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오늘의 묵상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들에게 신뢰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판단과 식별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뒤틀립니다.
고백하건대, 대개의 판단과 식별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기심으로
그 순수성과 진정성이 퇴색해 가고는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한결같았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
그 구원은 모든 이가 화해와 용서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요약되는 복음의 가르침은 이제껏 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문제는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합니다.
몇몇 해석들은 타락하여 이단이 되었고, 몇몇 해석들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고도의 수련으로 뻗어 갔습니다.
모든 해석은 어느 정도 제 삶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신앙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고유하게 다듬어 온 것이니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이 가꾸어 온 삶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에 물결치듯 흔들리며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단순함이 필요한 것이지요.
힘의 논리와 경제 논리 앞에 자기 삶의 가치관마저 포기하는 비굴함이 세상살이의 당연한 이치로 변질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교조주의적 계명 몇 가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축소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부터 회복해야 할 슬픈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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