레미야와는 직접 연관이 없다.
3. 여호야킴(609-598) :
성품이 오만하였고 親에집트 외교노선을 폈다.
자기 신하들의 손에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예레미야를 항상 적대시하였다.
여호야킴의 치세는 야훼와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과는
정반대되는 노선을 따랐다.
에집트 파라오의 손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그는 철저하게 친에집트 외교정책을 폈다.
예레미야는 그 정책이 국가에 위험천만하다 하여 극구 반대하였다.
여호야킴 치하에서 예레미야는 θ의 징벌이
임박하였다고 공공연히 설교하였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황폐하리라는 것이었다.
예레 7장(필리 26장과 함께 읽기 바란다)을 보면
신앙과 일관성 있는 신심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예배,
오히려 이기적이고 불의하고 반사회적인 목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도구화하는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예레미야의 강경한 예언설교와 여호야킴 왕의
성서에 반대되는 처사가 팽팽한 대립과
긴장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요시야왕 치하를 회상하면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습니다.
저는 웃으며 깔깔대는 자들과 한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손에 잡힌 몸으로 이렇게 울화가 치밀어 올라
홀로 앉아 있습니다”(예레 15,16-17).
4. 여호야긴 :
여호야킴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몇 달 안되어느부갓네살에게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전쟁 포로로 국왕과 고관, 군인, 시민들을 사로잡아간 것이다.
5. 시드키야 : 유다 최후의 왕.
여호야긴의 삼촌으로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왕위에 올랐다.
원래는 마따니야라고 했는데
느부갓네살이 자기 권위를 과시하는 뜻으로
그의 이름을 시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이 왕은 예레미야를 존경하고 그의 간언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주견이 약하여 신하들의 손에 쥐어 잡혔다.
국왕의 혼사, 예레미야에 대한 박해(예레 38,5 참조),
친에집트 정책이 신하들의 입김에서 온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와는 결별이 되었고
예언자는 매국노나 반역자로 취급을 당하게 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자(587년)
시드키야는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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