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 항쟁
1. 마카베오 항쟁이란?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가 :
팔레스티나의 프톨로메오 왕조를 차지하고
안식일 준수 금지, 할례 금지, 토라 사본 소각,
제단에 돼지고기를 바치게 하는 등의 강압 정책을 폈을 때,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다인 혁명.
2. 당시 정치상황 :
①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되었을 때 대사제는 오니야스 3세였는데,
그의 동생 야손은 :시리아에 뇌물을 바치고
오니야스 3세를 몰아내고 대사제직을 차지하였다.
후에 메넬라오스는 다시 같은 방법으로 대사제가 되었다.
②셀류코스 왕가는 : 세력을 공고히 하고 있는 한편,
유다는 : 國權을 잃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며
대사제들도 권위가 떨어졌다.
③이런 가운데 안티오쿠스 4세는 :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하고
성전을 강탈하여 異敎 제사를 지내는 등
유다인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3. 항쟁의 시작 :
1). 민중봉기를 촉발한 사람은 하스모네 일가의 마따디아,
당시 마따디아는 부호이긴 했지만 귀족에 속하지 않은 사제였다.
항쟁의 시작은 : BC167년 마따디아가 살고 있던
모데인이라는 마을에 惡名 높은 칙령이 내려지면서
사건은 시작.
= 즉, 강요된 헬라주의는 유다인들의 거국적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안티오쿠스 4세가 보낸 사절이 예루살렘 북서쪽 모데인에 도착하여
그리스 神들에게 제사를 바치라고 명령하자,
①원로인 하스모네 가문 출신 마따디아는 이를 거절하고,
②또 이를 따르려는 한 유다인을 죽이고,
임금의 사절마저 죽인 후
③이방신의 제단들을 헐어 버리고,
④헬라 세력에 동조하는 주민들을 기습 공격하고,
⑤어린이들에게 할례를 실시했다.
2). 그후
①그와 다섯 아들은 : 유다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戰을 폈다.
②이 게릴라 부대에 ‘경건한 이들’
또는 율법 전문가로 알려진 하시딤이 가담하면서,
유다 백성을 대표하는 군대가 되었다.
⇒유대가 독립하자 이들 ‘하시딤’은 ‘바리사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의 정치 및 종교 세력으로 떠오른다.
③그들은 : 셀레우코스 가문이 헬레니즘을 전파할 목적으로 세운
이교 제단들과 시설들을 파괴하고
시리아 관리들과 헬라화한 유다인들을 살해하였다.
3). 마따디아가 봉기 2-3개월만에 심한 과로로 죽자
그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
산발적이었던 모든 저항 행동들을 조직화하여
기원전 164년 성전을 되찾고
성전 봉헌 축제를 지냈다.
⇒그후 유다인들은 : 이 경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해마다
‘하누카’(봉헌이라는 뜻) 축제를 지내게 되었다.
유다인들의 저항은 : 종교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독립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유다의 별명은 : ‘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오였다.
여기서 마카베오 家門, 마카베오 항쟁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4). 그의 동생 요나단은 : 시리아의 동의를 얻어내어
공석이던 대사제직을 겸직하여
종교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다음 동생 시몬은 : 그 직책을 세습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스모네 王家를 시작하였다.
시몬 다음에는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가 왕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 이 마카베오의 후손들을
‘하스모네’ 가문이라 불렀고,
이들은 후에 ‘하스모네’ 왕조로 일컬어지게 된다.
4. 마카베오 항쟁 결과 :
①외세에 반대하고 종교적 순수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시작되었으나,
②하스모네 집안 사람들이 왕과 대사제로서의 권력을 갖게 되고
그 권력이 다시 셀류코스 왕가에 의존하게 되면서
부패하고 오히려 희랍화의 영향을 끼치고
폭정을 하게 되었다.
③마카베오 항쟁에는 : ‘무력으로는 안 된다’는
신학적 의미가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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