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에제키엘서 공부

에제키엘서 23장 공부 :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윤 베드로 2017. 10. 19. 07:16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두 탕녀의 죄와 심판(23,1-49) 


23,1-10 :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두 여인으로 비유하셨다.

하느님은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오홀라라고 부르셨고,

남쪽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오홀리바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여기 두 여인은 이스라엘의 두 왕국을 의미하고,

두 왕국을 여인으로 묘사한 것은

하느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하심으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다.

하느님은 두 여인이 行淫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와 애굽과 행음하였고,

그 결과 앗시리아의 손에 붙이게 되었다(23:5-10).

유다는 사마리아가 행음으로 인하여 넘어진 것을 보고도 경고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행음을 함으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되었다.

유다는 애굽과 앗시리아 그리고 갈대아와 행음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갈대아에게 망하였다(23:11-21).

여기 “行淫”이란 우상숭배와 그리고 강대국들과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행위를 행음이라고 한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두 가지 사실을 요구하셨다.

하나는 신앙적인 요구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느님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오직 하느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신뢰하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 하느님을 섬겨야 했다(신명 6,4).

만일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면 그 행위는 신앙적인 면에서 행음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실생활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살라는 것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필요 할 때마다 하느님을 의지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리하면 그들을 지도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기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행위는

단순히 도움을 구하고 받는 행위가 아니고

하느님과 교통하는 인격적 행위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행위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실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었고 또한 이런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청한 이 두 가지 요구는

실제로 하느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 두 가지 요청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어버린다면

실생활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고,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도 살 수 없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을 경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김으로 첫 번째 요청을 거부했고 

      또한 하느님보다 강대국의 힘을 의지함으로 두 번째 요청도 거부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총체적인 위기를 당했던 것이다.

이 위기는 마치 결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연애함으로

파혼의 위기에 직면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위기를 행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홀라는 하느님을 남편으로 두었을 때

그 이웃 앗시리아와 행음하였다(23:5-10).

여기 앗시리아를 “자주색 옷을 입은 지방관과 총독이며,

말을 잘 타는 기사로서 모두 멋진 젊은이였다.”(6절)라고 묘사한다.


23,11-21 :

유다는 이스라엘이 행음함으로 망한 것을 보고도 더욱 심하게 행음하였다.

그들 역시 앗시리아 사람들이 입은 화려한 옷과

또한 고관과 감독이라는 직위였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 준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함이 없다면 세속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이길 수 없다.

유다는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음으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보았지만 세속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했고 더욱 심하게 세속화 되었다.

“내가 보니 그 여자는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두 자매가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이다.(23:13)”

여기 두 여인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말한다.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서로 대립적이었지만

행음을 하는 일에는 한 길로 행하였다.

“바빌론인들이 와서 그 여자와 사랑의 잠자리에 들어,

그들의 정욕으로 그 여자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번 부정하게 된 다음에는,

그 여자의 마음이 그들에게서 떠났다.(23:17)”

이 말은 유다가 바빌론과 동맹 관계를 맺은 후

바빌론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굴욕을 당했기 때문에

이 관계를 혐오하게 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친애굽 정책으로 바꾸었고 애굽을 의지함으로

바빌론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것이 19-21절의 내용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유다가 바빌론을 의지한 것을 행음이라고 한 것처럼

애굽을 의지하는 것도 행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느님의 백성이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의지하는 것을

바로 음행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나 자신은 하느님만 신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3,22-35 :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행음을 심판하신 것처럼

유다의 행음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유다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더라면 행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때 그들이 연애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격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유다를 치도록 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느님만 의지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다른 것을 의지할 때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넘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느님은 심판으로 인하여 받게 될 유다의 참상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북쪽에서 병거와 수레와 민족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너에게 와서, 

     큰 방패와 작은 방패와 투구로 무장하고 사방으로 너를 둘러쌀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 앞에 소송 거리를 내놓으면,

그들은 저희 법규에 따라 너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내 질투를 쏟겠다.

그러면 그들은 화를 터뜨리며 너를 다루고, 너의 코와 귀를 잘라 낼 것이다.

네 뒤에 남은 자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너의 아들딸들은 붙잡혀 가고, 뒤에 남은 자들은 불에 타 버릴 것이다.

그들은 또 너의 옷을 벗기고 너의 패물들을 빼앗을 것이다.(23:24-26)”

하느님께서 유다에게 이와 같은 참혹함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음행으로부터 돌이키도록 하려 함이었다.

즉 시련의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구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다(23:27).

유다가 심판으로 인하여 참혹하게 된 것은 그들이 이방인을 좇고

우상들로 스스로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북쪽 이스라엘이 이미 이같이 행함으로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유다가 이스라엘의 악한 길을 따라 행하였을 때

그들 역시 동일한 심판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시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경고의 말씀이 된다.


23,36-49 :

이미 앞에서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이 범한 죄들을

각각 지적하며 그로 인하여 받게 된 형벌을 말하였다.

여기 본문은 그들이 각각 범한 죄를 종합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이 범한 죄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하느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이방인을 의지한 것이고 영적으로 범한 죄는

우상 숭배와 안식일을 더럽힌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졌고 또한 안식일을 더럽혔다.

안식일은 그들의 신앙의 회복을 위하여 주신 은혜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의 명하심에 따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면

언제나 영적으로 새롭게 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한순간 하느님을 멀리하였을지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면 

      그 시간을 통하여 영적으로 회복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에 안식일이 더 이상

그들의 영적인 삶을 새롭게 회복 시켜 줄 수 없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과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이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에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그들이 범한 온갖 죄악들은

바로 이 두 가지, 안식일을 더럽힌 것과 우상숭배로부터 온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더럽힘으로 인하여 회복의 은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을 상실했기 때문에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에 온각 죄악에 빠졌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위하여 자기 자식들을 우상 앞에 화제로 살랐고,

성소를 더럽혔고, 거룩하지 않을 자들과 함께 지껄이고 즐겼으며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자들을 청하며 그들과 어울렸다.

이와 같은 그들의 죄는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넘어졌다.

이와 같은 사실을 신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죄는 결국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23장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신앙은 오직 하느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실생활에서 온전히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