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공부/예레미야서 공부

예레미야서 16장 공부 : 고독한 예레미야

윤 베드로 2017. 5. 15. 07:10

고독한 예레미야(16,1-13)

 

16,1-9 :

하느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금하셨다.

하나는 아내를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실 때 해산한 어머니와 아버지와

                자식 모두가 독한 병으로, 전쟁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해 줄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시체들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취하여 자식을 생산할지라도 슬픔만 더할 뿐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금한 다른 하나는 초상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다(16:5-7).

초상집은 위로가 필요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웃들은 그 집에 가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위로해 주었다.

물론 위로해 주는 방식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각 나라에 따라 달랐다.

이스라엘의 위로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 되었지만

                   (굵은 베옷을 입는 것, 금식, 옷을 찢는 행위 등),

                   이런 위로의 방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곡(哭)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하지 말라는 의미다.

하느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화를 거두고, 자애와 자비를 거두어 버렸다.(16:5)”

즉 하느님께서 유다로부터 평화를 빼앗고 인자와 자비를 거두실 것이므로

                        유다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초상집보다

더 큰 슬픔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로는 보다 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이

            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유다 모든 사람이 당하는 슬픔이

             한 가족이 당하는 슬픔보다 더 크기 때문에 위로의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음은 유다가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 슬픔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이 땅에서 높은 자 낮은 자 할 것 없이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묻히지도 못하고, 그들을 위해 곡을 해 주는 자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죽은 이를 애도하는 상주를 위로하려고

            그와 음식을 나누지 않고,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그에게 위로의 술잔을 건네지도 않을 것이다(16:6-7).”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행해지고 있던 葬禮 절차에 대하여 말해 주며

            심판으로 인하여 유다가 죽임을 당할지라도

            이와 같은 장례 절차에 따라 매장 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심판의 혹독함을 말해 주고 있다.

언급한 것처럼 당시 장례식은 죽은 자를 슬퍼하는 여러 가지 의식이 있었고,

             또한 즉은 자를 매장지에 묻었고 장례식을 마친 후에는 위로의 떡을 떼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유다가 대적의 손에 죽임을 당할 때

             이처럼 죽은 자에 대한 禮를 갖추어줄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금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잔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16:8-9).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사라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때 잔치집의 기쁨도 허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금하신 세 가지, 결혼과 장례와 잔치, 즉 즐거움 등은

                   우리의 삶의 내용 모두를 담고 있는 말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심판이 임할 때 이런 것들의 기능이 무력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무력해 진다는 의미다.

결혼은 가정을 이루어 또 다른 생명을 탄생하여 다음 세대를 이루어가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심판으로 결혼의 기능이 무력해 진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 가운데 소망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또한 장례는 한 사람이 지상에서의 삶의 존엄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엄숙한 의식이지만 심판이 임하면 이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삶의 즐거움은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지만

                   심판이 임하면 더 이상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없다.

이처럼 심판 아래서 우리의 삶은 다만 무력해 질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삶의 활력은 은혜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은혜의 소중함을 보게 해 준다.

 

16,10-13 :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전한 메시지에 대하여 백성들이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렇듯 큰 재앙을 우리에게 선고하셨는가?

주 우리 하느님께 우리가 저지른 죄악이 무엇이며,

             우리가 지은 죄가 어떤 것이냐?(16:10)”라고 묻는다면

              12-13절과 같이 대답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즉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마음을 완고케 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또한 우상을 숭배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귀환(16,14-15)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비록 유다와 예루살렘이 범죄로 인하여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에게는 변함없이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하느님은 애굽에서 노예된 이스라엘을 전능하신 손으로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진노하심으로 북방의 한 나라에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때가 되면 하느님은 능하신 팔로 그들을 그 나라로부터 이끌어 내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다(16,16-18)

 

하느님은 또 다시 유다의 심판을 말씀하셨다.

여기 하느님께서 유다 땅으로 불러들이시겠다고 말씀하신 어부와 포수는

        모두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택하신 列國을 말한다.

하느님은 어부를 불러다가 유다를 낚게 하신 후,

               또 다시 포수를 불러다가 어부의 손에 남은 자들을 사냥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실 때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시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자는 없다(16:17-18).

하느님께서 끝까지 추적하시는 자들은 죄인들이다.

여기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피고 있으니”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행위를 살피신다는 의미다.

유다는 우상을 숭배하며 하느님께 바쳐야 할 희생을 우상에게 바쳤다.

이들의 이와 같은 행위는 하느님의 진노하심을 불러일으키셨다.

하느님은 이들의 죄를 끝가지 추적하심으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에 대한 깨달음(16,19-21)

 

예레미야가 모든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하느님에 대한 그의 신앙의 고백도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고백이 깊어진 것에 비례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어 깊은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가 빛으로 가까이 나갈수록 어둠 가운데 숨겨졌던 것들이 드러내지는 것처럼

            빛되신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우리 안에 감추어진 죄들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그는 더욱 깊이 하느님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심판의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하느님을 “나의 힘, 나의 요새,

         재난 날의 피난처시여(16:19)”라고 고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을 이처럼 힘과 요새와 피난처로 알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느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것인지 더욱 깊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대신하여 하느님 앞에

             “저희 조상들은 정녕 쓸모없는 헛것만 물려주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신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은 신이 아닙니다.(16:19-20)”라고 탄식하며 회개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 앞으로 가까이 이를수록

            스스로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어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멀리하는 자는 어둠이 그를 가려서

            죄에 대하여 더욱 무감각해 지기 때문에 회개에 이르지 못한다.