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예레미야서 공부

예레미야서 18장 공부 ; 옹기그릇과 옹기장이

윤 베드로 2017. 5. 21. 07:07

옹기그릇과 옹기장이(18,1-12)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옹기장이의 집에 가서 그가 행하는 것을 보도록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옹기장이와 진흙 사이의 관계로 비유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옹기장이와 진흙 사이의 관계로 비유한 것은

        옹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는 것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즉 옹기장이는 진흙을 빚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든다.

이때 진흙이 자신의 뜻대로 빚어져서 만들고자 한 그릇의 모양이 나오면

         그는 유약을 칠하여 가마에 구워서 완성품을 만들 것이지만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으면 그 모양이 나올 때까지 진흙을 반복하여 빚는다.

즉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옹기장이의 마음에 속한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주권도 전적으로 하느님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18: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옹기장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주권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대하여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실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심으실 수도 있고 뽑아내실 수도 있으며

                건설하실 수도 있고 파괴하실 수도 있다(18:7-10).

이와 같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개인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한 민족에게도 적용되며, 더 나아가 세계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生死禍福과 세계의 역사가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있음을 말해 준다.

옹기장이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비록 하느님의 백성들이 부패했을지라도

                   여전히 회복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민족이 내가 이른 대로 죄악에서 돌아서면,

                  나는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였던 재앙을 거두겠다(18:8).”

이 말씀은 비록 유다와 예루살렘이 죄로 인하여

                지금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을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옹기장이의 손에서 터진 그릇이 그의 뜻대로 다시 빚어지는 것처럼

                        죄로 인하여 황폐된 우리가 하느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물론 회개가 전제 되었을 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비극적 탈선(18,13-17)

 

 이스라엘은 심히 가증한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행한 가증한 일은 이방 나라들 가운데서도 들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상식에서도 벗어나는 일이었다.

“레바논의 눈이 시르욘 산의 바위에서 사라질 수가 있겠느냐?

그 시원한 물줄기가 마를 수가 있겠느냐?(18:14).”라는 말은,

                 레바논에 쌓인 눈이 녹을 때 그 물은 들을 적시고

                 또한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마르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마찬가지로 選民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상식이지만

        이스라엘은 상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그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였다(18:16-17).

하느님의 백성에게 상식은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와 같은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 행하였다.

그들은 정욕이 이끄는 대로 자신들 가운데 심히 가증한 우상들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그들 스스로를 멸망으로 향하게 했다.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18,18-23)

 

유다의 지도자들이나 또는 유다인들이 이전까지는 개인적으로 반대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레미야에 대한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갔다.

본문에서 제사장, 지혜로운 자, 예언자 등은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代言의 말씀에 대하여 반론하고 또한 그의 말에 주의하지 않기로 함으로

            예레미야를 그들의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일들은 힘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상에서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힘 있는 자들은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사람들을 조정함으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추방한다.

이와 같은 때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하느님께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일이다.

예레미야가 하느님께 자신의 활동으로 인하여 당하고 있는 고통을 살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므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파멸에서 구원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듣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력과 수단을 동원하여 예언자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언자는 지금 하느님께 나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며

             대적들을 멸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18,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