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예레미야서 공부

예리미야서 20장 공부 :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

윤 베드로 2017. 5. 23. 07:38

예레미야와 파스후르(20,1-6)

 

하느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힌놈의 골짜기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신 후에, 또 다시 그에게 성전 뜰에서 백성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선포하도록 말씀하셨다(19:14-15).

그때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때리고 성전 한 곳에 가두었다.

이 사건은 예언자 예레미야와 그를 체포하여 징계한 바스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고

                 또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받은 박해이기 때문이며,

                바스홀은 성전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총감독의 직무로서

                성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행한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하느님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언자 예레미야와 성전의 총감독 바스홀은 각자의 위치에서 정당한 일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 인하여 각 사람은 불행한 일을 당했다.

하느님의 백성들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

 

하느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스훌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주셨다.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파스후르가 아니라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실 것이오(20:3).”

이 이름의 뜻은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이다.

이 이름은 예언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곧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말하는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의 직임을 세속화함으로 계속 하느님을 거역한다면

       그들을 통하여 사방에 두려움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을 받는다.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20,7-13)

 

예레미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인하여 받게 된 고통에 대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느님을 신뢰함으로 위로와 소망을 갖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시련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여정 가운데 일어난 自傳적인 일들을 말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는지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보다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부르심에 응답한 결과

                   지금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다.

그의 친구들조차도 그의 敵이 되어 그를 박해하였다(20:8,10).

그의 고뇌는 이와 같은 외적 환경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내적 환경으로부터 왔다.

그는 이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자 했지만

          그의 신앙의 양심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내적 갈등에 대하여 9절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내적 고뇌 가운데서 그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부르심에 계속 응답할 수 있었다.

그가 이처럼 고뇌를 극복하고 신앙을 회복하게 된 것은

        그의 눈이 구원의 하느님을 향했기 때문이었다(20:11-13).

 

어찌하여 내게 생명의 선물을 주셨는가?(20,14-18)

 

영적으로 회복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던 예레미야는

                또 다시 절망의 늪으로 깊이 빠져 자신의 탄생 자체를 후회한다.

그는 처음부터 잉태되지 않았거나 또는 잉태되었더라도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태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어째서 태어나서 이렇게 고난을 받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18절은 절망에 빠진 예레미야의 탄식이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

 

7-18절은 예레미야가 환경에 따라 변하는 심리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마음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그리고 또 다시 절망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즉 부르심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초인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낙심하기도 하고 절망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연약함과 시련 중에서도

                그것들을 극복하고 오히려 구원의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