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민수기 공부

민수기 11장 공부 : 광야에서 백성이 불평하다

윤 베드로 2017. 12. 21. 07:43


광야에서 백성이 불평하다(11,1-23)

 

*11장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지도자 모세의 고통에 대한 호소를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느님은 전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11,1-3 :

이스라엘이 시나이산에서 출발하여 파란 광야까지 삼일 길을 행하였다.

이 여행은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한 듯하다.

그래서 그들이 파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께 원망함으로 큰 죄를 지었다.

그들의 원망은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한 원망이었고,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해 주신 자에게 한 원망이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로부터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고 진노하셨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불을 놓아 진영 언저리를 살라버렸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진노하심은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움 가운데 있게 했고 

      그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나가 부르짖도록 하였다.

하느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로부터 진노하심을 거두어 가셨다.

 

11,4-9 :

하느님께서 진노를 거두신 후 이스라엘 가운데 또 다시 원망이 일어났다.

이 원망의 발단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였다.

여기 이 무리는 출애굽 때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함께

애굽을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집에서 종으로 있던 사람들이나

또는 일군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하느님의 약속 때문에 애굽을 떠나

이스라엘과 함께 한 것이 아니었고,

당시 상황에서 애굽에 머무는 것보다 이스라엘과 함께 애굽을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공동체 가운데 이런 사람을 허용한다면 언제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고통들 가운데 많은 것은

바로 그들이 이와 같은 자들을 허용함으로 인하여 받게 된 고통들이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던 대부분의 원망과 불평은

그들로부터 시작 되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원망과 불평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현재의 광야 생활은 애굽의 생활보다 나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 때 애굽의 노예로서 고통을 당하기는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는 먹을 것이 풍족했다.

그들은 자유와 理想보다는 차라리 노예로 살지라도

실컷 먹고 마시며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雜族들 가운데 있는 이런 생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조를 얻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있던 원망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로 퍼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원망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11:4-6)”

원망은 하느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불신앙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원망으로 인하여

어떤 불신앙에 빠졌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불신했다.

만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홍해를 가르신 하느님을 기억하였더라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이처럼 원망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하느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말은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는지 말해 준다.

비록 그들이 현재 먹고 있는 만나가 애굽의 고기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은혜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 광야에 있기 때문이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하여 어떤 것도 보장해 줄 수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그들을 생존하게 해 주시는 것 자체가 은혜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통하여 매일 그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와 같은 은혜를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여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만나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고 있다.

만나는 고수 씨앗과 비슷하고 그 빛깔은 브델리움 같았다.

백성은 돌아다니며 그것을 거두어서,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빻아

냄비에다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 그 맛은 기름과자 맛과 같았다.

밤에 이슬이 진영 위로 내리면, 만나도 함께 내리곤 하였다.(7-9)”

만나는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리신 최고의 양식이었을 것이다.

 

11,10-15 :

모세는 이중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죄스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 대한 짐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이스라엘이 오히려 원망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하느님께 대한 죄스러움으로

큰 고통을 당해야만 했고 또한 백성들의 자신에 대한

원망 역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나가 고통을 쏟아 놓았던 것이다( 12-14).

안타까운 것은 모세 역시 백성들의 원망하는 말에 너무 집중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능력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백성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며

이들 모두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음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에 하느님의 전능하심으로 이런 일보다 더 큰일을 행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파라오와 싸워 이겼고

또한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육지처럼 지날 수 있었다.

모세도 이스라엘처럼 지금 만나를 먹고 있다.

이것은 그도 지금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하느님께 고통을 호소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바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범한 백성이든지 뛰어난 지도자이든지

하느님께 주목하지 않을 때 믿음에 굳게 설 수 없다.

 

11,16-23 :

하느님은 모세의 고통스런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의 원로 70인을 데리고 회막으로 가서

하느님 앞에 서도록 하였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주님의 신을 임하게 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모세와 함께 백성들의 짐을 지도록 하셨다(11:16,17).

하느님은 모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짐을

홀로 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모세의 짐을 분담시켜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모세의 어려움에 대해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셨다.

모세에게 실제적인 문제는 백성들의 욕구를 충족 시켜 주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지금 고기를 먹고 싶어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바로 그 필요를 채워 주신 것이다.(11:18-20).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나타내 주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파라오를 굴복시키시고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면 홍해도 가르실 수 있고,

또한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면

그들에게 고기도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없이 믿을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모세조차도 하느님을 이처럼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11:21,22).

 

원로 일흔 명이 주님의 영을 받다(11,24-30)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씀해 주신 것처럼 행하셨다.

회막에 둘러 서 있는 원로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신이 임했고

그 증거로서 그들이 예언했다.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마치 사도행전 2장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어떤 일을 위임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이처럼

먼저 그들을 부르시고 또한 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신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기적과 표적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령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 성령으로 충만케 된 곳에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로서 우리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11:26)”

여기 일닷과 메닷은 이스라엘 원로 칠십인 중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세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회막 주위에 둘러 선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신을 내려 주셨던 것처럼

그곳에 참여하지 못한 두 원로들에게까지

주님의 신을 허락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언하도록 했다.

이때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고

이들로 하여금 예언을 금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 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11:29)”고 책망했다.

 

주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시다(11,31-35)

 

하느님은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에게 고기를 내려 주셨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내리신 일은 매일 반복 되는 일이었다.

하느님은 바람으로 바다로부터 광야에 메추라기를 몰아서

진영 사방에 떨어지게 하셨다.

그래서 하룻길 되는 지면 위에 두 암마 정도 쌓일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원하는 만큼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적게 모은 사람도 십 호멜을 거두었다.

여기 호멜은 십 에바이고, 리터로 환산하면 이백이십칠.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탐욕에 대하여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고기를 씹어 넘기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였다.

만일 이스라엘이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고 하느님께 구하였더라면

고기를 먹는 날은 축제의 날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심판으로 인하여 진 쳤던 곳의 이름을 키브롯 타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탐욕을 낸 백성이 거기 장사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곳을 출발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진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