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잠언 공부

14장, 지혜의 길과 미련한 길

윤 베드로 2018. 9. 20. 06:54

14, 지혜의 길과 미련한 길

 

14장은 지혜의 길과 미련한 길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로 행하여 자기 집을 세우지만,

하느님을 멸시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릇된 길로 행하여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허문다.

 

1. 지혜자의 수고와 보상(14,1-3)

14,1 지혜로운 여자는 집을 짓고 미련한 여자는 제 손으로 집을 허문다.

2 바른길을 걷는 이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릇된 길을 걷는 자는 주님을 업신여긴다.

3 미련한 자의 입에서는 교만이 싹트지만

지혜로운 이의 입술은 그를 지켜 준다.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경멸하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정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1: 지혜는 집을 세우고 미련은 집을 허문다는 의미.

        물론 여기 집은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어떤 특별한 일의 성취와 관련 된 것일 수도 있다.

2: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정직하게 행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정직하고, 패역하게 행할 수 없다.

3: 잠언은 미련한 자와 교만을 언제나 동일 시 하고 있다.

        스스로 온전하다고 자만하여 어떤 가르침도 받지 않을 때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이다.

 

2. 구해도 얻지 못하는 지혜(14,5-9)

4 소가 없으면 구유는 말끔하지만 황소의 힘을 빌려야 소출이 많아진다.

5 진실한 증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지만 거짓 증인은 거짓말만 내뱉는다.

6 빈정꾼은 지혜를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슬기로운 이에게는 지식이 쉽게 온다.

7 우둔한 사람 앞에서 떠나가라. 거기에서는 지식의 말을 배우지 못한다.

8 영리한 이의 지혜는 갈 길을 깨닫게 하지만

우둔한 자의 미련함은 속임수일 따름이다.

9 미련한 자들은 속죄 제물을 비웃지만 올곧은 이들은 은혜를 입는다.

 

아무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지혜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만하게 행하는 사람은 결코 얻을 수 없다.

 

4: 모든 일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소로 인하여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소를 기르는 수고가 요청된다.

5: 증인은 본 것을 가감 없이 말하는 자다.

        그러므로 증인이 진실하다면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거짓 증인은 당연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6-9: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대립해 놓고 지혜를 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언제나 원칙에 따라 행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탐욕에 이끌림으로 스스로 속임을 당한다.

          미련한 자에게는 지식이 없음으로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3, 타인의 마음과 진리의 길(14,10-13)

10 마음만이 제 자신의 아픔을 알고 그 기쁨도 다른 사람은 나누지 못한다.

11 악인들의 집은 무너지고 올곧은 이들의 거처는 번성한다.

12 사람에게는 바른길로 보여도 끝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

13 웃으면서도 마음은 괴롭고 기쁨이 근심으로 끝나기도 한다.

 

하느님이 주신 지혜로 분별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멸망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10: 마음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불가침적인 장소이고

                  또한 자신의 어떠함을 시험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고통이나 즐거움은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참예할 수도 없는 것이다.

11: 의인과 악인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이다.

12: 생명과 사망의 길이 사람들의 판단에 의존되어 있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사람들의 보기에 바를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다면

                          그 길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13: 사람의 외적 삶의 모습과 내면의 모습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이다.

 

4. 분노와 악한 꾀의 말(14,14-19)

14 마음이 빗나간 자도 제 행실의 결과로 채워지고

착한 사람도 제 행동의 결과로 채워진다.

15 어수룩한 자는 아무 말이나 믿지만 영리한 이는 제 발걸음을 살핀다.

16 지혜로운 이는 조심해서 악을 피하지만

우둔한 자는 마음 놓고 굳게 믿는다.

17 화를 잘 내는 자는 미련한 짓을 하고 음흉한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18 어리석은 자들은 미련함을 제 몫으로 삼지만

영리한 이들은 지식으로 꾸며진다.

19 악한들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악인들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서 죄를 피하거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14: 사람은 각각 자기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말.

15: 어리석은 자와 영리한 자의 차이는 분별력이다.

16: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는 악에 대한 태도다.

         지혜로운 자는 삶의 모든 문제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악에서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악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피할 줄 모른다.

17: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사리를 분별할 수 없음으로 어리석은 일을 행할 수밖에 없다.

18: 어리석은 자의 수고는 어리석음을 얻고,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얻는다.

19: 선인과 의인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의미다.

 

5.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14,20-22)

20 빈곤한 이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유한 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

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짓는 사람이고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22 악을 꾸미는 자들은 반드시 길을 잃게 되지만

선을 꾸미는 이들에게는 자애와 진실이 따른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세상은 항상 부유한 자들을 환영하며 가난한 자들을 멸시한다.

