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사도행전 공부

안티오키아 교회

윤 베드로 2022. 11. 22. 07:40

안티오키아 교회가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살펴보면,

 

최초의 혼성교회 :

안티오키아 교회는 : 유다 땅이 아닌 이방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최초의 유다인과 이방인 혼성교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서 열 두 사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교회가 탄생했다.

주축을 이룬 신도들은 본토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행동을 같이 했던 이들이다.

그들 중 스테파노가 처음으로 순교했고,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안티오키아로 옮겨갔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 이야기가 사도행전 1119-30에 실려 있다.

 

안티오키아에서 디아스포라 유다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중 뜻밖의 일이 벌어졌는데,

                            키프로스 사람과 키레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이방인한테도 선교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견했고,

                 성과를 확인한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오로를 데려왔다.

바오로는 1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 기간동안 유랑 선교사 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정보를 습득한 것 같다.

 

이방인 선교의 전초 기지 :

바오로의 유랑 선교사 생활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매우 중요하다.

로마제국에는 : 인구 50만이 넘는 도시가 세 곳이나 있었다.

                           제국의 수도 로마와 문화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동방의 중심지 안티오키아였다.

          오늘날로 보면 인구 50만은 별로 많지 않으나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안티오키아는 : 내륙에 있었지만 가까운 곳에 지중해로 연결되는

                          셀레우키아 항구가 있어 지중해 각처로 여행하기에 편리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가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할 때

                   언제나 안티오키아 교회를 출발지요 도착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 :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 안티오키아 교회의 구성원에게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사도 11,26).

1세기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베드로 14,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겪으면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 자체가 치욕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냐시우스 주교 :

안티오키아의 3대 주교인 이냐시우스가 그리스도교 전체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이냐시우스 주교는 :

110년경 로마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 당해 순교했는데,

                끌려가는 도중 주변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그리스도교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언급한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후에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자리잡게 된다.

곧 우리가 매주 외우는 니케아 신경’(325년에 완성)의 정신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냐시우스 주교는 그리스도인들을 가톨리켄이라 불러

                     후에 그리스도교의 공식 명칭이 가톨릭이 되게 한 장본인기도 하다.

또한 이냐시우스는 주교-사제-부제로 이어지는 교계제도의 기틀

                                  마련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안티오키아 학파 :

2-7세기에 활동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

                  그리스도교 신학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고 많은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절기에 따라 모시는 성인 가운데 이냐시우스 주교, 순교자 루키아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대주교 등이 있다.

그들은 : 인간론, 신론, 그리스도론에서 고도의 그리스 논리를 사용한 교리를 만들어 냈고

              특히 성경에 대한 字義的 해석과 역사적 해석으로 유명했다.

그리하여 니케아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교회를

                     총 대주교좌로 임명하게 된다.

박해를 받아 쫓겨난 사람들이 세운 초라한 교회가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안티오키아 사건(갈라 2,11-14)

 

안티오키아 교회는 : 그리스도교 역사상 두 번째 교회로, 최초의 유대인이방인

           혼성 교회였다. 이 교회에 베드로가 방문했을 때 사건이 터졌다.

 

베드로는 : 교회의 수장답게 지중해권 곳곳에 설립된 당시 교회들을 두루 방문했는데,

                  마치 오늘날 교황의 행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베드로의 방문 이유는 : 자신의 생생한 예수 체험을 전달하고

                지역 교회를 격려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 혼성교회라 애찬(愛餐)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했으며,

        격려 차 방문한 교회의 어른인 베드로가 그 자리를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야고보의 사람들이 등장 : 그런데 난 데 없이 야고보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의 음식규정에 의하면 이방인의 음식은 부정하기 때문에

                이방인들과의 식사를 금했다(에제 4,13;호세 9,3-4).

󰡐야고보의 사람들󰡑은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유대인이라면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테니,

                    베드로는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 애찬을 사양했고 일단의 유대인들이 동조했다.

비록 바울로의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아마 야고보의 사람들을 자극시키면 더 큰 문제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대변하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던 바울로와는 입장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때문에 베드로는 :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겁쟁이󰡑라는 비난면치 못하게 되었다.

사도회의와 마찬가지로 안티오키아 사건의 핵심에도󰡐율법󰡑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