성경에서는 이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20: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상에서 소유가 지니고 있는 위력을 말해 준다.

21: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빈곤한 자를 있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22: 악을 꾸미는 자는 그르게 행동하고 선을 꾸미는 자는 자애와 진실이 따른다.

 

6. 수고와 소유(14,23-25)

23 모든 노고에는 이득이 생기는 법이지만 입술만 놀리면 궁핍해질 뿐이다.

24 지혜로운 이들의 면류관은 부유함이고 우둔한 자들의 화관은 미련함이다.   

25 진실한 증인은 여러 목숨을 구하지만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는 속임수만 일삼는다.

 

말만으로는 열매를 거둘 수 없고 반드시 수고가 뒤따라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일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한다.

 

23: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자는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교훈이다.

24: 지혜로운 자는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함으로 명예를 얻지만,

                     우둔한 자가 소유한 재물에 대해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

25: 진실한 증인은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죽일 수도 있다.

 

7. 생명의 샘(14,26-30)

26 주님을 경외함에 확고한 안전이 있으니 자손들에게도 피신처가 된다.

27 주님을 경외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28 백성이 많은 것은 임금의 영광이고 국민이 적은 것은 제후의 멸망이다.

29 분노에 더딘 이는 매우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성을 잘 내는 자는 제 미련함만 드러낸다.

30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

 

하느님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안전한 피난처와 요새이다.

하느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의 생명을 지켜주시며

그의 후손들까지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26-27: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말씀해 주셨다.

             이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지라도 경외하는 자들만

                        그 길로 행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피난처가 되고 생명의 샘이 된다.

28: 왕이 선정을 베풀 때 그에게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므로 왕의 나라가 견고해 지지만 왕이 백성들을 탈취할 때 백성들은 그를 떠난다.

29: 사려 깊은 행동의 지혜로움을 말해 주기 위한 잠언이다.

30: 마음의 화평은 자족함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것을 시기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조차 누릴 수 없다.

 

8. 의인과 악인의 결말(14,31-35)

31 약한 이를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불쌍한 이를 동정함은 그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32 악인은 제 악함 때문에 망하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피신처를 얻는다.

33 지혜는 슬기로운 마음에 깃들지만

우둔한 자의 마음속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34 정의는 나라를 드높이지만 죄악은 민족의 치욕이 된다.

35 임금의 총애는 사려 깊은 종에게 내리고

그의 진노는 수치스러운 자에게 내린다.

 

⇒①하느님을 떠나 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심한 재난을 만나면

                  금방 쓰러져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의로운 사람은 무서운 환난과 죽음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피난처를 향해 피신할 수 있게 된다.

정의는 나라의 운명과 명예를 좌우하는 귀중한 가치이다.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지고, 정의가 바로 서면 나라도 바로 서기 때문이다.

 

31: 하느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가난하거나 궁핍한 것이 한 인간으로서 멸시를 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느님은 각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부를 허락해 주시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난을 허락해 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32: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죽음은 인간에게 절대 절망이다.

         그러나 의인은 죽음 후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절망이 될 수 없다.

33: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드러내야 할 때 외에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34: 정의와 죄악은 개인의 삶에 영광과 수치를 가져다주는 것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35: 슬기로운 자는 은총을 입지만 어리석은 자는 진노를 당하는 것이다.

 

잠언이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하느냐(to do)”라는 문제보다는 무엇이 되느냐(to be)”에 있다.

잠언이 이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정직한 자가 되었을 때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은

정직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선한 자가 되었을 때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은 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잠언에서 사람을 칭()할 때 사용되는 명사들, 즉 지혜로운 자,

미련한 자, 의인, 악인, 슬기로운 자, 어리석은 자, 정직한 자 등은

모두 사람의 어떠함(to be)을 표현해 주고 있는 언어들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지 안다면

그를 통하여 어떤 일들이 행해 질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

지혜로운 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통하여

어리석은 일들이 행해 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는 자를 통하여

지혜로운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또한 부지런한 자에게 궁핍한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게으른 자에게 풍요로움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합당치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합당한 일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요청된다.

하나는 우리의 관심이 외모를 꾸미는 것으로부터

속사람을 꾸미는 일로 바꾸어져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관심이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로부터

무엇이 되느냐라는 문제로 바꾸어져야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외모를 꾸미기 위하여 하고 있는 모든 노력을

우리의 속사람(내적 존재)을 꾸미는 일에 투자한다면,

우리와 우리가 속한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처럼 우리의 관심이 바꾸어진다면

우리와 공동체 모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변화 중에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